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리뷰> |
철학적 테제들의 음악적 사상사 |
서현정 |
|
|
| <리뷰> |
분류법을 분류하기 - 해체론과 미학적 체제, 그리고 문학 |
김미성 |
|
|
|
우수
|
인간이라는 악보 |
권*주 |
|
|
|
인간이라는 악보의 몇 악장 쯤 건너 온 시간들이 갑자기 누추해지고 가벼워집니다. 사유라는 숨은 음표들을 빗소리 들으며 건반이듯 두들겨 보았지요. 시간이란 것이 원래 묵묵한 것이라 대답이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요. 말이 있어 생각이 표현되니 때때로 궁기를 면한다 해도... |
|
|
|
|
|
|
우수
|
섹스와 죽음과 종교를 넘나드는 역설적인 ‘성스러움’ |
나**비행 |
|
|
|
고통과 희열이 일치하는 “성의 질서”
우리는 사실 우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바로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근대 합리주의의 ‘단정한 옷’을 입은 사회에서 태어나 배우고 익힌 우리는 ‘이성’, ‘도덕’, ‘과학’이 삶의 깊은 뿌리가 돼준다고 믿는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인간은 합리적 동물’, ‘생존 경쟁’ 같은 슬로건이 엄마의 품속처럼 익숙하다. 그러다 익숙한 것이 낯설어질 때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해야 한다”고 하는 당위적 믿음을 깨뜨리는 사건이나 사람이 나타나면 ‘비이성’ ‘광기’ ‘정신병’ ‘야만’이라고 이름을 붙여야만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모두가 말하지 않은 것
그런데 바타유는 그런 ‘비이성들’을 인간의 본질적 욕망으로 본다. <아트앤스터디> ‘크로스오버 인문학’에서 최정우 선생님은 이런 바타유를 “유물론의 역사에서 살짝 비켜있는 독특한 위치의 유물론자”로 설명한다. 그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에서 ‘무시당한’ 지점들을 새삼스럽고 낯설게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종교의 냄새를 폴폴 풍기는 ‘성스러움’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을 강조하는 ‘역설’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차이의 핵심은 ‘생산 방식’의 문제다.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투쟁해서 얻을 것인지, 만인이 공동으로 생산을 통제해서 얻을 것인지의 문제. 결국 체제로 연결 되는 ‘방식’의 문제다. 그런데 바타유가 질문하는 것은 ‘방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생산’의 문제다. 왜 ‘생산’만 고민하느냐는 것. 자본주의, 공산주의 모두 ‘생산’의 문제에만 천착하다보니 바타유가 생각하는 인간의 ‘다른 욕망’은 자연스럽게 없는 것처럼 돼버렸다.
바타유가 말하는 인간의 질서는 두 가지다. 하나의 ‘속의 질서’, 또 하나는 ‘성의 질서’이다. ‘속의 질서’가 바로 저 ‘생산’의 문제를 비롯한 노동, 교환, 도덕, 일상의 세계다. 자본주의의 제도들은 인간의 모든 행동 영역이 ‘속의 질서’를 목적으로 갖길 원한다. 우리가 휴식을 가질 때 ‘재충전’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것처럼 우리의 휴식과 ‘멈춤’들도 생산력의 증대를 위한 도구로만 의식되는 것이다. ‘소비’마저도 사회의 재생산을 위해 권장되고 있다. 하지만 바타유는 또 다른 ‘소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섹스와 죽음과 종교를 넘나드는 역설적인 ‘성스러움’
바타유의 ‘성의 질서’는 목적 없는 것, 이유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질서에서는 “~을 위해서”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을 동물들에 비유하면서, 생존 본능으로 먹고 번식해 어떻게든 삶을 건강히 오래 유지하려는 존재라고만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동물의 본능과는 전혀 다른 부분들도 가졌다. 동물들과는 달리 제 생존을 파괴하는 ‘자살’이라는 것을 하는 독특한 존재이지 않나? 또 인간이 하는 섹스는 종족 번식의 의지를 넘고 있지 않은가? 종족 번식을 목적으로 하는 섹스보다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섹스가 더 흔하다.
바타유가 말하는 ‘소비’는 이런 이유 없는 소진, 탕진, 유희 같은 것이다. 체제와 제도는 ‘생산’만을 좇으며 돌아가지만, 인간의 욕망과 삶은 어쩌면 이유 없이 모든 것을 소진할 때가 필요하다. 나를 생존시키기보다 죽여 버리는 것이 간절할 때가 있다, ‘무’로 만들어버리면서 나를 넘어선 ‘성스러움’과 합일하는 것이다. 모든 에너지를 탕진해버리며 그 극한 순간에 맞닿는 초월적 세계와의 만남.
문제는 인간의 욕망은 초월을 바라면서 초월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질서와의 ‘합일’의 욕망하는 이유는 바타유의 표현대로라면 인간이 분리되어 고독한, ‘불연속적인 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선 ‘무한성’을 경험하길 원한다는 것.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유한한 자신의 몸의 껍데기 안에서만, 불연속적인 개체로 계속해서 남길 원하면서만, ‘무한성’과 ‘연속성’에 대한 경험을 하고 싶어 한다. 욕심이 많은 것일까, 소박한 것일까.
결국 ‘저 삶’이 아니라 ‘이 삶’으로 돌아온다. ‘성스러움’을 제 몸을 통해서만 욕망한다는 바타유의 이런 독특한 유물론은 인간을 동물과 같은 욕망을 지닌 존재로 보는 시선과 인간의 삶(몸)을 내세(정신)의 도구로 보는 종교적 시선 모두를 교란시킨다.
‘연속성’을 ‘불연속적인 몸’을 통해서만 경험하려는 인간의 여러 가지 다르지만 비슷한 시도들: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죽음’을 경험하는 것을 지켜봄으로 그 ‘찰나’만이라도 연속성을 경험하는 ‘희생제의’, 잔인한 방식의 공개 사형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 고통인지 희열인지 구분하기 모호한 표정의 사형수, 마담 에르와르다 소설의 “도끼에 맞은 돼지”의 모습으로 변하는 극한의 오르가즘, 성 테레사의 종교적 희열에 찬 표정.
섹스와 죽음과 종교를 넘나드는 무언가에 대해 최정우 선생님은 “고통과 희열이 극단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지점이라고 한다. 무언가 잡힐 듯 안 잡히는 하나의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것이 바타유의 ‘성의 질서’다.
|
|
|
|
|
|
|
우수
|
'건강한' 어지러움과 '희망적인' 불안감을 느껴보며 |
정**기 |
|
|
|
남이 있어야 내가 있고 꼴찌가 있어야 1등이 있고 실패가 있어야 성공이 있고 좌절이 있어야 희망이 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고 지낸다.
우리가 지겨우리만치 남발하고 있는 '진실'이라는 것도 그렇다. '거짓이 없는 사실' 혹은 '마음에 거짓이 없이 순수하고 바름'이라는 사전적 정의만 보더라도, 결국 '거짓' 없이는 '진실'이 존재할 수가 없음을 공감할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도 결국 아름답지 않음 혹은 추가 있어야만 존재하지 않겠는가? 이런 아주 단순한 논리로, 나는 움베르토 에코의 '미의 역사'에 이어 뒤늦게 '추의 역사'를 당당하게 구매했다. (사실 뭐든 꼭 '짝 맞춤'을 해야한다는 나의 은근한 강박감 때문이었을텐데)
하이데거가 그토록 강조했던 '존재'라는 존재 역시 그 진정한 모습은 오히려 '자기 숨김'에 있다고 했다. 어떠한 있음도 자기 없앰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그의 주장은 '극단끼리 서로 통한다'는, 단순하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진리를 새삼 일깨워준다.
예고된 죽음을 안고 사는 삶, 죽음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삶, 그리고 결국 폭력이 폭력을 낳아야만, 폭력의 순환 속에서라야만 모두가 살아갈 수 있다는 '카눈'의 역설적인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고 여겼던 사실이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할 것은 아님을 징후적으로 경고한다.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비폭력을 통해서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순진한' 믿음은 어쩌면 너무도 '무지한' 발상일지도 모른다. 폭력의 극단에는 과연 우리가 기다리던 평화가 있을까? 폭력과 법이 서로 반대말이 아닌, 같은 내용을 단지 다른 형식으로 드러낼 뿐이었다는 사실, 결국 우리는 폭력 속에 있어야만 평화를 말할 수 있다는 외면하고 싶은 사실, 평화라는 권력적이고 가식적인 구호로 폭력을 강제로 덮어버린, 아니 오히려 폭력을 더욱 부추긴 세상을 우리가 여태껏 살아왔다는 사실이 나를 충격에 빠뜨린다.
점점 커져가는 고통 속에서 힘겹게 병을 다스리기보다 손쉽게 진통제로 외면하고 마는 무지하고 위험한 자기파괴의 방식을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며 편하게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본다. 그리고 이 폭력과 비폭력의 뗄 수 없는 관계의 그 모호한 경계에서 우리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 대안을 고민해보다가, 문득 영화 가 떠올랐다. 수많은, 끝없는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인공은 너무도 가녀린 약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의 이름으로' 당당히 걸어나간다. 잔인한 폭력의 순환이 빚어낸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담담하게 품는다. 그 모든 피의 흔적을 '모성'으로 조용히 닦아낸다. 그 모든 폭력은, 결국 그녀 안에서 잠식되고 만다. 그리고 그녀가 더 큰 힘으로 숭고히 승화하는 걸 우리는 보게된다. 그녀를, 어머니의 이름을 기억함으로써 폭력을 잠재우고 '평화롭게' 나아갈 수도 있다는 한 줄기 희망을 품어본다. 정답은 아니겠지만, '나름의 대답'은 될 수 있을거란 나의 믿음이다.
== 2011. 5. 23.
자꾸 정답부터 찾으려고 하는 '참을 수 없는 태도의 전근대성'을 억누르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혼란의 파도 속 '건강한' 어지러움과 '희망적인' 불안감을 느껴보며
|
|
|
|
|
|
|
4 |
섹스와 죽음과 종교를 넘나드는 역설적인 ‘성스러움’ |
김*호 |
|
|
|
고통과 희열이 일치하는 “성의 질서”
우리는 사실 우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바로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근대 합리주의의 ‘단정한 옷’을 입은 사회에서 태어나 배우고 익힌 우리는 ‘이성’, ‘도덕’, ‘과학’이 삶의 깊은 뿌리가 돼준다고 믿는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인간은 합리적 동물’, ‘생존 경쟁’ 같은 슬로건이 엄마의 품속처럼 익숙하다. 그러다 익숙한 것이 낯설어질 때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해야 한다”고 하는 당위적 믿음을 깨뜨리는 사건이나 사람이 나타나면 ‘비이성’ ‘광기’ ‘정신병’ ‘야만’이라고 이름을 붙여야만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모두가 말하지 않은 것
그런데 바타유는 그런 ‘비이성들’을 인간의 본질적 욕망으로 본다. <아트앤스터디> ‘크로스오버 인문학’에서 최정우 선생님은 이런 바타유를 “유물론의 역사에서 살짝 비켜있는 독특한 위치의 유물론자”로 설명한다. 그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에서 ‘무시당한’ 지점들을 새삼스럽고 낯설게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종교의 냄새를 폴폴 풍기는 ‘성스러움’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을 강조하는 ‘역설’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차이의 핵심은 ‘생산 방식’의 문제다.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투쟁해서 얻을 것인지, 만인이 공동으로 생산을 통제해서 얻을 것인지의 문제. 결국 체제로 연결 되는 ‘방식’의 문제다. 그런데 바타유가 질문하는 것은 ‘방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생산’의 문제다. 왜 ‘생산’만 고민하느냐는 것. 자본주의, 공산주의 모두 ‘생산’의 문제에만 천착하다보니 바타유가 생각하는 인간의 ‘다른 욕망’은 자연스럽게 없는 것처럼 돼버렸다.
