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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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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보는 김진영 선생님 강의 |
한*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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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이처럼 심도 깊게 다룬 수업은 드물 것 같습니다. 바트르가 애도 일기를 쓰기까지 어머니와의 관계, 그리고 관계에서 발견한 은유와 환유의 의미들. 이 강좌를 통해 일상의 모든 것이 새로워졌고, 특별해졌으며 단조롭던 제 삶이 다시 보이네요. 벤야민 보다 제겐 더 특별한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였습니다. 감사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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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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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한 애도는 계속된다 |
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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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롤랑, 나의 마망 어머니가 부르는 목소리는 나의 고양이털보다 보드랍고 달콤한 향을 가졌다 어머니의 생사와는 무관하게 환청을 들은 귀는 언제나 행복하고 애틋하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전하는 입술의 감촉, 나를 놓치지 않는 오래된 치맛자락, 머리카락 냄새...... 열거되는 낱말은 어머니를 불렀던 횟수 보다 엄청나게 많고 사랑하는 한 어머니와 나와의 시간은 확장되고 계속될 것을 안다 마치 약속된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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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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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제비같은 시니피앙의 세계 |
s**3706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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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는 제비같은 분이신데 내면이 제비같아요. 시니피에의 세계 위를 날렵하면서도 공허하게 떠도는 시니피앙 세계의 봉합선을 잘도 집어주시는구만요. 바닥으로 내려가 집을 지을 수 없는 시니피앙 세계에서 우리는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음을 분명하게 확연하게 깨우쳐 주시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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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강 완강했습니다 |
김*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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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봄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멍하니 몇 달을 보냈다. 친구가 이 강의 추천해줘서 듣기 시작했는데 바르트가 쓴 일기 하나하나가 내 마음 같았다. 김진영 선생님이 '애도는 한 번도 못했다'는 말씀하실 때 울컥했음. 강의 들으면서 처음으로 제대로 슬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18시간이 긴 줄 알았는데 어느새 다 들었네. 강의록도 계속 꺼내 읽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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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 입문용으로 좋음 |
박*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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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읽고 바르트한테 빠져서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수강했다. 애도 일기 원문은 파편적이라 읽기 어려웠는데 김진영 선생님이 프루스트, 벤야민, 아도르노 등 여러 텍스트 연결해서 설명해주시니까 이해가 잘 됐다. 특히 사진과 슬픔 관계 설명하는 3강 좋았음. 다만 철학 배경지식 없으면 좀 버거울 수도. 나는 대학원에서 미학 전공이라 괜찮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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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이상이었습니다 |
이*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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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잃은 바르트의 슬픔을 다룬 강의라고 해서 감성적인 내용일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철학적이고 이론적이었어요. 기호론, 구조주의, 정신분석학까지 다루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풀어내시는 게 대단했습니다. 에고의 글쓰기에서 헌정의 글?기로 넘어가야 한다는 말씀이 계속 생각나네요. 바르트뿐 아니라 제 삶도 돌아보게 되는 강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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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포기할뻔 |
최*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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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까지 들었는데 솔직히 어렵다. 니체, 아도르노 나올 때부터 집중력 떨어짐. 김진영 선생님 설명은 좋은데 내 철학 배경지식이 부족한 게 문제인 듯. 그래도 바르트 어머니 이야기는 감동적이었고 슬픔을 코드화하는 사회 비판하는 부분은 공감됐다. 나중에 철학 공부 좀 더 하고 다시 들어볼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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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 강의는 언제나 옳다 |
정*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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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강의 듣고 반해서 이것도 바로 신청했어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네요.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단순히 읽어주는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철학적 의미를 깊이 있게 파헤쳐주십니다. 목소리, 사진, 음악 같은 구체적 소재들로 슬픔을 설명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어요. 10강 모두 알차고 강의록도 훌륭합니다. 프루스트 강의도 들어볼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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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됨 |
한*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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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인데 요즘 부모님 건강이 안 좋으셔서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이 강의 들으면서 애도가 뭔지, 슬픔이 왜 필요한지 알게 됐다. 바르트가 어머니 죽음 앞에서 자기 죽음도 인정해야 했다는 부분에서 많이 울었음. 우리 사회가 슬픔의 자유를 박탈한다는 지적도 뼈아프게 와닿았다. 인문학 강의가 이렇게 위로가 될 줄 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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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 번역자의 강의라서 신뢰감 |
송*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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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이 『애도 일기』를 직접 번역하신 분이라는 거 알고 들었습니다. 역시 번역자답게 텍스트 해석이 정교하고 깊이가 있어요. 프랑스어 원문의 뉘앙스까지 설명해주시는 부분도 좋았고요. 다만 강의 속도가 빠른 편이라 필기하면서 따라가기 벅찰 때가 있었어요. 강의록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바르트 연구하시는 분들한테 필수 강의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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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2회독 중 |
윤*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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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한 번 들었는데 올해 다시 듣고 있다. 첫 번째 들을 땐 슬픔과 애도에만 집중했다면 이번엔 글쓰기와 소설에 대한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바르트가 왜 소설 쓰기에 실패했는지, 일기 형식이 왜 중요한지 이제야 이해되는 느낌. 좋은 강의는 여러 번 들을수록 새로운 게 보이는 것 같다. 김진영 선생님 다른 강의들도 찾아 들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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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에게 필요한 강의 |
강*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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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회가 너무 빠르게 돌아가잖아요. 슬퍼할 시간도 주지 않고 빨리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요. 이 강의 들으면서 슬픔도 소중한 감정이고 애도 작업이 왜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바르트가 어머니 무덤 앞에서 집요하게 머물렀다는 표현이 계속 생각나요. 우리도 좀 더 천천히, 깊이 슬퍼할 권리가 있는 거 아닌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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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문학의 경계에서 |
조*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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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불문학 전공했는데 이런 강의는 학교에서도 못 들어봤다. 바르트를 철학적으로 읽으면서도 문학적 감수성을 놓치지 않으시는 게 인상적임. 프루스트, 카프카, 보들레르 등 문학 작품들과 연결해서 설명하는 부분이 특히 좋았다. 다만 10강 중 후반부(8~10강)가 앞부분보다 좀 산만한 느낌? 그래도 전체적으로 수준 높은 강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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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지만 보람있음 |
배*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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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강의 처음 듣는데 쉽지 않네요. 프로이트, 벤야민, 니체 이런 철학자들 이름만 들어봤지 제대로 아는 게 없어서 강의 따라가기 힘들었어요. 그래도 중간에 포기 안 하고 끝까지 들었습니다. 바르트가 어머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슬픔이 어떤 의미인지는 이해했어요. 다음엔 좀 더 쉬운 강의부터 들어야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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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슬픔 |
임*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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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작업하는 사람인데 3강 '슬픔과 사진' 파트가 정말 좋았습니다. 카메라 루시다 읽었을 때도 감동받았는데 김진영 선생님 해석 들으니까 더 깊이 이해됐어요. 사진이 침묵하면서도 의미로 포화된 상태라는 설명, 사진의 푼크툼이 어떻게 슬픔과 연결되는지. 제 작업에도 영감을 많이 받았습니다. 예술하는 사람들한테 추천하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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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록이 아쉬움 |
신*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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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내용은 정말 좋은데 강의록이 좀 부실한 것 같아요. 핵심만 간단히 정리되어 있어서 복습할 때 아쉬웠습니다. 선생님이 강의 중에 하시는 말씀들이 다 중요한데 그게 강의록에 다 담기지 않은 느낌? 그래도 전체적인 만족도는 높습니다.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이렇게 깊이 있게 다룬 강의는 없을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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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강의 |
허*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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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후반인데 이제까지 이별은 많이 겪었지만 제대로 애도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냥 잊으려고만 했고 빨리 털어내려고만 했던 것 같음. 바르트가 어머니 위해 글 쓰는 과정 보면서 진정한 사랑이 뭔지,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배웠다. 에고의 글쓰기에서 헌정의 글쓰기로 넘어가는 부분에서 큰 울림 받았다. 남은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준 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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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선생님의 집요한 바르트 읽기 |
l**muss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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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잃은, 그 슬픔의 끝까지 내려간 바르트의 집요함과 파편적으로 놓인 일기들에서 바르트의 어머니에 대한 애도의 의미를 읽어내는 김진영 서생님의 집요함이 교직되어 있는 강의입니다. 살아오면서 이별은 많이 치렀지만 애도는 한번도 못했다는, 남은 삶은 (바르트가 그러했듯) 글쓰기로 애도 작업을 하는 시기라는 김진영 선생님의 말씀이 '고결함'으로 남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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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철학-바르트 '애도 일기' 김진영 선생님 1강 |
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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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리뷰 잘 보고 갑니다. 김진영 선생님 강의는 언제 들어도 좋아요. 느슨해진 뇌에 탄력을 주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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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철학. |
김*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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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철학, 내가 사랑하는 것이 사라졌을 때의 태도 등.
행복과 긍정만을 덕목으로 강조하는 사회에 살면서, 멜랑콜리함과 슬픔과 우울함이 그저 물리쳐야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김진영선생님께 많이 배웠습니다. '슬픔'을 말하지만 결코 '행복함, 생의 에너지'를 간과하지도 않는,
그래서 슬픔의 철학을 말한 바르트의 사상을 가르치시면서 바르트의 이런 생각이 가진 위험성도 언급해주신 점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개인적인 경험을 말해주신 것도 마음에 많이 남았구요.
