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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
신神에 취한 사람, 스피노자의 신론 『에티카』 읽기 |
서민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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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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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인간 |
이*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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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물질문명에 의해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시대에 스피노자의 신-자연-인간의 연속적 구도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초월적인 신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간 안에 그러한 신성이 있어야 할 것이며, 어찌보면 현실세계에서 신과 인간이 합일을 이룰때 스피노자의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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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세태를 반영해서 읽으시니 고수 같으십니다. 앞으로도 아트앤스터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부탁드립니다. 아트소녀 (12.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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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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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심연을 넘나드는 느낌 |
앙*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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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에티카 강독 강의가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내공이 부족해서 아직 3강까지 밖에 이수하지 못했지만, 무언가 마음의 깊은 곳으로 내려갔다 유유히 올라오는 듯한 굉장히 신비롭고 흥분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석규 선생님의 다른 강의도 기대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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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혼자 읽어나가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책이지요. 이석규 선생님의 강독강의가 회원님들께서 책을 읽어나가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의미에서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dsess님 끝까지 완강하시어 에티카의 마지막 장을 덮는 승자가 되세요. 화이팅! artboy (11.1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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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에티카 강독이라 굉장히 기다리고 기다리던 강의 입니다. 그런데 에티카의 강독이 이 강의의 몇 프로를 차지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에티카 주변의 많은 정보와 같은 지식은 전달되는 듯 싶어도 깊은 에티카의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는 듯 싶네요 nombow (1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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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페이지까지 보는데 몇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겠네요^^ 이방인 (1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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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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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직 스피노자를, 헤겔을, 이야기 하는지 알 수 있는 보석같은 시간 |
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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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도록 저주 받은 인간
우리는 그동안 법과 제도, 국가를 억압적이라고 여기고 전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젝은 체제에 대한 전복이 역설적으로 체제를 유지시킨다고 말한다. 체제 자체의 불완전함, 불가능성을 은폐하는데 위반(금기에 대한)이 동원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들뢰즈식으로 국가의 소멸을 이야기 했고 계급해방, 여성해방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했다. 민주주의 이름으로 이러한 주장들은 정당화된 것이 사실이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자유, 도피. 하지만 신이 죽은 이후(근대 이래로)에 신이 환하게 인간이 가야할 길을 비추어 주던 시대를 지나 이제 어쩌면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았(사르트르)'는지 모르겠다.
인간은 언어적 질서로 들어오면서 자신의 존재론적 중핵(본능 등)을 상실한다. 이제 존재론적으로 불완전한 주체(빗금쳐진 주체)는 그 잃어버린 무엇을 욕망한다. 자신의 존재론적 결함, 결핍을 상상적 욕망의 대상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판사가 되고 의사가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나는 사회적 욕망, 부모의 욕망,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나는 가수가 되고 싶고 댄서가 되고 싶다. 이 간극, 괴리. 나는 텅빈 주체로서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을까.
강요된 욕망을 자발적으로 욕망하면서 나는 나의 존재론적 결핍을 메꾸고 보충, 보완하며 마치 자유롭게 살아아간다. 내 존재론적 결함을 숨기고 자유롭게 무엇인가를 욕망하며 살아가기 위해 상징 체계는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용하다. 인간은 자신의 결여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원초적 불완전함을 감추기 위해 외부에 장애물(금지, 아버지의 질서, 법과 제도 등의 억압적 질서)을 설치하고 '그것 때문' 이라고 여기길 좋아하는 것이다. 마치 그것(금지)이 없다면 자신은 충만한 존재인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라캉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 욕망하기 위해 법과 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인간은 오히려 온전히 존재할 수 없을지 모른다.
스피노자는 국가, 규범, 제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제 3항으로서 매개를 중시하고 있는 듯 하다.
아버지의 체제가 전복된, 금지(주인기표)의 중지 속에서 우리가 희희낙락하는 사이 국가는 감시와 통제의 훨씬 더 정교한 체계를 창조해내고 있다(아감벤). 이 논의는 올해 출간된 <전쟁은 없다>(지젝 외, 인간사랑 출판)를 참고 하면 도움이 될 듯하다.
에티카의 정리 67-국가 안에서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삶을 욕망한다. 자유인은 이성의 명령에 따라 생활하고 그는 죽음의 공포에 이끌리지 않으며 오히려 직접 '선'을 욕구한다. 그에게 이성은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 이렇듯, 자유의 조건이다.
데카르트적 개인에 맞서 정신이나 이성(정서와 분리되지 않는, 공통 감각으로서의)의 능력을 통해서 윤리학을 완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양(전제국가)은 한 사람(왕)이 자유로웠고, 그리스와 로마 세계는 약간의 사람이 자유를 알았다. 그리고 게르만 세계는 모든 사람이 자유를 알고 있다(헤겔).
우리는 소비 주체로 호명되는 현대판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야 한다. 단축키로 가장 친한 친구 핸드폰 번호조차 외우지 못하게 하는 기계화로부터 사유를 중지 시키는 정치 권력(기술과 손잡은)에서 또 자유로워야 한다. 해야 할 일이 많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 대학에서 교수직을 준다고 해도 거,,거절했던 스피노자는 분명 별종이다. 하지만 철저하게 예속된 주체로 살기를 원하지 않았던 그는 자신의 철학에 따라 그렇게 살았다. 스피노자가 현대인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아트앤스터디에서 이석규 선생님의 에티카 강의가 끝났다. 오늘날 많은 철학자들이 왜 아직 스피노자를, 헤겔을, 이야기 하는지 알 수 있는 보석같은 시간이었다. 스피노자의 르네상스는 끝나지 않았다. 그 옛날의 지혜를 다시 배우고 새롭게 해보자. 대학 교수직을 거부하고 독신으로 살다 간 자유로운 영혼에게서 우리가 배울 것은 무궁무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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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혼자 읽다가 포기했었는데 |
김*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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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에티카 책 사서 20페이지 읽다가 덮었다. 너무 어려워서. 실체, 속성, 양태 이런 개념들이 도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더라. 강의 듣고 나니까 조금은 이해가 간다. 데카르트와 비교해서 설명해주시는 부분이 특히 도움 됐다. 근데 솔직히 8강 들었는데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는 못하겠다. 다시 들어야 할 듯. 기하학적 증명 방식이 독특하긴 한데 따라가기 쉽지 않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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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즉 자연이라는 개념이 신선했다 |
이*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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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가 범신론자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다. 강의 들으면서 신을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로 본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인간중심주의 비판하는 부분도 좋았고. 요즘 환경문제 심각한데 300년 전 스피노자가 이미 경고했던 거 아닌가 싶다. 4대강 사업 같은 거 보면서 자꾸 스피노자 생각났음. 자연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데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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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좀 산만하다는 느낌 |
박*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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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자체가 어려운 텍스트인 건 알겠는데 강의가 집중이 잘 안 됐다. 데카르트 이야기도 나오고 현대 철학 이야기도 나오고 이것저것 많이 다루시는데 오히려 핵심이 흐려지는 느낌? 차라리 에티카 본문 정리에만 집중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유튜브에서 본 강의가 더 명확하게 설명하던데. 개인적으로는 별로였다. 돈 아까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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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입문으로 괜찮다 |
정*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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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전공도 아니고 그냥 교양 삼아 듣는데 생각보다 재밌다. 물론 어렵긴 하지만 선생님이 천천히 설명해주셔서 따라갈 만하다. 정서론 부분이 특히 와닿았다. 우리가 감정에 지배당하고 살면서 자유롭다고 착각한다는 거. 코나투스 개념도 인상적이었고. 다만 8강으로는 짧다는 느낌이 든다. 좀 더 깊이 있게 다뤘으면 좋았을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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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먼저 공부하고 들을걸 |
