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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
바르트와 기호 혹은 떠다니는 피니시앙 |
김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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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
음악은 결국 자기 스스로를 울린다 |
강효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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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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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좋아서 미쳐버리겠어요. |
진*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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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 강의는 진짜 항상 소름돋을 만큼 좋습니다. 물론 이것 또한 우상 숭배적 태도이고 바르트를 강의하는 것이 어불성설인 전복과 해체의 태도가 결여된 것 같기도 하지만...어떤 말로 표현안되는 강의 자체에 대한 몸 떨림이 있다는 건 좋은거죠 선생님??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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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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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가르보의 얼굴, 애도일기’ |
최*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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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죽음 그리고 사진』 3강「카메라 루시다」, ‘언어, 가르보의 얼굴, 애도일기’
아트앤스터디에서 김진영 선생님의 롤랑 바르트 강의를 듣고 있다. 1강과 2강에 이어서, 3강의 간단한 리뷰의 연재를 쓴다.
3강 강의는 조금 어려울 수도 지루할 수도 있다. 언어학에 대한 지식이 초반에 나오는데, 이건 지식 차원의 문제이고, 또 그렇지만 유용한 기초적 지식이기도 하니 꼭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반면 후반은 바르트의 내밀한 사고에 한층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바르트의 기호학은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더 나아가 현실 자체를 다루는 수단이 된다. 이날 강의에서는 먼저 언어에 대한 기초적인 이론에 대해 2장의 연장선상에서 배울 수 있었다.
언어는 크게 세 개의 의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랑그는 언어 형식이고, 빠롤은 랑그 안 언어 차이 속에서 selection과 composition을 한다. 곧 빠롤은 개인적 언어를 말한다.
언어는 paradigma(패러다임)와 sintagma로 나뉘기도 하는데, 패러다임은 랑그가 일정한 카테고리로 나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범주 아래 있는 단어들을 뽑아 이으면 singtagma가 된다.
마지막으로 denotaion(외시)와 connotation(공시)로 나뉘는데, 외시는 장미 하면 장미 이미지가 떠오름을 말한다. 곧 기표와 기의의 이론적인 작용이고, 공시는 장미 하면 장미 외에도 사랑 등 다른 내용이 떠올라 '의미가 확대 재생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외시의 의미 작용이 하나의 시니피앙이 되고, 그 시니피앙이 또 다른 의미를 물어오고 새로운 시니피앙이 됨을 말한다.
일상의 의미들에서 이것을 역추적하면 외시만이 남게 되는데, 의도, 목적, 집단의식에 의해서 현실에서는 의미들이 달라붙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믿음을 부여하는 코드 시스템을 낳는다.
이러한 고착되는 의미 시스템을 벗어나 기표와 기의의 자유로운 연관 관계를 통한 의미 생산을 하는 게 대표적으로 예술, 그리고 또 문학을 예로 들어본다면, 문학에는 metapher은유 metonymie환유의 두 차원이 있다. 그리고 이 기법을 통해 ‘전이’시키려는 것, 프로이트의 말을 따른다면 의사가 의자에서 내려와서 하나의 역할을 의사가 담당하는 것을 말한다. 둘의 위치가 의사와 환자의 역할로 고착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주어진 의미체계를 이탈해서 다른 의미로 전이되는 것을 가장 잘 드러나는 현상은 꿈으로, 꿈은 응집과 전위, 각각 나뉘어져 있는 것을 붙임, 또 달라붙어져 같이 가는 의미항이 따로 떨어져 움직이는, 이 두 가지 원칙에 의해 꿈이 움직인다는 게 프로이트의 꿈의 언어에서의 설명이다.
먼저 은유는 유사성의 원칙에서 기인하는데, 범주(앞서 말한 패러다임에서)에서 다른 범주를 선택하는 것인데, 근본적으로 이분법을 버리지 않는다. 사랑을 태양으로 은유함은 두 다른 단어를 유사성에 기초해 정신에서 잇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미움이라는 반대말로서의 단어를 상정한다.