책의 여백이 참 많아서 처음 책을 받았을 때는 이게 뭔가, 싶었는데 그 여백이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라는 걸,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깨달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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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현 님:)
리뷰를 읽으면서 저 울컥했어요. 맞아요. 슬픔과 우울, 멜랑콜리는 그저 물리쳐야 할 것이 아닌데요. 그 감정들이 지닌 에너지를 그저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아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관리자 (14.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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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철학 |
이*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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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워낙 좋아하는 작품이라 기대하면서 강의를 들었는데 참 좋았어요. 슬픔을 통제하는 사회에 대한 말씀 인상깊습니다. 롤랑 바르트에 대한 다른 강좌들도 있던데 그것도 들으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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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슬픔의 철학 10강 리뷰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는가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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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는가
모방범
나이로 보면 소년으로 분류되는 그 ‘소년’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자들은 지면을 통해 그 소년이 키우던 고양이며 몇 번씩이고 본 영화가 무엇인지 알렸다. 아주 단순하고 그가 왜 좋아하는 건지 나오지 않았지만 신문에서는 그 영화가 잔혹한 살인을 다루고 있다는 것과, 유해한 문화와 청소년들이 얼마나 쉽게 만날 수 있는지 짧게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은 청소년들을 위해서라도 폭력적이고 끔찍한 영화들은 이제 금지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에서든, 문학에서든 마찬가지다. 범죄를 그리는 소설은 그 자체가 범죄가 되었고 모든 모방의 수를 제시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문화에 대해 더더욱 경계하고, 동시에 동경한다. 그 문화에 ‘지나치게’ 빠져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을 특이하고 재미있게 생각하며 동시에 자신과 선을 긋는다. 두려워하는 것이다. ‘전염’을. 바르트는 독서는 텍스트와 독자가 만나는 순간이며, 그 순간 텍스트도 독자도 생각하지 못한 결말이 나온다고 말한다. 이 때 중요한 건 독자가 텍스트에 얼마나 집중하는가가 아니다. 텍스트에게도 에고ego가 있다. 어떤 걸 ‘감상’한다는 건 얼핏 보면 우아하고 한없이 지적인 행위이며, ‘깜박’ 졸아서는 안될 것 같지만 사실 피로한 일이다. 그건 전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끝없이 ‘감상전’을 벌인다. 어떤 쪽이 이길까? 누가 이긴다 하더라도, 설령 그게 독자의 승리라 해도 그게 과연 진정한 독서인가? 결국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쉽게 텍스트 쪽으로 끌려 들어가면, 우리는 순식간에 매몰되고 만다. 텍스트는 아름답지만 그래서 위험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미로처럼 복잡하다.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방심한 순간 역습을 당하고, 스친 것 같은 상처가 점점 깊어져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가 된다. 어린 시절에 ‘나이 든 책’과 ‘나이 어린 책’을 구분했던 건,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너무 이르게 ‘두려움’을 깨닫는 것도 나쁠지 모르지만 너무 쉽게 ‘호기심’을 내보이는 것도 좋지 않다. 하지만 정확한 건, 책을 읽으면서 성장한다는 건 제대로 줄을 잡는 법과 몸을 뒤로 당기는 법, 오래 버티는 법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 ‘소년’은 왜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을까. 전염이 아니다. 오히려 전염되기를 원했다. 유동하는 근대에서는 어떤 것도 견고하지 않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는 유령이다. 모든 껍데기는 하루면 벗겨진다. 그럴 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에고를 모방해 자신의 것처럼 만든다. 그게 가장 쉽다. 텍스트와 문화는 아무 죄가 없다. 그 공허에 끌려간 사람에게도 죄는 없다. 끌려갈 정도로 반투명한 그들은 바로 우리가 낳은 것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직접 꽃을 사겠다고 말했다
일상은 얼마나 놀라운가. 여행을 떠나는 순간 구질구질했던 일상은 추억처럼 곱게 채색된다. 떠날 때만 해도 지긋지긋했던 것들은 떠나고 온 뒤에 어느 정도 위치가 바뀌어 있고 그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다. 타인의 기나긴 여행 앞에서도 이를 깨닫는다. 기나긴 여행, 죽음 앞에서. 일상의 가치들은 말없이 포진해 있다가 햇빛이 약간 각도를 바꾼 순간, 아주 짧은 순간에 눈부시게 빛난다. 하지만 그 순간을 ‘붙잡지’ 못하다가,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는 건 너무 늦다. 바르트 또한 마찬가지로, 나중에서야 그 가치를 깨닫는다. 하지만 그 앞에서 그는 ‘시간을 돌리기’를 원치 않는다. ‘겨울 정원의 사진’ 앞에서 그가 원하는 건 어린 시절의 어머니가 아니라 어머니의 ‘윤회적 환생’이다. ‘자연스러운’ 일상이란 없다. 전혀 이질적인 조각들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맞물리고 꿰매져서 하나의 조각보가 되고 손수건이 된다. 누구든 자신의 조각보를 들여다 보는 순간이 온다. 하지만 너무 늦은 순간에야 자신의 조각보를 들여다 보게 된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자신의 삶에 대해 한 치의 후회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했던 그녀의 완벽한 생은 아주 조그만 균열의 발견으로 인해 감춰 두었던 조각보를 목격하게 된다.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댈러웨이 부인의 ‘자살’을 생각했으나, 후에 그 자살을 다른 이에게 돌린다. 자신의 조각보를 들여다 보고, 그 조각보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사람에게. 바르트는 그 일상의 조각보를 받아들인다. 그가 윤회적 환생을 도모했다고 해서 자신의 삶을 포기한 건 아니다. 그는 인정한 것 뿐이다. 자신을 지탱해 왔던 건 사실 자신의 견고한 에고가 아니라, 누군가가 ‘받쳐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낮과 낮 사이, 밤과 밤 사이
두 가지의 용기가 있다. 하나는 비밀을 간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거부하는 것이다. 단순히 남에게 해가 될 비밀을 간직하는 것이나 자신에게 불리한 걸 거부하는 게 아니다. 외부의 도덕이나 계산이 아닌 그 자신의 자발적 도덕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것이 그 용기들의 근원이다. 아주 아끼는 고양이나 인형이 있다고 하자.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보인 순간, 사람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일 것이나 대부분은 핀잔이나 왜 이 사람이 이걸 좋아하는지 호기심을 보일 것이다. 결국 그 인형을 버리게 된다. 가치는 내보이는 순간 더럽혀진다. 허나 이러한 과정이 두렵기 때문에 비밀로 두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의 사회 앞에서 상업화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뉜다. 비밀은 이 앞에서 할 수 있는 ‘완곡하지만 단호한 제스쳐’다. 그들의 게임에 끼지 않는 것,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게 아니라, 그들의 도발에 응하지 않고 가치를 간직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가치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한다면 그건 용기가 아닌 폭력으로 변모할 수 있다. 수많은 이상들이 그렇게 스러져 갔다. 후반부는 모두 음모론과 서로를 지목하며 ‘마녀사냥’을 벌였다. 이제 충분하지 않을까. 전구에 새까맣게 타서 들러붙어 있는 나방 시체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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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슬픔의 철학 9강 리뷰 : 기적의 시대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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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시대
길거리 문학
바르트는 프루스트의 문학은 ‘고통’ 없이는 읽어낼 수 없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감탄 반, 비아냥 반으로 언급하곤 한다. 책 권수도 만만치 않거니와 문장 또한 길게 늘어진다. 한 페이지, 두 페이지를 쉽게 넘겨 버리곤 한다. 어떻게 보면 그 문학을 접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지, 라고 하며 문학을 이지리딩easy reading-쉽게 읽을 수 있는 것만이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너무 난해하거나 어려운 작가의 글이 있다면 독자와 만날 생각이 없고 골방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고, 신흥종교 교주와 다름없다고 비난한다. 그렇다면 바르트의 글들은 어떤가? 주로 단상들로 이루어져 있는 바르트의 글들을 처음에 접할 때에는 난처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일단 배경 지식도 있어야 하고 묘한 반어법도 몇 번씩 읽어봐야 한다. 바르트는 작가의 권위적인 태도가 문학인 것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 태어나는 게 문학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바르트는 모순적인 말을 하는 것일까? ‘제대로 아는 것일수록 쉽게 풀어 쓸 수 있다’라는 말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을 잘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자유자재로, 부담감 없이 쓸 수 있으며 이를 자신의 색채로 제대로 변주해 내놓을 수 있다는 뜻이다. 현대 사회의 문맹 비율이 무슨 ‘개선 지표’처럼 언급되는 것처럼, 문학 텍스트를 글자 그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허나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문학을 너무 쉽게 ‘시각적’인 예술로만, 1차적으로만 오인하게 된다. 물론 ‘글’은 누구나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은 ‘골방’에서 쓰여진다. 혼자서 처박혀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의 내밀함을 발견하는 일인 것이다. 골방에서 우리는 침묵하게 된다. 타인과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아주 깊이 파내려가다 보면 우리는 ‘침묵의 순간’과 마주하게 된다. 허나 현대에서는 이러한 ‘순간’이 소멸되고, 대부분은 소음에 휩싸인 채 이 소음을 무시하라는 고압적인 명령을 듣게 된다. 산만한 사회인 것이다. 바르트가 ‘사진’을 주목한 건, 그가 여태껏 보지 못한 것을, ‘겨울 정원’ 사진에서 어머니의 ‘침묵의 한 가운데’를 목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침묵의 순간을 써내려간 문학은 그렇다면 골방에서 완성되는 것일까? 카프카의 문학-그건 자신의 나르시즘을 충족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카프카는 아주 예리하게 타인의 ‘침묵’까지 꿰뚫는다. 단순히 프루스트와 같은 ‘고통’이 있어야만 읽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건 자신의 ‘침묵’을 깨달았을 때, 꿰뚫린 상처를 매만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텍스트의 잠재성과, 그 기분 나쁜 위력을.
나비와 눈이 마주친 순간
스완은 스놉을 경멸하지만 오데트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순간 그 자신이 엄청난 스놉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두가 스놉이다. 하지만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이유로 그 깨달음을 무마시키고 정당화하려고 한다. 모든 것이 부족할 게 없다. 주변은 아름답고 빛나는 최고의 예술들로 도배되어 있고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그 가운데서 저급과 고급을 구분하는 것뿐이다. 모든 물건들이 다 튼튼하고 아름다울 때, 우리는 브랜드 서열을 매긴다. 원래 ‘없어서’ 못 썼던 옛날과 다르게, 이제는 그 브랜드가 아니면 제대로 취급해 주지도 않는 걸 보면 풍요로움이 지나쳐 권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제는 의미의 허영까지 일어나고 있다. 어떤 의미를 담지 않은 물건이 아니면 ‘생각이 없다’고 핀잔을 듣게 된다. 어떻게 본다면 우리는 계속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쓸 뿐 그 자신의 욕망은 모른다. 욕망을 모른다는 걸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스완처럼, 뱅퇴유의 소나타를 듣고서 그 아름다움은 어렴풋이 깨닫지만 ‘붙잡지’ 못한다. 갖고 싶은 물건의 리스트는 늘어나고 가고 싶은 나라의 목록은 늘어나지만 만약 그 중에 단 하나만 택하라고 한다면 뭐라고 할까. 왠지 후회할 것만 같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사실 그 리스트는 거짓에 불과한 것이다. 그 후회 앞에서 사람들은 어차피 올 것이었다고 말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깨를 으쓱거린다. 벤야민은 메시아는 늘 오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늘 메시아가 오는 줄 모른다. 계속 기다린다. 메시아는 결국 ‘우리’가 사라진 뒤에야 온다. 너무 많은 허영 앞에서, 우리는 어떤 걸 집어야 할지 모른다.