최*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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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에서 데카르트와 계속 비교하시는데 나는 데카르트를 잘 몰라서 비교가 안 됐다. 심신이원론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심신병행론 들으니까 헷갈렸음. 철학 기초 강의 먼저 듣고 이거 들을걸 그랬다. 아니면 강의 첫 부분에 데카르트 철학 요약 좀 더 자세히 해주셨으면 좋았을 것 같다. 중간에 좀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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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강했습니다 |
송*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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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달에 걸쳐 8강 완강했다. 쉽진 않았지만 끝까지 들으니까 뿌듯하다. 특히 4부 인간의 예속 부분이 좋았다. 정서에 지배당하는 인간의 모습이 지금 우리 모습 그대로더라. 소비사회에서 끊임없이 욕망하고 소비하는 현대인들 보면서 스피노자가 말한 '노예 상태'가 이건가 싶었다. 5부 자유론도 인상적이었고. 강의록이 잘 정리돼 있어서 복습하기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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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이 강의하시는 게 신기 |
윤*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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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규 선생님이 개신교 목사시라는데 스피노자 강의하시는 게 좀 신기했다. 스피노자는 유대교에서 파문당한 사람이잖아. 그래도 정치신학 전공하셔서 그런지 종교와 정치 이야기 나올 때 설명이 흥미로웠다. 신을 초월적 존재로 보는 전통 종교와 스피노자의 내재적 신 개념 차이 같은 거. 다만 가끔 신학적 해석이 너무 들어가는 것 같아서 순수 철학 공부하려는 사람한텐 호불호 있을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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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중간에 끊기는 부분 있음 |
강*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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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 상태가 별로다. 중간중간 소리가 끊기거나 잡음 들어가는 부분 있어서 집중 방해됐다. 아트앤스터디 측에서 기술적으로 좀 더 신경 써줬으면 좋겠다. 내용은 괜찮은데 이런 부분 때문에 감점이다. 온라인 강의는 음질이 생명인데 말이다. 다시 녹음하든지 해서 개선해주시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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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철학과 연결해서 설명 |
임*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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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가 들뢰즈한테 어떤 영향 줬는지 궁금했는데 강의에서 살짝 언급해주셔서 좋았다. 지젝 이야기도 나오고. 고전 철학이 현대에 어떻게 재해석되는지 맥락을 잡는 데 도움 됐다. 다만 현대 철학 이야기가 더 궁금해지는데 거기까지는 안 다루셔서 아쉽다. 스피노자의 르네상스라고 하던데 왜 지금 다시 주목받는지 더 알고 싶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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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
코나투스 개념 좋다 |
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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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보존 노력으로서 코나투스 개념이 인상 깊었다. 모든 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 한다는 거. 단순하지만 깊은 통찰인 것 같다. 이게 욕망의 기초가 되고 윤리의 기초가 된다는 설명도 좋았다. 김연아 예시 들어서 설명하신 거 기억난다. 자유는 억압이 없어서 오는 게 아니라 자기 능력으로 억압을 극복할 때 온다고. 명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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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책 읽으면서 들으니까 좋음 |
한*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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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원문 옆에 놓고 강의 들었다. 혼자 읽을 땐 무슨 소린지 몰랐던 부분들이 강의 들으면서 이해됐다. 특히 정리 증명 부분들. 기하학적 방법이라는 게 처음엔 낯설었는데 익숙해지니까 논리적이고 명확하다는 느낌 받았다. 다만 라틴어 용어들은 여전히 어렵다. Potentia와 Potestas 구분 같은 거. 용어집 같은 거 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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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이론적이다 |
배*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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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들었는데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할지 감이 안 온다. 형이상학이나 존재론 이야기는 많은데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음. 윤리학이라면서 윤리적 실천 부분은 좀 부족한 것 같다. 이론만 잔뜩 배우고 끝난 느낌? 차라리 실제 사례 중심으로 설명해주셨으면 더 와닿았을 것 같다. 철학과 학생들한텐 맞을지 몰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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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심신병행론 이해 안 감 |
신*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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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신체가 병행한다는 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정신 과정과 신체 과정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건가? 그럼 인과관계는 없다는 건가? 강의 들을 땐 이해한 것 같은데 나중에 생각해보면 헷갈린다. 예시를 더 많이 들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추상적인 개념 설명만 들어선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2회독 해야 할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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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정서론이 핵심인 것 같다 |
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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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정서론이 에티카의 하이라이트 아닌가 싶다. 기쁨, 슬픔, 욕망 이 세 가지로 모든 정서를 설명한다는 게 대단하다. 그리고 수동적 정서에서 능동적 정서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 이성의 역할에 대한 설명도 좋았다. 다만 현대 심리학이나 뇌과학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한데 그건 다루지 않으셔서 아쉽다. 300년 전 이론이 지금도 유효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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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네잎클로버 나눠주신 거 감동 |
오*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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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수강생 리뷰 보니까 선생님이 네잎클로버 나눠주셨다던데 부럽다. 온라인으로 듣는 나는 그런 거 못 받지 ㅠㅠ 그래도 강의 내용은 만족스럽다. 선생님이 열정적으로 가르치시는 게 느껴진다. 가끔 농담도 하시고. 무거운 주제지만 지루하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다음에 오프라인 강의 있으면 직접 가서 듣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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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차분한 강의 |
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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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해서 들으면 강의 내용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중간중간 교수님 말씀이 자꾸 끊어져요 녹음상태가 좋지 않네요 아트앤스터디에서 기술 담당 하시는 분께서는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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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이런 강의 처음입니다 |
김*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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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에 나오는 개념들을 쉽게 충실하게 설명하는 게 우선인데 데카르트와의 비교가 우선인지 한마디로 너무 산만합니다. 실체 속성 양태 자기원인의 개념이 매우 중요하죠. 그러나 강의 내용만 들으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차리리 유튜브 사람들이 더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잘 하는 것 같습니다. 어려운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으러 왔다가 정말 실망했습니다. 이런 강의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습니다. 아트앤스터디에서도 강사님을 선정할 때 교수법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검증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후설 니체 강의하시는 분들의 강의를 들어보시면 얼마나 잘 하시는지 비교가 될 겁니다. 너무 실망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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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너무 갓다리를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
최*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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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만 말씀하셔도 모라잘 것 같은데.. 너무 주변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그것도 반복해서 그러니까 강의가 지겹기도 하지만 깊이도 없는 것 같아요.. 계속해서 변죽만 울리는 격이라고나할까...크게 도움이 되질 않는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를 이해하기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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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스피노자 |
최*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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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많이 공부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책을 쓰는 방법이 너무 독특해서 기억력이 좋지 않은 사람은 너무 읽기 어려워요.. 사실 알고 보면 그리 난해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걸 쉽게 정리해 주실 강의를 찾았는데 열심히 들어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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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모두가 주권자일 때 따라야 할 보편적 이념이란 것 |
안*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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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vs 스피노자
유럽에서 카톨릭 세력과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중심으로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났다. 그리고 갈릴레이의 지동설은 교회와 교황 중심의 교권을 위협했다. 이 혼란의 시기, 네덜란드에는 두 철학자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활동하고 있었다.