바타유가 말하는 인간의 질서는 두 가지다. 하나의 ‘속의 질서’, 또 하나는 ‘성의 질서’이다. ‘속의 질서’가 바로 저 ‘생산’의 문제를 비롯한 노동, 교환, 도덕, 일상의 세계다. 자본주의의 제도들은 인간의 모든 행동 영역이 ‘속의 질서’를 목적으로 갖길 원한다. 우리가 휴식을 가질 때 ‘재충전’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것처럼 우리의 휴식과 ‘멈춤’들도 생산력의 증대를 위한 도구로만 의식되는 것이다. ‘소비’마저도 사회의 재생산을 위해 권장되고 있다. 하지만 바타유는 또 다른 ‘소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섹스와 죽음과 종교를 넘나드는 역설적인 ‘성스러움’
바타유의 ‘성의 질서’는 목적 없는 것, 이유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질서에서는 “~을 위해서”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을 동물들에 비유하면서, 생존 본능으로 먹고 번식해 어떻게든 삶을 건강히 오래 유지하려는 존재라고만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동물의 본능과는 전혀 다른 부분들도 가졌다. 동물들과는 달리 제 생존을 파괴하는 ‘자살’이라는 것을 하는 독특한 존재이지 않나? 또 인간이 하는 섹스는 종족 번식의 의지를 넘고 있지 않은가? 종족 번식을 목적으로 하는 섹스보다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섹스가 더 흔하다.
바타유가 말하는 ‘소비’는 이런 이유 없는 소진, 탕진, 유희 같은 것이다. 체제와 제도는 ‘생산’만을 좇으며 돌아가지만, 인간의 욕망과 삶은 어쩌면 이유 없이 모든 것을 소진할 때가 필요하다. 나를 생존시키기보다 죽여 버리는 것이 간절할 때가 있다, ‘무’로 만들어버리면서 나를 넘어선 ‘성스러움’과 합일하는 것이다. 모든 에너지를 탕진해버리며 그 극한 순간에 맞닿는 초월적 세계와의 만남.
문제는 인간의 욕망은 초월을 바라면서 초월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질서와의 ‘합일’의 욕망하는 이유는 바타유의 표현대로라면 인간이 분리되어 고독한, ‘불연속적인 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선 ‘무한성’을 경험하길 원한다는 것.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유한한 자신의 몸의 껍데기 안에서만, 불연속적인 개체로 계속해서 남길 원하면서만, ‘무한성’과 ‘연속성’에 대한 경험을 하고 싶어 한다. 욕심이 많은 것일까, 소박한 것일까.
결국 ‘저 삶’이 아니라 ‘이 삶’으로 돌아온다. ‘성스러움’을 제 몸을 통해서만 욕망한다는 바타유의 이런 독특한 유물론은 인간을 동물과 같은 욕망을 지닌 존재로 보는 시선과 인간의 삶(몸)을 내세(정신)의 도구로 보는 종교적 시선 모두를 교란시킨다.
‘연속성’을 ‘불연속적인 몸’을 통해서만 경험하려는 인간의 여러 가지 다르지만 비슷한 시도들: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죽음’을 경험하는 것을 지켜봄으로 그 ‘찰나’만이라도 연속성을 경험하는 ‘희생제의’, 잔인한 방식의 공개 사형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 고통인지 희열인지 구분하기 모호한 표정의 사형수, 마담 에르와르다 소설의 “도끼에 맞은 돼지”의 모습으로 변하는 극한의 오르가즘, 성 테레사의 종교적 희열에 찬 표정.
섹스와 죽음과 종교를 넘나드는 무언가에 대해 최정우 선생님은 “고통과 희열이 극단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지점이라고 한다. 무언가 잡힐 듯 안 잡히는 하나의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것이 바타유의 ‘성의 질서’다. |
|
|
|
|
|
|
5 |
그 어떤 말보다 더 강렬했던 건 단 몇 마디의 음악 |
이*정 |
|
|
|
어느 술자리에서 오랫동안 잠적하고 있다가 최근 '아리랑'이라는 영화로 이슈가 된 김기덕 감독 이야기가 나왔다. 우선, 한국에서 김기덕이라는 감독의 위치는 매우 특이하다. 가장 한국적인 작품을 찍는 감독임에도(적어도 내 생각에는) 한국에서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해외, 특히 유럽 지역에서 인정을 받는 감독이다.
한국에서는 영화의 적나라함이나 자극성 때문에 일부러 인정을 안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것은 오히려 해외에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한국에서도 그나마 인정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외 영화제에서의 수상 '쾌거'를 거두고서야 국내 관객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황당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인터뷰에서 김기덕 감독이 말했다. '사실 관객들이 좋아하는 상업영화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김기덕 감독은 자신을 외면하는 한국을 일부러 조롱하려한걸까? '세계적인'이라는 수식어에 무척이나 민감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에 일침을 가하고 싶었던 걸까? '세계 문학'을 주제로 시작된 오늘 수업을 듣다가 떠오른 나의 생각이었다. '세계적'이라는 표현의 강박에 시달리는 우리의 의식을 되새겨보며, '징후적 독해'를 시도해보려 한 인터넷 기사를 살펴보았다.
김 감독의 영화는 국내 영화계와 정부에 대해 적나라한 비판을 담았기에 국내에 개봉이 될지조차 미지수인 반면 해외에서는 이미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 칸 영화제 수상까지 기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고, 기사의 마지막 문구가 나의 표적이 되었다.
'해외 바이어들의 관심도 상당하다. 베니스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바 있는 김기덕 감독은 이미 세계 영화제가 인정하는 한국의 거장이자 스타 감독이다.'
세계 영화제? '세계'라는 수식어에는 과연 어느 나라가 속할 수 있을까? 국내 반응과 상관없이, 김기덕 감독은 '유럽에서 인정받았으므로' 한국의 거장이자 스타 감독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국내에서는 외면 받더라도 유럽에서 인정받으면 됐다는 위로일까? 징후적 독해는, 지극히 평범해보이는 말 한마디조차도 알고보면 뿌리깊은 사대주의에 젖은 무서운 독약임을 깨닫게 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라는 말, 그것은 한국적인 것을 찾기도 전에 세계적인 것부터 우선 강조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성급함이었다.
김기덕 감독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내 영화가 잔인한 것은 내가 돌려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비난했던 영화의 그 모든 잔인함과 적나라함은 결국 우리가 만들어놓고 우리 스스로 외면하고 싶었던 감춰둔 진실일지도.
보편성과 특수성, 시대적 편재성,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포스트모던 등등등 수많은 단어들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기 시작할 즈음, 바르톡(1881-1945)의 현악 사중주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흔히 듣던 클래식 음악과는 확실히 다르다. 조화롭고 매끄러운 '보통'의 클래식과 달리, 뭔가 어긋난 듯 어색한 듯 불편한 듯한 악기들의 조합이 단숨에 '현대 음악'임을 알 수가 있다.
그 '불편한 화음'이 지속되다가 중간에 갑작스레 '편안한 화음'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 지점이 바로 하이라이트였다. 침투, 개입, 해체 그리고 이어지는 확장과 역전. 익숙함 속 낯섦과 낯섦 속 익숙함이 동의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익숙함이 '고정관념' '선입견'이 될 가능성, 그리고 낯섦이 새로운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그 가능성들은 무심하게(con indifferenza), 점점 느리게(rallentando) 드러나야 한다. 발상의 전환, 깨달음의 순간은 그렇게 문득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Robert Bereny <Portrait of Bela Bartok 1913>
무수히 많은 철학자들은 왜 그토록 예술을 찬양했을까. 고통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삶 속에서 유일한 구원을 예술이라고 했던 쇼펜하우어 철학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인 '존재'가 위장되지 않은 채 드러나는 탁월한 영역을 예술이라고 본 하이데거 도구적 이성에 의해 억압받는 현대 사회는 예술이 그 진리로써 일깨워준다고 주장했던 아도르노 바르톡의 현악 사중주를 듣는 순간 깨달았던 건 그 많은 철학자들이 진리이자 구원으로 여겼던 예술의 위대함이었다. 그 어떤 말보다 더 강렬했던 건 단 몇 마디의 음악이었다.
|
|
|
|
|
|
|
6 |
<은어낚시통신>이 레저 코너에 분류 배치된 현실 |
양*진 |
|
|
|
1
주인공으로 남장여자가 유행인 때가 있었다. 남장여자라고 해도 머리만 짧은, 예쁜 여배우가 분했기에 그들의 남장은 그냥 남자가 아니라 '미소년'에 가까웠다.
어떤 숏컷트의 10대 여자애들은 네이버 지식인에 자신이 너무 보이쉬해 미소년이란 말을 곧잘 듣는다고 푸념하는 글들이 꽤 많이 올라왔는데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식의.
여자애가 미소년이라는 거 칭찬인가요? 미소년이란 소리 듣기 싫어요.
사실은 드라마 속 남장여자처럼 언젠가는 원래의 '성'으로 해피엔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예쁠 것이다란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진짜로 스스로를 보이쉬하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태세라면 앞의 '미'를 떼야 옳으니.
우리가 드라마에서 보는 남장여자들은 젠더가 남성인 경우는 아니었다. 약간의 보이쉬한 매력을 지니고 있고, 나름의 사정이 있을 뿐, 본래는 여자였다. 오해로 미소년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정에 의해 미소년으로 분류되고, 미소년인 척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모두 여성이 되려고 했다.
2
아트앤스터디의 한 강의실에서 '크로스오버인문학-지적 해방을 위한 가이드'수업을 듣던 중. 데즈카 오사무의 일대기와 만화 세계를 그린 <아톰의 철학>이란 책이 그 제목만으로 철학 코너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 떡 하니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는 일본야구 관련 책이 아니지만 스포츠코너에 <은어낚시통신>은 소설이지만 레저에 분류 배치된 적이 심심찮게 있었다고 한다.
참, 그책들 찾는 이는 고생 많았겠네.
3.
집이 개판이다. 아직도 이것 저것 고민하며 고민하는 나는 머리속도 정리하지 못한 주제에 겨울옷을 정리한답시고 모든 걸 방안에 뒤집어 버렸고, 급기야 책이며, 신발이며, 옷이며, 모자며, 가방이며....... 제자리에 있는 게 없다.
성공하려면 정리부터 하라는 현대인의 친구 '자기계발서'를 보지 않더라도 있을 곳에 있는 게 그것이 지닌 가치를 발하게 한다는 것쯤은 누구나 안다.