애통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예수는 슬픔의 힘을 증명했는가. 제자들은 죽은 라자로가 되살아나자 예수의 ‘권위’를 찬양한다. 하지만 예수는 ‘더 깊은 슬픔에 빠진다’. 바르트는 죽은 어머니를 ‘되살아나게’ 하기 위해 그녀에게 ‘헌신’한다. 지독한 에고이스트였던 바르트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자신마저도 포기하고 누군가에게 아낌없이 던진다는 것. 바르트는 예수의 일화를 인용하며 헌신의 ‘빈틈’을 지적하고 앞으로도 헌신할 것임을 다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는 왜 라자로의 죽음에서 ‘더 슬퍼했을까’. 그 자신의 슬픔의 힘으로 헌신을 한 결과 얻게 된 ‘찬란한’ 결과일진대. 제자들은 예수에게 ‘기적’을 요구한다. 그가 신의 아들임을 공공연히 증명해야만 그들의 행로가 무의미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예수의 부활 앞에서 그의 상처에 손가락을 찔러넣었던 도마가 더 순수하다고 볼 수 있다. 도마는 예수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이는 예수를 믿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기 위해서다. 그는 그 자신이 의심하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고,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 예수는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한다. 제자들도 역시 슬퍼한다. 허나 그들은 라자로가 되살아나자 ‘예수의 기적’이라고 말하며 예수를 찬미한다. 삶과 죽음은 이어져 있고, 예수는 라자로의 죽음을 ‘눈을 감았다’라고 간결하게 말한다. 하지만 제자들은 ‘만족하지 않는다’. 그리고 라자로가 되살아 난 순간 그들은 외친다. ‘예수를 믿는다’고. 예수의 슬픔의 힘은 물질적으로 라자로를 살아나게 하는 것에 있지 않다. 바르트 또한 마찬가지다. 그가 프랑켄슈타인 박사도 아니고 억지로 시체를 되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르트에게 말한다. 그렇게 ‘애통해’해봤자, 죽은 사람이 되돌아오기나 해? 뒤집어 본다면, 죽은 사람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애통해하는 건 아무런 쓸모도 없다는 소리다. 바르트는 어머니의 ‘돌아오기’가, ‘생성으로서 되살아나기’가 물질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그건 예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사람들은 라자로가 그들 눈앞에서 일어나길 원했다. 허나 그런 ‘물리적 기적’의 결말은 과연 해피엔딩일까?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대’에서 라자로는 계속 되살아나고, 니고데모에 의해 계속 죽는다. 그는 한탄하며 말한다.
‘오, 주님이시여, 나의 하느님이시여. 어찌하여 당신은 내 어머니의 태를 닫지 아니하셨습니까?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듯이 궂은 일을 당하게 하십니까? 내가 어찌하여 모태에서 죽지 아니하였으며 나오면서 숨지지 아니하였습니까? 차라리 죽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295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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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슬픔의 철학 8강 리뷰 : 앵콜요청금지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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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콜요청금지
피노키오처럼 인간이 되면 집에 갈 수 있나요?
어쩌면 우리는 안드로이드가 아닐까? 지시된 기능을 이해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 시간과 속도의 강박에 쫓겨 하루를 보내고 퇴근길에 오른다. 아예 주변이 새카맣게 변해버리면 좋으련만, 여름이 되면서부터 해가 길어졌다. 하지만 한낮처럼 공격적으로 내리쬐는 햇빛이 아니다. 빛은 한풀 꺾여 사물들의 모서리를 깎아내는 대신 부드럽게 두들긴다. 마치 사포질을 하듯 뾰족하게 솟은 건물들도 냉정하기 짝이 없는 유리창도 뭉툭해진다. 그 풍경은 아름답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쳐다본다. 아름다운 만큼, 왠지 모를 슬픔을 안겨준다. 슬로우 모션으로, 망가진 영화 필름처럼 죽죽 늘어지는 것만 같다. 얼른 역에서 내려서 집까지 빨리 걸어가고 싶다. 이럴 때면 오만가지 잡상들이 다 떠오른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집에 가면 다 괜찮아질까? 살아 있는 게 맞기나 한 걸까? 그저 얼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일어나고, 자리에 앉아서 기절하듯 잠들고 싶다고만 여기게 된다. 그 물음들은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음들은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눈물 또한 해결될 수 없다. 아이가 울 때 엄마는 마치 죄를 지은 듯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 ‘주변’에 먼저 사과를 한다. 그리고선 아이에게 ‘뭘 잘했다고 우느냐’며 호통을 친다. 어른들은 그 때 울음을 그치거나 그치지 않는다. 그러한 제스쳐에는 보이지 않는 목적이 있다. 상대방의 페이스에 말려들거나 상대방을 내 페이스로 끌고 오려는 셈이다. 허나 아이들은 다르다. 아이들은 자신의 페이스가 얼마나 넓은지 확인하지 않고, 내심 그런 꾀를 낸다쳐도 어머니가 화를 내며 돌아서면 엉엉 울면서 매달린다. 사람들은 우는 아이를 보면 인상을 찌푸린다. 단순히 우는 게 시끄러워서만은 아니다. 저 울음이 쉽게 그치지 않을 것이고, 그 울음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는, 피곤하게 하는 큰 울음소리이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여기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뭐에 홀린 듯이 그 아이를 쳐다본다. 힐끔힐끔거리거나 혹은 넋을 놓고 쳐다본다. 그렇게 시각과 청각을 빼앗긴다는 건, 사실 부러운 것이다. 사회는 우리에게 더 이상 거리에서 울고 다닐 자유를 주지 않는다. 이제 거리에서 울고 다닐 수 있는 건 그나마 ‘아이’ 뿐이다. 아이가 울음을 그치는 건 우는 데에 ‘지치는’ 순간이다. 어느 누구 때문에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물려주는 사탕도 사실 임시방편이다. 아이는 또 울 것이다. 지금은 ‘잠깐’ 멈춘 것일 뿐이다. 인간이 인간과 닮게 만든 ‘로봇’에 대한 영화들을 보면 지극히 ‘인간적인’ 로봇들이 나온다. 그 ‘로봇’들은 대부분 두 갈래로 나뉜다. 잔인하거나 윤리적이거나, 단순한 프로세스 때문만이 아니다. 그들이 ‘인간적인’ 이유는 그 두 가지 때문도 아니며 어느 한쪽이 더 인간적이라고 할 수도 없다. 다만 ‘로봇’들이 인간적인 건, 바로 그들이 ‘이유없이’ 그렇기 때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A.I’에서 소년 로봇은 어머니를 꿈꾼다. 어떠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들, 그 로봇이 어머니라는 허상을 지워버려야 할 이유들이 산재해 있지만 소년 로봇은 이를 거부하고 ‘이유없이’ 어머니를 꿈꾼다. 어떻게 본다면 인간은 자신의 인간다움을 잊지 않기 위해 로봇을 창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인간다움이 되살아나고, 환기되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허나 우리는 영화에서 그저 ‘로봇들’에게 방심해서는 안된다는 것만을 되풀이해서 바라볼 뿐이다. 로봇들이 인간을 학살한 뒤에 펼쳐지는 그 잔인한 풍경은, 사실 우리가 몇십년전에 본 2차 세계 대전과 수용소 풍경과 흡사하지 않은가.
신세계
바르트는 ‘나르시즘’에 빠진 여성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벤야민은 근대 사회에 대해 ‘투명한 방’이라고 말했다. 버그만이 아니면서 버그만인 척 하는 것, 자신만큼은 ‘예외’라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외부에 무관심하게 놔두는 것. 바르트는 엘리아스와는 다르게 슬픔이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성이 단순히 ‘골방’만을 뜻하지 않는다. 외부는 분명히 날카롭고 둔탁하다. 하지만 내부에 갇혀 있는 것이 과연 살아 있는 것일까. 현대 사회의 여성들은 ‘자신을 위안’하기 위해 스스로를 꾸민다. 남성들의 시선은 상관할 것 없이, 자신만 예쁘면 된다고 여긴다. 이는 상대적인 구조-남녀의 파워 게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묘한 위화감을 준다. 과연 그게 자신만의 것일까. 스놉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걸 자신의 것으로 예쁘게 포장해서 품고 다닌다. 그리고 그것이 무색해졌을 때 가차없이 버린다. 프루스트의 할머니는 스놉이 아니다. 할머니는 ‘옛것’의 상냥함을 알고 있었다. 스놉들은 말한다. 자신은 이걸 믿고 있고, 그것의 근거들은 무수하다고. 폭력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기존의 싸움과 달리 치고받는 대신 말과 종이들이 오간다. 카카오톡만으로도 왕따를 시킬 수 있고 몇 마디 말만으로도 상대방을 순식간에 몰락으로 치닫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방패막이 되는 건 바로 ‘법’이다. 법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법이 변한다면, 법은 스스로의 권력을 파괴하게 된다. 법은 새로워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고정된 진실’을 끊임없이 다져가며 버텨왔기 때문이다. 예전에 토론 대회에 나갔을 때 깨달은 건 토론은 토론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떤 하나의 결론을 ‘같이’ 도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신의 주장이 맞다고 싸우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버튼이 눌렸고 누군가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총소리보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더 거슬렸고 말꼬리를 죽죽 잡아 늘이는 건 수류탄보다 더 큰 효과를 불러왔다. 모든 근거는 ‘법’이었다. 이기는 방법은 그 ‘법’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과연 그 법이 인간이 만든 것인지, 아니면 인간을 재단하기 위해 법이 스스로 태어난 것인지. 그러나 이는 상대방 뿐만 아니라 자신조차도 와해시켜 버리고 만다. 어떻게 본다면 현재 한국의 토론에서 이긴다는 건 자신의 허구를 그럴듯하게 정당화해서 잘 쌓아올리는 것이며, 동시에 상대방의 것과 내 것을 함께 폭파시켜 버리는 것이다.