오늘 아트앤스터디에서 이석규 선생님의 에티카 강의가 있었다. 나는 스피노자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있다. 대학때 기말 레포트가 밀려 있는 상황이었고 감기에 걸려 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학교 세미나에서 에티카 발제까지 맡았던 것이다. 한줄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눈물이 앞을 가려 목놓아 울었던 것 같다. 할일은 많고 발제는 한장도 진척되지 않았다. 스피노자가 등장한 철학적 배경이나 맥락을 몰랐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다.
오늘 선생님 수업을 듣고 스피노자가 겨냥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왜 그런 주장을 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그는 신이 이 세계로부터 초월해 있다고 전제했다. 그리고 정신 세계와 분리된 물질 세계를 주장함으로써 자연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데카르트는 신의 세계와 정신 세계 그리고 물질 세계의 관계를 분리했다. 그는 근대 과학의 기초를 닦아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보기에 신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곧 자연이며 '사유하는 사물'이다. 이로써 그는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대조적으로 신을 초월적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로 이해했다. 또 사유와 연장은 이분법적으로 단순히 분리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과 같이 합리적 이성과 과학이 각광받는 시대에 비이성적이거나 비과학 혹은 반과학적인 입장은 배제되고 만다. 이렇게 합리적 이성이라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을 배제하는 폭력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이성은 비이성이다.
모든 것을 수치로 나타내고 계량화하는 것이 우리가 좋아하는 과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수치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적 관계, 사회는 비합리적인 것들의 집합체이다. 어쩌면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에 반박하면서 휴머니즘, 합리적 이성에 반기를 든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는 인간 그리고 인간 중심주의는 결국 자연을 대상화하고 지배했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자연의 복수일지 모른다.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할까. 이제 위계는 파괴되었으며 억압적 이성, 금지에 맞서 개인을 중시하고 상대주의, 다원주의를 부르짖으며 하나의 진리란 없다. 대신 다양한 진리가 있다. 모두가 주권자인 지금 우리의 모습에 스피노자는 경고한다. 선입견, 편견을 버리고 합리적이고 비판적으로 순종하라.
모두가 주권자일 때 따라야 할 보편적 이념이란 것이 있을까. 그 안에 윤리 의식은 자리잡을 수 있을까.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통해 우리가 오늘날 그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앞으로 선생님과 함께 두달 남짓 열심히 들여다 볼 참이다.
유대인 상인 가계에서 자라 데카르트의 저술들을 반박하고, 사상의 자유를 이유로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 자리를 거부한 채 렌즈 깎는 일을 하면서 살았던 스피노자.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가 말하는 신은 어떤 신이고 그 신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혼자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에티카, 수업 빠지지 말고 들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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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
수동적 존재에 머물러 있는 인간에게 삶을 ‘생산하라’고 다독인다. |
박*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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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중학교 시절 한창 유명한 구절을 외우고 그 구절을 내 상황에 빗대어 위안을 삼곤 했는데 이 구절로 인해 많은 위로를 받았고, 그리하여 자연스레 이 말을 했던 스피노자도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5년 동안 이게 당연히 스피노자가 처음 사용한 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구절은 스피노자가 처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마틴 루터가 먼저 사용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상당한 배신감이었다. 만일 그 때 저 구절을 접하고서 마틴 루터가 쓴 것임을 알았다면 스피노자가 아닌 마틴 루터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스피노자가 매력적이라는 건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나에게 양가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스피노자를 아트앤스터디 강의에서 만났다.
1. 신에 관하여
<「에티카」로 읽는 스피노자>의 첫 강의는 ‘신에 관하여’였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는 사실 데카르트의 논리를 수용하면서도 그와 또 다른 논지를 펼치며 에티카를 전개해 나간다. 따라서 에티카를 스피노자가 의도한 바대로 최대한 왜곡시키지 않고 읽으려면 우선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해 알아야 한다.
중세의 모든 현상은 신의 섭리로 설명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든 대상이 신의 섭리에 의해 자신이 가지로 있는 목정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나간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과학과 기계론적 세계관이 대두되면서 목적론적 세계관은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는 프로테스탄트적인 신앙과 합리적인 사유를 통해 자신의 과학과 사상을 전개하고 발전시킨다. 이른바 ‘합리주의’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신이 이 세계로부터 초월해 있다는 가설로 그리고 정신세계와 분리된 물질세계를 주장함으로 자연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세 개의 세계 즉 신의 세계, 정신세계 그리고 물질세계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함으로 존재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인식론적인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에 스피노자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데카르트의 한계를 극복하려 시도한다. 스피노자에게는 단 하나의 실체인 신만이 있고 이것이 곧 자연이었다. 그리하여 정신을 다시 자연으로 복귀시켜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물질적 자연을 정신과 물질을 포함하는 일원론적 자연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가진 두 개 이상의 실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이고, 각각의 속성들이 실체의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라고 보았다. 그에게 신이란 ‘우주 자체’였던 것이다.
2. 인간 중심주의 비판
그가 펼치는 논지를 가만히 듣고 있자면 스피노자는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느껴진다. 그는 인간의 기준으로 선과 악이 나누어지고, 자연정복설이 대두되며 인간에게 해로운 것은 배척받고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되는 인간중심주의로 인해 자연이 대상화되고 세계의 모든 것들이 왜곡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자연을 설명하려고 사용하는 모든 개념은 오직 표상의 양식일 뿐이다. 이는 사물의 본성을 표시하지는 않으며, 단지 표상의 상태를 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물의 완전성은 사물의 본성과 능력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야 하고, 따라서 사물은 인간의 감각을 즐겁게 해 주거나 괴롭힌다고 해서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알맞거나 반발적이라고 해서 더 완전하거나 덜 완전하지 않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주체성이나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 이전에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신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모든 속성을 지니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이다. 따라서 인간이 아닌 신이 사유의 주체가 된다.