환유는 인접성의 관계를 가진 것으로, 노동운동이 한껏 일어났을 때 런던의 노동자들은 날이 갈수록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을 닮아 간다는 신문 기사가 실렸는데, 노동자와 그 집이 인접해 있는 것이다.
한편 signification 의미화와 signifiance 의미작용이 있다. 코드 시스템이 무한히 의미를 생산하지만, 근본적으로 코드 시스템에 들어가고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의미작용이고 이것을 해체하고자 하는 게 바르트가 말한 의미화이다. 따라서 코드 시스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후자인 시그니피앙스가 중요할 것이다.
본격적으로 바르트의 책으로 돌아가면, 바르트는 가르보와 헵번의 얼굴을 비교해서 의견을 진행한다. 가르보의 얼굴이 이데아라면 헵번의 얼굴은 이벤트라 한다. 가르보는 눈과 코 등의 기본적인 이목구비만 갖추어서 피조물의 얼굴이 되고, 이는 보편성의 얼굴 기호를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헵번은 완벽한 헵번의 얼굴 그 자체로 소급되니 그 안에는 우리 모두의 의미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의견도, 선생님의 정밀한 해석도 놀라웠는데, 개인적으로는 김태희의 얼굴이 후자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접근할 수 없고, 친숙하지 않으며 안정감을 주지 않는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가르보의 얼굴이란 것은 타자성을 갖되 우리에게 문을 여는 것이라는 생각. 이것은 예술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영화나 무대, 모든 배우에게도. 곧 개체성으로 환원되는 게 아니라 무한한 개체성과 만날 수 있는 것.
바르트가 애도의 일기에서 말하는 멜랑콜리는 우울증과 다르다고 한다.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삶, 제 3의 삶으로 가는 것. '나는 슬픔 속에 있는 게 아니다. 슬픔 자체가 되어 버렸다.'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선생님이 번역하고 계시다는데, 아직 국내 출간은 안 됐고, 그런데 몇 장의 페이퍼를 들고 와서 지하철에서 읽는데 정말 멜랑콜리했다. 이게 멜랑콜리하다는 게 느껴졌다. 계속 읽어도 이 텍스트는 질리지 않고 새롭게 각인되는 것 같았다. 바르트를 수업을 통해 다시 알게 된 후 바르트가 친숙하게 다가오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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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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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없음으로서의 메시지-사진 |
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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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디움」, 『사랑과 죽음 그리고 사진』: 코드 없음으로서의 메시지-사진
4장은 사진이 인류가 이미지를 문화화한 이래 사진은 해방적 기제로서, 혁명적인 이미지이며 언어가 아니지만 언어로 비유하자면 코드 없이(=no 메시지) but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세지(말을 하는)라는 걸 다룬다.
바르트는 사진을 절대적 유사물(absolute analogon)이라 칭한다. 곧 이미지에서 사진 이미지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변형이 불가능하다. 사진 이미지는 옮겨갈 뿐으로, 연속적이며 동어 반복적이다.
반면 회화는 어느 개인의 주관성이 개입하고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옮겨 가는 과정이 불연속적이다.