자주 쓰는 것은 이쯤, 철지난 것은 저 안쪽, 직사광선을 피해야 하는 것은 저기. 정리를 하기 전에 어떤 기준으로 나눌 것인지부터 정해야 하건만 어지간한 정리의 여왕이 아닌 이상 몸을 쓰면서 생각하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잦은 시행착오로 몸이 고달프다.
내 친구는 옷을 옷의 두께나 형태 상관없이 색깔별로 정리한다. 그냥 아는 사이인 xx씨는 지금 계절의 옷은 행거, 나머지는 모두 박스에 넣어둔다.
나는? 옷을 정리하는 기준을 차치하고, 내가 어디에 분류되는지조차 모르겠다.
일단 잉여. 그리고 또??? 근데 왜 잉여인 거지?
|
|
|
|
|
|
|
7 |
'정답'이 아닌 '나름의 대답'을 얻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
박*정 |
|
|
|
분필을 잡는 강사님의 손가락을 보았다. 눈에 띄게 긴 손톱이 분명 '남다르다'.'젊은 남자'라는 모델에서는 도출해내기 어려운 특징이며, 나의 '상식 기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다.
여기서부터 질문이 솟구친다. '왜 손톱을 길렀을까?' 그리고 다양한 답을 생각해본다. '네일 아트가 취미일 수도 있고, 누군가 손톱을 못 자르게 할 수도 있고, 징크스가 있을 수도 있고' 등등.
프린트물에 적힌 강사님의 이력을 보니 '기타리스트'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그렇다면 나의 질문에 대한 가장 가능성이 높은 답은 '기타를 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문득 이 생각의 과정이 마치 '철학'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라는 질문. 그것은 모든 철학의 시작일 것이다. 질문으로 시작된 철학은 자연스레 그 답을 찾기 위한 여정으로 이어진다. 수많은 가능성과 다양한 선택들 속 시행착오를 통해서, 깨달음이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곧 나만의 답을 찾는 경이로운 순간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1+1=2' 라는 뻔한 수학 공식이 아닌, '1+1=2 이상'의 '시너지효과'를 내는 고차원적인 활동인 것이다. 단순히 '손톱을 긴 남자=이상한 사람' 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 공식을 활용할 것이 아니라, 손톱을 기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고 다양한 '가능성 있는' 답을 도출해보는 것이다. 이건 '수학'이 아닌, 어디까지나 '철학'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해체되고 혼란스러운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강사님은 무수한 '가능성들'에 대해 강조했다. 그리고 이 무수한 가능성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 '물음'으로부터 다시 시작하려한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은 내가 강사님의 손톱에 대해 가졌던 의문의 답을 찾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힘든 여정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엔 '나 혼자'가 아닌 '우리', <사유의 악보>를 함께 읽을 '우리'가 있다.
사유의 악보 속을 탐험할 대원으로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푼 가슴을 안고 대장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가 읽게 될 <사유의 악보>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악보란 그 자체로서는 결코 음악이 아니며 단지 표기의 한 형식이자 약속일 뿐. 말하자면 '사유의 악보'라는 것은 하나의 비유, 그것도 이론을 지극히 '예술화'한 하나의 비유'라는 것.
음악과 악보는 별개이다. 악보 그 자체는 음표들로 이루어진 단순한 한 형식이자 기호일 뿐이지만, 악보가 음악으로 연주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흐름, 덩어리로 느껴지게 된다. 분절된 음표에서 시작된 악보는 곧 분절될 수 없는 연속체(continuum), 하나의 덩어리(cluster)로서의 음악이 된다. 그것은 '1+1=2 이상'이라는 공식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곧 그 악보 속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현재의 문제점과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을 얻기 위해, '분절된 음표들'이라는 시작점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음표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교배해보는 것이다. 똑같은 악보를 보고도 지휘자마다 전혀 다른 연주가 나오듯 똑같이 오늘 수업을 듣고서도 리뷰어마다 전혀 다른 리뷰가 나오듯, 우리는 사유의 악보를 통해 전혀 다른, 또는 새로운, 또는 더 발전된 사유를 이끌어낼 것이다. '정답'이 아닌 '나름의 대답'을 얻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
|
|
|
|
|
|
8 |
파괴적인 듯 보이지만 결코 파괴는 아닌, 새로운 듯 보이지만 새로운 것은 아닌 |
이*주 |
|
|
|
전시 제목이 선언 형식인 이유가 '나는 가수다'의 유행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두 달여를 <사유의 악보>와 함께 하다보니 이제는 제목 자체가 징후적 독해(毒解)를 유발하고 있음을 직감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선언'이라는 형식 자체는 많은 함의를 지닌다. 때문에 단순히 '미국미술전'이라고 규정할 때와 '이것이 미국미술이다'라고 선언할 때는 큰 차이가 느껴진다. 이 진지하고 단호하고 강요적이기까지한 '선언'의 형식은, 그만큼 큰 위험을 감수해야하고 그만큼의 책임도 뒤따름을 암시한다. 농담이라곤 통할 것 같지 않은 이 심각한 선언 앞에서 나는 위험한 위엄마저 느끼며, 그 독단에 기죽지 않으리라는 다짐과 함께 침착하게 전시를 둘러보았다.
전형적인 풍경화에서부터 미니멀리즘, 팝아트, 키치까지 온갖 미술사조들이 다 집합한 듯한 이번 전시는 과연 앞서 선언이 단언하던 '미국미술'의 범주가 무엇인지에 집중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인이 그리면 미국미술인가? 미국에서 그리면 미국미술? 미국을 그리면 미국미술? 비디오 아트는 한국인 백남준이 창시했기에 '한국미술'로 규정될 것인가? 온갖 사조들, 그 다양성과 혼성과 낯섦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 자체가 바로 아주 '쿨한' 미국 스타일임을 보여주고자 한 것도 같지만, 사실 그 현란한 포장의 이면에는 여전한 차별이나 독단 등이 숨겨졌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산만함으로 대중들을 현혹하는 '쿨하지 못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전시가 단순히 '휘트니미술관전'이 아닌 '이것이 미국미술이다'라고 선언되는 순간, 관객들이 성급하게 일반화하고 선입견을 가질 가능성은 커지게 된다. (사실 광고를 통해 전시 제목만 봤을 때 상업적인 냄새부터 강하게 풍겼다) 라우셴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의 회화와 조각을 결합한 'Combines' 작품, 재스퍼 존스(Jasper Johns, 1930-), 짐 다인(Jim Dine, 1935-)의 오브제 작품 등을 보았을 땐, 마치 온갖 요소들을 뒤섞고 펼쳐놓는 것이 곧 미국적인 것이라는 편견이 생길까 염려하기까지 했다.
리게티(Gyorgy Ligeti, 1923-2006)의 음악을 듣다가 문득 깨달은 건 라우셴버그의 작품이 의미없이 뒤섞고 펼쳐놓은 작품은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듣다보면 악기로 연주한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낯설고 충격적인 리게티의 음악이었지만, 사실 쇤베르크의 무조 음악처럼 조성을 없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성은 유지하고 단지 그 기준을 파괴한 음악이다. 마치 두 가지 다른 음악을 한꺼번에 듣는 느낌. 그리고 이를 통해 조성의 확장을 도모하는 전략. 그것은 어쩌면 라우셴버그의 전략과 동일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라우셴버그의 전략은 회화가 재현을 거부하다 결국 사물성으로까지 나아가고 원본을 거부하다 적나라한 복제가 넘쳐나는 그런 극단으로 치닫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회화의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오브제를 도입하여 회화의 경계를 넓히는 것이었다. 기존 형식을 유지하면서 그 형식을 흐리는 전략은 무조건적인 뒤섞음이 아니었다. 파괴적인 듯 보이지만 결코 파괴는 아닌, 새로운 듯 보이지만 새로운 것은 아닌 그의 작품은 '이것이 미국미술이다'라는 선언에 대한 경계심이 앞섰던 나에게 새로운 인식의 확장을 권유하는 자극제였다. |
|
|
|
|
|
|
9 |
시는 소설을 빌려 시를 이야기한다 |
백*영 |
|
|
|
"시는, 소설이라는 자신의 바깥으로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고,
바로 그럼으로써 그 안의 의미를 다시금 물어보고자 한다.
시는 소설을 빌려 시를 이야기한다."
변주.
나는 나를 모른다
나는, 타인의 존재가 없다면, 나를 모른다
나는, 다른 이의 관심을 받지 않는다면, 나를 모른다
나는, 남을 통하지 않고서는, 나를 모른다
나는, 너의 말이 없이는, 나를 모른다
네가 없이는, 나는 나를 모른다
|
|
|
|
|
|
|
10 |
그저 현재를 탈피하고 싶은 자의 비겁한 변명일 뿐인가? |
진*학 |
|
|
|
"성스러움이란, 어떤 엄숙한 제의 안에서 한 불연속적인 존재의 죽음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이들 앞에 드러난 존재의 연속성, 바로 그것이다."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는 유한한 인간의 무한을 향한 열망으로 인해 죽음이 발생한다고 했다. 불연속적인 개체로서의 인간은 사후 세계, 즉 연속성의 세계로의 이행을 꿈꾸지만 '죽음'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희생 제의와 같은 형식을 통해 죽음으로 이끌게 되고, 나 아닌 다른 개체가 죽는 그 찰나에 우리는 연속성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폭력적인' 죽음은 이토록 필수불가결하다.
지금 우리는 죽음이 너무도 쉬운 세상에 살고 있다. 인간에게 '무한'의 경험을 선사해준다는 그 성스러운 죽음은 더이상 성스럽지만은 않은 것 같다. 고통이 너무 심하면 무감각해지듯, 잔인하고 자극적인 죽음이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그 심각성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가볍고 일상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다.
특히 '자살률 1위 국가'라는 타이틀은, 지금 사회에 남의 죽음을 통해 무한을 경험하는 대리만족을 넘어 자신 스스로 무한의 세계에 뛰어들겠다는 '용기 넘치는' 인간들이 늘어간다는 증거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어쩌면 무한에의 욕망보다 우월에의 욕망이 더 커져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이 경쟁 사회에서 돈 때문에, 사랑 때문에, 공부 때문에 생기는 열등감은 곧 스스로에의 폭력으로 쉽게 이어지고 만다. 연속적으로, 무한하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지만 이제는 무한하기보다는 우월하고 싶은 욕망이 인간을 더 깊이 지배해버린 건 아닌지.
이 지긋지긋한 경쟁 사회, 죽음이 너무도 쉬운 나약한 사회에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 다시 등장하길 바라는 극단적인 기대마저 하게 된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은 열망, 모든 차이과 구별이 사라지고 하나로 뭉쳐있던 태초로 되돌아가고 싶은 바람, 그것은 그저 현재를 탈피하고 싶은 자의 비겁한 변명일 뿐인가? |
|
|
|
|
|
|
11 |
내가 보는 "나"는 크게 문제가 없는데, 어째 남이 본 "나"는 볼품없기 그지 없다 |
최*훈 |
|
|
|
1.
