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스오버 인문학

: 지적 해방을 위한 가이드
『사유의 악보: 이론의 교배와 창궐을 위한 불협화음의 비평들』 (최정우, 자음과모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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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 차
  • 제 목
  • 시 간
  • 보 기
  • 1교시 - 서곡, 사유의 악보 / 전체 강의 개요 I
  • 25분
  • 2교시 - 서곡, 사유의 악보 / 전체 강의 개요 II
  • 24분
  • 3교시 - 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 / 세계문학의 이름으로 I
  • 25분
  • 4교시 - 문학적 분류법을 위한 야구 이야기 / 세계문학의 이름으로 II
  • 27분
  • 주요내용
  • -정상(正常, 情狀, 頂上)
    -클로스터로서의 사유의 악보
    -‘아톰의 철학’은 철학?
최정우 (작곡가, 비평가, 『자음과모음』 편집위원)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불어불문학과에서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시즘 문학과 유물론적 철학'에 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데이비드 헤어의 희곡 『철로The Permanent Way』를 번역하고, 무용 <육식주의자들>의 대본을 썼으며, 현재 계간지 『자음과모음』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저서
『사유의 악보』, 『알튀세르 효과』, 『아바타 인문학』, 『현대 정치철학의 모험』
 
  • 번 호
  • 제 목
  • 작성자
<리뷰> 철학적 테제들의 음악적 사상사 서현정
<리뷰> 분류법을 분류하기 - 해체론과 미학적 체제, 그리고 문학 김미성
우수 인간이라는 악보 권*주
인간이라는 악보의 몇 악장 쯤 건너 온 시간들이 갑자기 누추해지고 가벼워집니다. 사유라는 숨은 음표들을 빗소리 들으며 건반이듯 두들겨 보았지요. 시간이란 것이 원래 묵묵한 것이라 대답이야 기대하지도 않았지만요. 말이 있어 생각이 표현되니 때때로 궁기를 면한다 해도...
우수 섹스와 죽음과 종교를 넘나드는 역설적인 ‘성스러움’ 나**비행
고통과 희열이 일치하는 “성의 질서”

우리는 사실 우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바로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근대 합리주의의 ‘단정한 옷’을 입은 사회에서 태어나 배우고 익힌 우리는 ‘이성’, ‘도덕’, ‘과학’이 삶의 깊은 뿌리가 돼준다고 믿는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인간은 합리적 동물’, ‘생존 경쟁’ 같은 슬로건이 엄마의 품속처럼 익숙하다. 그러다 익숙한 것이 낯설어질 때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해야 한다”고 하는 당위적 믿음을 깨뜨리는 사건이나 사람이 나타나면 ‘비이성’ ‘광기’ ‘정신병’ ‘야만’이라고 이름을 붙여야만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모두가 말하지 않은 것

그런데 바타유는 그런 ‘비이성들’을 인간의 본질적 욕망으로 본다. <아트앤스터디> ‘크로스오버 인문학’에서 최정우 선생님은 이런 바타유를 “유물론의 역사에서 살짝 비켜있는 독특한 위치의 유물론자”로 설명한다. 그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에서 ‘무시당한’ 지점들을 새삼스럽고 낯설게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종교의 냄새를 폴폴 풍기는 ‘성스러움’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을 강조하는 ‘역설’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차이의 핵심은 ‘생산 방식’의 문제다.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투쟁해서 얻을 것인지, 만인이 공동으로 생산을 통제해서 얻을 것인지의 문제. 결국 체제로 연결 되는 ‘방식’의 문제다. 그런데 바타유가 질문하는 것은 ‘방식’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생산’의 문제다. 왜 ‘생산’만 고민하느냐는 것. 자본주의, 공산주의 모두 ‘생산’의 문제에만 천착하다보니 바타유가 생각하는 인간의 ‘다른 욕망’은 자연스럽게 없는 것처럼 돼버렸다.