우리는 사진에서 항상 무언가를 읽어낸다. 코드가 주어져있기 때문에 곧 코드가 있음 때문에 오는 메시지, 그리고 코드가 없음 때문에 오는 메시지로 존재하며 코드 시스템을 허물고자 했던 바르트로서는 당연히 후자가 중요한 것이다. 가령 전자는 인간은 사진 찍을 때 또는 찍힐 때 포즈를 만들고, 이는 의미화되어 있어 의식적으로 그에 맞춰 포즈를 만든다. 따라서 여기서 코드가 파생되기도 한다. 또한 사진이 전통적인 회화 미학을 따라 회화적인 심미성을 재현하려고 찍는 경우가 있다. 또는 단사진이 아닌 사진들을 시리즈화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쇼크 포토shock photo를 보면 우리에게 트라우마를 건드려 말을 할 수 없고 수용할 수 없게 하지만, 대개는 그 안에 이데올로기가 섞여 전달되면 모르는 사이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데, 그 이데올로기가 사건/충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닌 무력화시키는 가치 체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쇼크 포토는 의도적 전달이 아닌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사진이다. 곧 이는 전쟁 사진을 찍은 게 아니라 오히려 풍경 사진일 수 있다. 풍경 사진은 우리에게 아무 말도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정치적인 것은 진짜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쇼크 포토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트라우마가 말을 못하게 하는 것 곧, 말이 막힌다는 것 외에 무한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과 등가 된다. 즉 너무 할 말이 많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오히려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부당한 정치, 이데올로기 정치는 어떤 말은 못하게 하고 어떤 말은 하게 하는 것으로, 진정한 정치성은 모든 말에 터부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곧 코드가 있는 사진은 무한한 말을 하게 하는 대신 일정한 말만 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쇼크 포토는 우리 사회에서 잘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쇼크 포토를 보고 그렇게 말을 많이 하게 된다면, 곧 내가 돌연 너무 많은 말을 허용 당하게 되어서 안전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어떤 범주에 들어가는 게 아닌 범주 없이 모든 것들과 만나게 되면서 위기를 느끼게 된다.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또 아무 것에도 기댈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진 이미지는 인류사 한 번도 없었던 이미지로 의미 생성의 자유를 띤다. 이는 신체 해체시키는 데 끝나는 게 아니라 지적인 행위를 활성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사진은 생성, 곧 자연적인 것으로서는 결코 코드화될 수 없고 무한하게 생성될 수밖에 없는데, 앞의 경우와 같이 의미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체하는 게 역설적으로 또한 사진 읽기이다. 바르트는 시니피앙스(의미 작용)를 가능하게 하는 혁명적인 이미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마 여기서 사진 읽기는 또한 독자의 주체적 개념을 다시 말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까지 강의를 거의 크게 수정하지 않고 추려봤는데, 사진이 시간을 담고 있음까지 가야지 사진에 대한 조금 더 명확한 이해를 얻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강의의 밀도가 높아 그것들을 완전히 정리하기 전에 육화해서 내 의견을 뱉는 데 대한 어려움이 있다.
사진이 있었던 사실을 담는다면, 결국 사진은 표현 이전에 현상으로 존재하고, 그것은 현실의 그 적확함을 가지고 현실을 보여주므로 예술이 아닌 현실로서 의미화되지 않는 해석의 날개를 펼쳐낸다고 보인다. 그렇기에 사진은 있었던 것, 있었음의 증표이고, 오히려 있지 않음의 유일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가운데 오직 사진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우리의 해석만이 무한하게 뻗어나갈 수 있음을 가리키며 곧 현상과 독자만이 남게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사진은 해석하는 주체가 존재한다는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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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수록 빠져드는, 롤랑 바르트 사유의 늪 |
한*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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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 강의는 정말 묘한 중독의 기운이 있습니다. 아도르노, 벤야민 강의에 이어 바르트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카메라 루시다』를 책으로만 볼 때 느꼈던 난해함과 저평가를 완전히 해소시켜 주었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죽음 이후 '비변증법적인 죽음'과 '사랑'이 바르트의 후기 스타일을 결정짓는 경계라는 해석은 압권이었습니다. 단지 이론 해설을 넘어, 강의 자체에 대한 몸 떨림이 느껴지는 깊이 있는 명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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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읽는 새로운 눈: 스투디움과 풍크툼의 횡단 |
박*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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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디움과 풍크툼 개념을 코드 시스템의 해체와 횡단의 관점에서 설명해 주신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풍크툼이 단순히 '나만 아는 것'을 넘어, 스투디움을 관통할 때 나타나는 탈코드적이고 담론화될 수 없는 특별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사진뿐만 아니라 예술, 문학,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모든 기호 시스템을 해체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생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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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의 삶을 통해 그의 지적 여정을 따라가다 |
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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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의 지적 이력을 '테러리스트', '시스템 매혹', '욕망과 글쓰기'를 넘어 '후기 스타일'까지 다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 부분이 좋았습니다. 어머니 부재 이후의 시기와 바르트의 성적 정체성(호모섹슈얼리티)을 탈코드적인 의미 생산과 연결한 분석은 매우 흥미롭고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강사님 특유의 섬세하고 세련된 철학하기 방식 덕분에 난해한 이론도 인간적인 체험으로 다가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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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죽음인가, 사랑의 저항인가에 대한 깊은 사유 |
