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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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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둘러싼 달콤하고 치명적인 것들 |
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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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악은 달콤하고 치명적으로 미혹하기 마련이죠. 선이나 지혜, 덕에 대한 강좌는 많이 있는 반면에 악에 대해 조명한 강좌는 드무네요. 희소성이 있는 강좌인만큼 열심히 꼼꼼하게 잘 들었습니다. 어렵고 까다로운 주제를 잘 풀어내주신 구연상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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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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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에 중요한 선악개념 |
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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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개념만큼 인간생활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개념이 있었을까요? 사회를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그것을 방해하는 행위에 대한 엄격한 제재가 필요했고 처벌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기준이 필요했습니다. 죄는 법,율법을 어긴 행위이지만 법이 모두 선하다고 볼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보다 추상적이고 근원적인 악개념이 따로 존재했습니다 악의 개념사와 구연상교수의 독자견해로 풀어가는 강의입니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편집한 강의록이 일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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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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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혹스러운 물음'에 대한 '합리적 대답'> |
c**rryjubi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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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상 선생님의 <악에 대한 철학적 고찰> 1주차 수업 후기입니다.
<'당혹스러운 물음'에 대한 '합리적 대답'>
“심영신의 최근작들을 바라보노라면 앙리 마티스의 회화가 떠오른다. … 화면 위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굵은 백색의 선묘이다. 이로서 자연의 어떤 식물 형태를 간명하게 암시하고 있는데, 정밀한 재현으로서가 아니라 대상의 몇 가지 특성만을 축약하여 X-Ray로 투사하듯 묘사하고 있다. 구불거리는 선은 또한 바탕 화면의 색들과 하나로 작동하여, 마티스의 회화에서처럼, 데생과 색채를 융합하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보인다. 여기에 선과 색의 갈등은 조금도 없다. 작가는 탁월한 회화적 감각으로 두 조형 요소를 상호 호응하는 조화의 관계에 놓고 있다.” - 서영희 (서양미술사, 미술평론)
http://blog.naver.com/lastinlove12?Redirect=Log&logNo=150129995858 링크를 따라가시면 그림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내가 폴 리쾨르를 만난 건 이 한 점의 그림에서였다. 작가는 자연 속에서 씨방이라는 존재를 끌어와 자기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자아정체성을 찾는다. 이름 없는 들꽃의 자궁이 해내는 막중한 임무에 강렬한 빛과 색들로 찬사를 보내며 작가는 여성인 작가 자신의 또 다른 자아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타자에게 반영하며 자아의 모습을 비추어 내는 ‘자기 동일화’가 폴 리쾨르의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 Soi-même comme un autre》(1990)에 언급된다. 폴 리쾨르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자기-타자에 대한 열린 존재론적 사유를 한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타자와의 관계맺음 속에서 얻는 '자기 동일성’을 성립시키게 된다. 다른 사람 혹은 다른 대상과의 얽힘 속에서 확립되는 이 자기동일성은 보다 값진 주체 확인이 될 수가 있다. 이러한 과장을 통해 작가는 구체적인 자기 재현을 통해 자화상을 그리지 않고서도 자아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후 망각의 공간속에 있던 이 현상학적 철학자와 구연상 선생님의 강의에서 재회하게 되었다. 이번에 만난 폴 리쾨르는 좀 더 근원적인 물음은 던져주었다. “악은 무엇인가?” 리쾨르는 악을 ‘성스러운 것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위협적 현상’으로 정의한다. 그에게 있어 가장 성스러운 것은 ‘신’으로, 악의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답은 곧 그의 종교적 믿음과 연결된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인간이 고통의 책임자로 등장한다. 사람이 마음을 잘못 먹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고, 그런 인간의 악에서 고통이라는 악이 비롯되었다. 악은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리쾨르는 ‘악의 개념’을 현상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이러한 원죄의 신화 밑에서 ‘죄에 대한 고백의 현상’을 끌어 올린다. 1. 죄의 고백 서양의 전통은 ‘죄의 고백’을 통해 ‘악’의 실재를 발견했다. 죄의 고백은 ‘악의 상징’으로서 ‘악’을 문화적-역사적-언어적으로 드러낸다. 고백을 강요당하면 실존론적인 고민을 하게 된다.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친구가 “왜 그 사람을 좋아해?”라는 질문을 한 후 비로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왜 하필 그 사람이지? 이 사람이어야 하는 이유가 뭐지?’ 서구적 사고는 모든 질문에 답을 요구한다. 즉,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좋아’라는 로맨틱한 답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유 없는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죄를 고백한다는 것 또한 죄의 의미를 묻게 되는 것과 같다. 마음속의 느낌을 말로 뱉음으로써 객관적으로 형태화 하고, 구체화 시킬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던 시간 속에서 벗어나 서서히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의미를 물음으로써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게 되었다. 신화는 우리에게 원죄에서 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나님이 인간을 저버린 것이 아니라고 답해준다. 사람이 죄를 지어 신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체험에 대한 고백은 죄에 대한 ‘당혹스러운 물음’에 대한 ‘합리적 대답’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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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罪)와 악(惡)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고 근원적 악을 탐구하다 |
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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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좌는 분명한 것 같으면서도 모호한 '악'의 개념을 동서양 철학과 문학 작품을 통해 전방위적으로 고찰합니다. '죄는 법/율법을 어긴 행위'이지만, '악은 근원적인 것'이라는 경계가 모호하던 두 개념을 명확히 정리해준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구연상 교수님의 독자적인 견해로 풀어가는 악의 개념사는 철학과 역사를 '악'이라는 렌즈를 통해 재해석하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정성스럽게 편집한 강의록도 매우 훌륭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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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악 개념을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새로운 정의 |