카메라를 손에서 놓기 시작한 것은 형사도 아닌데 매순간 기록하려는 사람들에게 질리면서부터였다. 조용히 차를 마시러 들어간 카페엔 쉴 새 없이, 찰칵 찰칵 대는 소리가 가득하고...... 싸이나 블로그에 자신의 일상을 일거투 일투족까지 올리는가 하면 자신의 사진을 파파라치컷처럼 찍어서 올리기도 하고. 뮤직 비디오의 주인공처럼 눈물을 흘리거나 좌절에 빠진 모습조차 아름답길 바라며, 그 모습을 노출하길 즐기는 정신병자들 사이에 우린 살아가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유아기적 성향을 버리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중성화 수술을 한 집고양이와 똑같다. 몸은 늙어가도, 마음만은 언제나 아기인. 어딜 거세당한 걸까. 오싹하다.
2. 필자
"필자"란 단어에 몸서리치는 사람들이 있다. "나"라는 말 대신에 객관적인 체 "필자는......"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기만이라고. 하긴, "나는" 대신에, "마괭이는 과자 먹고 싶어."란 말을 한다면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 친구들은 날 떠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저자들이 자주 쓰는 "우리는"이라는 말도 문제가 있는 단어가 아닐까. 내 글이든 남의 글이든 읽는 내내 찝찝하다.
3.
크로스오버 인문학- 최정우(아트앤스터디) 중 "자서전을 쓰는 인간은 나르시시트입니다." <사유의 악보> 6악장 나르시시스트를 위한 자기진단법을 언급하며, 덧붙인 말이었다. "나에 대한 글쓰기"를 즐기는 자는 나르시시트란 말에 반론의 여지가 없다. 멀리 갈 것 없이 컴퓨터만 켜면 다양한 행태의 자기애 흔적들을 만나볼 수 있으니까.
필립 르죈은 "자서전은 허구의 질서가 아닌, 거짓의 질서에 따른다."고 했다. 하긴, 어차피 본인 스스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내보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자신의 셀카와 남이 찍은 자신의 모습이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얼마 전, 염병최포토가 찍은 내 모습을 보고, 나 자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정도(?)였는데 말이다.
내가 아는 "나"와 남이 보는 "나"가 다른데 스스로 쓴 자신의 진짜 이야기따윈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자체가. 내가 보는 "나"는 크게 문제가 없는데, 어째 남이 본 "나"는 볼품없기 그지 없다. |
|
|
|
|
|
|
12 |
“광인의 자서전”은 불가능한가? 나는 무슨 장르인가? |
장*아 |
|
|
|
“광인의 자서전”은 불가능한가?
자서전에 대한 문제는 ‘자신에 대해 글 쓴다는 것’의 문제다. 새삼스럽게 떠올려본다. 유명인들의 자서전 속 고난과 극복, 성공의 스토리를. 그리고 혹시나 내가 그런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쓰고 무엇을 뺄 것인가. 간혹 혼자 쓰고 읽는 일기를 쓸 적에도 나도 모르는 필터가 나의 단어와 문장을 자동 편집하는 걸 느끼는데, 그들 또한 이런 ‘선택과 집중’의 과정을 분명 거쳤을 거다. 타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의 삶’이라고 내어놓는 자서전이란 것. 여기에 관여하는 것들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첫 번째 불가능성 : 나는 무슨 장르인가?
아트앤스터디 <크로스오버 인문학>의 최정우 선생님은 역시나 자서전의 ‘분류법’을 문제 삼았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글쓰기 자체의 분류법이다. “글들이 현재의 미학적 체계에서 어떻게 분류, 분할, 분배되고 있는가”의 문제. 그 첨예한 문제적 지점에 “나는 무슨 장르인가?”라고 묻는 자서전이 있다. 허구인가, 실제인가, 수필인가, 저자와 화자는 동일한가, 등의 질문들이 이어지는 ‘애매한 정체성’ 때문인지, 필리프 르죈은 자서전에 대한 ‘정의 내리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 “한 실제 인물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소재로 하여, 개인적인 삶 특히 자신의 인성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산문형식의, 과거 회상 이야기”
르죈이 규정한 자서전의 첫 번째 조건은 저자와 화자와 주인공의 ‘동일성’이다. 두 번째는 담론, 담화 형식에서처럼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펼쳐서는 안 된다는 것. 주관성을 배제해야 한다. 세 번째 조건은 산문형식이여야 한다는 것. 자서전 쓰기가 꽤 까다롭다. 저자와 화자, 주인공이 ‘유사’한 것이 아니라, ‘동일’하다는 것을 어떻게, 잘 증명해낼까? 또 개인의 이야기,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을 것인가? 자서전의 존재 조건에서부터 ‘어떠한 강박적인’ 냄새가 난다.
이런 강박에 알맞게 자서전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저자의 ‘서명’이다. 저자와 화자와 주인공이 동일해야 한다는 첫 번째 어려운 조건은 어쩌면 ‘간편하게’ 저자의 서명 행위(“I Signed below”)로 대체된다. 이 부분에서 최정우 선생님은 “자서전은 문학적 내용, 형식으로 규정되는 장르가 아니라, 구조적인 형식으로 규정되는 장르”라고 설명한다. 텍스트 외부로부터 주어진 어떤 것으로 내부적 글 내용의 성격이 확립되는 것이다.
‘서명 행위’는 자서전이라는 장르가 성립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또는 암암리에 진행되는 하나의 ‘계약’이라 볼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런 계약, 약속을 ‘위반’하는 자가 나타났을 때다. 저자 혹은 주인공의 이름이 표기되지 않고, 서명되지 않았을 경우, 덩그러니 텍스트 내용만 남겨져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을 자서전이라 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소설로 봐야하는 걸까. 또 ‘서명되지 않은 자서전’과 ‘자전적 소설’이 나란히 있을 때에 우리는 무엇이 소설이고, 자서전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자서전이란 장르의 기반은 어쩌면 ‘서명’이라는 빈약하고도 딱딱한 전제 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정우 선생님은 이런 사태를 “분류법 안에서의 ‘공백’의 상태”라고 보았다. 그랬을 때, 자서전 같은 논픽션에 ‘대비되는’ 픽션을 대표하는 소설의 존재기반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공백’의 상태에서는 자서전 장르만의 빈약함이 아니라, 서로를 의지해서 존재했던 글의 분류체계 자체의 모호함이 불쑥 튀어나와 버린다.
두 번째 불가능성 : ‘진짜’가 가능한가?
자서전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두 번째 조건에서 본다면 자서전은 “개인적인 삶”에 대해 “주관성”을 배제해야 한다. 있었던 ‘사실’만을 서술할 것을 기대하는 것일까. 자서전의 질서는 ‘허구의 질서’가 아니라 ‘거짓의 질서’일 수밖에 없다. 자서전의 내용은 일단 ‘사실’이라고 공표돼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허구'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참 아니면 거짓‘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가려낼 수도 없고, 그럴 필요성도 없다. 결국 자서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용의 진위여부(현실성)가 아니라 “저자가 글쓰기에 얼마나 성실하게 임하고 있는가?”하는 ’진실성(성실성)‘이다.
이렇게 자서전의 토대는 줄 곳 저자의 ‘행위’ 또는 ‘태도’로 형성된다. ‘언표된 것(내용)’이 아닌 ‘언표 행위(enonciation)’.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저자가 “자신을 그런 존재로 드러내기를 원했고, 목표했다”는 게 중요하다. 과거 기억을 뒤늦게 불러내서 스스로에 대해 서술하는 내용을 두고, ‘객관성’을 바랄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사람은 기억 자체를 바꾸어버리기도 하지 않나? 저자는 의식과 무의식을 동원해서 과거 기억을 조합해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정체성을 서술한다. 자서전이 정신분석의 텍스트로 유용한 이유다.
‘저자’의 행위와 태도로‘만’ 성립 가능한 장르이기 때문일까. 자서전에서는 저자가 누구인지가 물론 중요할 것이고, 그 저자는 과연 진실할 수(성실할 수) 있는가에 대한, 혹은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헛된’ 우리의 의식/무의식적 판단도 뒤따른다. 아내를 교살한 후 금치산자 판정을 받은 알튀세르의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 된다>가 바로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광인의 자서전”. 과연 광인이 자기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서술할 수 있냐하는 질문. 그럴 수 없다면 “법적으로” 정상성을 인정받은 사람만이 자서전 쓰기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냐는 질문. 하지만 결국 “자신에 대한 글쓰기”란 어차피 무의식과 의식이 뒤범벅된 ‘광기’의 지점이 아니냐는 질문. 저자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들 속에서 또다시 자서전 자신의 정체성이 뒤틀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강박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자서전을 꼭 분류하려는 욕망에서, 오히려 자명하지 않은 문학적 분류법의 모호한 토대가 삐져나온다.
최정우 선생님은 이런 혼란과 균열을 드러냄으로써 “자서전이라는 장르, 문학적 분류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분류체계가 없어지지도 않을 거라고. 그가 굳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자서전은 자기 이야기를 쓴 책”이라고 “자명하게 생각하는 것”의 문제이다. ‘자신에 대한 글쓰기’를 그 사람의 이야기라기보다 그가 “쓰고자 했던 이야기” 혹은 “써야만 했던 이야기”로 읽는 것. ‘자서전’이라는 장르가 통용되기 위해서 은폐되어야만 했던 것들은 불러 모으는 하나의 작업이 되지 않을까.
|
|
|
|
|
|
|
13 |
조급증을 치료하고 불가능성을 즐기는 인문학 |
전*민 |
|
|
|
음악과 철학은 다른 일이 아니다?
시대의 음울한 공기를 타고서 “인문학이 위기다”라는 얘기가 유행했다. 그 후로 최근엔 “치유의 인문학”을 목적으로 하는 대중적인 인문학, 철학 책이 인기가 높다. 이렇게 되니 ‘위기’에서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 인문학인지, 사람들인지, 둘 다인지가 헷갈린다. 아리송한 인문학과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정의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질문!
사유한다는 것. 철학한다는 것. 항상 그래왔듯이 아트앤스터디 <크로스오버 인문학>강좌 또한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최정우 선생님은 “철학이란 영어로 Philosophy로서,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하며, 그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같은 모법답안을 되풀이 하지 않았다. 그는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정의’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질문”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던졌다. 앞의 정의는 ‘definition'이고 뒤의 정의는 ’justice'다. 사실 정의(definition)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인문학의 위기‘를 대하는 그의 태도 또한 같다. “인간이라면 사유해야 한다”는 한탄의 목소리를 불편해하는 그는 “사실 인간에게 깊이 있는 사유를 해야 하는 ’당위‘는 없다”고 말한다. 문제는 “사유해야만 하는, 사유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다. 그는 ’누구‘와 ’왜‘ ’어떻게‘ 같은 것들에 천착한다. 그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사유를 하는가? 왜 사유하는가?” 그리고, “타자가 어떻게 우리에게 사유를 요청(혹은 종용 또는 강요)하는가?” 심각한 지점은 ’정의(definition)'나 ‘당위’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왜’ 따위의 ‘상황’인 것이다. 이런 질문들만이 “철학이 현실과 맞닿을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최정우 선생님은 우리가 즐겨 분리시키고 호명하는 ‘시대’ ‘세대’ 같은 표현 또한 “강요되고, 요청되는” 것으로 여긴다. ‘그 시대’와 ‘이 세대’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시대가 바뀌고 ‘새로움’이 도래했다는데, 진짜? 그는 ‘오래됨’을 기피하고 ‘새로움을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의 “새로움에 대한 강박”을 지적한다. 이런 단어, 언어들에 대한 “느낌, 감정”은 유행처럼, 팬덤처럼 번진다.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성)의 ’새로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모더니티(근대성)를 ’오래된 것‘ ’우리가 잘 아는 것‘ 으로 착각하게끔 만드는 것과 같다.