인간들은 흔히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을 혼동하여 신에게 인간의 정서를 부여하는 오류를 범하지만 실체는 진실을 통해서 파악되기에 실체의 진리는 지성을 제외하고는 오직 실체 자체 안에만 존재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들은 실체의 존재는 실체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진리임을 필연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유의 과정을 통해 동일한 본성을 소유하는 실체가 하나 밖에 없음을 또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인간중심주의는 비단 자연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삶을 왜곡시키는데도 일조한다. 각박한 현대사회에 우리는 그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억압되고 개발된 세계 안에서 표상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아가는가, 무엇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이미 정복대상으로 인식된 지 오래이며 오직 인간에게 유리한 세상으로 만들려 노력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세계의 중심으로 삼는 인간들은 그들의 관계는 돈독히 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너도나도 열심히 일하고 소비하고 또 다시 일을 하러 돌아간다. 진지한 내적 자아가 아닌 오직 이미지로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타인이 원하는 이미지를 내비침으로써 매우 친밀한 척 포장하며 살아간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좇아가기에도 벅찬 현대사회에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내적성찰을 할 기회조차 없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을 대상화시키고 진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척 내적자살을 함으로써 불안감을 내려놓는다. 현대사회에 피상적 관계와 소비로 둘러 쌓인 인간들은 외부도, 내부도 없는 ‘자동인형’이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현대사회는 과연 인간에게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가.
3.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가
인간은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법과 제도에 의해 묶여있지만 이것을 어기는 것에 대한 선택도 인간의 자유이다. 법을 어겼을 때 자신에게 돌아오는 불이익을 계산하여 준수하는 것이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할 수 없이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스피노자의『에티카』에 따르면 우리는 전혀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노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데 왜 자유롭지 않은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왜 그런 의욕이나 욕망을 가지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욕과 충동을 의식하지만 왜 자신들이 그 충동과 의욕에 사로잡히는지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관하여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우리의 선조들은 이에 대해 고민하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태어났으며 우리가 왜 지금 이것을 욕망하고 있는가, 욕망의 추동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해 알고서 행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후 너무나 긴 시간이 흘러 동기는 이미 우리의 내면 깊숙이 무의식화 되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의식으로 끌어올릴 힘이 없다. 따라서 욕망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충동에 따라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향해 열심히 달려왔고,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지만 그 모든 과정이 끝난 후 엄습하는 공허함을 느낀 적 있는가. 분명 내가 원하는 것이었고, 이것만 할 수 있으면 세상을 다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원하던 것을 얻고 나니 멍한 기분이 드는 경우가 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작정 달렸을 때 나타나는 우울증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조울증은 삶의 원인을 모르는 무능력자들의 병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깊이 사유하지 않는다. 그저 남들이 다 하니까 이게 정규 코스겠지, 하며 함께 무작정 달린다. 좋은 대학을 들어가면 좋은 직장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직장을 들어가면 미래에 행복해지겠지 하며 현재 자신의 행복을 미래에 투자하며 살아간다. 능동적 주체가 되지 못한 채 수동적 대상에 머무를 때, 우리 인생은 불확실한 기쁨과 슬픔에 던져진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자유롭지 못하고 수동적 존재에 머물러 있는 인간에게 삶을 ‘생산하라’고 다독인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내 삶을 좌지우지하는 원인들을 알아야 한다. 또한 삶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삶을 생산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불확실한 우연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삶을 조직해야 한다. 스스로 삶의 원인이 되고, 삶의 생산자가 됨으로써 인간은 자유를 누리고, 기쁨을 늘릴 수 있다.
우리는 세계에 피투된 대상이다. 자연법칙에 따라 수동적으로 행동하고, 알 수 없는 욕망을 따라가다 일순간 허무함에 빠져 조울증을 겪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모든 세계가 자신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고 그렇기에 인류를 제외한 다른 종들을 도구화, 대상화 시키지만 세계는 그 자체가 신이다. 인간은 인간이 아닌 신이 조직해 놓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자연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인간은 세계 안에서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조직하고, 자신의 삶의 이유를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성찰함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다. 같은 삶을 살더라도 이러한 형이상학적 성찰을 하는 사람과 무작정 알 수 없는 욕망에 따라 흘러가는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 된다. 이쯤에서 삶의 속도를 한 템포 낮추어 과연 나는 누구인지, 지금 하는 행동이 진정 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면 어떨까. 오늘은 호란의 잔잔한 목소리만으로 위로가 되는 이바디의 ‘오후가 흐르는 숲’이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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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선생님과 우린 찐한 사이이다 |
서*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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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정서는 외부작용에 의해 수동적으로 발생한다. 이렇게 발생하는 정서는 혼란한 정서로 슬픔과 같은 정서가 있다. 반대로 기쁨은 내재적으로 능동적 정서에 해당한다. 수동적이고 외부적인 자극에 영향을 받는 노예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력(코나투스)이 필요한 것이다. 이 때 기쁨의 정서(선, 덕, 긍정)에 도달할 수 있다.
자신을 보존하려는 노력이(욕망) 덕의 첫째가는 유일한 기초이다. 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덕을 따르는 사람들의 최고 선은 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했다고 한다면 개인은 다른 사람들을 전혀 해치지 않고 자신의 이 권리를 누렸을 것이다.
이성의 지도에 따르지 않은 탐욕, 명예욕, 정욕 등은 비록 병이라고 부르지 않을지라도 정신 착란 증세의 일종이다.
자본주의는 이성의 지도에 따르지 않고 더 많은 이익을 가지려는 탐욕에 따르는 정신 착란이다. 사회가 ‘협력’에 기반 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에 기반 할 때 공공성을 잃고 개인은 고립된다.
늘 경쟁해야 하는 현대인은 바쁘다. 생각하고 읽고 쓸 시간이 없다. 자신의 본성에 따르지 않고 외부의 원인에 수동적으로 따를 때 개인은 주체성을 잃고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신에게 복속된 인간을 해방했지만 계몽의 변증법은 다시 현대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계몽은 종교를 몰아내려 했을 때 계몽은 스스로 불완전했다. 믿고 따라야 할 주인을 상실한 것이다. 법과 제도 규범들이 억압적이라고 불평하고 위반하려고 할 때 주체는 불안해 진다. 믿고 따라야 할 법과 규제를 상실한다면 우리는 윤리도 덕도 잃어 버릴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억압적이라고 삭제하려 했던 것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법과 질서 안에서 오히려 철저하게 법을 따를 때 사회는 안정될 것이다. 강자에게 유연하고 약자에게 강한 법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정한 법이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다 아는 사실이다. 어릴때 부터 법이 중요하고 자연, 사람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현 정부도 그렇게 배웠을 것이다. 자연이 소중해서 4대강을 자기들 마음대로 파헤치고 있는지. 그렇게 자연과 사람이 중요해서 그것들을 전부 상품화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인지.
삼백년 전 스피노자의 노트는 지금도 유효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음 시간은 스피노자 마지막 강의이다. 끝나고 선생님과 찐한 커피라도 마셔야겠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선생님과 우린 찐한 사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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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선생님과 두 번의 강의 밖에 남지 않았다. 아쉽다. |
정*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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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트앤스터디에서 스피노자 에티카(이석규 선생님) 강의(여섯번째)가 있었다.
