• 문학X철학
  • 『파우스트』
  • 악마와 손잡은 인간, 그래도 구원받는 이유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1.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파우스트』에는 저주가 하나 숨어 있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으면서 제시한 조건이다. 만약 어느 순간, 파우스트가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그의 영혼은 악마의 것이 된다.

    이 계약의 논리는 단순하다. 파우스트는 어떤 순간에도 현재에 만족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만족이 없으면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멈추지 않는 한, 악마는 그의 영혼을 가져갈 수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계약은 무언가 이상하다. 만족을 모르는 인간, 절대 쉬지 않고 욕망하는 인간—이것이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 인간의 모습인가. 아니면 그것이야말로 저주받은 자의 모습인가.

    『파우스트』는 바로 이 물음을 2부작, 총 1만2천 행이 넘는 방대한 시극(詩劇) 형식으로 펼쳐 보인다. 괴테가 60년 넘게 써 내려간 이 작품은 단순한 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 유럽이 자기 자신에게 던진 가장 심층적인 질문이다. 욕망하는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2. 파우스트 박사 — 지식의 한계 앞에 선 인간

    파우스트는 지식인이다. 철학, 법학, 의학, 신학을 모두 섭렵한 박사다. 지금 기준으로 치면 여러 학과의 교수 직함을 동시에 달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는 행복하지 않다.

    1부의 유명한 첫 독백에서 파우스트는 고백한다. "이제 나는 철학도 공부했고 / 법학도 의학도 유감스럽게도 신학도 / 철두철미 열심히 공부했다 / 그러나 지금 나는 불쌍한 바보로 서 있을 뿐 / 전보다 조금도 현명해지지 않았다." 지식이 쌓일수록 무지가 드러난다. 그것이 그의 절망이다.

    이 절망은 개인의 좌절이 아니라 시대적 증상이다. 18세기 말 유럽은 계몽주의의 절정기였다. 이성과 과학이 세계의 모든 비밀을 풀어줄 것이라는 낙관론이 팽배했다. 그런데 파우스트라는 인물은 그 낙관론의 끝에서 진공 상태를 발견한 인간이다. 지식은 늘었지만, 지식이 줄 수 없는 무언가—의미, 충만, 삶의 진수—가 여전히 비어 있다.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1781)에서 인간 이성의 한계를 정확하게 그어놓았다. 이성은 경험 가능한 세계에 대해서만 유효하고, 신, 자유, 영혼 불멸 같은 '이념'에 대해서는 인식이 불가능하다. 파우스트의 절망은 칸트가 철학적으로 정리한 이 한계를 살로 경험하는 고통이다.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그것이 근대 지식인의 비극이다.


    3. 메피스토펠레스 — 악마는 왜 신의 내기에 응했는가

    메피스토펠레스는 단순한 악당이 아니다. 그는 프롤로그에서 신과 내기를 한다. 신은 파우스트를 자신의 종이라고 부른다. 메피스토는 자신이 파우스트를 타락시킬 수 있다고 제안한다. 신은 흔쾌히 허락한다.

    이 프롤로그는 성경의 「욥기」를 직접 패러디한다. 욥기에서 사탄이 신에게 욥을 시험하자고 제안하는 장면. 괴테는 이 구조를 빌려와 전혀 다른 철학적 무게를 싣는다. 신이 내기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신이 악의 존재와 협력한다는 것이다. 악은 세계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계획 안에 있다.

    메피스토펠레스 자신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나는 항상 악을 원하면서도 항상 선을 이루는 힘의 일부다(Ein Teil von jener Kraft, die stets das Böse will und stets das Gute schafft)." 이 자기소개는 철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악 개념 중 하나다. 악은 선과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선의 생산에 기여하는 부정의 힘이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의 변증법이 여기서 겹쳐 읽힌다. 헤겔은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 des Geistes, 1807)에서 역사가 정(These)과 반(Antithese)의 충돌을 통해 합(Synthese)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했다. 부정이 없으면 발전이 없다. 메피스토는 이 변증법적 부정의 원리를 의인화한 존재다. 그는 파우스트를 파괴하려 하지만, 결과적으로 파우스트를 전진시킨다.


    4. 그레첸 비극 — 욕망의 대가는 누가 치르는가

    『파우스트』 1부의 핵심은 그레첸(마르가레테) 이야기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의 도움으로 순수한 소녀 그레첸을 유혹한다. 그레첸은 파우스트를 사랑하고, 파우스트는 그녀에게 진짜 감정을 느끼면서도 결국 그녀를 버린다. 그레첸은 파우스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죽이고, 감옥에서 처형을 기다린다.