앵콜요청금지
순진무구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운명적인 사랑을 꿈꾼다. 자신을 다 받아주고, 혹은 자신이 온전하게 투신할 수 있을 사랑. 그러나 그런 사랑이 깨지고 났을 때 가장 힘든 건 그 사람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이다. 상대방을 끔찍하게 원망하거나 미워하고 증오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투신하는 대신 자신의 참호벽을 쌓고 온갖 말들을 상대방의 참호에 집어 던진다. 설령 누가 이긴다 하더라도, 당분간의 휴전일 뿐이다. 싸운다는 건 사랑하는 증거라고 말하는 건 이제 식상하다. 머리채를 잡아채거나 상대방의 뺨을 핸드백으로 갈기는 게 과연 사랑하는 것일까. 서로에게 상처를 내다 못해 지겨워져서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상대방이 내게 먼저 상처를 내기 전에 선제 공격을 가하는 건 아닐까? 흔들다리 효과라는 게 있다. 흔들다리에서는 어떤 것도 받쳐주는 것이 없고, 고정되는 것이 없다. 계속 흔들린다. 믿을 것이라고는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사람, 그 쪽으로 걸어가도 된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사람이다.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다 보면 자신의 심장도 함께 뛰고, 사랑하는 마음과 혼동해 버리고 만다는 효과다. 사랑은 마치 흔들다리처럼, 일종의 ‘착각’인 것이다.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하기를 원할 뿐 정작 사랑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고 냉소적으로 말한 바 있다. 막상 사랑이 성공했을 때, 그 사람의 ‘그늘’까지 다 가졌다고 여겼을 때-베르테르는 로테에게 얼마나 실망했던가. 하지만 로테는 달아났고, 베르테르는 또다시 쫓아갔다. 그러면 어느 한쪽만 달라붙으면 사랑이 되는 것일까? 결국 사랑은 권력 싸움이고, 타인의 희생을 기반으로 하는 것일까. 사랑은 흔들다리다. 사랑이 끊어지는 건 흔들다리 위에 떨어진 돌멩이 때문도 아니고 사람 때문도 아니다. 그들이 지나가거나 떨어졌을 때 끊어진다면 이미 끊어질 다리였기에 끊어지는 것이다. 다리가 끊어지는 건, 어떤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서로 붙잡고 있다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놔버렸기 때문일까. 그래서 그 사람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침까지 뱉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실패한 상대를 그렇게 미워하고 원망할 때, 괜찮아질 수 있을까. 원래대로, 사랑하기 전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상대방이 내 손을 놓은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손을 놓았던 건 아닐까. 순서에 상관없이, 둘 다 손을 놔버렸기 때문에. 흔한 히어로 무비의 주인공처럼 히로인과 다시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영웅처럼 우리는 무모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그 사람을 볼 때마다, 떠올릴 때마다 아픈 건 아닐까. ‘나도 널 포기했기에’. 그리고, ‘용기가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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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슬픔의 철학 7강 리뷰 : 은밀하게 초라하게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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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게 초라하게
무피아 전성시대 두 시간 동안 꼼짝 말고 앉아 있어야 한다. 오로지 한 곳만 쳐다봐야 한다. 바로 옆 사람조차도 가끔은 그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화장실이 가고 싶단 핑계로 일어서면 주변이 술렁거린다.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마치 늪 속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겨우 탈출했다고 안심하는 것도 잠시, 또다시 들어가야 한다. 어둠을 뚫고, 내 자리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자리인지 모를 곳을 찾아서. 영화를 단순한 여가라고 치부할 순 없다. 바르트는 사진과 영화의 차이에 대해서, 사진의 경우 감상자 위주의 ‘정지버튼’이 있다면 영화는 감상자가 아닌 감상 대상이 주인이 된다. 정지 버튼도 없이 계속 일방적으로 서사를 받아들여야 한다. 한 때 영화는 놀라움의 대상이었으나 레니 리펜슈탈의 필름처럼 새롭게, ‘서사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장르가 되었다. 무방비한 사람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새로운 ‘폭력의 가능성’이 된 것이다. 단순히 제국주의와 이데올로기의 합당화를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 폭력에 대해 사람들은 감성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이제 그 감성마저도, 자본주의에 의해 상품이 된다. ‘늑대 소년’이나 ‘은밀하게 위대하게’ 등의 영화들은 보는 사람의 ‘욕구’를 채워주는 상품이었다. 그렇기에 그 영화에서는 어떤 컷과 컷 사이의 연결, 서사의 타당성의 논의는 설득력이 없게 된다. 사람들은 그저 ‘재미있었다’만으로 영화를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새로 나온 보풀 제거기를 쓰고 나서 설문지를 작성하는 주부처럼 말이다. 보풀만 제거할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영화의 가능성은 상품 만능주의에 가로막혀 버렸는가? 바르트가 생각한 대로 영화는 지극히 ‘일방적인 에고이즘’의 산물일까. 허나 또다른 영화들이 있다. 상품들이 득세하는 영화판에서, 바르트가 말한-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깊고 내밀한 어둠-공간을 그려내려는 노력이. 멋진 배우들도 아름다운 배경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 텅 빈 공간 앞에 사람이 마주쳤을 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다. 영화 감독조차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그는 그 순간 카메라를 멈춘다. 혹은 수다를 떤다(장면으로). 하네케의 ‘아무르’가 바로 그런 영화 중 한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피아들이 거대한 대포와 강에 풀 독약을 준비해 누군가를 제거하려 한다면, ‘텅 빔’을 그리는 영화는 예리하고 조용하다. 그들은 잠금장치를 푼 뒤, 천천히 겨냥하고-방아쇠를 당긴다. 그 총알은 우리의 한 가운데에 명중할 것이다. 마치 아킬레스의 발뒤꿈치처럼,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아주 약하고 부드럽고, 여린 부분에.
배트맨이 배트맨이 될 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공포고 두려움이다. 허나 막상 우리가 추락해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서글프고 수치스러운 감정도 있지만 묘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바르트가 어머니의 죽음 후 발견한 건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라 차가운 사체와 무성하게 풀이 뒤덮인 무덤이었다. 그 앞에서 그는 어머니의 죽음을 그 자신을 위한 것으로 애써 부정하려 했지만,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이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그건 바르트의 지독한 에고이즘이고 동시에 어머니라는 존재를 자신의 부속물로 만들어 버리는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한 순간, 바르트는 자신 또한 어머니처럼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건 곧 격렬한 슬픔이었다. 어떤 발악도 할 수 없고 그저 나아지지 않는 고통을 싸안고 뒹굴어야 할. 하지만 바르트는 그 가운데서도 ‘쓴다’. 진정으로 ‘쓴다’. 그건 죽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가 죽음이라고 여긴 바닥에서 마주한 건 새롭게 살아나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어머니 또한 그러한 욕망이 있었을 것이다. 바르트는 그런 ‘어머니’를 다시끔 생성시키기 위해서 애쓴다. ‘욕망의 낄낄거림’은 악마의 웃음이 아니다.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동시에 어머니 또한 다시 살려내고자 하는 순수한 바르트의 욕망 그 자체였던 것이다. 어떤 에고이즘에도 오염되지 않고 그 가운데에 자신을 던지고자 하는. 그 순간 바르트는 진정으로 ‘글을 쓰게 된다’. 나오지 않을 결과물을 향해. ‘배트맨 라이즈’에서 배트맨은 악당의 흉계에 의해 절대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감옥 구덩이 속으로 떨어진다. 이전에도 그는 ‘굴’에 떨어진 적 있었다. 어둡고, 빛을 향해 손을 뻗어보지만 닿을 수 없는. 배트맨은 누군가를 위해 배트맨이 된 게 아니었다. 부모님을 위한 복수로 만들어진 복수의 화신이었다. 악당과 별다를 것이 없었기에 그는 악당에게 지고 만다. 악당은 그 자신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지만 배트맨은 모르기 때문이다. 허나 배트맨이 ‘다시 날아오르는 rise' 순간은 찾아온다. 그는 지극히 초라해졌지만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해, ’고담시‘를 위해 자신을 던진다. 그 때 배트맨은 ’배트맨‘이 된다. 그는 초반부에서는 배트맨의 표식을 정하고 가짜 배트맨을 가려내지만, 후반부에서는 ’고담시‘를 지키는 그 누구든 ’배트맨‘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 순간 배트맨은 영웅이 된다.
