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카드값이 나올 때마다 후회한다. 필요하지도 않은 한정판 운동화를 샀고, 세 번도 안 간 헬스장 1년 회원권을 끊었으며, 어디서 쓸지도 모르는 고급 위스키를 들여놓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소비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합리적 행위자 모델"의 예외로 처리하고, 심리학자들은 "충동 조절 실패"라고 진단한다. 그런데 만약 이 소비가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존재 방식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는 이 물음을 20세기 중반에 철학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사상가다. 신학교를 중퇴하고 국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동시에 에로티즘 소설을 쓰고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철학 저작을 발표한 이 인물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우리 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가"라고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여전히 변방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소비 과잉, 번아웃, 자극 중독이 일상이 된 지금, 바타유의 질문은 어느 때보다 정확하게 우리를 겨냥한다. 왜 인간은 하지 말라는 걸 하는가? 왜 낭비하고, 탕진하고, 한계를 넘으려 하는가?
1. 사서이자 소설가이자 철학자 — 바타유라는 인물
바타유의 이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수수께끼다. 1897년 프랑스 퓌드돔에서 태어난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되어 신학교에 입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중퇴했다. 이후 파리 국립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에서 30년 가까이 사서로 근무하면서, 낮에는 중세 동전과 고문서를 분류하고 밤에는 에로티즘 소설을 쓰고 비밀 결사 "아세팔(Acéphale, 머리 없는 자)"을 이끌었다. 이 결사는 실제로 인간 제물 의식을 계획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극단적이었다.
이 이력이 단순한 일탈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타유의 삶은 그의 철학을 직접 살아낸 궤적이다. 성(聖)과 속(俗), 이성과 광기, 질서와 위반 — 이 대립 쌍들이 그의 삶 속에서 공존했고, 그것이 그의 사유의 원천이 되었다. 그가 남긴 주요 저작으로는 에로티즘의 철학을 정면으로 다룬 『에로티즘』(L'Érotisme, 1957), 경제학을 근본적으로 다시 쓴 『저주받은 몫』(La Part maudite, 1949), 그리고 신학교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 『눈이야기』(Histoire de l'œil, 1928) 등이 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바타유를 헤겔 철학을 넘어서는 사상가로 평가했으며(「제한 경제에서 일반 경제로」, De l'économie restreinte à l'économie générale, 1967), 들뢰즈(Gilles Deleuze)와 푸코 역시 바타유의 "위반(transgression)" 개념을 자신들의 사유에 적극적으로 흡수했다.
2. "일반 경제" — 왜 인간은 반드시 낭비하는가
바타유 사상의 출발점은 경제학의 근본 가정에 대한 도전이다. 주류 경제학은 "희소성"을 전제한다. 자원은 부족하고 인간은 그것을 효율적으로 배분해야 한다는 것이 경제학의 제1원칙이다. 이것을 바타유는 "제한 경제(économie restreinte)"라고 부른다. 개별 기업이나 국가 단위에서 보면 이 원칙은 맞다. 그러나 태양계 전체를 단위로 놓고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태양은 매 초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지구로 쏟아붓는다. 지구 생태계가 흡수할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 있고, 나머지는 그냥 낭비된다. 생명체도 마찬가지다. 생명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 이상의 잉여가 발생하면, 그 잉여는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 소비되어야 한다. 성장, 번식, 유희, 예술, 전쟁, 종교적 의례 — 이 모든 것이 잉여 에너지의 출구다. 바타유는 이것을 "일반 경제(économie générale)"라고 불렀고, 이 관점에서 보면 낭비는 예외가 아니라 법칙이다.
『저주받은 몫』에서 바타유는 고대 아즈텍 문명의 사례를 든다. 아즈텍인들은 거대한 인신공양 의례를 거행했는데, 이것은 생산성과 전혀 무관한, 순수한 소비의 행위였다. 현대인들은 이를 야만으로 규정하지만, 바타유의 눈에는 이것이 잉여를 처리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그리고 현대 소비사회도 다르지 않다. 명품 소비, 스펙타클한 스포츠 이벤트, 폭죽놀이, 연말 보너스로 한 번에 써버리는 여행 — 이 모든 것이 현대판 인신공양이다. 형식만 바뀌었을 뿐, 구조는 동일하다.