음악과 철학은 다른 일이 아니다?
최정우 선생님의 사유에서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하는 부분은 ‘분류’에 관한 것이다. 강좌 제목 <크로스오버 인문학>, 강좌의 바탕이 되는 책제목 <사유의 악보>. 그는 ‘정의’내리기를 즐기지 않듯 ‘분류’하는 것을 삐딱하게 바라본다. 그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이종교배시키고, 잡종의 창궐”을 시도하고 있다. 책 제목 <사유의 악보>에 대해서는 “그저 단순한 비유만은 아니다”라며 음악과 철학이 “왜, 어떻게 분류되었을까?”하는 ‘도발적’ 질문을 하는 것이다.
최정우 선생님은 밴드를 하고 작곡을 한다. 그리고 철학하고 글을 쓴다. “옛날의 철학자 ‘어른’들은 아마 나를 딴따라라고 했을 것”이라는 그의 ‘정체성’이 음악과 철학이 다른 것으로 분류되는 지점을 문제 삼으려는 급진적 사유를 가능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가장 철학적인 사유가 아닌가? 나 또한 ‘분류된’ 일들의 경계에서 고민하고 남감해하는 ‘잡종’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이런 ‘발견’(?)이 신선하기도 하고, 그보다 더 반갑기도 하다.
그는 “음악과 글쓰는 것, ‘이 둘은 다른 분야의 일이다’라는 생각을 가장 경계”하는 것이다. 철학은 언제부터 철학이며, ‘철학자가 하는 것’이었고, 음악은 ‘어제부터 누가’ 음악이라 이름 붙였으며 ‘음악가가 하는 것’이 된 걸까. 글이 사유 그 자체가 아니듯 악보도 음악이 아니다. 글과 악보는 하나의 “기호, 표기법, 약속”이다. 글이라는 기호로 담아낼 수 없는 사유의 부분이 있듯, 악보라는 분절된 기호가 우리의 귀에 하나의 “연속체”로서 들리는 음악을 나타내주진 못한다. 또 글로 담아내어 표현한 ‘사유’로 불리는 총체적인 ‘무언가’와 그가 음악으로 표현하는 ‘무언가‘가 분절된 다른 것으로부터 왔다고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최정우 선생님은 분절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감각적으로 분절되지 않는 (우리가 음악을 전체로서 듣지, 악보에 표기된 것처럼 하나하나 나누어 듣지 않듯) 하나의 ‘덩어리(연속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것은 랑시에르가 말한 ‘감각적인 것의 분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분할되지 않는 감각적인 것을 분할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 보여도 볼 수 없고, 들려도 들을 수 없는, 그래서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게 되는 것들. 같은 언어의 한 종으로 우리 주위에서 맴도는 영어와 베트남어. 이 둘을 우리가 듣게 되는 방식, 또 말하게 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하나는 동경하는 방식으로, 다른 하나는 희화화하는 방식으로.
조급증을 치료하고 불가능성을 즐기는 인문학
결국 우리는 분류돼있는 어떤 ‘체계’ 속에서 살고 있고, 우리가 감각하는 것은 체계 안에서, 정치적으로, 권력과 관습에 관련된 채로, 나눠져 있다. 우리가 아는 ‘분과’들 또한 당연하지만, 새삼스럽게도 정치적으로 결정된 ‘제도’일 뿐이다. 우리가 분류하는 방법 자체가 잘 ‘훈육’된 결과물인 것이다.
‘훈육된’ 분과, 분류, 제도들을 전복적으로 사유하는 것. 애매하고 모호한 경계선들의 불명확성을 참아내는 것.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보이는 선택지들 앞에서 빨리 선택하고 싶어 하는 조급증을 치료하는 것. 분류할 수 없고,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의 ‘불가능성’이 갖는 가능성을 무모하게도 밀어붙이는 것. 이러한 것들이 <크로스오버 인문학>이 제시하는, 당위가 아니라 정의를 위한, 인문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
|
|
|
|
|
|
14 |
아리 폴만의 선택은 마치 알튀세르의 그것과 흡사하다 |
이*민 |
|
|
|
나는 학창시절에 유독 자서전을 즐겨읽었다. 자서전은 당연히 '진실'을 말한다고 믿었고, 남의 사생활에 대한 관음증적 호기심이 있었던 것도 같다. 또한 자서전을 낸다는 것 자체가 저자의 성공, 인생에서 하나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여겼기에, 저자가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과 진실함을 보여주리라는 기대감이 높았다.
'성공'에 대한 강박증을 가진 우리 사회에서, 이토록 '진실된' 자서전은 내게 '성공적인 미래'를 위한 훌륭한 지침서가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머리가 클수록' 자서전을 점점 믿지 않게 되었다. 자서전이 그 장르 자체로 '진실'이라던 나의 믿음은 착각임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서전의 성공 여부는 결국 '자기 포장 능력'에 달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커진 이상, 나는 이제 '배반의' 자서전을 읽지 않게 되었다.
텍스트를 '자서전'이라고 선언할 것인지 '소설'이라고 선언할 것인지는 결국 저자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필리프 르죈(Philippe Lejeune)이 말했던 것처럼, 자서전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허구(fiction)의 질서가 아니라 거짓(mensonge)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거짓의 질서라는 것은 텍스트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화자로서, 주인공으로서 얼마나 '진실하게' 글쓰기에 집중하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다. 이미 허구임을 전제하고 읽는 소설과 달리, 자서전은 그 사실성 여부를 독자가 따질 수가 없는 장르인 것이다.
"자서전의 문제는 그 자체로서보다는 오히려 소설이나 여타 장르와의 비교하에서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믿게 만들기'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의 자서전은 이 지점에서 독특한 문제를 제기한다. 착란 상태에서 아내를 살해하고 금치산자 판정을 받았던 알튀세르는 "자서전적 글쓰기의 사법권과 서명의 저작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바로 그 시점으로부터 오히려 그 자신의 자서전적 글쓰기를 감행"했던 것이다. 가장 진실되지 못할 비정상적인 '광인'의 상태에서 가장 진실된 자서전을 쓰게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을 자서전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가장 진실한 자서전을 쓰게 되는 역설을 보여준다.
가장 진실되지 못할 상태에서 가장 진실된 것을 보여주는 모순.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 (Waltz with Bashir)>은 이 난해한 상황에 마치 해결사처럼 내 앞에 등장한 영화였다. 영화 장르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즉 '허구'적인 애니메이션을 통해 '진실'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이다.
감독이자 주인공이자 화자인 아리 폴만은 레바논 전쟁 당시 자신이 이스라엘 군으로 활동했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낸다.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가장 진실되지 못할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가장 진실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결심한 아리 폴만의 선택은 마치 알튀세르의 그것과 흡사하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형식적 특성을 통해 숨겨진 진실을 재구성하는 아리 폴만의 고백록은 불편한 진실을 어떻게 가장 진솔하게 드러낼 것인가의 문제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다가가지 않았나 싶다. 알튀세르의 자서전이 "시작부터 그 자체로 이미 '불가능성'의 자서전이라는 역설적 위치를 점하게 된" 것처럼, 아리 폴만의 다큐멘터리 역시 불가능성의 위치에 서서 그 아슬아슬한 경계의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
|
|
|
|
|
|
15 |
차이를 차별로 보지 않고, 둘의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기란 |
조*영 |
|
|
|
질료와 형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물질과 정신 등등. 이러한 대립은 무척이나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둘은 항상 공존해왔지만 또 항상 서로의 위계에 민감하다. 과연 위계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한 것일까?
어느 전시장에서 까무러칠 뻔한 적이 있는데, 단지 사람이 없고 어둡고 조용한 전시장이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산발한 머리에, 다리가 없는 사람이 덩그러니 바닥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건 진짜 사람처럼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작품인지 알고서 사진을 찍는데도 괜히 소름이 끼쳤다. 금방이라도 눈을 번쩍 뜨고서, 자기를 데려 가라며 내 발목을 붙잡을 것만 같아서.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인가) 사진을 찍고 뒤돌아섰을 때 또 한 번 까무러칠 뻔했던 건 숨소리도 내지 않고 마치 동상처럼 서있던 전시장 직원이 갑자기 기침을 했기 때문이었다. 작품을 사람으로 착각하고 사람을 작품으로 착각하는 '정신없는' 경험이었다.
'그리스도를 어깨에 메고 가다'란 의미의 Saint Christopher는 여행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오랫동안 추앙받아온 인물인데, 천주교에서는 이 인물의 '실존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1969년부터 달력에서 그의 축일을 제외하기로 했다.
그의 다리는 '닳아진' 상태이다. 그것이 상식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이미 알고 있고 작품이기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는 판단하면서도, 눈 앞에서도 보게된 너무도 리얼한 모습때문에 왠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 그리고 '섬뜩함'을 우리는 경험하게 된다.
그 아무리 천주교에서는 그의 존재를 부정해도, 직접 눈으로 본 그의 실제같은 모습에 대해 논리적인 판단에 앞서 우리가 느끼고 말았던 그 '본능적인' 반응은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우리가 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거대 종교의 권위에 대한 작가의 '발칙한' 발상이 인상깊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 말하는 '실존 증거'란 말에 의심이 갔다. 그 말은, 천주교에서 말하는 다른 인물들은 모두 실존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일까. 예수는,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은 모두 납득할만한 실존 증거를 가지고 있는 걸까. 직접 내 눈으로 그들을 보지 않는 이상, 실존 증거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있을까.
결국 믿음이란 모두 조작된 것일 뿐인가?! 갑자기 그 모든 종교의 믿음이라는 것이 이 진짜같은 작품만 못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직접 경험한 것만이 진리라는 영국의 경험론자들이나, 천사를 직접 보여달라고 했던 쿠르베도 모두 이런 나의 마음과 같지 않았을까. 지극히 물질적인 이 작품 덕에, 나는 종교의 그 추상적인 믿음(faith)이라는 것을 의심(doubt)하기 시작했다. 전시회의 제목에 "'왜곡된' 믿음과 '건강한' 의심"이라는 수식어도 붙였다.
Saint Christopher 작품 옆방에는 예수의 옆구리를 찔러보는 Saint Thomas 그림이 있었다. 예수를 만져봄으로써 자신의 의심을 풀었던 성 토마스가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믿음과 의심의 추상적인 경계 속에서 나에게 진정 확신을 주는 것은 결국 내가 보고 만지는 물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없이 추상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보다도, 흔히 '미신'이라며 멸시받지만 적어도 작두를 타면서 '신내림'이라는 걸 몸소 보여주는 무당의 굿이 훨씬 진실해보이기도 했다.
물질과 정신의 위계에 집착하다보니 어느 새 이분법을 너무도 당연시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항상 '편가르기'에 익숙했던 탓인지, 모호함이나 양가성은 마치 허용될 수 없는 금기어가 된 듯하다. 또한 경계를 흐리는 것이 아니라 자꾸 경계를 뒤집기만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차이를 차별로 보지 않고, 둘의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기란 과연 가능할 것인가? |
|
|
|
|
|
|
16 |
'건강한' 어지러움과 '희망적인' 불안감을 느껴보며 |
경*빈 |
|
|
|
남이 있어야 내가 있고 꼴찌가 있어야 1등이 있고 실패가 있어야 성공이 있고 좌절이 있어야 희망이 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고 지낸다.