끝없는 이야기
‘성경’ 뿐 아니라, 모든 종교의 성서는 하나의 이야기이다. 한 명, 혹은 여러 명의 이야기. 이야기로 읽다 보면 그만큼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게 없다. 허나 그 ‘성서’를 ‘진실’로 믿는다는 것, 그건 위험할 수 있다. ‘진실’이 나쁜 것은 아니다. 허나 ‘진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진실이 수많은 파편들로 갈라져 매 순간마다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부인한다. 그 기준에서 벗어나는 이들을 이단으로 지적하고 규탄한다. 바르트는 ‘루시다’ 이전에는 담론이 ‘진실’ 그 자체라고 했다. 허나 ‘루시다’ 이후 그는 담론이 수다라고 말한다. 끊임없이 말하는 것, 매번 달라지는 것. 어떤 경험에 대해 여러 사람에게 각각 돌아가다 말하다 보면 ‘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진실이라는 것들을 뺀다면, 우리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혹은 우리가 믿는 진실들을 채워넣는다면, 과연 우리들 각 자신이 ‘꽉 찰 수 있을까?’ 소설의 문장과 문장 사이는 끊어진다. 그 문장 사이를 억지로 잇는 것-계속된 동의어 반복으로-은 문장 자체의 힘을 억누르는 것이다. 단절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허나 어느 한 문장을 다른 문장을 밟고 올라서도록 하지 않고 서로 맞붙어 충돌시킨다면, 아주 짧은 순간에-문장은 이어진다! 언젠가는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문장’들이지만, 문장들이 표현해 내는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문장을 읽는 게 아니라, ‘소설’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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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슬픔의 철학 6강 리뷰 : 세잔의 어머니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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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의 어머니
잃어버린 것과 찾은 것 어머니의 상실 후 바르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외친다. 그러나 어쩌면, 이전부터 바르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슈만의 어린아이처럼 그는 고집스럽게 자신과 어머니는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 연결이 죽음이라는 불청객에 의해 끊어졌다고 주장한다. 허나 죽음이라는 불청객은 손님이다. 손님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 죽음으로 인해 우리가 감추고 있던 균열이 드러나게 된다. 지독한 에고이스트였던 바르트에게는 그 자신이 믿고 있던 견고한 바닥이 순식간에 투명하게 녹아내리는 것이었다. 위니코트는 정신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 이미 일어난 것이며, 일어나도 당신은 여전히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바르트의 두려움은 치료했지만 동시에 그에게 장막 너머의 세상을 보여주었다. 훈육은 혼내는 것이면서 또한 감싸는 것이기도 하다. 어느 누구도 그를 훈육하지 못한다. 오직 한 사람만 빼고는.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썼다. 이 ‘잃어버렸다’라는 것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 ‘상실’되고, 이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한다는 뜻처럼 보인다. 허나 사실 ‘잃어버린다’라는 것은 그 자신의 행동 반경 내에서, 지극히 그의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구조 바깥으로 나가서 잃어버린 것을 찾아낼 순 없다. 허나 우리는 종종 그 잃어버린 것이 ‘아주 멀리’,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떠내려갔다고 생각한다. 바르트는 그 잃어버린 시간을 아주 간단한 스위치를 통해, 마치 하루종일 찾은 문서를 무심코 곁에 놓아두었던 파일 속에서 찾은 것처럼 찾아낸다. 그렇기에 ‘잃어버린 것’은 ‘찾은 것’이고, ‘찾은 것’은 ‘잃어버린 것’이다. 바르트는 초자아로서의 어머니의 부재 앞에서 그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는다. 그는 ‘어머니’를 잃어버렸으나, 동시에 ‘어머니’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찾았다. 그는 어머니의 상실 후에야 어머니라는 존재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신 없는 성소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이 그 자신의 ‘노이로제’를 치료하기 위했던 것이라고 애써 자기 위안을 삼아도 바르트는 끊임없이 강 하구에 부딪치게 된다. 그는 생과 죽음 사이에서 헤매인다.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둘째 이반은 공공연한 무신론자이다. 허나 그는 그 누구보다도 신을 믿는다. 그는 ‘악마’를 만나게 된다. 어떠한 이유도 없이 어린 아이를 괴롭히는 광기 앞에서 그는 신이 있냐고 되묻지만, 이는 신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도전이다. 믿음이 간절하고 절실할수록 신에 대해 더 도전하고 묻게 된다. 허나 그 끝에서 마주치게 되는 건, 바로 어쩌면 이건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 낸 ‘초자아’일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결말이다. 바르트 또한 그 자신을 지탱하기 위한 위안으로서 어머니의 ‘위로’를 생각했고 그 자신이 새로운 생을 향해 가는 핑계로 댔지만. 그 한계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그때까지 철저한 에고이스트였으며 동시에 실패한 에고이스트였다. 그는 그 자신의 에고이즘을 방어하기 위해 어머니라는 핑계를 만들어냈지만, 어머니의 헌신은 그의 사유에 파고들어 외면할 수 없게 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떠내려가고, 나뭇가지에 걸렸다가 또다시. 떠내려가는 것이다. 이 성소에 신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성소를 만들 수 있다. 정말로 신이 있다면 그건 무자비한 신에 더 가깝지 않을까. 자비로운 신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신은 기도를 들어주는 편보다 기도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불행한 사태들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더더욱 간절하다.
신들의 황혼 에고이스트였던 바르트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깨달은 건 그 혼자만이 꼿꼿이 서 있는 기둥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를 받치고 있는 건 땅이었고 그를 붙잡은 건 힘없어 보이는 흙이었다. 바르트는 어머니의 상실 후 깨닫는다. 그가 여태껏 달려왔던 건 어머니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였고, 그게 그의 힘이었다는 걸. ‘애도 일기’에서 사유의 힘은 바로 바르트가 끊임없이 그 자신이라는 에고를 되돌아본다는 점이다. 어린 아이가 글자를 읽고 어머니에게 보여주기 위해 벌레를 잡아 보이는 것, 어린아이가 순수하다며 우리는 즐거워하지만 사실 이 순수하다고 느끼는 건 우리가 어리석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 또한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것 보세요. 이게 나예요!’라고 말하기 위해 애쓴다. 하지만 그게 부끄럽다고 생각하며 애써 감추려 한다. 오로지 그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만 주장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상실 후 바르트는 혼자서 독립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상실로 인해 그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전에 그를 가리고 있던 ‘에고이즘’의 가면을 벗는다. 그리고 철저하게 ‘헌정의 글쓰기’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바로 ‘죽은 어머니’를 향해서. 영웅은 무조건 강한 이가 아니다. 모든 영웅은 결국 끝에서 ‘돌아오지 않는다’. 영웅들이 돌아오는 건 사실 헐리우드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영웅들은 마지막 임무에서 그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는다. 하지만 그들은 ‘물러서지 않는다’. 물러서는 순간 그들은 변명을 만들어내고 비겁해진다는 걸 안다. 그들이 그 임무를 선택하는 건 그들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다. 지극히 ‘타인’을 위해서다. 생존을 중시로 하는 이 사회의 코드에서 그 자신의 생존보다 타인을 위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일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초인으로 불리어지고 전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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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실 정리하다가 허리를 살짝 삐끗해서 후반부는 거의 메모를 그대로 옮겨적다시피 했네요. ㅠㅠ 나중에 다시 손보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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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리뷰어> 슬픔의 철학 4강 리뷰 : 바르트가 쓰는 바르트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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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가 쓰는 바르트
폐허에 서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주변은 폐허다. 시험을 앞둔 학생의 책상은 어지럽고 산만하지만, 시험 기간이 끝나면 원래대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의 주체는 사랑하는 대상에게 집중하면서 일종의 ‘폭풍’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폭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건 파멸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지만, 사랑의 주체가 원한 건 궁극적으로 파멸이 아닌 그 ‘대상’이다. 히스테리에 빠져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처럼 요한의 목을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광기다. 광기와 사랑은 한 끗 차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로메를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그녀를 외면하지 못한다. 살로메는 처음부터 미쳐버린 걸까? 그녀는 냉정했다.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그녀는 파괴되었다. 애착이 집착으로 변질되었고 요한은 이제 그녀에게 있지만 그녀에게 없다. 인지하지 못하는 새에 깊숙이, 그녀 주변의 황금으로 된 모든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그녀에게 이제 폐허나 다름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사랑의 주체는 살로메가 되지 않기 위해 또렷한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허나 그 주변은 폐허, 똑같은 폐허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찾는 대상만이 눈에 보일 뿐이다. 바르트는 어머니를 잃어버렸다고 애도하면서도 끊임없이 어머니를 찾는다. 그에게 어머니는 초자아이면서 바르트, 자아 자체였다. 어머니가 죽은 뒤 바르트는 그림자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피터팬이 그림자를 잃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그림자가 피터팬을 잃어버린 것인가? 그는 ‘넋이 나간 채’로 주변을 둘러본다. 주변은 폐허다. 하지만 텅 빈 폐허만은 아니다. 폭풍 속으로 들어간다는 건 폭풍에 의해 파멸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폭풍을 찾기 위해서다.
아내에게 바치는 어느 생물학자의 고별사
셔윈 스티븐스 천국을 믿지 마오, 지옥도 믿지 마오. 당신은 죽는 거요. 그것뿐이오. 안녕히. 잘 가오. 영원이 기다리고 있다고? 물론 그렇겠지. 죽음은 부패이고 거름이고 가차 없이 썩어 가는 거요. 부패, 부패. 당신이 동물에서 식물로 되돌아가면 물론 나는 비탄에 잠기겠지. 그러나 죽어 가는 아내여, 슬픔은 이제껏 한 번도 삶을 연장해 준 적이 없었소. 죽음의 손길이 닿은 몸에서 단 한 번의 숨도 가외로 이끌어낸 적이 없었소.
짐 크레이스의 ‘그리고 죽음’ 서문
슬픔은 억지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슬픔도 어느 정도의 ‘적당한 기간’이 지나면 마무리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라는 식으로 한 사람의 생을 일축한다는 건 사실 그 자신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이거나 묘한 회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대상을 보면 기호화하고 싶어한다. 대상과 육체적 교감을 나누는 순간 기호가 생성된다. 하지만 기호는 태어났던 본질에서 멀리 떨어져서 전혀 다른 것인양 존재하게 된다. 사랑할 때 쓰는 러브레터가 사적인 것인지 아니면 공적인 것인지는 그 기호와 육체성의 관계에 의해 구분될 수 있다. 수많은 미사여구들, 당신의 눈동자는 제비꽃 같다느니 하는 말들은 사실 계속 읽다 보면 어떠한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문구를 그대로 따다가 다른 사람에게 써서 보내도 될 정도다 싶다. 허나 육체의 언어로 말하는 순간, 환유적인 편지는 평생토록 간직하게 된다. 둘만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은유의 언어들은 제비꽃이 아름답다는 상징적 판단, 코드에 종속되어 있다. 연인은 생존을 중시하는 코드 체계를 파괴하는 탈코드적 존재들이다. 허나 러브레터가 코드로 환원된다면, 파괴한 줄 알았는데 파괴하지 못했던 걸 깨닫는다면 그건 얼마나 씁쓸한 일인가. 수많은 연인들이 헤어지고 나서 깨닫는 건 그들이 철저히 ‘매뉴얼’에 따라 행동했으며 지금도 그 사람을 잊기 위해, 혹은 다시 잡기 위해 매뉴얼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프루스트의 할머니의 임종 순간이 아름다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만약 할머니의 임종 순간을 철저하게 ‘현실 코드’로 받아들였다면 과연 프루스트에게 할머니의 죽음이 그렇게 큰 사건이었으며, 후에 할머니의 귀환을 다시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글쓰기는 코드의 언어로 이야기하면서 코드를 파괴하고자 하는 모순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그 결을 따라 흘러가면서 그 결을 거슬러 파괴할 힘을 찾는다.
