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쇼츠_칼럼
  • 내 우울은 정말 ‘마음’의 문제일까
  • 2026년 뇌 회로도가 다시 호명한 스피노자

  • 지난해 국내 우울증 진료 환자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 정신과 문턱은 낮아졌고 심리상담 앱 광고는 SNS 피드를 가득 채운다. 그런데 이 풍경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묘한 어법을 쓴다. “마음을 잘 다스려야지.” “정신력으로 버텨.” 약을 복용하면서도 마음을 따로 다스리려 하고, 명상을 하면서도 몸이 보내는 신호는 외면한다. 마치 마음이 신체와는 다른 어딘가에 따로 살고 있는 것처럼.

    이 분리의 어법은 사실 17세기에 데카르트가 설계한 오래된 청사진이다. 정신은 사유하는 실체, 신체는 연장된 기계. 둘은 뇌 어디쯤에서 잠시 만났다가 헤어지는 별개의 것이다. 우리는 그 청사진 위에서 줄곧 살아왔다. 그러나 같은 세기에 한 사람이 정반대의 그림을 그렸다. 바로 바뤼흐 스피노자다.


    스피노자, 마음을 회로 위에 올려놓다

    스피노자는 『에티카』(1677)에서 정신과 신체를 두 개의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자연이 드러내는 두 측면으로 보았다. 동일한 사건이 어떤 각도에서는 신경의 떨림이고, 다른 각도에서는 감정의 일렁임이라는 것이다. 그가 이 통합을 떠받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 코나투스(conatus)다. 모든 존재는 자기를 보존하고 자신의 활동 역량을 유지하거나 증대시키려 한다는 원리다. 이 역량이 커지면 우리는 그것을 기쁨으로, 줄어들면 슬픔으로 경험한다. 즉 감정은 영혼의 사사로운 사건이 아니라 활동 능력의 객관적 변동인 셈이다.

    이 발상은 오랫동안 형이상학의 영역에 갇혀 있었다. 변화의 결정적 계기를 만든 것은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였다. 그는 『스피노자의 뇌』(2007, 원저 2003)에서 감정을 ‘신체 상태의 변화에 대한 신경학적 지도 그리기’로 재정의했다. 마음은 뇌 어딘가에 떠 있는 유령이 아니라, 몸 전체에서 끊임없이 갱신되는 신호의 패턴이라는 것이다.


    2026년, 회로도가 스피노자에게 보내는 답장

    20년이 지난 지금, 신경과학은 이 가설에 점점 더 구체적인 답을 보내고 있다. 2025년 4월 미국 프린스턴 대학과 MICrONS 컨소시엄은 쥐 시각피질 1세제곱 밀리미터 안에 있는 뉴런 약 7만 6천 개와 시냅스 5억 개를 모두 추적한 3차원 회로도를 공개했다. 2026년 4월에는 일리노이 대학 연구진이 RNA 바코드로 시냅스를 대규모 식별하는 ‘Connectome-seq’ 기법을 학술지 『Nature Methods』에 발표했다. 같은 해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연구진은 뇌의 배선 구조와 인지 기능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일관되게 결합되어 있음을 통계적으로 입증했다.

    이 결과들이 말하는 바는 단순하다. 의식, 결정, 정서, 우울, 활기는 신비로운 마음의 작용이 아니라 측정 가능한 회로의 활동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21세기의 뇌 지도는 17세기 스피노자가 기하학적 증명으로 도달한 결론, 즉 마음과 몸이 ‘하나의 사건의 두 얼굴’이라는 명제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회로가 흔들릴 때, 우리가 다시 봐야 할 것

    이 통찰은 개인의 위로를 넘어 사회적 함의를 갖는다. 우리는 흔히 우울과 무기력을 ‘마음이 약해서’라고 진단한다. 그러나 코나투스가 신체-신경 회로의 활동 역량이라면, 그 역량을 끌어내리는 환경—과로, 수면 부족, 만성적 모욕, 통제 불가능한 노동시간—은 곧바로 회로의 손상이다. 의지의 문제로 보였던 것이 사실은 시스템의 문제인 셈이다.

    따라서 회복의 출발점은 정신력 강화 캠페인이 아니라, 회로가 다시 자신의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충분한 잠, 안정된 관계, 자율성을 가진 시간 같은 가장 기본적인 신체적 조건들. 스피노자가 17세기에 직관했고, 다마지오가 21세기 초에 번역했으며, 2026년의 회로도가 시각화하고 있는 진실은 결국 같은 한 가지다. 우리는 회로 위의 존재이며, 회로의 기쁨이 곧 우리의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