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밥상에는 오래된 금기가 하나 있다. 정치 얘기는 꺼내지 말 것. 누군가 무심코 선거 이야기를 시작하면 분위기가 싸늘해지고, 어른들은 서둘러 화제를 돌린다. 우리는 이것을 지혜라고 부른다. 평화를 위해서는 갈등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벨기에 출신의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Chantal Mouffe, 1943– )라면 이 장면을 정반대로 읽을 것이다. 그에게 갈등을 덮어버린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병들어 있다는 증상이다. 무페의 거의 모든 저작은 하나의 불편한 명제로 수렴한다. 갈등이 사라진 민주주의는 더 건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더 위험한 민주주의다.
이상한 말처럼 들린다. 우리는 늘 '정치적 양극화'를 시대의 병으로 진단하고, '대화와 타협'을, '협치'를, '국민 통합'을 처방으로 내놓지 않았던가. 그런데 무페는 바로 그 처방이야말로 병을 키운다고 말한다. 21세기 들어 우파 포퓰리즘이 전 세계에서 폭발하고 민주주의가 안에서부터 흔들리는 이 국면을, 가장 일찍 그리고 가장 정확하게 예고한 사람이 무페였다. 왜 하필 지금 무페인가? 그가 던진 질문이 우리 정치가 앓는 병의 정체와 정확히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1. 합의라는 환상 — "대화로 풀자"는 왜 함정인가
20세기 후반 정치철학의 주류는 '심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였다. 핵심 발상은 단순하다.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이 충분히 토론하면,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존 롤스(John Rawls)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도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고,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권력과 이해관계가 제거된 이상적 대화 상황에서라면 더 나은 논변이 합의를 이끈다고 믿었다.
무페는 이 그림 전체를 의심한다. 『민주주의의 역설』(The Democratic Paradox, 2000)에서 그가 지적한 것은, 합리적 토론으로 모든 갈등이 해소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정치의 본질을 못 본다는 점이다. 사회의 대립은 정보가 부족하거나 사람들이 덜 합리적이어서 생기는 게 아니다. 자원, 가치, 삶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생긴다. 토론을 아무리 거듭해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해, 개발과 보존의 가치, 종교적 신념과 세속적 권리가 하나의 '올바른 답'으로 수렴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합의'를 외칠 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무엇인가. 무페는 그것이 대개 특정 입장을 '합리'로, 거기서 벗어난 입장을 '비합리'로 몰아내는 작업이라고 본다. 모두가 동의하는 중립적 합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목소리를 토론장 밖으로 밀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1990년대 토니 블레어와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가 내세운 '제3의 길', 즉 좌파도 우파도 아닌 합리적 중도라는 기획이 대표적이다. 무페는 이렇게 좌우의 경계가 흐려지고 진짜 대안이 사라진 상태를 '포스트 정치(post-politics)'라 불렀다. 선거 때마다 후보는 바뀌어도 정책은 크게 다르지 않고, 유권자는 "찍을 사람이 없다"고 느낀다. 그 공허함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는 다음 장에서 보게 된다.
2. 적대와 경합 — 적을 경쟁자로 바꾸는 기술
무페의 사유에는 의외의 출처가 하나 있다.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Der Begriff des Politischen, 1932)에서 정치의 본질을 '동지와 적(Freund/Feind)'의 구별로 규정했다. 정치란 결국 우리 편과 상대편을 가르는 일이며, 그 적대는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슈미트가 곧 나치에 가담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무페가 하필 그를 끌어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갈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이론보다, 갈등을 직시한 슈미트가 정치의 현실에 더 가깝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무페는 슈미트의 결론을 그대로 받지 않고 결정적으로 비튼다. 슈미트에게 적은 섬멸의 대상이지만, 무페는 적대(antagonism)를 '경합(agonism)'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경합은 그리스어 아곤(agon), 즉 겨룸에서 온 말이다. 핵심은 상대를 부르는 이름에 있다. 슈미트의 적(enemy)은 없애야 할 존재다. 그러나 무페의 경쟁자(adversary)는 끝까지 맞서 싸우되, 그가 민주주의라는 같은 무대 위에 설 권리는 인정하는 상대다. 생각은 격렬하게 부정하지만,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 구분은 추상적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 시험받는 지점이다. 정치적으로 의견이 다른 사람을 떠올려보자. 그를 '나와 생각이 다른 시민'으로 대하는가, 아니면 '없어져야 할 적폐'로 대하는가. 단톡방에서 반대편을 조롱하고 SNS에서 차단 버튼을 누르는 순간, 우리는 경쟁자를 적으로 강등시키고 있는 것이다. 무페가 말하는 좋은 민주주의는 갈등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다. 적대를 경합으로 길들이는 데 성공한 상태, 즉 잘 싸우는 상태다.