우리가 지겨우리만치 남발하고 있는 '진실'이라는 것도 그렇다. '거짓이 없는 사실' 혹은 '마음에 거짓이 없이 순수하고 바름'이라는 사전적 정의만 보더라도, 결국 '거짓' 없이는 '진실'이 존재할 수가 없음을 공감할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도 결국 아름답지 않음 혹은 추가 있어야만 존재하지 않겠는가? 이런 아주 단순한 논리로, 나는 움베르토 에코의 '미의 역사'에 이어 뒤늦게 '추의 역사'를 당당하게 구매했다. (사실 뭐든 꼭 '짝 맞춤'을 해야한다는 나의 은근한 강박감 때문이었을텐데)
하이데거가 그토록 강조했던 '존재'라는 존재 역시 그 진정한 모습은 오히려 '자기 숨김'에 있다고 했다. 어떠한 있음도 자기 없앰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그의 주장은 '극단끼리 서로 통한다'는, 단순하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진리를 새삼 일깨워준다.
예고된 죽음을 안고 사는 삶, 죽음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삶, 그리고 결국 폭력이 폭력을 낳아야만, 폭력의 순환 속에서라야만 모두가 살아갈 수 있다는 '카눈'의 역설적인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고 여겼던 사실이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할 것은 아님을 징후적으로 경고한다.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비폭력을 통해서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순진한' 믿음은 어쩌면 너무도 '무지한' 발상일지도 모른다. 폭력의 극단에는 과연 우리가 기다리던 평화가 있을까? 폭력과 법이 서로 반대말이 아닌, 같은 내용을 단지 다른 형식으로 드러낼 뿐이었다는 사실, 결국 우리는 폭력 속에 있어야만 평화를 말할 수 있다는 외면하고 싶은 사실, 평화라는 권력적이고 가식적인 구호로 폭력을 강제로 덮어버린, 아니 오히려 폭력을 더욱 부추긴 세상을 우리가 여태껏 살아왔다는 사실이 나를 충격에 빠뜨린다.
점점 커져가는 고통 속에서 힘겹게 병을 다스리기보다 손쉽게 진통제로 외면하고 마는 무지하고 위험한 자기파괴의 방식을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며 편하게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본다. 그리고 이 폭력과 비폭력의 뗄 수 없는 관계의 그 모호한 경계에서 우리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 대안을 고민해보다가, 문득 영화 <Incendies>가 떠올랐다. 수많은, 끝없는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인공은 너무도 가녀린 약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의 이름으로' 당당히 걸어나간다. 잔인한 폭력의 순환이 빚어낸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담담하게 품는다. 그 모든 피의 흔적을 '모성'으로 조용히 닦아낸다. 그 모든 폭력은, 결국 그녀 안에서 잠식되고 만다. 그리고 그녀가 더 큰 힘으로 숭고히 승화하는 걸 우리는 보게된다. 그녀를, 어머니의 이름을 기억함으로써 폭력을 잠재우고 '평화롭게' 나아갈 수도 있다는 한 줄기 희망을 품어본다. 정답은 아니겠지만, '나름의 대답'은 될 수 있을거란 나의 믿음이다.
== 2011. 5. 23.
자꾸 정답부터 찾으려고 하는 '참을 수 없는 태도의 전근대성'을 억누르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혼란의 파도 속 '건강한' 어지러움과 '희망적인' 불안감을 느껴보며
|
|
|
|
|
|
|
17 |
"오아시스는 여기 없는데 다들 신기루에 홀려 미친 듯이 달려간다" |
윤*경 |
|
|
|
1. 순종
"절대적인 순수"를 꿈꾸는 것은 병이다, 지독한 병.
강박증도 이런 강박증이 없다.
하늘 아래 존재하는 것 중 그 어느 것에도 영향받지 않는, 순수 혈통 따윈 존재하지 않기에
이는 변태적인 소리에 가깝다.
진화론에 입각한다면 토종 한국인, 순수 게르만인도 흑인에서 나왔기에 존재 불가능.
그래도 우린 이런 헛소리에 익숙하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꼭 세계적이어야 하나?
개나 고양이의 순종이냐, 아니냐는 주인과의 관계에 어떤 의미도 없지만
시장에서의 위치를 정하는데 절대적이긴 하다.
어떤 사람들은 같이 지낼 반려견을 찾을 때조차 순종 여부에 신경을 쓴다.
2. 타자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은
그가 일본 문학을 읽지 않았다고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타인들이 규정한 나의 "자기다움"을 채우는 것이
어째서 나다워 지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한참 할 때였다.
한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나지만 서양보다 "동양"이 신비롭고,
아쟁보다 피아노가 익숙하고, 신선로보다 피자가 "보통" 음식이다.
내가 한국문학을 싫어하게 된 건
중학생 시절 학교에서 구입한 세계대표단편집, 한국대표단편집이 계기였다.
3. 구색 맞추기
타이라 뱅크스는 지난 호 표지가 흑인 모델이었으니
이번 호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백인 모델은 숱하게 거의 매번 표지를 장식하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 우리집 책장에는 위인전 세트가 있었다.
세계편은 이상하지만 당연하게도 서양인들이 많았다.
과학자든, 정치인이든, 독립운동가든, 음악가든.
막사이사이편이 있는 건 참으로 기특한 노릇.
어느 나라의 세계편에 수집당한 한 한국인의 위인전이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아 오싹하다.
4. 신기루
아트앤스터디의 크로스오버인문학-지적해방을 위한 가이드(최정우) 두번째 시간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이야기로 수업은 시작되었다.
주류 사회에 편입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를 세계문학이라 믿는 어느 판에 맞추어
자르고 붙이고 접어서 통과하려 용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것 하나 빠지지는 않게 모으려 한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이면서도 보편성과 특수성을 두루 갖춘,
그로테스크한 세계문학 속의 한국문학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한국에서 뜨지 않다가
해외 시장에서 인정받으면 국내 시장에서
그 이전보다 훨씬 많이 소비되는 한국 가요들이 많은 요즘,
난 헷갈린다.
해외에서 인정받을 기회가 없던 예전 한국가요는 요즘 가요에 비해 가치가 없는 것일까?
왜 인기가 없다가 해외에서 인정받으면 다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걸까?
우리가 그 음악을 가치있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뭘까?
오아시스는 여기 없는데
다들 신기루에 홀려 미친 듯이 달려간다. |
|
|
|
|
|
|
18 |
광인의 자서전은 불가능한가? |
나** 비행 |
|
|
|
“광인의 자서전”은 불가능한가?
자서전에 대한 문제는 ‘자신에 대해 글 쓴다는 것’의 문제다. 새삼스럽게 떠올려본다. 유명인들의 자서전 속 고난과 극복, 성공의 스토리를. 그리고 혹시나 내가 그런 자서전을 쓰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쓰고 무엇을 뺄 것인가. 간혹 혼자 쓰고 읽는 일기를 쓸 적에도 나도 모르는 필터가 나의 단어와 문장을 자동 편집하는 걸 느끼는데, 그들 또한 이런 ‘선택과 집중’의 과정을 분명 거쳤을 거다. 타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의 삶’이라고 내어놓는 자서전이란 것. 여기에 관여하는 것들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첫 번째 불가능성 : 나는 무슨 장르인가?
아트앤스터디 <크로스오버 인문학>의 최정우 선생님은 역시나 자서전의 ‘분류법’을 문제 삼았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글쓰기 자체의 분류법이다. “글들이 현재의 미학적 체계에서 어떻게 분류, 분할, 분배되고 있는가”의 문제. 그 첨예한 문제적 지점에 “나는 무슨 장르인가?”라고 묻는 자서전이 있다. 허구인가, 실제인가, 수필인가, 저자와 화자는 동일한가, 등의 질문들이 이어지는 ‘애매한 정체성’ 때문인지, 필리프 르죈은 자서전에 대한 ‘정의 내리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 “한 실제 인물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소재로 하여, 개인적인 삶 특히 자신의 인성의 역사를 중심으로 한, 산문형식의, 과거 회상 이야기”
르죈이 규정한 자서전의 첫 번째 조건은 저자와 화자와 주인공의 ‘동일성’이다. 두 번째는 담론, 담화 형식에서처럼 저자가 자신의 주장을 펼쳐서는 안 된다는 것. 주관성을 배제해야 한다. 세 번째 조건은 산문형식이여야 한다는 것. 자서전 쓰기가 꽤 까다롭다. 저자와 화자, 주인공이 ‘유사’한 것이 아니라, ‘동일’하다는 것을 어떻게, 잘 증명해낼까? 또 개인의 이야기,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을 것인가? 자서전의 존재 조건에서부터 ‘어떠한 강박적인’ 냄새가 난다.
이런 강박에 알맞게 자서전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저자의 ‘서명’이다. 저자와 화자와 주인공이 동일해야 한다는 첫 번째 어려운 조건은 어쩌면 ‘간편하게’ 저자의 서명 행위(“I Signed below”)로 대체된다. 이 부분에서 최정우 선생님은 “자서전은 문학적 내용, 형식으로 규정되는 장르가 아니라, 구조적인 형식으로 규정되는 장르”라고 설명한다. 텍스트 외부로부터 주어진 어떤 것으로 내부적 글 내용의 성격이 확립되는 것이다.
‘서명 행위’는 자서전이라는 장르가 성립하기 위해 공공연하게 또는 암암리에 진행되는 하나의 ‘계약’이라 볼 수 있는데, 문제는 이런 계약, 약속을 ‘위반’하는 자가 나타났을 때다. 저자 혹은 주인공의 이름이 표기되지 않고, 서명되지 않았을 경우, 덩그러니 텍스트 내용만 남겨져 있을 때. 우리는 이것을 자서전이라 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소설로 봐야하는 걸까. 또 ‘서명되지 않은 자서전’과 ‘자전적 소설’이 나란히 있을 때에 우리는 무엇이 소설이고, 자서전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자서전이란 장르의 기반은 어쩌면 ‘서명’이라는 빈약하고도 딱딱한 전제 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정우 선생님은 이런 사태를 “분류법 안에서의 ‘공백’의 상태”라고 보았다. 그랬을 때, 자서전 같은 논픽션에 ‘대비되는’ 픽션을 대표하는 소설의 존재기반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공백’의 상태에서는 자서전 장르만의 빈약함이 아니라, 서로를 의지해서 존재했던 글의 분류체계 자체의 모호함이 불쑥 튀어나와 버린다.
두 번째 불가능성 : ‘진짜’가 가능한가?
자서전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두 번째 조건에서 본다면 자서전은 “개인적인 삶”에 대해 “주관성”을 배제해야 한다. 있었던 ‘사실’만을 서술할 것을 기대하는 것일까. 자서전의 질서는 ‘허구의 질서’가 아니라 ‘거짓의 질서’일 수밖에 없다. 자서전의 내용은 일단 ‘사실’이라고 공표돼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허구'에 대한 질문은 무의미하다. ’참 아니면 거짓‘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가려낼 수도 없고, 그럴 필요성도 없다. 결국 자서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용의 진위여부(현실성)가 아니라 “저자가 글쓰기에 얼마나 성실하게 임하고 있는가?”하는 ’진실성(성실성)‘이다.