최*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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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가 악을 이기적 욕심에서 비롯된 이성의 명령 거부로 규정한 것을 되짚어보고, '돌이킬 수 없는 몹쓸 짓'으로서 '보다 나은 삶의 가능성을 짓밟거나 빼앗아 가는 행위'로 새롭게 규정하는 시각이 날카로웠습니다. '행위 법칙의 악'에서 '관계의 악'으로 나아가는 교수님의 해석 덕분에 현실 속의 악행을 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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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철학에서 악(惡)의 근원을 찾다: 인위(人爲)와 무위(無爲) |
박*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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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에서 다룬 노자 『도덕경』과 성리학 『대학』을 중심으로 한 동양 철학의 악 개념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악을 '하늘이 싫어하는 것'이자 '억지로 이루는 인위(人爲)'와 '제몫(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동양의 시각은 서양의 자유의지 개념과는 다른 깊은 통찰을 주었습니다. 천지도(天之道)와 인위의 대비를 통해 악의 근원을 살핀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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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고백, 흠(欠), 금기(禁忌) 등 성스러운 것과의 단절로서의 악 |
이*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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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리쾨르의 철학을 바탕으로 악을 '성스러운 것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는 위협적 현상'으로 정의한 1, 2강의 내용이 좋았습니다. 흠(欠), 금기(禁忌), 죄(罪)라는 상징 개념을 통해 악의 실재를 문화적, 역사적, 언어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이 매우 체계적이었습니다. '죄의 고백'이 당혹스러운 물음에 대한 합리적 대답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실존적 고민에서 비롯됨을 알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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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하고 까다로운 주제, 다소 깊이가 부족합니다. |
오*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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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라는 어렵고 까다로운 주제를 다루었음에도, 칸트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되살피는 과정이 너무 일반론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기대했는데, 개략적인 개념 설명에 그친 부분이 있어 아쉬웠습니다. 희소성은 있지만, 학문적 깊이가 다소 부족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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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철학적 의미를 되새겨준 교수님의 통찰 |
최*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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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중에 언급된 '않'이라는 단어의 존재론적 의미나 '죽어 싸다'의 '싸다'의 의미를 너무도 쉽게 그 정곡을 찌르셨을 때 거의 충격적이었습니다. 교수님은 그 나라 말의 철학적 본래 의미를 정확하게 집어내주는 진정한 우리나라의 철학자이십니다. 본격적인 우리말의 철학적 작업 강좌가 아님에도 우리말의 깊이를 느끼게 해준 점에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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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악 개념에 대한 비판적 성찰 |
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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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모든 실체는 선하다'는 전제와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잘못 사용된 것'이라는 주장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후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인간이 오만해지고 악을 저지르는 시발점이 신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저버리고 자기 자신만의 왕국을 구축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도발적 사유가 좋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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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쓸'이라는 낱말의 새로운 뜻매김 |
윤*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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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에서 악에 대한 새로운 뜻매김으로 제시된 '몹쓸'이라는 낱말의 뜻 넝굴이 흥미로웠습니다. '악함은 나쁨과 다르다'는 설명과 함께, 본디 모습의 빼앗김과 저지레의 성격으로 악을 규정하는 시각은 매우 독창적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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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탁류』와 영화 「아저씨」 분석이 부족했습니다. |
김*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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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소개에 채만식의 『탁류』와 한국영화 「아저씨」 속 악의 모습을 구체화하고자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지만, 실제 강의에서는 문학/영화 작품 분석이 매우 간략하거나 후반부에 집중되어 아쉬웠습니다. 사례 분석을 통해 '악의 일어남의 얼개'를 더 생생하게 보고 싶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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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철학의 '천명(天命)'과 성스러움과의 관계 |
서*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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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에서 동양철학의 도(道)와 하늘이 시키는 일(천명)을 성스러운 길과 연결 지어 설명한 것이 좋았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을 통해 악을 하늘의 질서를 거스르는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서양 종교적 악 개념과 비교하며 철학적 사유의 넓이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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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맞서기 위한 '악의 발견술'에 대한 관심 |
한*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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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강에서 다룬 악에 맞서기 위한 '악의 발견술'에 대한 논의가 매우 실천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악을 부추기는 '마음의 뿔'을 인식하고, '보다 나은 가능성을 앗아가 버리는 악'에 미리 대응하기 위한 방법론적 성찰이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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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에 나타난 자기 소유의 문제 연결 |