3. '정치적인 것'과 '정치' — 갈등은 제거되지 않는다
무페는 두 단어를 구별한다. '정치(politics)'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다. 『정치적인 것의 귀환』(The Return of the Political, 1993)과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On the Political, 2005)를 관통하는 구분이다. '정치'는 우리가 흔히 아는 제도와 절차다. 정당, 선거, 국회, 정책. 반면 '정치적인 것'은 그보다 깊은 차원, 인간 사회에 본래 깃든 적대와 갈등의 차원을 가리킨다.
무페의 주장은 이렇다. 제도로서의 '정치'는 바꿀 수 있어도, '정치적인 것'은 없앨 수 없다. 어떤 사회 질서도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모든 '우리'는 반드시 어떤 '그들'을 배제하면서 만들어진다. 무페는 이를 '구성적 외부(constitutive outside)'라 부른다. 어떤 정체성도 그것이 아닌 것과의 경계를 통해서만 성립한다는 뜻이다. '환경을 지키자'는 입장은 '개발을 우선하자'는 입장과 부딪힐 때 비로소 정치적 의미를 얻는다. 대립을 지우면 정치도 함께 지워진다.
그래서 무페가 보기에 갈등 없는 완전한 화해, 모두가 하나 되는 사회라는 이상은 아름답기는커녕 위험하다. 그런 사회는 현실에 존재한 적이 없으며, 그것을 강제로 실현하려는 시도는 결국 '우리'에 끼지 못한 사람들을 제거하는 폭력으로 끝나기 쉽다. 역사 속 전체주의가 늘 '분열 없는 통합'을 약속하며 시작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된다. 갈등을 인정하는 것은 패배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폭력을 막는 안전장치다.
4. 헤게모니와 '우리/그들' — 질서는 영원하지 않다
무페의 이름이 처음 세계 학계에 각인된 것은 1985년, 아르헨티나 출신 정치이론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 1935–2014)와 함께 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을 통해서였다. 두 사람은 평생의 동지이자 동반자였고,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의 한 가지 전제를 정면으로 무너뜨렸다. 역사가 경제 법칙에 따라 정해진 방향으로 흘러가며, 노동계급이 변혁의 주체로 예정되어 있다는 믿음이다.
두 사람이 가져온 핵심 개념이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의 '헤게모니(hegemony)'다. 어떤 사회 질서도 자연법칙처럼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세력이 다른 가능성들을 누르고 '상식'의 자리를 차지한 잠정적 결과라는 것이다. 지금 당연해 보이는 모든 것—시장이 효율적이라는 믿음, 정상 가족의 형태, 성공의 기준—은 사실 한때 벌어진 싸움에서 한쪽이 이긴 결과일 뿐이다. 이긴 적이 있다면, 질 수도 있다. 무페가 비관론자가 아닌 이유가 여기 있다. 질서가 우연의 산물이라면, 다시 짤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와 '그들'의 경계는 결함이 아니라 정치의 작동 원리 자체가 된다. 집합적 정체성은 언제나 어떤 경계선을 그으면서 만들어진다. 중요한 것은 경계를 없애는 일—그것은 불가능하다—이 아니라, 그 경계를 어떻게 긋느냐다. 상대를 섬멸할 적으로 그리는가, 함께 규칙을 지키며 겨룰 경쟁자로 그리는가. 같은 '우리/그들'의 구도라도, 이 선택에 따라 정치는 야만으로도 문명으로도 간다.
5. 좌파 포퓰리즘 — '찍을 사람 없음'의 공백을 누가 채우는가
2010년대 중반, 무페는 시대를 '포퓰리즘 모멘트(populist moment)'라 진단했다.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For a Left Populism, 2018)의 출발점이다. 그의 분석은 명료하다. 앞서 본 포스트 정치, 즉 좌우가 신자유주의라는 합의로 수렴해 진짜 대안이 사라진 상태가 거대한 불만의 저수지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자기 삶이 나빠지는데 어느 정당도 그것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 공백을 먼저 파고든 것이 우파 포퓰리즘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브렉시트, 프랑스의 마린 르펜, 이탈리아의 마테오 살비니. 이들은 분노를 이민자와 소수자에게로 돌렸다.
무페의 제안은 도발적이다. 이 포퓰리즘의 물결을 '비합리적 대중의 일탈'이라 비난하며 합리성으로 맞서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태도야말로 사람들을 더 멀어지게 만든 포스트 정치의 오만이다. 대신 그는 좌파가 자신만의 포퓰리즘을, 즉 '우리 대 기득권'이라는 새로운 경계를 그어 흩어진 민주적 요구들을 하나의 '인민(people)'으로 묶어내야 한다고 말한다. 스페인의 포데모스, 영국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미국의 버니 샌더스가 그가 주목한 사례였다.