이*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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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아이도스(본질)는 죽음이지만, 그것이 사랑의 사건 속에서 부활한다는 해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그때 거기서 그랬었다(that has been so)'는 사진의 인덱스(지표) 이미지가 애도의 슬픔과 만날 때 죽음에 대한 강력한 사랑의 저항이 된다는 통찰은, 『카메라 루시다』의 핵심을 꿰뚫는 설명이었습니다. 사진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사유하게 해 준 강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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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했던 '애도 일기'와 '가르보의 얼굴' 강독 |
강*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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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에서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일부를 강독하며 멜랑콜리를 '슬픔 자체가 되어 버린 상태'로, 하강 판타지로 정의한 부분이 깊이 와닿았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가 겪었을 고통과 애도를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듯했습니다. 또한 가르보의 얼굴이 이데아라면 헵번의 얼굴은 이벤트라는 비교를 통해, 보편성과 개체성에 대한 바르트의 시각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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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독자로서의 각성과 지적 유희 |
김*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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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가 말한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명제가, 글을 끝까지 읽고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정체성의 강요를 거부하고 쓰는 독자가 되라는 의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저절로 멈춰 서서 내 생각을 적게 되는 경험 자체가 유희로서의 글쓰기(아르바이트)이자 주이상스임을 느꼈습니다. 덕분에 '삶을 말랑말랑하게 추구'하고 '코드화된 독해에서 매몰되지 않으려는' 시선을 갖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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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강의이지만, 난해한 이론에 압도당했습니다. |
오*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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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님의 해박한 지식과 열정은 훌륭합니다. 기호론(semiologie)에 대한 기초 이론, 외시(denotation)와 공시(connotation), 은유와 환유에 대한 설명까지 매우 상세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이론들이 쉴 새 없이 몰아치다 보니, 철학 배경 지식이 부족한 저로서는 너무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번 들어서는 완전히 정리되지 않아 반복적으로 되돌려보게 됩니다. 난이도가 높으니, 마음 단단히 먹고 들으셔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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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모자랄 지경, 사유가 폭발하는 강의 |
박*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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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듯한 말투 속에 중요한 의미들이 마구 튀어나와 오히려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습니다. 바르트의 지적 카멜레온적 특성을 그의 폐결핵 병력이나 아카데미 진입 좌절과 연결하여 분석하는 방식은 매우 독창적이고 흥미로웠습니다. 지식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 '잊어버리는 시기(vita nuova)'를 가르치는 바르트의 교육 3단계처럼, 이 강의는 저를 생성적 사유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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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크 포토와 코드 없는 메시지의 의미 |
윤*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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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에서 다룬 쇼크 포토(Shock Photo)와 코드 없는 메시지에 대한 논의가 충격적이었습니다. 사진이 이데올로기를 무력화시키고, 말이 막히는 순간에 무한한 말을 허용하게 함으로써 위기를 느끼게 한다는 해석은, 우리가 미디어를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합니다. 코드가 있는 사진은 일정한 말만 하게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맴돕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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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가 아닌 강사님의 개인적인 경험에 치우친 강의 |
최*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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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님께서 바르트의 '애도 일기'를 번역하셨다는 점은 알겠지만, 강의 전반에 걸쳐 강사님 개인의 '멜랑콜리'나 '하강 판타지'에 대한 해석,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사적인 감정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신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바르트의 후기 저작 이해에 필수적이겠지만, 때로는 강사님의 개인적인 체험에 압도되어 바르트 이론 자체에 대한 객관적인 논의가 흐려지는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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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이론을 너무 단편적으로 나열하는 느낌 |