박*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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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타난 자기 소유의 문제를 악 개념과 연결 지어 설명한 부분이 좋았습니다. 현대 윤리와 전통적 악 개념을 비교하며 현실 속 인문학적 사유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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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가 너무 길어 집중하기 힘들었습니다. |
이*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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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3시간 18분의 긴 강의 시간과 한 교시당 25분 내외의 분량 때문에 중간중간 집중력이 떨어졌습니다. 내용이 워낙 무겁고 밀도가 높아서 짧게 끊어 듣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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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애착'과 '눈의 악용'에 대한 해석 |
최*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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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가 악의 근거를 무지, 무능력, 그리고 애착에서 찾았고, 눈(eye)의 악용을 예로 든 해석이 인상 깊었습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사물에 대해 탐욕을 지님으로써 악이 출현한다는 설명이 와닿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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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징악의 악 개념, 본래적 권리의 빼앗김 |
김*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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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에서 권선징악의 악 개념을 '본래적 권리를 앗아가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 좋았습니다. 최한기의 '화(禍)' 개념과 연결하며 악함이 나쁨과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구분해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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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상 교수님 강의 추천합니다 |
최*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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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상 교수님의 한 강좌만 들어도 교수님이 얼마나 성실한 학자이신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철학이 주어진 사회에서 해야할 역할 중 하나가 그 나라 말의 철학적 본래 의미를 정확하게 집어내주는 것으로 볼 때에 구연상 교수님은 진정 우리나라의 철학자이십니다. 악에 대한 고찰과 성찰은 물론 저의 악을 보는 시야를 잘 정리하게 해 주었습니다. 본격적인 우리말의 철학적 작업 강좌는 아니었지만, 예를 들면,'않' 이라는 단어의 존재론적 의미는 거의 충격적이었고, 죽어 '싸다'의 싸다의 의미도 너무도 쉽게 그 정곡을 찌르셨습니다. 강의록도 교수님의 성의가 물씬 베어 있습니다. 부디 교수님의 학문이 우리나라의 철학을 발전시키게 되는 학문적 분위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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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악 |
박*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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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이라는 개념은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모든 인간에게 선과 악이 다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도 마찬가지겠죠?? 제 마음도 들여다볼 수 있는 강의여서 좋았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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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은 악한가? |
손*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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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악하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도대체 저 사람들은 왜 그럴까 의문을 갖게 되는데요. 왜 사람은 악할까?를 고민하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이 강의를 들었어요. 단순히 심리학적인 게 아니라 악에 대해서 철학적이고 깊이 있게 고민할 수 있어서 듣기 잘했단 생각이 듭니당.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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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 대한 철학적 고찰 |
김*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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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주제로 한 강의. 인문학과 악은 완전 반대인 거 같은데,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강의였어요.죄와 악, 그리고 금기에 대한 내용들을 공부하니 인간에 대한 이해도 넓어지는 것 같군요.ㅎㅎ 좋은 강의 감사드려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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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강의록에 대해서.. |
오*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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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록 정말 좋습니다. 물론 강의도 좋아요. 철학과 역사를 '악'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재해석하고 분석하는 게 매력적입니다. '악'의 개념이 시대와 철학변천사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게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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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악이라는 개념 |
권*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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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가 모호하던 두 개념을 잘 정리하였습니다. 세상 하고 많은 물건중에 하필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저지른 모든 악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할 지 아득합니다. 인간의 본성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자연물이라는 사유는 새롭습니다. 그러니까 죄는 인간이 만든것 악은 근원적인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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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신을 저버린 인간이 악을 저지르는가> |
c**rryjubil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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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상 선생님의 <악에 대한 철학적 고찰> 3주차 수업 후기입니다.