이 시각으로 보면 "탕진잼"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다. 과도하게 지출하고 그것을 즐기는 행위는, 바타유의 관점에서 인간이 잉여를 처리하는 가장 근원적인 충동의 현대적 표현이다. 절약하고 투자해야 한다는 강박이 지배적인 시대에, 낭비는 일종의 저항이기도 하다.
3. 금기와 위반 — 왜 인간은 하지 말라는 걸 하는가
바타유 철학의 핵심 구조는 "금기(interdit)"와 "위반(transgression)"의 변증법이다. 그런데 이 개념을 이해하려면 먼저 금기의 기원을 알아야 한다.
바타유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결정적인 지점은 죽음과 성에 대한 태도다. 동물은 같은 종의 죽음 앞에서도, 교미 앞에서도 특별한 금지를 설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이 두 가지 앞에서 강력한 금기를 만들어냈다. 시체를 처리하는 의례, 성행위를 은폐하는 문화 — 이것이 문명의 출발이다. 왜인가? 바타유는 이 두 가지가 모두 "불연속적 개체"인 인간을 "연속성"으로 돌려보내는 경험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조금 더 풀어서 말하면 이렇다. 우리는 각자 독립된 존재로 살아간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내 몸 안에 갇혀 있고, 타인과의 완전한 합일은 불가능하다 — 이것이 "불연속성"이다. 그런데 죽음의 순간, 또는 극도의 성적 쾌락의 순간, 이 불연속성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 같은 경험이 발생한다. 황홀경(extase)이라고 부르는 상태다. 이것은 매혹적이지만 동시에 공포스럽다. 문명은 이 공포를 통제하기 위해 금기를 만들었다. 성을 결혼 제도 안에 가두고, 죽음을 장례 의례 안에 봉인했다.
그런데 금기가 있는 곳에 반드시 위반이 뒤따른다. 바타유는 이것을 도덕의 붕괴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금기와 위반은 함께 작동한다. 위반은 금기를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라, 금기를 인식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행위다. 금기가 없으면 위반의 쾌락도 없다. 이것이 바타유가 에로티즘을 단순한 섹슈얼리티와 구분하는 이유다. 에로티즘은 금기를 의식한 위에서 이루어지는, 불연속적 존재가 연속성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이다.
우리 일상에서 이 구조는 곳곳에서 작동한다. 다이어트 중에 야식을 먹는 것, 금연을 결심한 날 밤에 담배 한 개비를 피우는 것, 야근해야 하는 날 유튜브를 끄지 못하는 것 — 이것들을 단순히 의지력 부족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바타유의 시각에서 보면, 이 모든 작은 "위반"들은 금기가 설정한 경계를 잠시나마 넘어서려는, 존재론적으로 뿌리 깊은 충동의 발현이다.
4. 에로티즘 — 쾌락이 아니라 죽음과의 관계
바타유의 가장 유명한 저작 『에로티즘』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에로티즘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의 삶의 긍정이다(L'érotisme est l'approbation de la vie jusque dans la mort)." 이 문장을 처음 읽으면 당혹스럽다. 에로티즘이 왜 죽음과 연결되는가?
바타유의 논리는 이렇다. 성적 결합의 순간, 두 개의 개별적 존재는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려 한다. 이것은 개체성의 해소를 의미하고, 개체성의 해소는 일종의 죽음 — 자아의 소멸 — 과 구조적으로 동일하다. 프랑스어에서 오르가슴을 "작은 죽음(petite mort)"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에로티즘이 문화 보편적으로 금기와 결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이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자아의 경계가 해체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 분석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에로티즘이 작동하는 방식을 새롭게 보게 만든다. 넷플릭스에서 자극적인 콘텐츠가 소비되고, OTT 플랫폼들이 점점 더 강도 높은 자극을 제공하며 경쟁하는 현상,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감보다 공허함이 뒤따르는 경험 — 이것은 바타유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결과다. 에로티즘의 진정한 의미는 자아의 경계를 실제로 허무는 경험에 있는데, 스크린을 통한 소비는 그 형식만 제공할 뿐 본질적 경험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강한 자극을 원하는 욕망의 나선은, 바타유가 말하는 위반의 구조를 이해할 때 비로소 설명이 된다.