이렇게 자서전의 토대는 줄 곳 저자의 ‘행위’ 또는 ‘태도’로 형성된다. ‘언표된 것(내용)’이 아닌 ‘언표 행위(enonciation)’.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저자가 “자신을 그런 존재로 드러내기를 원했고, 목표했다”는 게 중요하다. 과거 기억을 뒤늦게 불러내서 스스로에 대해 서술하는 내용을 두고, ‘객관성’을 바랄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사람은 기억 자체를 바꾸어버리기도 하지 않나? 저자는 의식과 무의식을 동원해서 과거 기억을 조합해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정체성을 서술한다. 자서전이 정신분석의 텍스트로 유용한 이유다.
‘저자’의 행위와 태도로‘만’ 성립 가능한 장르이기 때문일까. 자서전에서는 저자가 누구인지가 물론 중요할 것이고, 그 저자는 과연 진실할 수(성실할 수) 있는가에 대한, 혹은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헛된’ 우리의 의식/무의식적 판단도 뒤따른다. 아내를 교살한 후 금치산자 판정을 받은 알튀세르의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 된다>가 바로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광인의 자서전”. 과연 광인이 자기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서술할 수 있냐하는 질문. 그럴 수 없다면 “법적으로” 정상성을 인정받은 사람만이 자서전 쓰기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냐는 질문. 하지만 결국 “자신에 대한 글쓰기”란 어차피 무의식과 의식이 뒤범벅된 ‘광기’의 지점이 아니냐는 질문. 저자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들 속에서 또다시 자서전 자신의 정체성이 뒤틀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강박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자서전을 꼭 분류하려는 욕망에서, 오히려 자명하지 않은 문학적 분류법의 모호한 토대가 삐져나온다.
최정우 선생님은 이런 혼란과 균열을 드러냄으로써 “자서전이라는 장르, 문학적 분류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주장한다고 해서 분류체계가 없어지지도 않을 거라고. 그가 굳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자서전은 자기 이야기를 쓴 책”이라고 “자명하게 생각하는 것”의 문제이다. ‘자신에 대한 글쓰기’를 그 사람의 이야기라기보다 그가 “쓰고자 했던 이야기” 혹은 “써야만 했던 이야기”로 읽는 것. ‘자서전’이라는 장르가 통용되기 위해서 은폐되어야만 했던 것들은 불러 모으는 하나의 작업이 되지 않을까.
|
|
|
|
|
|
|
19 |
소설을 빌려 시를 이야기한다 |
정**기 |
|
|
|
"시는, 소설이라는 자신의 바깥으로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고,
바로 그럼으로써 그 안의 의미를 다시금 물어보고자 한다.
시는 소설을 빌려 시를 이야기한다."
변주.
나는 나를 모른다
나는, 타인의 존재가 없다면, 나를 모른다
나는, 다른 이의 관심을 받지 않는다면, 나를 모른다
나는, 남을 통하지 않고서는, 나를 모른다
나는, 너의 말이 없이는, 나를 모른다
네가 없이는, 나는 나를 모른다
|
|
|
|
|
|
|
20 |
내가 보는 나, 남이 보는 나 |
월**병 |
|
|
|
:
1.
카메라를 손에서 놓기 시작한 것은 형사도 아닌데 매순간 기록하려는 사람들에게 질리면서부터였다. 조용히 차를 마시러 들어간 카페엔 쉴 새 없이, 찰칵 찰칵 대는 소리가 가득하고...... 싸이나 블로그에 자신의 일상을 일거투 일투족까지 올리는가 하면 자신의 사진을 파파라치컷처럼 찍어서 올리기도 하고. 뮤직 비디오의 주인공처럼 눈물을 흘리거나 좌절에 빠진 모습조차 아름답길 바라며, 그 모습을 노출하길 즐기는 정신병자들 사이에 우린 살아가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유아기적 성향을 버리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중성화 수술을 한 집고양이와 똑같다. 몸은 늙어가도, 마음만은 언제나 아기인. 어딜 거세당한 걸까. 오싹하다.
2. 필자
"필자"란 단어에 몸서리치는 사람들이 있다. "나"라는 말 대신에 객관적인 체 "필자는......"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기만이라고. 하긴, "나는" 대신에, "마괭이는 과자 먹고 싶어."란 말을 한다면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 친구들은 날 떠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저자들이 자주 쓰는 "우리는"이라는 말도 문제가 있는 단어가 아닐까. 내 글이든 남의 글이든 읽는 내내 찝찝하다.
3.
크로스오버 인문학- 최정우(아트앤스터디) 중 "자서전을 쓰는 인간은 나르시시트입니다." <사유의 악보> 6악장 나르시시스트를 위한 자기진단법을 언급하며, 덧붙인 말이었다. "나에 대한 글쓰기"를 즐기는 자는 나르시시트란 말에 반론의 여지가 없다. 멀리 갈 것 없이 컴퓨터만 켜면 다양한 행태의 자기애 흔적들을 만나볼 수 있으니까.
필립 르죈은 "자서전은 허구의 질서가 아닌, 거짓의 질서에 따른다."고 했다. 하긴, 어차피 본인 스스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내보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자신의 셀카와 남이 찍은 자신의 모습이 같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얼마 전, 염병최포토가 찍은 내 모습을 보고, 나 자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정도(?)였는데 말이다.
내가 아는 "나"와 남이 보는 "나"가 다른데 스스로 쓴 자신의 진짜 이야기따윈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자체가. 내가 보는 "나"는 크게 문제가 없는데, 어째 남이 본 "나"는 볼품없기 그지 없다.
|
|
|
|
|
|
|
21 |
그저 현재를 탈피하고 싶은 자의 비겁한 변명일 뿐인가? |
정**기 |
|
|
|
"성스러움이란, 어떤 엄숙한 제의 안에서 한 불연속적인 존재의 죽음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이들 앞에 드러난 존재의 연속성, 바로 그것이다."
바타유(Georges Bataille, 1897-1962)는 유한한 인간의 무한을 향한 열망으로 인해 죽음이 발생한다고 했다. 불연속적인 개체로서의 인간은 사후 세계, 즉 연속성의 세계로의 이행을 꿈꾸지만 '죽음'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희생 제의와 같은 형식을 통해 죽음으로 이끌게 되고, 나 아닌 다른 개체가 죽는 그 찰나에 우리는 연속성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폭력적인' 죽음은 이토록 필수불가결하다.
지금 우리는 죽음이 너무도 쉬운 세상에 살고 있다. 인간에게 '무한'의 경험을 선사해준다는 그 성스러운 죽음은 더이상 성스럽지만은 않은 것 같다. 고통이 너무 심하면 무감각해지듯, 잔인하고 자극적인 죽음이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그 심각성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가볍고 일상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다.
특히 '자살률 1위 국가'라는 타이틀은, 지금 사회에 남의 죽음을 통해 무한을 경험하는 대리만족을 넘어 자신 스스로 무한의 세계에 뛰어들겠다는 '용기 넘치는' 인간들이 늘어간다는 증거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어쩌면 무한에의 욕망보다 우월에의 욕망이 더 커져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이 경쟁 사회에서 돈 때문에, 사랑 때문에, 공부 때문에 생기는 열등감은 곧 스스로에의 폭력으로 쉽게 이어지고 만다. 연속적으로, 무한하게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이지만 이제는 무한하기보다는 우월하고 싶은 욕망이 인간을 더 깊이 지배해버린 건 아닌지.
이 지긋지긋한 경쟁 사회, 죽음이 너무도 쉬운 나약한 사회에서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 다시 등장하길 바라는 극단적인 기대마저 하게 된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은 열망, 모든 차이과 구별이 사라지고 하나로 뭉쳐있던 태초로 되돌아가고 싶은 바람, 그것은 그저 현재를 탈피하고 싶은 자의 비겁한 변명일 뿐인가?
|
|
|
|
|
|
|
22 |
조급증을 치료하고 불가능성을 즐기는 인문학 |
나**비행 |
|
|
|
음악과 철학은 다른 일이 아니다?
시대의 음울한 공기를 타고서 “인문학이 위기다”라는 얘기가 유행했다. 그 후로 최근엔 “치유의 인문학”을 목적으로 하는 대중적인 인문학, 철학 책이 인기가 높다. 이렇게 되니 ‘위기’에서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 인문학인지, 사람들인지, 둘 다인지가 헷갈린다. 아리송한 인문학과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정의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질문!
사유한다는 것. 철학한다는 것. 항상 그래왔듯이 아트앤스터디 <크로스오버 인문학>강좌 또한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됐다. 하지만 최정우 선생님은 “철학이란 영어로 Philosophy로서,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하며, 그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같은 모법답안을 되풀이 하지 않았다. 그는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정의’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정의’에 대한 질문”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던졌다. 앞의 정의는 ‘definition'이고 뒤의 정의는 ’justice'다. 사실 정의(definition)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
‘인문학의 위기‘를 대하는 그의 태도 또한 같다. “인간이라면 사유해야 한다”는 한탄의 목소리를 불편해하는 그는 “사실 인간에게 깊이 있는 사유를 해야 하는 ’당위‘는 없다”고 말한다. 문제는 “사유해야만 하는, 사유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다. 그는 ’누구‘와 ’왜‘ ’어떻게‘ 같은 것들에 천착한다. 그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누구의,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사유를 하는가? 왜 사유하는가?” 그리고, “타자가 어떻게 우리에게 사유를 요청(혹은 종용 또는 강요)하는가?” 심각한 지점은 ’정의(definition)'나 ‘당위’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왜’ 따위의 ‘상황’인 것이다. 이런 질문들만이 “철학이 현실과 맞닿을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 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최정우 선생님은 우리가 즐겨 분리시키고 호명하는 ‘시대’ ‘세대’ 같은 표현 또한 “강요되고, 요청되는” 것으로 여긴다. ‘그 시대’와 ‘이 세대’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시대가 바뀌고 ‘새로움’이 도래했다는데, 진짜? 그는 ‘오래됨’을 기피하고 ‘새로움을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의 “새로움에 대한 강박”을 지적한다. 이런 단어, 언어들에 대한 “느낌, 감정”은 유행처럼, 팬덤처럼 번진다.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성)의 ’새로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모더니티(근대성)를 ’오래된 것‘ ’우리가 잘 아는 것‘ 으로 착각하게끔 만드는 것과 같다.
음악과 철학은 다른 일이 아니다?
최정우 선생님의 사유에서 가장 중심적 역할을 하는 부분은 ‘분류’에 관한 것이다. 강좌 제목 <크로스오버 인문학>, 강좌의 바탕이 되는 책제목 <사유의 악보>. 그는 ‘정의’내리기를 즐기지 않듯 ‘분류’하는 것을 삐딱하게 바라본다. 그는 그의 표현대로라면 “이종교배시키고, 잡종의 창궐”을 시도하고 있다. 책 제목 <사유의 악보>에 대해서는 “그저 단순한 비유만은 아니다”라며 음악과 철학이 “왜, 어떻게 분류되었을까?”하는 ‘도발적’ 질문을 하는 것이다.