김*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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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는 바르트의 모든 것을 다루려는 욕심이 과했던 것 같습니다. 기호학, 언어학의 역사, 프로이트의 꿈의 언어, 벤야민의 사진론 등 너무 많은 이론을 10강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압축적으로 다루다 보니, 내용이 파편화되어 연결 고리를 잡기 어려웠습니다. 푼크툼과 스투디움을 이분법적으로 보지 않아야 한다는 설명은 좋았지만, 정작 개념들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나열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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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루시다'의 완독은 이 강의와 함께! |
이*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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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내용의 책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어?' 하고 혼자 읽었을 때는 큰 의미를 발견하기 힘들었던 『카메라 루시다』의 진정한 위대함을 이 강의를 통해 깨달았습니다. 좋은 선생님이 공부에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텍스트를 보니 '이게 이런 뜻이었구나...'하고 감탄했습니다. 롤랑 바르트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고, 다른 강의도 더 봐야겠다는 생각이 확실히 드는 강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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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 이론 속에서 철학의 살아있음을 느끼다 |
박*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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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해한 이론들에 머리를 흔들다가도, 김진영 선생님 특유의 잔잔하면서 찌르는 감동을 통해 철학의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특히 <사랑의 단상>과 <카메라 루시다>를 연결하여 사랑이라는 끈을 잡으려는 바르트의 모습을 따라가는 과정은 지적인 유희를 넘어 따뜻한 위로를 받았습니다. 망각하고 있었던 어떤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 돌아와 찌르는 경험은 이 강의를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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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깊게 파고들어 부담스러웠던 강의 |
최*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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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님이 아도르노와 벤야민, 미학을 전공하셨다는 배경지식이 곳곳에서 드러나 『카메라 루시다』뿐만 아니라 인접한 사상가들의 이론까지 너무 깊게 파고드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저는 바르트의 사진론에만 집중하고 싶었는데, 다른 철학자들의 언어 철학 변천사까지 들어야 하는 것이 다소 부담스러웠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에도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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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없는 주체와 탈코드화의 의미 |
김*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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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없는 까닭에 떠다니는 주체, 흔들리는 주체를 긍정할 수 있었던 바르트의 특이한 지적 정체성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버지=신/권위라는 근대적 코드에서 벗어나 탈코드적인 경험을 추구했다는 분석은, 바르트의 사유를 그의 사적 세계와 연결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푸코의 추천으로 콜레쥬 드 프랑스 교수가 되었을 때의 일화도 멋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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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으면 들을수록 늪같은 강의입니다. |
김*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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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들면 헤쳐나오기 힘든 늪같은 강의입니다. 김진영선생님의 강의는 묘한 중독의 기운이 있습니다. 아도르노며 벤야민이며 바르트까지 놓을 수 없는 열정의 무리에 저도 올라탔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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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론으로 신화 벗겨내기- 기호론, 부드러운 매스 |
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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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가 생각난다. 마침 그 영화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주인공 할(Hall)은 미모의 여자를 밝힌다. 예쁜 여자가 아니면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에게 여자는 '미모의 소유자'와 등식이다. 외모 밝히는 게 어디 할 뿐이겠냐만, 어쨌든 유명한 상담사의 최면으로 이번에는 뚱뚱하거나 못 생긴 여자들만 그의 눈에 들어온다. 더구나 할의 눈에는 그녀들이 늘~씬한데다 최고의 미녀들로 보인다. 아름다움을 외면으로 판단하지 말고 내면을 들여다보라는 충고에 일종의 저주가 더해진 마법인 셈이다.
사실 하려던 얘기는 줄거리가 아니라 주인공 할이 생각하는 '여자=미모의 소유자'라는 등식이다. 외시(denotation)와 공시(connotation)을 이해하기에 좋은 예가 될까 싶어서다. 외시는 어떤 단어에 붙은 명시적, 지시적 의미이다. 공시는 외시를 둘러싸고 달라붙은 의미들이다. 가령, 장미의 외시는 우리가 떠올리는 꽃이다. 그러나 장미는 그런 지시적 의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화려한 포스터를 떠올려 보자. 장미는 사랑이요, 열정이요, 심지어 야하기까지 하다. 바로 이것이 장미의 공시적 의미이다.
다음 대화를 보자.