인간은 정서를 통제하지 못할 때 무능력한 채로 예속, 굴종 또는 부자유의 상태로 있다. 이런 인간은 자신의 능력(코나투스)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선과 악을 인식할 때도 내 존재의 이익이나 해가 됨에 따라 판단한다. 선과 악은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인간의 필요에 따라 선이고 악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 중심을 비판하고 스피노자는 인간이 철저히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동안 인간의 우월한 이성은 끔직한 전쟁을 막지 못했다.
인간이란 대단치 못한 존재이다. 동물보고 생각이 없다고 말하길 좋아하지만 정작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 내 이성을 온전히 사용해서 주체적으로 살고 있지 않다. 누가 생각이 없는 것일까. 유행을 따르고 티비에 나오는 스타처럼 외모를 만들기 위해 수술도 한다. 개성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실상은 우상을 세워놓고 그와 똑같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이야 말로 자유롭지 못하고 예속되어 있는 인간이다. 김연아는 스케이트장 위에서 자유롭다. 그녀가 자유롭기까지는 숱한 고생이 있었을 것이다.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고통이 따른다. 막힘없이 자유롭게 책을 읽으려면 고통이 따른다. 처음에 책을 읽을 때는 어려운 개념들이 많아서 부자유스럽다. 하지만 노력 끝에 자유 자재로 책을 읽고 쓸 수 있는 날이 온다. 이것이 코나투스이다. 자유는 억압이 없어져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자신의 능력으로 억압을 감당하고 그것을 넘어설 수 있을 때 찾아오는 것이다. 이런 능력을 욕망 하자.
스피노자는 욕망은 인간의 본질 자체라고 했다. 인간의 욕망이란 무엇일까. 내가 욕망하는 좋은 차가 있고 좋은 집이 있으면 행복한 것일까. 그것은 나의 욕망일까. 타자의 욕망일까. 내 욕망도 내 것이 아닐 수 있다. 타자에 의해,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면 나는 내 스스로 욕망할 줄도 모르는 것이다. 내가 의사가 되고 싶고 판사가 되고 싶은 것은 진실로 나의 욕망일까. 부모님의 욕망이고 사회적 욕망은 아닐까. 욕망은 채워지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 ‘채워지지 않음’을 배회하며 존재하는 것이 '욕망'이라는 것일지도.
내 능력을 내 스스로 찾아 키워서 모든 예속에서 벗어나 진정 즐겁고 행복해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것을 욕망해야 한다. 스피노자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삼백년이 지났지만 그래도 우리가 스피노자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선생님과 두 번의 강의 밖에 남지 않았다. 아쉽다. 졸업 논문 핑계로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지 못했지만 선생님이 항상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많이 도움이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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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라면 용기를 내어 전면 무상 교육 실시하라고 외치지 않았을까 |
c**l p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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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VS 정서
아트앤스터디에 이석규 선생님 에티카 다섯번째 강의가 있었다. 반값 등록금 문제로 떠들썩하다. 다른 건 몰라도 의료와 교육은 무상으로 해야하는 것 아닌가. 스피노자라면 뭐라고 했을까. '용기'를 내어 전면 무상 교육 실시하라. 고 외치지 않았을까.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때이른 장마라나. 날씨가 꾸물꾸물하다. 때이른 장마, 생태계의 교란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초래한 것이다. 인간이 무차별하게 자연을 훼손해서 생긴 결과다. 지진도 해일도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인간은 인간의 편의대로 사물을, 자연을, 이해하고 해석해 왔다. 지금 내앞의 책상도, 어젯밤 화장실 가다 부딪혀서는 '악'이고, 지금은 노트북을 올려놓을 수 있는 유용하고 착한 '선'이다. 동일한 책상이 동시에 선과 악이 되는 것이다. 오직 인간 이성에 의해서만. 합리적 이성이 선과 악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정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성은 정서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정신이 정서에 대하여 절대적인 지배권을 소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데카르트식 사유는 지성의 위대함에 대한 자만일 뿐이다. 정신이 신체를 지배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인간이 동물이나 자연을 지배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인간이 아픈 사람을 상대로 돈을 요구하는 것도 잘못이고 사회적 지식(공적 영역)을 상품화, 개인화(축소) 하는 것 또한 잘못이다. 인간 이성의 나쁜 예라 할 수 있다.
인간 이성이 정서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 인간은 정서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되고 예속되어 있는 것 같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정서를 기쁨과 슬픔과 욕망의 세 가지로 정의했다. 정신이 활동하는 한 정신에 관계하는 정서에는 기쁨이나 슬픔, 욕망에 관계하는 것 밖에 없다(정리 59).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려고 한다. 하나가 되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다. 그/녀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도한 동일시의 욕망에 따라 그/녀를 사랑하기도 하고 증오하기도 한다. 소유욕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나 증오하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용납시키려고 하는데 그것 또한 명예욕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은 이처럼 합리성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에 관계하고 욕망에 관계한다. 이성이 이렇게 쓰일때 권력 지향적이 되고 목적 지향적이 된다.
스피노자는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으로 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키에르케고르가 그의 약혼녀에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진정한 당신 자신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그는 파혼했다. 신 앞에 단독자로서 당당히 서야한다. 나 자신이 아닌, 외부에 사랑하는 사람을 설정하고 그를 향한 온갖 정서, 정념을 버리고. 정념을 버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닌것 같다.
철학자들과 달리 왜 우리 범인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온갖 괴로움과 번민에 휩쓸려 살아가는지. 인문학을 하면 자살은 하지 않는다는 우스개소리 말이 있다. 단순히 우스갯소리라고 하기에는 곱씹어 볼 말이다. 자살은 나를 객체화 하고 사물화하는 것이다. 주체로 우뚝 서기 위해 사유하고 또 사유하라. 현대 철학은 주체가 텅비어 있다고 하지만 그 주체의 공백만이 주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면 텅 빈 채로 주체되기는 어떨까. 주체의 존재론적 일관성을 고집하기보다 그런 것은 없다고 과감하게 인정하고 다르게, 다른 주체되기. 실험해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사유하기가 중단된 시대에, 60초 광고에 익숙해 60초 이상 집중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에게 고한다. 프로포즈 하고 싶다. 인문학을 하라. 지금과는 다르게 생각하라. 그리고 스피노자를 읽어보라. 오늘날 스피노자의 반이데올로기적인 아이디어는 여전히 유효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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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되기의 포기를 통해서 남성 질서를 해체할 수는 없을까 |
j**k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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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본성과 기원에 관하여
아트앤스터디에서 이석규 선생님의 에티카 네 번째 강의가 있었다. 오늘 선생님 수업을 들으면서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헤겔이 말한 '대립의 일치' 개념이 떠올랐다. 말 그대로 대립하는 것들이 일치하는 것인데. 예를 들면 존재는 없고 존재자만 있다고 한다면 존재는 '무'이다. 존재=무. 신 즉 자연. 헤겔에 의하면 대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여성은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남성적 질서에 저항하여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립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여성이 저항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남성 질서의 형식(-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진정한 저항과 해방은 어디에 있을까. 여성적 정체성을 포기하는 곳에 있을지 모른다. 여성이 남성에 저항하고 독립하고자 할 때 여성은 남성을 '완전한 무엇'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그 '완전한 무엇'이 불완전하고 불가능한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존재'가 자신의 대립물인 '무'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남성이 여성에 의존해 있다면 여성 되기의 포기를 통해서 남성 질서를 해체할 수는 없을까.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스피노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신, 정신은 사유하는 사물이다. 관념은 실재한다.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삼각형의 관념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있는’ 것이다. 관념의 질서와 사물의 질서는 동일하다(정리 7). 그동안 공부했던 것처럼 반 데카르트적 향기가 짙다.