백지 ; 백치
그러나 애도는 끊임없이 그 ‘부재의 장소’를 떠올리게 한다. 이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분명 맺어져 있었지만 어느 순간 끊어졌다. 바르트는 어머니였고 어머니는 바르트였다. 어머니의 현전이 사라진 이후 그는 끊임없이 ‘지워질까봐’ 두려워한다. 이전에 어머니라는 이름이 쓰여 있던 자리는 지워져 버렸다. 그렇다면 그 또한 지워질 수 있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깨끗하게. 하지만 ‘맺어져 있었던 장소’는 공허한 부재만이 아니다. 사랑은 사라져도 그 흔적은 남는다. 그 흔적 또한 사랑이고, 계속 사랑이 이어지게 해달라고 ‘부른다’. 그 부름은 ‘기호’를 낳는다. 바르트는 기호를 계속 생산해 낸다. 어머니가 완전히 부재한다는 그 슬픔을 ‘부재의 장소’로 만든다. 부재의 장소는 동시에 어머니가 죽기 전에 느낀 고통을-어머니라는 존재에서 고통을 제거하는 순간 ‘어머니’가 사라지게 된다-함께 끌어당긴다. 기호는 이제 추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으로 밀착된다. 결국 부재의 장소는 백지이되 ‘꽉 찬 백지’가 된다. 바르트는 미쉬낀 공작처럼 불가능성 앞에서도 ‘깨끗이 돌아서는 법’ 없이, 한없이 당황해 하며 그 불가능성을 두드리고 횡설수설하는 또다른 ‘백치’가 되어버린다. 된다. 되고자 한다. 그게 그의 애도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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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슬픔의 철학 5강 리뷰 : 기억의 기미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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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기미
유품
현대 자본주의의 미덕은 ‘새로움’이다. 낡은 것은 악덕이 되고 얼른 눈앞에서 치워져야 할 불결한 것이 되어 쓰레기장으로 직행한다. 사람들 또한 으레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게 절대적 진리라면, 버린 사람들 또한 그 ‘유한성’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그들도 언젠가는 ‘낡을’ 것이고, ‘새로운 것’들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들은 쓰레기가 될 것이다. 이미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징조가 보이고 있다. 단순히 세대의 단절이 아니다. 자신이 일군 현실이 왜곡되고 일그러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견고했던 바닥이 무너질 것만 같다는 두려움에 외면한다. 이 외면은 결국 이성이라는 이름의 극단적인 파도가 끝까지 밀려가도록 내버려 둔다. 허나 이 파도는 다른 파도처럼 되돌아오지 않는다. 모든 걸 쓸어가 폐허로 만든다. 바르트는 버터통도 이 파도 속에 아주 ‘당연한 듯이’ 휩쓸려 갈까봐 두려워한다. 단절은 도로 이어지려고 노력해도 온전히 이어질 수 없는, ‘끊어진 자국’이다. 사물들은 사용했던 사람들의 흔적을 기억한다. 앉은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쿠션, 너무 매만져서 닳아버린 손잡이, 부러졌다가 다시 붙인 다리까지.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건 그 사람의 물건을 간직한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심장하고 가치있는 물건만이 유품이 된다는 건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따지는 ‘가치’가 아닌가. 그걸로 어떤 ‘이익’을 얻는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만 사람들은 유품을 간직한다. 오래된 시계도 브랜드가 있고 움직여야만 두지 아니면 버리게 된다. 허나 그렇게 따진다면 어떤 유품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인간은 불을 발견했다. 인간은 그 누구보다도 현명한 생명체다. 문명을 발견했다. 이러한 것에 의기양양해 하는 순간 인간은 그 무엇보다도 어리석어진다. 그는 그 자신이 이전에는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잊는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필요로 하는 건 우리의 어리석음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불가능을 극복하고, 어쩌면 불멸로 살아남는 것. 그래서 황제들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때 ‘상징’으로서, 불멸로 살아남고자 했다. 허나 우리는 이제 그걸 잊어버렸다. 너무나도 쉽게.
화장하는 여자
여자가 가장 선한 순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예쁘게 꾸미려는 때이다. 그 때 여자는 자신을 꾸며야 할 ‘대상’으로 객관화하며 동시에 그 대상에 대해 무한한 ‘선의’를 베풀게 된다. 자신에 대해 악해지면 자신을 예쁘게 꾸미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자신을 예쁘게 꾸미는 순간 ‘나’는 ‘내’가 아니게 되어버린다. 낯선 타자가 된다. 그 순간 우리는 ‘너그러워진다’. 상대방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상대를 ‘좋은 사람’으로 만든다. 바르트는 영화 속 분갑을 보며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머니는 상대방에게 ‘너그러웠고’ ‘선했다’. 선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현 사회에서의 대세는 사실 선한 여자가 아니라 나쁜 여자다. 나쁜 여자는 멋지다. 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독한 에고이스트다. 멋지고 당당해서 ‘나 혼자’여도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타인이 그렇게 ‘인정해주길’ 내심 원한다. 타인의 이야기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 급급하다. 자본주의는 여성이 ‘예뻐지는 순간’을 포착해 그 안에 ‘생존의 문제’까지 집어 넣는다. 그 순간 예뻐진다는 건 어떤 ‘선의’가 아니라 ‘생존의 필수 요건’이 된다. 아이라인을 짙게 그리고 눈썹을 똑부러지게, 선명한 색의 립스틱을 바르면서 모든 이들이 자신이 말할 때 주목해 주고, 자신을 ‘만만하게 보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사람을 동경하고 질투할 순 있다. 허나 사랑하는 순간, 우리는 파워 게임에 시달리게 된다. 그 사람을 압도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랑은 혈투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허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정말 꼭 싸워서 이기고 또 다시 싸워야만 하는 것인가? 바르트의 어머니는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 자신의 뜻을 주장하기보다는 상대방을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했다. 타인에게 멍청하다는 인정을 받더라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들은 ‘멍청한 이미지’조차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고는 정복된 순간 초라해진다. 사랑에서 ‘콩깍지’가 벗겨지는 순간은 그 때다. 이 환멸의 순간을 겪기 위해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랑했던가? 개츠비는 데이지를 정복하기 위해 사랑했던 게 아니었다. 그는 데이지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품’을 만들고 싶었을 뿐이다. 허나 데이지에게 사랑은 정복이었고 획득이었다. 그녀는 ‘이익 가치’를 따져보고 움직여야 했다. 데이지가 나쁜 건 아니다. 허나 데이지는 이미 그 속에 파묻혔고, 빠져 나올 수 없었다. 잃어버린 순간에서야 깨닫게 될 뿐이다. 개츠비의 사랑은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기를 번복할 뿐’이다.
이방인
여행의 수칙은 바로 이전에 하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가는 것이다. 순수하게 ‘보는 사람’이 된다. 모든 풍경들은 그의 눈을 통과한다. 투명한 수정체를 통과해 마음의 체에 걸러진다. 그 와중에 체에 남아 있는 것들은 그 순간만큼은 불순물이 아니다. 온 몸으로 보고 느낀다. 이를 위해서는 이전에 하던 숙제나 업무는 방해가 될 뿐이다. 바르트 또한 이를 원했다. 여행을 하면서 그는 ‘새롭게 태어나길’ 원했다. 허나 그가 깨닫게 된 건 그 상처를 묻어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카사블랑카에 도착한 순간 그는 뼈저리게 외로움을 느낀다. 자유롭다는 감정은 그가 묶여 있었던 ‘말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자유란 것의 가치는 사실 감옥에 갇힌 순간에 가장 커 보인다. 바르트는 자신의 상처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공항’에서 깨닫게 된다. 외부에서 내부를 바라볼 순 있지만 손댈 수는 없다. 그리스의 정치에서 참여가 제한된 이들은 여자와 노예만이 아니었다. 외국인도 포함되었다. 그들은 외국인에게 무한한 혜택을 제공했다. 자국 문화에 대한 몰이해적 면이나 언어의 소통 불가능성을 이해해 주었다. 허나 어떤 외국인이든 그 나라 문화에 익숙해져 그 나라 사람이 되었다고 여길 때 가장 크게 ‘튕겨나간다’. 이방인은 자유로우나 자유롭지 않다. 그 자신이 속해 있는 그 ‘불명’의 위치에. 그리고 그가 과거에 속했었던 어떤 곳에 대한 ‘암시’로 인해. 바르트는 이방인이 되고자 했으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상관없다’고 치부해 버릴만큼 그는 메마르고 무감각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뫼르소는 감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는 순간 처음으로 ‘어머니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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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슬픔의 철학 3강 리뷰 : 기나긴 실연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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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실연
녹취록
바르트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어머니의 부재를 실감한다. 단순히 ‘목소리’가 없다는 것뿐이라면, 녹음된 목소리도 있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마르셀에게 들려주던 어머니의 ‘낭독’은, 그 장소에서 이루어지던 실황으로써 의미가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말과 말 사이에 느껴지는 미묘한 간격, 떨림들 사이에 있던 ‘끊어진 것’들의 여진을 느꼈다. 뱅제의 목소리 또한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흩어지는 것이었다. 기계로 붙잡아 놓는다 해도 그건 자동인형의 말처럼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뱅제는 더 이상 롤랑에게 ‘대답’해주지 않는다. 뱅제의 초상을 몽타주 작성처럼 끼워맞출 수 있을 테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온전히 구현해내는 건 불가능하다. 그녀의 목소리 높낮이, 그리고 그 독특한 리듬은 그녀만의 음악이었다. ‘가깝다’라고 판단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깝다’일 뿐, 정말 똑같다고 말하기란 어렵다. 무엇보다도 그 ‘현전성’을 재현하기 위해 본인을 데려온다 할지라도, 본인에게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란 어색하기 그지없다. 자신이 이런 ‘리듬’을 가졌는지, 어떤 어조인지 그제서야 알게 된다. 하지만 또렷하게 ‘내 목소리의 특성’을 아는 게 아니라, 그저 ‘낯설다’라는 것뿐이다. 자신에게 너무 낯선 리듬과 어조, 그런데 이게 자신의 목소리라니. 목소리는 잡아둘 수 없는 것이다. 기술이 발달해도 언어 영역 듣기 문제를 읽어 내려가는 기계음의 어색한 어조는 끝까지 고칠 수 없을 것이고, 사람들은 범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목소리 묘사를 위해 동원한 ‘옥쟁반에 구슬 굴러가는 소리’라거나 ‘종달새 소리’라는 흔한 비유도 효과적이지 않다. 추상적인 비유로 끝날 뿐이다. ‘말’을 주워담을 수 없듯,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로 ‘주워 담을 수’ 없다. 어떻게 본다면 텍스트는 주워담지 못할 말들을 수건으로 눌러 어떻게든 주워 담으려고 하는 움직임일 것이다. 이전에 대야에 가득 차 있던 물의 반도 못 건질 지라도, 그리고 그 수건에 물이 묻은 순간 이전과 완전히 똑같은 물이라고 할 수 없을지라도 멈추지 않는다. 바르트는. 그는 조금이라도 대야에 쏟은 물을 도로 담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절망한다. 그러나 바르트가 말했듯 텍스트는 끊임없이 쓰여지는 것이다. ‘말’을 담은 텍스트는 그 말을 재현하기 위해 계속 쓰여진다. 온전히 재현하지는 못할지라도, 쓰는 이 뿐 아니라 읽는 이에게도 하여금 머릿속에서 계속 ‘되풀이’하게 한다.