여기서 무페는 정치철학의 오랜 금기 하나를 건드린다. 정념(passion)의 문제다. 이성적 설득만으로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어떤 집단에 자신을 동일시하고, 무언가에 분노하고 또 희망을 거는 정서적 과정 없이는 어떤 정치도 작동하지 않는다. 합리주의 정치학이 애써 외면해온 이 정념을, 무페는 정치의 연료로 정면에 놓는다.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의 열기를 단지 '비이성적 군중심리'로 깎아내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6. 무페를 향한 비판 — 슈미트의 그림자
무페의 사유에는 만만치 않은 반론들이 따라붙는다. 가장 날카로운 것은 그가 끌어온 카를 슈미트의 그림자다. 적대가 정치의 본질이고 모든 정체성이 '우리/그들'의 경계에서 생긴다면, 도대체 무엇이 경합을 다시 적대로 미끄러지지 않게 막아주는가? 경쟁자와 적의 경계는 무페의 바람만큼 견고하지 않다. 오늘의 경쟁자가 내일의 섬멸 대상이 되는 일은 현실 정치에서 너무 흔하다. 무페는 민주주의의 공통 규칙에 대한 충성이 그 선을 지킨다고 답하지만, 갈등이 격해질수록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이 바로 그 공통 규칙이라는 점에서 답은 충분히 단단하지 않다.
사회학자 피에르 비른바움(Pierre Birnbaum)처럼, 무페의 이론이 구체적 사회 분석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보는 비판도 있다. '인민'을 어떻게 구성하느냐를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 인민이 누구이며 어떤 경제적·사회적 조건에서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실증적 분석은 빈약하다는 지적이다. 좌파 포퓰리즘 전략의 성적표 역시 후하지 않다. 포데모스는 동력을 잃었고 코빈은 선거에서 패했다. '인민'을 호명하는 기술이 우파의 손에 들어갔을 때 더 큰 위력을 냈다는 점도 무겁다. 무페가 제시한 도구가 그가 막으려던 바로 그 위험을 키울 수 있다는 역설이다.
이 비판들을 기록하는 것은 무페를 깎아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무페 자신이 가르쳐준 태도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상도 의심받지 않는 진리의 자리에 올라서는 순간 정치적이기를 멈춘다. 무페를 무페답게 읽는 길은, 그를 둘러싼 경합 속에 그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7. 왜 지금 한국에서 무페인가
한국 정치는 무페를 시험하기에 더없이 좋은 무대다. 표면만 보면 우리에게는 갈등이 차고 넘친다. 상대 진영을 '적폐'나 '악마'로 부르고, 가족과도 정치 얘기를 못 하며, 선거는 매번 내전처럼 치러진다. 무페의 언어로 옮기면, 우리에게는 경합이 아니라 적대가 흘러넘친다. 상대를 함께 겨룰 경쟁자가 아니라 없애야 할 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페의 진단은 여기서 한 겹 더 들어간다. 우리에게는 적대가 과잉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진짜 경합은 부족하다. 거대 양당은 서로를 악마화하며 싸우지만, 정작 부동산이든 노동이든 복지든 삶을 바꾸는 정책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대안을 내놓는 일은 드물다. 싸움은 사나운데, 그 싸움이 도덕적 진영 대결로 환원될 뿐 실질적 가치의 대결로는 잘 이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정치 혐오'에 빠지고 무당층이 두꺼워지는 것은 그래서다. 격렬한 적대는 보면서도, 정작 자기 삶을 대변하는 진짜 선택지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무페가 우리에게 건네는 처방은 두 가지다. 하나, 적대를 경합으로 길들여라. 목표는 갈등을 없애 모두가 사이좋아지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상대를 섬멸할 적이 아니라 같은 민주주의 규칙 안의 경쟁자로 대하는 문화를 세우는 것이다. 둘, 갈등을 덮는 '통합'과 '협치'의 구호를 경계하라. 진짜 차이를 봉합하는 합의는 불만을 사라지게 하는 게 아니라 더 위험한 곳으로 흘려보낸다. 한국에서 '국민 통합'이라는 말이 종종 비판을 잠재우는 용도로 쓰여온 것을 떠올리면, 이 경고는 결코 한가하지 않다.
무페 이후의 정치
무페는 답을 주는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질문을 바꾸는 철학자다. "어떻게 하면 갈등을 끝낼 수 있는가"라고 묻는 대신, "어떻게 하면 갈등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를 묻는다. 민주주의는 합의를 관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갈등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여 문명화하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침묵을 평화로, 봉합을 통합으로 착각하는 사회에서 무페의 질문은 분명 불편하다. 그러나 갈등을 두려워한 나머지 밥상 위에서 정치를 추방한 우리에게, 그의 불편한 질문은 어쩌면 가장 먼저 되찾아야 할 것인지도 모른다. 잘 싸우는 법을 잃어버린 민주주의는, 결국 싸우지 않는 법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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