<과연 신을 저버린 인간이 악을 저지르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 철학의 아버지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이 선하다고 보는 이유는 인간이 신에 의해 만들어 졌기 때문이며, 그에 따르면 인간이 지니는 자유의지 또한 선한 신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선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선한 인간에게 악의 개념이 존재함은 어떤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악은 자유로운 의지가 잘못 사용되는 데서 비롯된다. 사람이 올바른 자유의지를 갖추지 못하는 까닭은 ‘무지’와 ‘무능’ 때문이다. 즉, 알려고 하는 노력의 부재에서 오는 ‘알지 못함’과 이성의 힘으로 본능을 통제하지 못하는 ‘능력의 못 미침’으로 인해 욕망의 노예가 되어 악으로 귀결된다. 사물들은 그것들 나름의 고유한 질서 속에서 선을 구현하고 있지만, 인간이 그 사물들을 본래의 질서에 따라 지배하지 못하고, 사물에 대해 탐욕을 지님으로써 악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은 스스로의 알지 못함을 깨닫고, 자신의 정욕을 스스로 다스릴 수 없음을 인정하여 죄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직 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이 자신의 알지 못함과 힘없음을 겸허하게 고백하고, 신의 도우심을 찾아 구하는 길만이 단죄 받은 사람들이 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오만은 죄의 시작이다.”(아우구스, 423쪽)이라 정의한다. 오만은 사람이 ‘하느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최고의 선을 실천하려고 의지하는 대신 오만에 빠져 상대적이고 열등한 선을 욕망할 때 그는 악을 범하게 된다. 오만은 주를 버리는 데서 시작되고, 그 결과 사람은 자신의 죄악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의 탓으로 돌리면서 신에게 투덜댄다. 글쎄, 인간이 오만해지고 악을 저지르는 시발점이 과연 신을 저버리는 것일까? 오히려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불행이 있던 그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로 귀속된다고 볼 수 있다. 즉, 무신론자들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해서 신을 탓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결과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으며 만일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이것은 자기 자신이 과거에 어떠한 일을 함에 의한 파장이거나 우연한 맞닥뜨림이다. 신을 원망할 수도, 신에게 버림받았다고 투덜거릴 수도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이기적인 마음을 품게 되면 그 의미는 달라진다. 자신이 잘못하여 일어난 결과임에도 남들의 부족함을 탓하거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면 그는 그 순간 죄의 시발점에 서게 된다. 인간으로서의 부족함을 깨닫고, 자신이 행하는 모든 것에 책임감을 가지고 착수하면 인간은 겸손해 진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결과의 원인을 찾는 다면 이는 신을 저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오만은 주를 버리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저버리고 자기 자신만의 왕국을 구축하는 데서 시작 된다 볼 수 있다. 인간은 분명 오만하고 악의 유혹에 쉽게 현혹된다. 그렇기에 세상에는 범죄가 끊이질 않고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으로 인해 다른 생명체계가 파괴된다. 그러나 이렇게 인간세계를 유지해 온 것은 분명 인간 스스로 자신이 나약하게 악에 쉽게 빠짐을 시인하여 죄악을 법으로 규정하고, 이를 막기 위해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에게만 매달려 구원받기를 원했다면 과연 이만큼의 진보를 이룰 수 있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보다는 인간을 좀 더 높이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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