신체의 관념은 필연적으로 신 안에 주어져 있다. 이 결론은 인간의 정신이 자기 신체의 본성과 함께 물체의 본성을 지각한다는 것이다(정리 15). 우리는 신체의 관념으로 인간 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그 반대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많은 사람이 신의 능력을 신의 자유 의지나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신의 권능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것은 신의 능력을 왕이나 지배자의 권력과 비교하는 것과 같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우연한 것으로 그리고 신이 모든 것을 파괴할 힘을 가지고 있다는 등. 그러나 신의 능력은 단지 신의 본질이다. 신의 능력과 지배자의 권력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신의 능력과 지배자의 권력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정리 3). 부시는 많이 혼동하고 있는 예가 된다.
정리 10에 의하면 인간의 본질에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거나 또는 실체(신)는 인간의 형상을 구성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겨냥하고 한 말일까. 신인동형론에 대한 비판 아닐까.
인간 중심에 대한 비판으로써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자연을 대상화하여 착취하는 행태는 심각하다. 광우병이나 구제역 또한 인간 중심주의의 산물이다. 자연의 복수는 이미 시작된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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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 네잎크로버를 수강생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
이*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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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중심주의 비판
오늘 아트앤스터디에서 이석규 선생님의 에티카 세번째 강의가 있었다. 네잎크로버를 어디서 어떻게 구하셨는지 수강생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어른이 되어서 상상력을 잃어버리고 호기심과 꿈을 잃어버리고 한동안 하늘도 땅도 없는 듯 살아왔다. 내가 받은 건 네잎크로바와 하늘, 구름, 바람, 꿈, 이었다. 스치는 인연이지만 그래도 묻자. 내 앞에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조금 느리게 살면 어떤가. 왜 우리는 빠르게 살아야하는가.
각박한 현대 사회에 우리는 익명으로 살아간다. 서로가 누구인지 어떤 꿈을 갖고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관심이 없다. 신을 잃고 인간이 이 땅에 중심인 이래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얻었을까. 무엇을 잃었을까. 여기에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스피노자의 경고가 있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사유의 주체가 아니라 신이 사유의 주체라고 했다. 데카르트의 인간 중심주의에 대한 항변이었던 셈이다. 데카르트는 신을 초월적 존재자로 상정했지만 스피노자는 그러한 신념을 거부했다. 신은 내재적으로 우리를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더불어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신을 초월적 존재로 인간에게서 떼어내버렸고 지상에 인간이 군림하게 했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발로서 스피노자의 철학이 서 있는 것이다.
생물학에는 해충이라는 말이 없다고 들었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니까 해충인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가. 느닷없이 멀쩡한 강을 파헤치질 않나. 인간도 자연에게 대단히 해로운 존재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연을 이해하고 신을 이해해 왔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러한 생각에 반대한다.
스피노자에게는 인간의 주체성이나 자유의지에 대한 회의가 있다. 인간 주체 이전에 신이 필연적으로 있다.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이며(정리 14) 신은 통일체이고 그 본성대로 하나의 실체만 존재하며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한하다. 신적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무한하게 많은 사물들이 무한하게 많은 양태들로 존재할 수 밖에 없고(정리 16) 신은 자신의 본성의 법칙에 의해서만 활동하며 그 무엇에 의해서도 강제되지 않는다(정리 17). 등. 여기에 수업 내용을 다 정리할 수는 없다.
중심이 부재하는 시대. 우리의 시대일 것이다. 신은 물론이거니와 아버지의 권위는 해체되었고 학교에서는 선생님의 권위가 무너져 가고 있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왔노라 떠들지만 우리의 예상과 상황은 반대로 돌아간다. 아버지와 선생님의 권위를 따르지 않은 아이들은 제 멋대로이고 내가 주체이니 내가 나를 해하는 것도 내 의지에 달려 있다. 자살을 막을 길이 없다.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가 공부를 잘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스피노자에게서 오늘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최소한의 신의 본성이 부여하는 강제성, 필연성이 아닐까. 자유는 규범 아래에서 누릴 수 있다. 자유롭게 하늘을 보고 네잎크로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으려면 어쩌면 법과 질서, 규범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것이 억압적이라고 저항하기 이전에 그것이 왜 필요한지 우리가 왜 필요로 하는지를 숙고해야 할 것이다.
이야기가 너무 멀리 온 것 같다. 다음 시간에는 정신의 본성과 기원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했다. 벌써 기다려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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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강의를 클리어하게 잘 해주시니 다행이다 |
이*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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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
아트앤스터디에서 이석규 선생님의 에티카 강의가 있었다. 데카르트가 플라톤의 철학적 맥락에 있다면 스피노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이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은 심각하게 다르다. 이 차이만 보아도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얼마나 다른지 짐작할 수 있다. 이상과 현실이 일치되는 삶을 살고 싶다. 이상이 현실이 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고 다시, 다른 이상을 세워야겠지만 말이다. 일이 놀이가 되고 나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은 모두의 꿈일 것이다. 스피노자처럼 숙련된 기술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모두가 일이 놀이가 되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의 역할도 중요할 것이다. 문제가 너무 커졌다 다시 본론으로.
중세 말, 근대 초, 말하자면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태동기에 데카르트의 노선은 프로테스탄트의 길을 걷게 된다. 반면 스피노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토마스아퀴나스로 이어져 카톨릭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초월적인 심신이원론을 비판하고 내재적 심신병행론을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신체의 과정과 의식의 과정은 병행하는 것이다. 일종의 일원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스피노자에게 궁극적으로 실체는 하나이다. 데카르트와는 한참 다르다.
모든 실체는 변용에 앞서고 필연적으로 무한하며 모든 속성에 대하여 하나의 실체만이 있다. 동일한 속성의 여러 실체는 없으며 수적 구별은 실재적이지 않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는 분할되지 않으며 실체의 각 속성은 그 자체를 통해 파악된다. 이러한 정리들을 통해 스피노자는 신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정의에 따른 공리, 증명에 따라 논증적으로 집요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스피노자의 성격이 엿보인다. 나는 왜 집요함이 없을까. 지구력도 없어서 큰일이다.