5. 신성(聖性)과 소비 — 종교를 잃은 시대의 탕진
바타유 사상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가 하나 있다. 그것은 종교, 정확히는 성스러움(le sacré)에 대한 집착이다. 신학교를 중퇴한 그는 평생 신을 부정하면서도 성스러움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게 성스러운 것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금기가 위반되는 순간 — 즉 일상의 질서가 잠시 중단되고 불연속적 존재가 연속성의 감각을 경험하는 순간 — 에 출현한다.
이 맥락에서 바타유는 현대 소비 사회의 등장을 단순한 경제 현상이 아니라 종교적 공백을 채우려는 운동으로 읽는다. 전통적 종교 의례가 쇠퇴한 자리에, 인간의 성스러움에 대한 욕구는 사라지지 않고 다른 형태를 취했다. 아이돌 콘서트에서 집단적 황홀경을 경험하는 것, 대형 스포츠 이벤트에서 낯선 사람들과 함께 절정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 명절 대목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들이는 것 — 이 모든 것이 성스러운 경험의 세속화된 대체물이다.
이 분석이 날카로운 이유는, 그것이 현대인의 소비 행동을 비난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타이유는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라고 타박하는 대신, "인간이 이렇게 소비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문제는 낭비 자체가 아니라, 낭비를 통해 추구하는 경험 — 연속성의 감각, 경계의 해소, 성스러운 황홀경 — 이 실제로 충족되고 있는가이다. 바타유가 보기에 현대의 소비는 대부분 이 경험을 흉내 내는 데 그친다.
2020년대 한국의 "탕진잼" 문화, 명품 소비의 대중화, 한정판 굿즈를 향한 오픈런 열풍 — 바타유의 프레임으로 보면 이것들은 서로 무관한 현상이 아니다. 모두 성스러운 경험을 향한, 그러나 구조적으로 좌절될 수밖에 없는 욕망의 표현이다. 소비는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반복된다.
6. 바타유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 한계와 주의점
바타유를 읽을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그의 "위반" 사상이 도덕적 방종의 철학적 허가처럼 읽힐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바타유의 에로티즘 소설들은 성적으로 매우 노골적이며, 그의 비밀 결사 활동은 위험한 극단으로 흘렀다. 이 점을 무시하고 바타유를 낭만화하는 것은 그의 사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바타유 자신도 위반이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위반은 금기의 한계에서 발생하는 경험이지, 금기를 폐기하는 해방이 아니다. 금기 없는 위반은 불가능하고, 위반 없는 금기는 억압으로 굳는다. 이 긴장 속에서 인간 문화가 작동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또 하나의 한계는 그의 이론이 젠더 문제에서 결정적으로 취약하다는 점이다. 바타이유의 에로티즘 이론은 주로 남성의 시각에서 구성되었으며, 여성의 경험을 대상화하는 경향이 있다. 페미니즘 철학자들은 이 점을 정당하게 비판했다. 바타유를 읽을 때 이 한계를 인식하지 않으면, 그의 사상이 특정 종류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데 오용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바타유의 철학이 가진 설명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입문서로는 닉 랜드(Nick Land)나 마이클 리처드슨(Michael Richardson)의 영어권 해설서보다, 조르주 바타유의 주요 개념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줄리언 펙(Julian Pefanis)의 『이질학(Heterology and the Postmodern)』(1991)이 도움이 된다. 국내에서는 최정우 번역의 『에로티즘』(자음과모음, 2009)이 핵심 텍스트이며, 최근 한국 연구자들의 관련 논문이 증가하고 있다. 바타이유의 경제학적 사유를 이해하는 데는 『저주받은 몫』(문학동네, 2022)이 필수적이다.
바타유 이후 — 과잉의 시대를 이해하는 언어
바타유는 금지된 욕망을 정당화한 철학자가 아니다. 그는 금지와 욕망이 분리될 수 없음을, 그리고 인간이 왜 반드시 낭비하고 위반하고 한계를 넘으려 하는지를 설명한 사상가다. 그의 철학은 불편하다. 우리가 쉽게 외면하는 것들 — 소비의 과잉, 성의 문제, 죽음의 공포, 종교적 황홀경의 흔적 — 을 정면으로 바라보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이 설계한 욕망을 소비하고, 무한 스크롤 속에서 자극을 쫓으며, 소비로 공허함을 달래다 다시 소비로 돌아가는 순환 속에서 — 바타유의 질문은 낯설고 거북하다. 그러나 "왜 하지 말라는 걸 하는가"를 묻지 않는 한, 그 순환을 이해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