    결말에서 파우스트는 그레첸을 탈옥시키려 한다. 그레첸은 거부한다. "신의 심판을 받겠다." 그녀는 광기와 죄의식 속에서도 도덕적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반면 파우스트는 도망친다. 메피스토가 "그녀는 이미 구원받았다(Sie ist gerettet!)"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이 비극에서 철학적 핵심은 욕망의 비대칭성이다. 파우스트의 욕망은 끝없이 전진하고, 그 과정에서 타인이 파괴된다. 그레첸은 파우스트의 자기실현 서사에서 소모품이 된다. 그녀는 파우스트가 경험해야 할 '사랑'이라는 챕터를 채워주고 퇴장한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는 『제2의 성』(Le Deuxième Sexe, 1949)에서 여성이 역사적으로 남성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타자(the Other)로 기능해왔다고 주장했다. 파우스트-그레첸 관계는 이 구조의 문학적 원형에 가깝다. 파우스트는 주체이고, 그레첸은 그 주체성을 완성시켜주는 타자다. 파우스트는 욕망하고, 그레첸은 욕망의 결과를 감당한다.


    5. 2부의 세계 — 역사, 정치, 그리고 헬레나

    『파우스트』 2부는 1부와 전혀 다른 세계다. 1부가 개인적 욕망과 사랑의 비극이라면, 2부는 역사, 신화, 정치, 경제를 아우르는 거대한 알레고리 세계다.

    파우스트는 황제의 궁정에서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 관여하는데, 이때 메피스토가 제안한 해결책이 흥미롭다. 땅속의 황금을 담보로 지폐를 발행하라는 것이다. 실체도 없는 가치를 약속으로 만들어내는 이 장면은 자본주의 신용화폐 체계에 대한 놀라운 예견이다. 괴테는 19세기 초에 이미 경제가 실물이 아닌 기호와 약속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내다보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이어 고대 그리스 세계로 여행하여 절대미의 화신 헬레나(Helena)와 결합한다. 이 결합은 근대(파우스트)와 고대(헬레나), 북방 낭만주의와 남방 고전주의의 만남이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에우포리온은 시의 정신이자 자유를 상징하며, 하늘로 날아오르다 죽는다. 이 에우포리온이 죽는 장면에서 괴테는 자신의 시대에 요절한 시인 바이런(Lord Byron, 1788~1824)을 애도하고 있다.

    이 2부의 세계를 읽는 철학적 열쇠는 헤겔의 역사철학이다. 헤겔은 세계 역사가 '세계정신(Weltgeist)'의 자기실현 과정이라고 보았다. 각 시대의 위대한 개인은 이 세계정신의 도구다. 파우스트의 방황과 전진은 세계정신이 자신을 실현해가는 과정으로 읽을 수 있다. 실패와 비극을 포함한 모든 경험이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6. 욕망의 철학 — 파우스트적 인간이란 무엇인가

    문명 비평가 마샬 버먼(Marshall Berman, 1940~2013)은 『견고한 모든 것은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 1982)에서 '파우스트적 발전(Faustian development)'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파우스트적 발전이란,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근대적 발전 욕망이 그 과정에서 인간과 공동체와 자연을 파괴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버먼이 주목한 것은 2부 마지막 장면이다. 노년의 파우스트는 바다를 개간하여 새로운 땅을 만드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 땅에 오래 살던 노부부 필레몬과 바우치스가 이사를 거부한다. 메피스토는 이들을 죽이고 집을 불태운다. 파우스트는 이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지만, 프로젝트는 멈추지 않는다.

    버먼은 이 장면에서 근대 개발주의의 원형을 읽는다. 더 크고 더 나은 것을 만들기 위해 그 자리에 있던 것을 파괴한다. 그 파괴의 희생자들은 '진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된다. 파우스트는 죄의식을 느끼지만 멈추지 않는다. 그것이 파우스트적 인간의 비극적 본질이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 1818)에서 인간의 근본적 욕망 에너지를 '의지(Wille)'라고 불렀다. 의지는 목표를 달성해도 다시 새로운 목표를 욕망하기 때문에 원리상 충족될 수 없다. 파우스트의 욕망이 바로 이 쇼펜하우어적 의지의 화신이다. 그리고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 의지야말로 고통의 근원이다.


    7. 악과 구원 — 메피스토는 왜 실패했는가

    2부의 마지막에서 파우스트는 결국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라는 말에 해당하는 순간에 이른다. 그는 새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민중이 살아가는 미래를 상상하며 환희를 느낀다. 그 순간 그는 쓰러져 죽는다.

    계약대로라면 메피스토가 영혼을 가져가야 한다. 그런데 천사들이 내려와 파우스트의 영혼을 들어 올린다. 메피스토는 빈손으로 남는다. 파우스트는 구원받는다.

    이 결말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파우스트는 악마와 계약했고, 그레첸을 파괴했으며, 노부부를 죽이게 했다. 그런데도 구원받는다고? 괴테는 이 결말에 대해 명확한 해석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이 의도적이다.

    한 가지 독해는 이렇다. 구원의 기준은 결과가 아니라 방향성이다. 파우스트는 끝없이 노력했다. 오류를 범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전진하는 의지 자체가 신의 기준에서는 구원의 조건이 된다. 극의 마지막 합창이 말한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Das Ewig-Weibliche zieht uns hinan)."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인간의 본성과 운명』(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1941)에서 인간을 유한성과 무한을 향한 욕망 사이에 갇힌 존재로 정의했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무한을 꿈꾼다. 이 긴장이 인간의 창조성이자 비극이다. 파우스트는 이 긴장을 가장 극단적으로 살아낸 인간이다.