바타유가 말하는 인간의 질서는 두 가지다. 하나의 ‘속의 질서’, 또 하나는 ‘성의 질서’이다. ‘속의 질서’가 바로 저 ‘생산’의 문제를 비롯한 노동, 교환, 도덕, 일상의 세계다. 자본주의의 제도들은 인간의 모든 행동 영역이 ‘속의 질서’를 목적으로 갖길 원한다. 우리가 휴식을 가질 때 ‘재충전’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것처럼 우리의 휴식과 ‘멈춤’들도 생산력의 증대를 위한 도구로만 의식되는 것이다. ‘소비’마저도 사회의 재생산을 위해 권장되고 있다. 하지만 바타유는 또 다른 ‘소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섹스와 죽음과 종교를 넘나드는 역설적인 ‘성스러움’

바타유의 ‘성의 질서’는 목적 없는 것, 이유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질서에서는 “~을 위해서”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을 동물들에 비유하면서, 생존 본능으로 먹고 번식해 어떻게든 삶을 건강히 오래 유지하려는 존재라고만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은 동물의 본능과는 전혀 다른 부분들도 가졌다. 동물들과는 달리 제 생존을 파괴하는 ‘자살’이라는 것을 하는 독특한 존재이지 않나? 또 인간이 하는 섹스는 종족 번식의 의지를 넘고 있지 않은가? 종족 번식을 목적으로 하는 섹스보다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섹스가 더 흔하다.

바타유가 말하는 ‘소비’는 이런 이유 없는 소진, 탕진, 유희 같은 것이다. 체제와 제도는 ‘생산’만을 좇으며 돌아가지만, 인간의 욕망과 삶은 어쩌면 이유 없이 모든 것을 소진할 때가 필요하다. 나를 생존시키기보다 죽여 버리는 것이 간절할 때가 있다, ‘무’로 만들어버리면서 나를 넘어선 ‘성스러움’과 합일하는 것이다. 모든 에너지를 탕진해버리며 그 극한 순간에 맞닿는 초월적 세계와의 만남.

문제는 인간의 욕망은 초월을 바라면서 초월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질서와의 ‘합일’의 욕망하는 이유는 바타유의 표현대로라면 인간이 분리되어 고독한, ‘불연속적인 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선 ‘무한성’을 경험하길 원한다는 것.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유한한 자신의 몸의 껍데기 안에서만, 불연속적인 개체로 계속해서 남길 원하면서만, ‘무한성’과 ‘연속성’에 대한 경험을 하고 싶어 한다. 욕심이 많은 것일까, 소박한 것일까.

결국 ‘저 삶’이 아니라 ‘이 삶’으로 돌아온다. ‘성스러움’을 제 몸을 통해서만 욕망한다는 바타유의 이런 독특한 유물론은 인간을 동물과 같은 욕망을 지닌 존재로 보는 시선과 인간의 삶(몸)을 내세(정신)의 도구로 보는 종교적 시선 모두를 교란시킨다.

‘연속성’을 ‘불연속적인 몸’을 통해서만 경험하려는 인간의 여러 가지 다르지만 비슷한 시도들: 자신과 비슷한 존재가 ‘죽음’을 경험하는 것을 지켜봄으로 그 ‘찰나’만이라도 연속성을 경험하는 ‘희생제의’, 잔인한 방식의 공개 사형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 고통인지 희열인지 구분하기 모호한 표정의 사형수, 마담 에르와르다 소설의 “도끼에 맞은 돼지”의 모습으로 변하는 극한의 오르가즘, 성 테레사의 종교적 희열에 찬 표정.

섹스와 죽음과 종교를 넘나드는 무언가에 대해 최정우 선생님은 “고통과 희열이 극단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지점이라고 한다. 무언가 잡힐 듯 안 잡히는 하나의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것이 바타유의 ‘성의 질서’다.

우수 '건강한' 어지러움과 '희망적인' 불안감을 느껴보며 정**기
남이 있어야 내가 있고 꼴찌가 있어야 1등이 있고 실패가 있어야 성공이 있고 좌절이 있어야 희망이 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고 지낸다.

우리가 지겨우리만치 남발하고 있는 '진실'이라는 것도 그렇다. '거짓이 없는 사실' 혹은 '마음에 거짓이 없이 순수하고 바름'이라는 사전적 정의만 보더라도, 결국 '거짓' 없이는 '진실'이 존재할 수가 없음을 공감할 수밖에 없다. '아름다움'도 결국 아름답지 않음 혹은 추가 있어야만 존재하지 않겠는가? 이런 아주 단순한 논리로, 나는 움베르토 에코의 '미의 역사'에 이어 뒤늦게 '추의 역사'를 당당하게 구매했다. (사실 뭐든 꼭 '짝 맞춤'을 해야한다는 나의 은근한 강박감 때문이었을텐데)

하이데거가 그토록 강조했던 '존재'라는 존재 역시 그 진정한 모습은 오히려 '자기 숨김'에 있다고 했다. 어떠한 있음도 자기 없앰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그의 주장은 '극단끼리 서로 통한다'는, 단순하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진리를 새삼 일깨워준다.