최정우 선생님은 밴드를 하고 작곡을 한다. 그리고 철학하고 글을 쓴다. “옛날의 철학자 ‘어른’들은 아마 나를 딴따라라고 했을 것”이라는 그의 ‘정체성’이 음악과 철학이 다른 것으로 분류되는 지점을 문제 삼으려는 급진적 사유를 가능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가장 철학적인 사유가 아닌가? 나 또한 ‘분류된’ 일들의 경계에서 고민하고 남감해하는 ‘잡종’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이런 ‘발견’(?)이 신선하기도 하고, 그보다 더 반갑기도 하다.
그는 “음악과 글쓰는 것, ‘이 둘은 다른 분야의 일이다’라는 생각을 가장 경계”하는 것이다. 철학은 언제부터 철학이며, ‘철학자가 하는 것’이었고, 음악은 ‘어제부터 누가’ 음악이라 이름 붙였으며 ‘음악가가 하는 것’이 된 걸까. 글이 사유 그 자체가 아니듯 악보도 음악이 아니다. 글과 악보는 하나의 “기호, 표기법, 약속”이다. 글이라는 기호로 담아낼 수 없는 사유의 부분이 있듯, 악보라는 분절된 기호가 우리의 귀에 하나의 “연속체”로서 들리는 음악을 나타내주진 못한다. 또 글로 담아내어 표현한 ‘사유’로 불리는 총체적인 ‘무언가’와 그가 음악으로 표현하는 ‘무언가‘가 분절된 다른 것으로부터 왔다고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최정우 선생님은 분절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감각적으로 분절되지 않는 (우리가 음악을 전체로서 듣지, 악보에 표기된 것처럼 하나하나 나누어 듣지 않듯) 하나의 ‘덩어리(연속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것은 랑시에르가 말한 ‘감각적인 것의 분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분할되지 않는 감각적인 것을 분할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 보여도 볼 수 없고, 들려도 들을 수 없는, 그래서 생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게 되는 것들. 같은 언어의 한 종으로 우리 주위에서 맴도는 영어와 베트남어. 이 둘을 우리가 듣게 되는 방식, 또 말하게 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하나는 동경하는 방식으로, 다른 하나는 희화화하는 방식으로.
조급증을 치료하고 불가능성을 즐기는 인문학
결국 우리는 분류돼있는 어떤 ‘체계’ 속에서 살고 있고, 우리가 감각하는 것은 체계 안에서, 정치적으로, 권력과 관습에 관련된 채로, 나눠져 있다. 우리가 아는 ‘분과’들 또한 당연하지만, 새삼스럽게도 정치적으로 결정된 ‘제도’일 뿐이다. <discipline : 분과, 학과, 훈육> 우리가 분류하는 방법 자체가 잘 ‘훈육’된 결과물인 것이다.
‘훈육된’ 분과, 분류, 제도들을 전복적으로 사유하는 것. 애매하고 모호한 경계선들의 불명확성을 참아내는 것.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보이는 선택지들 앞에서 빨리 선택하고 싶어 하는 조급증을 치료하는 것. 분류할 수 없고, 선택할 수 없는 것들의 ‘불가능성’이 갖는 가능성을 무모하게도 밀어붙이는 것. 이러한 것들이 <크로스오버 인문학>이 제시하는, 당위가 아니라 정의를 위한, 인문학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
|
|
|
|
|
|
|
23 |
아리 폴만의 선택은 마치 알튀세르의 그것과 흡사하다 |
정**기 |
|
|
|
나는 학창시절에 유독 자서전을 즐겨읽었다. 자서전은 당연히 '진실'을 말한다고 믿었고, 남의 사생활에 대한 관음증적 호기심이 있었던 것도 같다. 또한 자서전을 낸다는 것 자체가 저자의 성공, 인생에서 하나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여겼기에, 저자가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과 진실함을 보여주리라는 기대감이 높았다.
'성공'에 대한 강박증을 가진 우리 사회에서, 이토록 '진실된' 자서전은 내게 '성공적인 미래'를 위한 훌륭한 지침서가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머리가 클수록' 자서전을 점점 믿지 않게 되었다. 자서전이 그 장르 자체로 '진실'이라던 나의 믿음은 착각임을 어느 순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서전의 성공 여부는 결국 '자기 포장 능력'에 달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커진 이상, 나는 이제 '배반의' 자서전을 읽지 않게 되었다.
텍스트를 '자서전'이라고 선언할 것인지 '소설'이라고 선언할 것인지는 결국 저자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필리프 르죈(Philippe Lejeune)이 말했던 것처럼, 자서전의 범주에 속하는 것은 "허구(fiction)의 질서가 아니라 거짓(mensonge)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거짓의 질서라는 것은 텍스트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화자로서, 주인공으로서 얼마나 '진실하게' 글쓰기에 집중하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다. 이미 허구임을 전제하고 읽는 소설과 달리, 자서전은 그 사실성 여부를 독자가 따질 수가 없는 장르인 것이다.
"자서전의 문제는 그 자체로서보다는 오히려 소설이나 여타 장르와의 비교하에서만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믿게 만들기'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의 자서전은 이 지점에서 독특한 문제를 제기한다. 착란 상태에서 아내를 살해하고 금치산자 판정을 받았던 알튀세르는 "자서전적 글쓰기의 사법권과 서명의 저작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바로 그 시점으로부터 오히려 그 자신의 자서전적 글쓰기를 감행"했던 것이다. 가장 진실되지 못할 비정상적인 '광인'의 상태에서 가장 진실된 자서전을 쓰게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을 자서전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가장 진실한 자서전을 쓰게 되는 역설을 보여준다.
가장 진실되지 못할 상태에서 가장 진실된 것을 보여주는 모순. 영화 <바시르와 왈츠를 (Waltz with Bashir)>은 이 난해한 상황에 마치 해결사처럼 내 앞에 등장한 영화였다. 영화 장르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즉 '허구'적인 애니메이션을 통해 '진실'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이다.
감독이자 주인공이자 화자인 아리 폴만은 레바논 전쟁 당시 자신이 이스라엘 군으로 활동했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려낸다.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가장 진실되지 못할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가장 진실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결심한 아리 폴만의 선택은 마치 알튀세르의 그것과 흡사하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의 형식적 특성을 통해 숨겨진 진실을 재구성하는 아리 폴만의 고백록은 불편한 진실을 어떻게 가장 진솔하게 드러낼 것인가의 문제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다가가지 않았나 싶다. 알튀세르의 자서전이 "시작부터 그 자체로 이미 '불가능성'의 자서전이라는 역설적 위치를 점하게 된" 것처럼, 아리 폴만의 다큐멘터리 역시 불가능성의 위치에 서서 그 아슬아슬한 경계의 모험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
|
|
|
|
|
|
24 |
그 어떤 말보다 더 강렬했던 건 단 몇 마디의 음악이었다 |
정**기 |
|
|
|
어느 술자리에서 오랫동안 잠적하고 있다가 최근 '아리랑'이라는 영화로 이슈가 된 김기덕 감독 이야기가 나왔다. 우선, 한국에서 김기덕이라는 감독의 위치는 매우 특이하다. 가장 한국적인 작품을 찍는 감독임에도(적어도 내 생각에는) 한국에서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해외, 특히 유럽 지역에서 인정을 받는 감독이다.
한국에서는 영화의 적나라함이나 자극성 때문에 일부러 인정을 안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재미있는 것은 오히려 해외에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한국에서도 그나마 인정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해외 영화제에서의 수상 '쾌거'를 거두고서야 국내 관객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황당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인터뷰에서 김기덕 감독이 말했다. '사실 관객들이 좋아하는 상업영화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김기덕 감독은 자신을 외면하는 한국을 일부러 조롱하려한걸까? '세계적인'이라는 수식어에 무척이나 민감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에 일침을 가하고 싶었던 걸까? '세계 문학'을 주제로 시작된 오늘 수업을 듣다가 떠오른 나의 생각이었다. '세계적'이라는 표현의 강박에 시달리는 우리의 의식을 되새겨보며, '징후적 독해'를 시도해보려 한 인터넷 기사를 살펴보았다.
김 감독의 영화는 국내 영화계와 정부에 대해 적나라한 비판을 담았기에 국내에 개봉이 될지조차 미지수인 반면 해외에서는 이미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 칸 영화제 수상까지 기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고, 기사의 마지막 문구가 나의 표적이 되었다.
"해외 바이어들의 관심도 상당하다. 베니스 영화제,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바 있는 김기덕 감독은 이미 세계 영화제가 인정하는 한국의 거장이자 스타 감독이다."
세계 영화제? '세계'라는 수식어에는 과연 어느 나라가 속할 수 있을까? 국내 반응과 상관없이, 김기덕 감독은 '유럽에서 인정받았으므로' 한국의 거장이자 스타 감독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국내에서는 외면 받더라도 유럽에서 인정받으면 됐다는 위로일까? 징후적 독해는, 지극히 평범해보이는 말 한마디조차도 알고보면 뿌리깊은 사대주의에 젖은 무서운 독약임을 깨닫게 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라는 말, 그것은 한국적인 것을 찾기도 전에 세계적인 것부터 우선 강조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성급함이었다.
김기덕 감독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내 영화가 잔인한 것은 내가 돌려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비난했던 영화의 그 모든 잔인함과 적나라함은 결국 우리가 만들어놓고 우리 스스로 외면하고 싶었던 감춰둔 진실일지도.
보편성과 특수성, 시대적 편재성, 이데올로기, 헤게모니, 포스트모던 등등등 수많은 단어들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대기 시작할 즈음, 바르톡(1881-1945)의 현악 사중주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흔히 듣던 클래식 음악과는 확실히 다르다. 조화롭고 매끄러운 '보통'의 클래식과 달리, 뭔가 어긋난 듯 어색한 듯 불편한 듯한 악기들의 조합이 단숨에 '현대 음악'임을 알 수가 있다.
그 '불편한 화음'이 지속되다가 중간에 갑작스레 '편안한 화음'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 지점이 바로 하이라이트였다. 침투, 개입, 해체 그리고 이어지는 확장과 역전. 익숙함 속 낯섦과 낯섦 속 익숙함이 동의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 익숙함이 '고정관념' '선입견'이 될 가능성, 그리고 낯섦이 새로운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그 가능성들은 무심하게(con indifferenza), 점점 느리게(rallentando) 드러나야 한다. 발상의 전환, 깨달음의 순간은 그렇게 문득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
Robert Bereny <Portrait of Bela Bartok 1913>
무수히 많은 철학자들은 왜 그토록 예술을 찬양했을까. 고통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삶 속에서 유일한 구원을 예술이라고 했던 쇼펜하우어 철학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인 '존재'가 위장되지 않은 채 드러나는 탁월한 영역을 예술이라고 본 하이데거 도구적 이성에 의해 억압받는 현대 사회는 예술이 그 진리로써 일깨워준다고 주장했던 아도르노 바르톡의 현악 사중주를 듣는 순간 깨달았던 건 그 많은 철학자들이 진리이자 구원으로 여겼던 예술의 위대함이었다. 그 어떤 말보다 더 강렬했던 건 단 몇 마디의 음악이었다.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