소망 없는 불행
바르트와 페터 한트케의 공통점을 든다면, 개인적으로는 둘 다 좋아하는 필자라는 점이고 공적으로는 둘 다 어머니를 잃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저자들 또한 어머니를 잃어본 적이 있겠지만, 바르트와 한트케는 ‘어머니’의 상실 이후 그 상실에 대한 글을 썼다. 그들이 어머니를 잃기 전에 쓴 글과 잃은 뒤에 쓴 글은 확연하게 다르다. 바르트는 이전까지는 자아 중심적인 글쓰기를 했으며 이 ‘중심’은 그 자신이 생각하던 자신의 ‘이미지’에 맞춘 것이었다. 그 이미지에 맞추기 위해 바르트는 얼마나 긴장한 채로 굳어 있어야 했는가. 그리고 계속해서 그 이미지가 자신의 이미지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여야 했다.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서 나오는 ‘사랑의 주체’는 결국 끊임없이 짝사랑만을 번복한다. 짝사랑의 대상에게 다가가기 위해 계속해서 고찰하고 고민하며 갈등하지만, 그건 오로지 그 주체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일 뿐이며 그가 그렇게 가닿으려던 ‘대상’은 실제로 그의 앞에 있는 대상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베르테르가 자살한 건 그 지난한 과정에 대한 투신이었다. 그는 로테라는 이미지를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로테에 대한 사랑에 자신을 투신했다. 로테는 그와 이루어질 수 없다. 설사 로테에게서 로테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아낼지라도. 베르테르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한트케는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그의 글은 계속해서 어머니에 대해 ‘분석’하려 한다. 그는 어머니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파악하면, 그가 사랑하는 어머니가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분석과정에서 그는 어머니를 되살린다는 기쁨이 아니라, 어머니의 끝없는 절망과 마주치게 된다. 바르트는 스탕달처럼 소설 형식을 빌린다면 어머니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재의 글쓰기 시스템을 따라가는 척하면서 그 사이의 틈새를 알아채기 위해서. 하지만 페터 한트케는 끝내 ‘소망 없는 불행’에서 어머니에 대해 ‘쓰기’를 실패하고 만다. 그는 ‘언젠가는 다시 한번’ 어머니에 대해 쓰리라고 다짐한다. 바르트는 왜 ‘자신’이 소설을 쓰지 못했는가에 대해 강의했지만, 그건 비단 자신만의 경우를 밝히는 ‘자기 고백’만은 아니었다. 모든 이들이 실패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시도한다.
참담한 고백
봉준호의 ‘마더’에서, 그의 아들 대신 잡힌 지체장애아에게 어머니는 묻는다. ‘너한테는 엄마가 없니?’ 그 물음은 단순히 신상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다는 뜻도 아니다. 어머니가 없다는 것에 대해 딱하다고 말하고, 그를 버리거나 홀로 남긴 어머니에 대한 비난도 아니다. 모든 것을 투신하는 모성에 대한 역찬양도 아니다. 다만 그녀는 정말로 그의 편이 단 한 명도 없는지 묻는 것이다. ‘사랑의 단상’에서 죽음은 바르트에게 또다른 시작이기도 했지만, 극단적으로 보자면 ‘끝’이었다. 끊임없이 사랑하는 주체가 짝사랑을 멈추기 위해서는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르트는 ‘애도 일기’에서 죽음의 또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죽음’은 이제 타인에 대한 사랑의 투신이 된다. 가장 쓸모 있고 또렷한 사랑의 증거인 셈이다. 그렇다면 그 ‘죽음’은 말 그대로의 죽음인가? 이슬람에는 지하드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어떤 테러에 대한 암시를 뜻하는 게 아니라, 정말 ‘죽음’에 다다를 정도로 열심히 한다는 뜻이다. 죽음에 스스로를 투신한다는 건 사실 죽기 위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다. 생을 부지하기 위해 죽음을 외면하는 순간, 인간은 현실이라는 목걸이에 매이게 된다. 그는 살기 위해 죽는다. 바르트는 어머니를 살리고 자신이 죽는 걸 지향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현실은 사자에 대해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에우리디케’로 규정하지만, 그는 현실의 코드에서 탈코드를 찾아내 ‘에우리디케의 귀환’을 꿈꾸고자 했다. 허나 그는 자신이 ‘새로운 삶의 욕구’를 잃은 것을 깨닫는다. 그 지난한 과정, 끝은 보이지 않고 무엇 하나 손에 쥐는 게 없는 그 여정에 대해 바르트는 ‘이제 지쳤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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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슬픔의 철학 2강 리뷰 : 수갑과 백합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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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갑과 백합
술자리 소설
비밀은 말해서는 안 되지만 동시에 말하고 싶다는 욕망을 내포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비밀을 상담한다는 핑계로-다른 타자의 이야기인 것처럼 말한다. ‘내가 아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이는 사실 그 자리에서 물어보나 마나 아는 사람이 아닌 말하고 있는 화자 자신의 이야기인 것이다. 설사 아닐지라도 그 혼자서는 판단이 어려운, 그 자신도 똑같이 빠져 있는 수렁이기에 솔직하게 고백하고 싶은 것이다. 소설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타자의 이야기이다. 술자리에서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함으로써 소설을 한편 쓰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의 형식으로 제시하는 것은 묘한 ‘부끄러움’ 때문이다. 이야기하면서도 사람들은 어떤 감정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그랬다더라’거나 ‘이건 내 판단이지만’ 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는 더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다. 허나 바르트는 스탕달처럼 ‘소설의 형식’을 빌려 말하는 데에 실패한다. 이는 그의 필력이 딸리기 때문이 아니다. 소설이 어떤 천부적인 재능으로 쓰여지기 때문도 아니다. 타인을 ‘속인다’는 것, 타인은 그 자신의 이야기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지만 속아주는 척하고 있다는 걸 안다는 이중적인 노출증, 부끄러움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다. 결국 자기 얼굴은 가린 채 치부를 내보이는 꼴이나 다름없다. 바르트는 이 부끄러움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애당초 우리는 왜 그 행위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가? 그건 그 자신이 만들어 낸 ‘자신의 이미지’를 타인에게 고백하게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자신이 ‘만들어졌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바르트는 그의 어머니의 장점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이미지를 만들고자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공적인 담론(이미지메이킹)에서 사적 담론으로 전환하고자 했던 스스로조차도 하나의 이미지로 존재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타인을 속인 게 아니라 스스로를 속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지 않기 위해, 타인을 속이지 않기 위해-진정한 사적 담론을 위해 계속 설계한다. 하지만 소설의 형식은 ‘언젠가는 시작하고 언젠가는 끝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소설 쓰기에 ‘끊임없이’ 실패한다. 그가 원하는 소설 쓰기란 사실 모든 글쓰기를 초월한 ‘글쓰기의 영도’에 가까운 글쓰기이고, 그는 이를 위해 끊임없이 설계한다. 그가 ‘왜 나는 소설 쓰기에 실패하는가’라는 강의를 하는 건 계속되는 반성과 성찰, 그리고 새로운 설계를 위해서이다.
비둘기
프로이트는 확고한 주체성을 통해 완성된 인간이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완성된다는 건 곧 시작과 끝이 정해진다는 것이고, 이는 사실 감옥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끝은 곧 한계를 뜻하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 무한히 날아가는 대신 태양이라는 한계에 부닥쳐 날개가 녹아버린다는 것, 이는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허나 우리는 타인과 상대적으로 구분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취향을 설정하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구분짓는다. 이는 자신의 변화를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집은 정지해 있기를 원하고, 정지 상태는 넋없는 수동적인 죽음을 부른다. 하네케의 영화 ‘아무르’에서 비둘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오지만, 나갈 곳을 찾지 못해 헤매인다. 끊임없이 부딪치고 날아다니면서 비둘기는 폭력성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를 보는 남편에게 그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인지하게 한다. 그는 비둘기가 두 번째로 들어왔을 때 비둘기를 생포하지만, 죽이지 못한 채 한동안 끌어안고만 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안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꽉 조이지 못하고 껴안고 있다. 사랑과 집착에 대해서 하네케는 질문한다. 그의 아내가 어쩌면 한 마리의 비둘기가 아닌가? 아내는 죽지 못한 채 한 육체 속에 붙박여 있다. 이는 그가 만든 ‘아내의 이미지’에 대해 포기하기 싫어했던 ‘고집’ 때문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계속 노래를 가르치고 이야기를 들려 주며 아내를 ‘유지’하고자 하지만, 아내는 끊임없이 ‘어머니’와 ‘죽음’을 번복한다. 마마MAMA, 모르타MORTA, 마마, 모르타. 바르트가 솔직하게 고백한 순간, 바르트는 그 자신이 설정해 놓았던 ‘죽음’을 목격한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면서 동시에 그가 살아왔던 이미지의 삶과 죽음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순간 느끼게 되는 건 어떠한 경악이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원했던 그는 그가 얼마나 죽음에 대해 외면하고 있었는가를 깨닫는다. 어떻게 본다면 그는 그의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반면 ‘이미지’를 만들지 않는다. 이는 어떠한 설정에 대한 ‘포기’가 아니다. 애당초 어머니에게는 ‘어머니’라는 현숙한 상이 주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바르트가 생각한 그녀는 ‘이미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그 이미지를 튕겨내는 공격적인 상대적 이미지를 만들지 않았다. 그녀야 말로 부드러움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애도 일기’ 세 편에 관한 단문들 1. ‘체실 비치에서’ -애도와 결혼은 동일하다.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라는 골문을 통과한 것으로 여기며 기뻐하는 것이고 애도는 ‘삶의 완성’이라는 골문을 통과한 것으로 여기며 기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결혼의 첫날밤은 일종의 마법으로 그 자신의 의심을 잠재워 버린다. 이게 정말 진짜 사랑인 걸까? 애도의 첫날밤 또한 그러하다. 타인의 죽음 앞에서 ‘과연 이게 그녀가 원하던 죽음이었을까?’ 라고 되묻는 것. 그리고 그 장례식이 끝났다는 것에 대한 ‘안도’. 혹은 우리가 누군가의 임종을 기다릴 때-특히 자연사의 경우, 미리 장례식을 예약해 놓는 행위는 그녀의 죽음이 ‘별 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준비해 두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결혼’이라는 매력적인 베일이 걷히는 건 아주 짧은 순간에 이루어진다. 일본의 ‘나리타 이혼’이 우스갯소리 같은 진실이 되는 건 그 때문이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애도가 끝난 줄 알았지만 애도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는 첫날밤에 다다른 신혼 부부가 헤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혐오해서 헤어지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심을 차마 저버리지 못했기에, 그 ‘솔직함’ 때문에 헤어지게 되는 것이다.