예고된 죽음을 안고 사는 삶, 죽음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삶, 그리고 결국 폭력이 폭력을 낳아야만, 폭력의 순환 속에서라야만 모두가 살아갈 수 있다는 '카눈'의 역설적인 논리는 아주 단순하다고 여겼던 사실이 그렇게 단순하게만 생각할 것은 아님을 징후적으로 경고한다.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비폭력을 통해서 평화를 추구하겠다는 '순진한' 믿음은 어쩌면 너무도 '무지한' 발상일지도 모른다. 폭력의 극단에는 과연 우리가 기다리던 평화가 있을까? 폭력과 법이 서로 반대말이 아닌, 같은 내용을 단지 다른 형식으로 드러낼 뿐이었다는 사실, 결국 우리는 폭력 속에 있어야만 평화를 말할 수 있다는 외면하고 싶은 사실, 평화라는 권력적이고 가식적인 구호로 폭력을 강제로 덮어버린, 아니 오히려 폭력을 더욱 부추긴 세상을 우리가 여태껏 살아왔다는 사실이 나를 충격에 빠뜨린다.

점점 커져가는 고통 속에서 힘겹게 병을 다스리기보다 손쉽게 진통제로 외면하고 마는 무지하고 위험한 자기파괴의 방식을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며 편하게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본다. 그리고 이 폭력과 비폭력의 뗄 수 없는 관계의 그 모호한 경계에서 우리는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 대안을 고민해보다가, 문득 영화 가 떠올랐다. 수많은, 끝없는 폭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주인공은 너무도 가녀린 약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어머니의 이름으로' 당당히 걸어나간다. 잔인한 폭력의 순환이 빚어낸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담담하게 품는다. 그 모든 피의 흔적을 '모성'으로 조용히 닦아낸다. 그 모든 폭력은, 결국 그녀 안에서 잠식되고 만다. 그리고 그녀가 더 큰 힘으로 숭고히 승화하는 걸 우리는 보게된다. 그녀를, 어머니의 이름을 기억함으로써 폭력을 잠재우고 '평화롭게' 나아갈 수도 있다는 한 줄기 희망을 품어본다. 정답은 아니겠지만, '나름의 대답'은 될 수 있을거란 나의 믿음이다.


== 2011. 5. 23.

자꾸 정답부터 찾으려고 하는 '참을 수 없는 태도의 전근대성'을 억누르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혼란의 파도 속 '건강한' 어지러움과 '희망적인' 불안감을 느껴보며

4 섹스와 죽음과 종교를 넘나드는 역설적인 ‘성스러움’ 김*호
5 그 어떤 말보다 더 강렬했던 건 단 몇 마디의 음악 이*정
6 <은어낚시통신>이 레저 코너에 분류 배치된 현실 양*진
7 '정답'이 아닌 '나름의 대답'을 얻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박*정
8 파괴적인 듯 보이지만 결코 파괴는 아닌, 새로운 듯 보이지만 새로운 것은 아닌 이*주
9 시는 소설을 빌려 시를 이야기한다 백*영
10 그저 현재를 탈피하고 싶은 자의 비겁한 변명일 뿐인가? 진*학
11 내가 보는 "나"는 크게 문제가 없는데, 어째 남이 본 "나"는 볼품없기 그지 없다 최*훈
12 “광인의 자서전”은 불가능한가? 나는 무슨 장르인가? 장*아
13 조급증을 치료하고 불가능성을 즐기는 인문학 전*민
14 아리 폴만의 선택은 마치 알튀세르의 그것과 흡사하다 이*민
15 차이를 차별로 보지 않고, 둘의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기란 조*영
16 '건강한' 어지러움과 '희망적인' 불안감을 느껴보며 경*빈
17 "오아시스는 여기 없는데 다들 신기루에 홀려 미친 듯이 달려간다" 윤*경
18 광인의 자서전은 불가능한가? 나** 비행
19 소설을 빌려 시를 이야기한다 정**기
20 내가 보는 나, 남이 보는 나 월**병
21 그저 현재를 탈피하고 싶은 자의 비겁한 변명일 뿐인가? 정**기
22 조급증을 치료하고 불가능성을 즐기는 인문학 나**비행
23 아리 폴만의 선택은 마치 알튀세르의 그것과 흡사하다 정**기
24 그 어떤 말보다 더 강렬했던 건 단 몇 마디의 음악이었다 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