    8. 파우스트적 거래 — 근대 문명의 자화상

    19세기 이후 '파우스트적 거래(Faustian bargain)'는 관용어가 되었다. 단기적 이득을 위해 장기적 대가를 치르는 거래. 영혼을 팔아 능력을 얻는 계약. 이 비유가 이토록 광범위하게 쓰이는 이유는, 그것이 근대 문명 자체를 정확하게 묘사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전례 없는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그 대가는 자연의 파괴, 노동자의 착취, 전통 공동체의 해체였다. 20세기 핵에너지는 전기를 주고 히로시마를 가져갔다. 인터넷은 정보의 자유를 주고 개인정보 감시를 가져갔다. 인공지능은 생산성을 주고 일자리와 진실의 개념을 흔들고 있다.

    어느 시대나 파우스트적 거래는 있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특이한 점은 거래의 속도다. 메피스토가 파우스트에게 일생의 경험을 압축해 제공했듯, 디지털 기술은 인간의 경험과 욕망을 전례 없는 속도로 처리하고 증폭한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즉시 제공한다. 대가는 무엇인가. 기다리는 능력,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 욕망을 숙성시키는 능력의 소멸이다.

    오스발트 슈펭글러(Oswald Spengler, 1880~1936)는 『서구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landes, 1918~22)에서 서양 문명의 핵심 정신을 '파우스트적(Faustisch)'이라고 명명했다. 끝없이 팽창하고 정복하고 초월하려는 의지. 슈펭글러는 이 파우스트적 정신이 문명의 동력이자 동시에 문명 몰락의 씨앗이라고 보았다. 더 멀리 가려는 의지가 결국 자기 파괴로 이어진다는 것.


    9. 영원히 여성적인 것 — 구원의 원리로서의 에로스

    『파우스트』의 마지막 행,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린다"는 괴테 사상의 핵심이자 가장 많이 논쟁된 구절이다.

    이 '영원히 여성적인 것(das Ewig-Weibliche)'은 무엇인가. 단순히 여성을 이상화하는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은 원리를 가리키는가. 괴테가 의도한 것은 후자에 가깝다. 그것은 사랑, 공감, 연결, 수용의 원리다. 쉬지 않고 전진하는 파우스트적 욕망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 정복이 아닌 포용, 획득이 아닌 수용의 원리.

    플라톤(Platon, 기원전 428~348경)은 『향연』(Symposion, 기원전 385경)에서 에로스(Eros)를 결핍에서 충만으로 나아가려는 욕망으로 정의했다. 에로스는 아름다움에서 출발하여 선 자체, 진리 자체로 상승한다. 파우스트의 욕망도 이 플라톤적 에로스의 형태로 읽을 수 있다. 그레첸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여 헬레나의 절대미로, 다시 자유로운 인류 공동체의 이상으로 상승하는 과정.

    그런데 그 상승의 끝에서 파우스트를 구원하는 것은 그가 정복한 무언가가 아니다. 그가 한때 파괴했던 그레첸의 영혼이다. 1부 끝에서 "신의 심판을 받겠다"고 했던 그녀가 2부 마지막에서 파우스트를 위해 기도한다. 파우스트는 자신의 욕망이 파괴한 존재에 의해 구원받는다. 이 역설이 괴테가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다.


    10. 지금 여기서 — 우리 시대의 파우스트

    파우스트는 오늘도 살아있다. 그는 스타트업 창업자가 되어 "세상을 바꾸겠다"고 외친다. 그는 성장을 멈출 수 없는 기업이 되어 분기 실적을 높이고 또 높인다. 그는 더 빠른 배달, 더 짧은 영상, 더 즉각적인 쾌락을 욕망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있다.

    파우스트적 욕망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괴테도 그것을 단죄하지 않았다. 파우스트는 결국 구원받는다. 문제는 그 욕망이 어디를 향하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가 그레첸이 되는가이다.

    지금 이 순간 기후 위기는 파우스트적 거래의 가장 큰 청구서다. 200년간의 산업 문명이 쌓아 올린 욕망의 대가를 지구가 치르고 있고, 그 대가는 현재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가 감당해야 할 지도 모른다. 필레몬과 바우치스는 지금 이 순간도 어딘가에서 쫓겨나고 있다.

    괴테는 이 모든 것을 1832년에 이미 썼다. 그는 파우스트가 죽기 직전에 꿈꾼 것이 "자유로운 땅에 자유로운 인민"이 사는 세계라고 썼다. 그 꿈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 꿈의 땅은 메피스토가 파낸 것이고, 그 땅의 원주민들은 이미 죽었다.

    욕망과 구원, 전진과 파괴, 이상과 현실—『파우스트』가 던지는 이 물음들에 2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여전히 답을 찾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이 작품이 오늘도 살아있는 이유다.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말할 수 없는 한, 우리는 계속 이 물음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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