스피노자를 해석하기에 따라 유물론자로 보느냐 아니면 그가 계속해서 신을 전제하는 것 아니냐의 입장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스피노자식으로 신(즉 자연)을 해석하는 것은 아무튼 발상의 전환일 것이고 분명 유물론적 측면이 있다. 유물론과 관념론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에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정신과 신체를 분할 할 수 없듯이. 물질적, 신체를 중시하다 보면 정신을 배제할 수 있다. 하지만 물질을 중시할 수 있는 것도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물질의 우연성, 공백(텅빈)을 받아들이는 유물론이 물질을 고집하는 유물론보다 어쩌면 매력적인 것 같다.
오늘은 정리 1~14번까지 공부했다. 다음주에 15번부터 다시 시작이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안그러면 스피노자의 꼼꼼한 정리, 증명 논리를 따라가기 힘들다. 용어도 쉽지 않아서 자꾸 잊어버리고 내식으로 변용해서 썼다간 감당이 안된다. 외워야겠다.
속성:실체의 본질(신, 자기원인) 양태:실체의 변용 실체를 표현하는 개념들: 속성, 본질, 완전, 무한, 절대
등등. 많다 외울게. 점점 자신없어지지만 선생님이 강의를 클리어하게 잘 해주시니 다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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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지식이 더 필요할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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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에 관심이 있어서 강의를 보았는데 역시 강의만 들어서는 확실히 이해가 되지 않네요 어느정도 스스로 에티카에 대해 읽어보고 의문점을 가진 상태에서 이 강의를 수강하여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현재 에티카를 읽어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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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지식이 더 필요할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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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에 관심이 있어서 강의를 보았는데 역시 강의만 들어서는 확실히 이해가 되지 않네요 어느정도 스스로 에티카에 대해 읽어보고 의문점을 가진 상태에서 이 강의를 수강하여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현재 에티카를 읽어보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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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보다 읽기 어려운 스피노자 |
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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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 니체 - 들뢰즈 - 지젝 등에 관심이 있습니다. 에티카는 사놓고 1-2년 묵혔다가 오늘 다시 시작했는데 20페이지 읽기가 쉽지 않군요. 지루하긴 해도 이런 강의가 흔치 않긴 한 것 같습니다. 짜라투스트라 강의하던 백교수님 생각 나는데 강독 강의가 나중에는 많이 남는 것 같습니다. 어려웠지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책도 이정우 선생님과 또 다른 분 두분 것으로 책 밑줄쳐가면서 보니 남는 것이 있는듯.. 어쨌든 고전을 직접 읽는데 도움을 주는 강의들이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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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스피노자... |
문*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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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에티카를 강독하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혼자 읽긴 너무 어렵더라구요.. 특별히 '신'과 '윤리'의 부분에 대한 이해가 힘들었습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따라 에티카를 강독하니 여전히 어려워도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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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좋은 강의 잘 들었습니다. |
김*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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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은 들뢰즈에 관심이 있어서 들은 강의였는데 오히려 스피노자에게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네요. 신을 기준에 두고 판단을 한다는건 제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라 좀 거부감이 있지만 인간이 살면서 어느정도는 물자체라던가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 '신적인 것'에 기준점을 잡고 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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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잘듣고 갑니다. |
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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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이원론 아리스토텔레스 기본 철학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초보는 이해하기 힘들겠네요. 처음 철학을 접하시는 분들이라면 기본적 기초부터 듣고 들으시길 ... 사유 속성 연장 양태 본질 이런 단어에 대한 개념이 없으면 듣기 힘들겠네요. 기초가 없으신 분들은 비추입니다. 기초부터 듣고 들으시길 조언 드립니다. 잘듣고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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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강의 잘들었습니다. |
김*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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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에티가 책만 사놓고 보다가 말았었는데 강의수강을 기회로 책을 완독하게 되었네요. 다만 강의는 스피노자의 해석을 해독하는 데만 치우쳐 스피노자의 이론의 난점이나 현대적 해석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부분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조금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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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만 유익한 스피노자 강의 |
이*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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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8강을 끝냈습니다! 사실 철학 전공도 아니여서 이 수업을 듣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죠..역시 데카르트의 기본 사상도 모르고, 철학 입문도 공부하지 않은터라 여러가지 고충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네덜란드-유태인-스피노자 이렇게 관심사가 가지치기되어 스피노자 사상을 조금이나마 훑을 수 있게 되니 기쁩니다.. 어찌되었건 스피노자는 행복해지려고 노력한 사람, 자유를 찾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배운 걸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이 강의를 들으시는 분들 중, 저처럼 문외한(?)이라고 한다면, 이석규쌤이 제공해주신 강의록을 여러번 정독한 후에 강의를 듣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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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만 잡아도... |
유*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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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문외한인 제가 이 싸이트 문을 두드린 건 그야말로 철학의 문을 두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그런데 좋은 문학 강의가 많아 그거 듣느라고 철학은 아직 많이 못 들었습니다.). 이석규 교수님 강의를 통해 스피노자 <에티카>가 대체로 어떤 거라는 감만 잡아도 저로서는 큰 결실인데요. 앞으로 더 깊은 수준의 강의까지 소화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계속 정진할 생각입니다. 좋은 강의, 정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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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결심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꼭 좋은 결실을 맺길 바랍니다. 제가 응원할게요. 으랏찻차! artboy (11.12.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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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
윤*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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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에티카 강독이라 굉장히 기다리고 기다리던 강의 입니다. 그런데 에티카의 강독이 이 강의의 몇 프로를 차지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에티카 주변의 많은 정보와 같은 지식은 전달되는 듯 싶어도 깊은 에티카의 바다에 들어가지 못하는 듯 싶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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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의 깊고 방대한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근육키우기 강의 정도가 될 것 같네요. 회원님들께서 많은 성원을 보내주시면 이 다음 단계의 강좌도 개설하도록 하겠습니다. 열심히 들어주세요~^-^ artboy (1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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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적 존재에 머물러 있는 인간에게 삶을 ‘생산하라’고 다독인다. |
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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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중학교 시절 한창 유명한 구절을 외우고 그 구절을 내 상황에 빗대어 위안을 삼곤 했는데 이 구절로 인해 많은 위로를 받았고, 그리하여 자연스레 이 말을 했던 스피노자도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5년 동안 이게 당연히 스피노자가 처음 사용한 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구절은 스피노자가 처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마틴 루터가 먼저 사용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상당한 배신감이었다. 만일 그 때 저 구절을 접하고서 마틴 루터가 쓴 것임을 알았다면 스피노자가 아닌 마틴 루터에 대해 관심을 가졌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스피노자가 매력적이라는 건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나에게 양가감정을 일으키게 하는 스피노자를 아트앤스터디 강의에서 만났다.
1. 신에 관하여 <「에티카」로 읽는 스피노자>의 첫 강의는 ‘신에 관하여’였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는 사실 데카르트의 논리를 수용하면서도 그와 또 다른 논지를 펼치며 에티카를 전개해 나간다. 따라서 에티카를 스피노자가 의도한 바대로 최대한 왜곡시키지 않고 읽으려면 우선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해 알아야 한다.