2. ‘죽어가는 엄마’ -‘여성의 몸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은 사실 동성애자에게 뿐만이 아니라 이성애자에게도 마찬가지다.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 중 하나는 이성의 몸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허나 지나친 혐오와 애착이란 것은 똑같은 눈가리개다. 오히려 바르트는 사회에서 ‘편견’에 휩싸인 동성애자라는 위치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묘한 동병상련을 느낀다. 이는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강제로 편입되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죄악이 되어 ‘평범한 이미지’를 강요받는 것에 대한 동병상련이다. 어머니는 바르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가장의 자리에 대신 들어서게 된다. 어머니라는 모성이 강요받는 이미지들은 생산과 보호이다. 그리고 연약함이다. 그들은 남편의 ‘인형’이 된다. 노라처럼. 꽃같은 처녀의 몸만이 여성의 몸이 아니다. 진정한 여성의 몸으로서의 여성들은 소외당하고 ‘병들어 죽어간다’. 결국 바르트의 어머니는 자연사로 죽은 게 아니라 어떻게 본다면 이미 젊었을 때부터 천천히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3. ‘흑 아니면 백’ -문명은 우리의 삶을 쓰레기로 만든다. 죽은 뒤 하나의 비석으로, 그리고 그가 쌓아왔던 모든 기록들은 유령이 되고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청소차’는 쓰레기를 내놓으라는 일종의 강요이다. 청결에의 강요. 프랑스의 도시는 하수도를 형성해 관으로 쓰레기들을 내놓고 도시 포도 위는 깨끗하게 유지하라고 강조했다. 허나 거기에서는 아직도 ‘기분 나쁜 냄새’가 난다. 그 강요가 불러온 ‘은폐막’, 그리고 그 ‘은폐막’이 얼마나 허술한지 증명하는 그 냄새. 그들은 그들이 만든 ‘흑’ 아니면 ‘백’이라는 선택지 중에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강요한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른 결말까지도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쓰레기를 선택한 순간 ‘청소차’가 와서 수거해 가는 죽음이 잇따르는 것이다. 허나 존 버거의 ‘결혼을 향하여’에서 남자의 아버지가 말하듯 ‘쓰레기’라는 건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쓰레기는 분류하고 정의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어디서? 문명에서. 만약 그 쓰레기들을 ‘자신의 식대로’ 분류하고 정의를 내린다면 쓰레기는 쓰레기가 아닌 것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청소차가 지나가는 새벽 여섯시 반은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태어나는 시간이다. 어머니가 안도를 느끼고 ‘말’을 할 수 있는 건 ‘그 시간’이 지나간 뒤다. 문명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대답’을 강요한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 나라에서는 저승사자가 데려갈 사람의 이름을 세 번 부른다고 한다. 그 때 응답을 하면 저승으로 가게 된다. 죽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죽음을 ‘순응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허나 어머니는, 연약하고 여린 몸으로도 그 ‘선택에의 강요’를 거부한다. 그녀는 응답하지 않는다. 그 밤 내내 그녀는 선택하라는 강요와 맞서 싸워야만 했다. ‘침묵’으로. 하지만 여섯시 반이 지나는 순간 그녀는 그 ‘선택에의 강요’가 끝났다는 안도감에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또다시 밤이 올 것이고, 그녀는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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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슬픔의 철학 1강 리뷰 : 완고한 등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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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철학-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김진영 선생님 1강 강의록+리뷰]
완고한 등
참고 서적: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원과 구
백지 위에서 곡선의 끝과 끝이 만나서 맞물리면 원이라고 한다. 지극히 추상적인 정의다. 그러나 수많은 지식들, 글자로 하는 문학부터 숫자로 하는 수학까지 모든 것이 추상적인 것의 끝과 끝이 맞물려 이루어진다. 어떤 한 지식인을 조명할 때, 그 지식인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는 그가 ‘공인’-그것도 존경받을 만한-이라는 것과 동시에 협잡이나 스캔들 같은 사적인 흠집들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흠, 가령 그가 시장에서 물건 값을 깎았다거나 자신의 아이들을 학대했다는 건 그의 존경할 만한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공공적인 것’, 아주 추상적이고 멀어 보이는 ‘진리개념’ 같은 것들만이 남게 된다. 진짜 그들은 결국 그들 자신의 뜻을 표현하고자 내놓은 ‘탐구’에 스스로의 목이 잘리는 기요틴과 같은 운명을 맞는다. ‘공부가 밥 먹여 주나’라는 말마따나 추상적인 학문들은 지금 당장 닥친 현실 앞에서 무력해 보이기만 한다. 쌓인 학자금 대출 빚은 어쩔 것이며 지금 당장 천오백원이 없어 사먹지 못하는 컵라면은 어떻게 할 것인가. 구체적인 문제들만큼 급박하고 처리하기 어려운 건 없기에 우리는 쉽게 추상적인 대안을 내놓는다. ‘젊은 세대는 꿈을 먹고 살아야지’라는 말처럼 당혹스럽고 서글픈 말들을. 우리가 이미 잊어버린 말들을. 바르트는 이러한 추상적 영역에서 활동하는 대신 자신의 사적 영역을 직시한다. 그의 사유들은 그 자신의 사적 영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목을 잘리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가 부재하고 어머니가 그 자리를 대체한 과거의 유년 시절에 대해 ‘부드러운 중심’이었다고 말한다. 중심을 무조건 ‘아버지’만이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가부장주의적 사고를 벗어나 그의 어린 시절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 ‘어머니’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는 것이다. 물론 그도 지적 중심 궤도에 다가가려는 욕구가 있다. 허나 그 지적 중심 궤도는, 아도르노가 지적하듯 자본주의와 무관하지 않다. 원과 달리 구는 구체적이고 손으로 직접 만져서 확인해 볼 수 있는 ‘구’이다. 모난 데가 없고, 잘 굴러다닌다. 종이 위에서 굳어 있는 원이 아닌 구에서, 바르트는 자신의 ‘사랑의 주체’를 발전시켰고 이는 ‘어머니’의 상실로 인해 또다른 ‘애도의 주체’로 변화하게 된다.
시작과 끝
바르트는 경계에 예민했다. 모든 사람들이 경계를 두려워한다. 그들은 어떤 경계든 일단 자신이 선 자리를 지켜야 하고 그 경계를 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바르트는 경계에 예민했다. 허나 그가 경계에 예민했던 건 타인들처럼 넘지 말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그 허위적인 굴레를 인식하고 이 허위를 폭로하고자 했다. 그가 ‘지적 테러리스트’였을 때, 그는 그 허구들을 지적했다. 그의 동성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성애가 합리적이라는 말은 대체 누가 먼저 이야기했는가? 어떤 만고불변의 진리라면, 인간이 만들어 내는 모든 가치들은 다 퇴색해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계속 해서 뭔가를 생산해 낸다. 이는 그 자신 또한 그 ‘만고불변’이라는 말 자체가 허상이라는 걸, ‘넘고’ ‘지워야’ 한다는 걸 아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경계를 폭로해도 인간은 이 경계에 계속해서 속았다. 바르트는 인간들을 속이는 그 ‘코드 시스템’에 매혹된다. 매혹과 혐오는 양날의 칼이듯, 바르트는 계속 해서 허상적 시스템에 매혹되면서도 혐오를 느끼게 된다. 어머니의 부재에 대해 시스템이 ‘애도’의 끝을 요구했을 때도, 바르트는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척하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카메라 루시다’에서는 마술적인 재회가 이루어지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애도 일기’에서는 그 재회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해피엔딩은커녕 끝나지 않는, 끝없는 ‘하강 운동’만이 일어났을 뿐이다. 프로이트는 ‘애도’가 병적인 ‘집착’이 되는 건, ‘없다’라는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자신의 슬픔에 도취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과연 ‘없다’라는 건 언제부터, 누가 정하는 것일까. 죽음에 대해 그 사람이 물리적으로 눈 앞에 보이지 않는다면 없는 것일까. 그 사람의 시체가 눈 앞에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탄생은 어떠한가. 예전에 한 여자가 자신이 임신한 걸 알고 몰래 유산시키려다 경찰에게 단속된 적이 있었다. 법원에서는 여자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3개월이 채 안 되었다는 걸 알고 ‘살인죄’가 아니라고 말했다. 만약 3개월이 넘었다면 아기는 살아 있는 ‘인간’으로 치부되었을 것이며 여자는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과연 아기를 언제부터 인간으로 봐야 하는가. 죽음과 마찬가지로, 탄생의 순간을 규정하는 건 ‘법’이다. 인간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만든 법이 인간의 시작과 끝을 규정하고 이를 강요한다. 도구에 의해 ‘법’을 따르는 인간으로 ‘도구화’된 것이다.
박수칠 때 떠나라
결국 바르트가 그 자신의 애도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그에게 ‘애도의 끝’을 강요하는 사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프랑스 지성계의 스타였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의 어머니보다 훌륭한 사람들도 많았다. 허나 그는 ‘대체’를 거부했다. 이전에 아버지의 부재를 어머니가 부드럽게 채웠듯이 또 다른 사람이 어머니의 빈 자리를 채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머니를 중심에 두고 쌓아온 그의 사유들은, 끝없이 욕망하며 사랑을 갈구하는 사랑의 주체가 온전한 ‘그 사람’에 대한 획득이 불가능하다는 절망적 전제를 두고 있듯이 이 애도적 사유의 끝도 끝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낸다. 모두가 호응해주고 좋아하는, 승화적인-뭔가 최종적으로 ‘교훈’ 비슷한 걸 얻을 수 있는-의미에 스스로를 동화시킬 수 있다. 모두가 그에게 박수를 쳐줄 것이다. 하지만 바르트는 그 반대를 택한다. 그는 수없이 치는 박수들을 등진 채 떠난다.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너무 오래 비추면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바르트는 자신의 눈을,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수없이 쏟아지는 박수 세례를 거부하고-오르페우스처럼 끝없이 죽음과 생의 끝을 넘어서기 위해-무대를 ‘내려간다’. 완고하게 등을 돌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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