중세의 모든 현상은 신의 섭리로 설명될 수 있었다. 그들은 모든 대상이 신의 섭리에 의해 자신이 가지로 있는 목정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나간다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과학과 기계론적 세계관이 대두되면서 목적론적 세계관은 더 이상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카르트는 프로테스탄트적인 신앙과 합리적인 사유를 통해 자신의 과학과 사상을 전개하고 발전시킨다. 이른바 ‘합리주의’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신이 이 세계로부터 초월해 있다는 가설로 그리고 정신세계와 분리된 물질세계를 주장함으로 자연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대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세 개의 세계 즉 신의 세계, 정신세계 그리고 물질세계의 관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함으로 존재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인식론적인 문제를 야기하였다.
이에 스피노자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데카르트의 한계를 극복하려 시도한다. 스피노자에게는 단 하나의 실체인 신만이 있고 이것이 곧 자연이었다. 그리하여 정신을 다시 자연으로 복귀시켜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물질적 자연을 정신과 물질을 포함하는 일원론적 자연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연 안에는 동일한 본성 또는 속성을 가진 두 개 이상의 실체는 존재할 수 없으며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이고, 각각의 속성들이 실체의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하는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실체라고 보았다. 그에게 신이란 ‘우주 자체’였던 것이다.
2. 인간 중심주의 비판 그가 펼치는 논지를 가만히 듣고 있자면 스피노자는 인간중심적인 세계관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느껴진다. 그는 인간의 기준으로 선과 악이 나누어지고, 자연정복설이 대두되며 인간에게 해로운 것은 배척받고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되는 인간중심주의로 인해 자연이 대상화되고 세계의 모든 것들이 왜곡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자연을 설명하려고 사용하는 모든 개념은 오직 표상의 양식일 뿐이다. 이는 사물의 본성을 표시하지는 않으며, 단지 표상의 상태를 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물의 완전성은 사물의 본성과 능력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야 하고, 따라서 사물은 인간의 감각을 즐겁게 해 주거나 괴롭힌다고 해서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알맞거나 반발적이라고 해서 더 완전하거나 덜 완전하지 않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주체성이나 절대적인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 이전에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신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모든 속성을 지니는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이다. 따라서 인간이 아닌 신이 사유의 주체가 된다.
인간들은 흔히 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을 혼동하여 신에게 인간의 정서를 부여하는 오류를 범하지만 실체는 진실을 통해서 파악되기에 실체의 진리는 지성을 제외하고는 오직 실체 자체 안에만 존재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들은 실체의 존재는 실체의 본질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진리임을 필연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유의 과정을 통해 동일한 본성을 소유하는 실체가 하나 밖에 없음을 또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인간중심주의는 비단 자연 뿐만 아니라 인간들의 삶을 왜곡시키는데도 일조한다. 각박한 현대사회에 우리는 그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억압되고 개발된 세계 안에서 표상적인 존재로 살아간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아가는가, 무엇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이미 정복대상으로 인식된 지 오래이며 오직 인간에게 유리한 세상으로 만들려 노력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세계의 중심으로 삼는 인간들은 그들의 관계는 돈독히 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너도나도 열심히 일하고 소비하고 또 다시 일을 하러 돌아간다. 진지한 내적 자아가 아닌 오직 이미지로서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타인이 원하는 이미지를 내비침으로써 매우 친밀한 척 포장하며 살아간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좇아가기에도 벅찬 현대사회에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내적성찰을 할 기회조차 없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을 대상화시키고 진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척 내적자살을 함으로써 불안감을 내려놓는다. 현대사회에 피상적 관계와 소비로 둘러 쌓인 인간들은 외부도, 내부도 없는 ‘자동인형’이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현대사회는 과연 인간에게 어떤 가치를 부여하는가.
3.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가 인간은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법과 제도에 의해 묶여있지만 이것을 어기는 것에 대한 선택도 인간의 자유이다. 법을 어겼을 때 자신에게 돌아오는 불이익을 계산하여 준수하는 것이지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할 수 없이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스피노자의『에티카』에 따르면 우리는 전혀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노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데 왜 자유롭지 않은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왜 그런 의욕이나 욕망을 가지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욕과 충동을 의식하지만 왜 자신들이 그 충동과 의욕에 사로잡히는지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에 관하여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우리의 선조들은 이에 대해 고민하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태어났으며 우리가 왜 지금 이것을 욕망하고 있는가, 욕망의 추동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해 알고서 행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후 너무나 긴 시간이 흘러 동기는 이미 우리의 내면 깊숙이 무의식화 되었으며, 우리는 그것을 의식으로 끌어올릴 힘이 없다. 따라서 욕망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충동에 따라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향해 열심히 달려왔고,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지만 그 모든 과정이 끝난 후 엄습하는 공허함을 느낀 적 있는가. 분명 내가 원하는 것이었고, 이것만 할 수 있으면 세상을 다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원하던 것을 얻고 나니 멍한 기분이 드는 경우가 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작정 달렸을 때 나타나는 우울증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조울증은 삶의 원인을 모르는 무능력자들의 병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깊이 사유하지 않는다. 그저 남들이 다 하니까 이게 정규 코스겠지, 하며 함께 무작정 달린다. 좋은 대학을 들어가면 좋은 직장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직장을 들어가면 미래에 행복해지겠지 하며 현재 자신의 행복을 미래에 투자하며 살아간다. 능동적 주체가 되지 못한 채 수동적 대상에 머무를 때, 우리 인생은 불확실한 기쁨과 슬픔에 던져진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자유롭지 못하고 수동적 존재에 머물러 있는 인간에게 삶을 ‘생산하라’고 다독인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내 삶을 좌지우지하는 원인들을 알아야 한다. 또한 삶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은 삶을 생산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불확실한 우연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삶을 조직해야 한다. 스스로 삶의 원인이 되고, 삶의 생산자가 됨으로써 인간은 자유를 누리고, 기쁨을 늘릴 수 있다.
우리는 세계에 피투된 대상이다. 자연법칙에 따라 수동적으로 행동하고, 알 수 없는 욕망을 따라가다 일순간 허무함에 빠져 조울증을 겪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모든 세계가 자신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고 그렇기에 인류를 제외한 다른 종들을 도구화, 대상화 시키지만 세계는 그 자체가 신이다. 인간은 인간이 아닌 신이 조직해 놓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자연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인간은 세계 안에서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조직하고, 자신의 삶의 이유를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성찰함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다. 같은 삶을 살더라도 이러한 형이상학적 성찰을 하는 사람과 무작정 알 수 없는 욕망에 따라 흘러가는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것이 된다. 이쯤에서 삶의 속도를 한 템포 낮추어 과연 나는 누구인지, 지금 하는 행동이 진정 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보면 어떨까. 오늘은 호란의 잔잔한 목소리만으로 위로가 되는 이바디의 ‘오후가 흐르는 숲’이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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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이군요. 어렴풋이나마 알아듣겠네요. 에티카 읽는 중인데 책은 이렇게 이해하기 쉽지 않더군요. 이방인 (13.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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