남1: 오, 나의 장미! 남2: 뭔 소리야? 장미가 어딨어? 남1: 내 사랑, 나의 장미. 너를 사랑해. 남2: 너 뭐 잘못 먹었냐?
남자1의 사랑고백은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그건 접어두고 가만히 생각해보자. 장미는 어쩌다가 사랑과 동의어가 되었을까? 남자가 장미 꽃을 주며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하면서부터? 그렇다면 그 남자는 어떻게 알고 장미로 사랑을 표현할 생각을 했을까?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남녀라는 이성애가 지배적인 이 사회에서 위의 대화는 그 자체로 대화로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당신이 이성애자라면 충분히 낯선 대화이다. 대다수에게는 너무나 낯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성애자에게 위의 대화는 차라리 하나의 코미디로 여겨질 것이다. 문화는 이런 식으로 형성된다. 장미를 둘러싸고 달라붙은 의미들에 대해 우리는 질문하지 않는다. 이성애라는 코드는 의문을 떠올리기엔 이미 수많은 세월을 뚫고 두꺼운 코드로 장식되어 있다. 너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 궁금해한다는 것조차 낯설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롤랑 바르트는 이처럼 기호론을 통해 하나의 지시적 단어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껍데기, 즉 코드를 벗겨내려 한다. 그러나 그는 언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당신이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을 들고 거리를 걷고 있다면 당신은 뜨거운 커피가 내뿜는 모락모락 연기 뿐 아니라 스타벅스를 둘러싼 기호, 이를테면 세련됨, 우아함, 댄디즘(남성일 경우) 등을 내뿜고 다니는 것이다. 바르트는 우리가 언어행위를 통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간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기호론이라는 매스로 이 사회, 단단한 코드 시스템으로 위장하고 있는 이 사회라는 신화를 벗겨내려 한다.
롤랑 바르트의 신화학(론)은 부드러운 매스이다. 부드럽다함은 벗겨내기 작업이 엄청난 섬세함을 요구한다는 차원에서이고, 매스라함은 칼날이 무언가를 찢어냈을 때의 효과에 관한 것이다. 한 번 균열이 생긴 시스템은 쉽게 아물려 하지 않는다. 찢어진 자리는 더 벌어지고 벌어질 뿐이다. 과연 그는 어디까지 성공했을까? 또는 우리는 이데올로기 벗겨내기 작업을 제대로 이어가고 있을까?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의 주인공 할은 절친 덕분(탓)에 최면술사의 주문에서 깨어나 난감한 현실을 마주한다. 기네스 팰트로우의 몸매와 외모를 조금도 가지지 않은 못 생기고(사실 그런 것 같지 않지만) 뚱뚱한 애인의 모습에 할은 일단 달아나기부터 한다. 그러나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건 외모가 아니라 그녀의 '내면'임을 깨닫고~~~~.(이하 생략. 애초에 이 영화 얘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 앞으로 풀어가야 할 의문들
√기호의 해체를 통해 이데올로기라는 시스템을 벗겨내려 한 바르트는 과연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해체의 끝은 있는가? √언어코드로 구축된 사회를 언어로 벗겨낸다는 것이 성립 가능한가? √구조의 외부를 상정하지 않고 어떻게 구조를 부술 수 있을까?
오늘(2011.01.20) 수업에서는 바르트의 기호론이라는 무기가 가진 힘에 대해 1교시에 다루었고 2교시에는 바르트의 텍스트 <그레타 가르보의 얼굴>과 바르트가 죽기 얼마 전에 쓴 텍스트 <애도 일기>를 읽으며 그의 슬픔과 슬픔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추적해 들어가는 바르트 특유의 집요함을 보았습니다.
수업 시간에 다룬 걸 일일이 소개해 드리지 못해 아쉽습니다. 수업을 들으면서 느끼는 감정, 뭐라 설명하기 힘든 지적인 유희를 전달하기에 제 역량이 부족한 탓도 있구요. 들어보시길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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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바르트 |
노*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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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바르트는 기호학의 대가이다. 모든 이미지들의 의미와 영향력에 대해서 연구했던 위대한 학자이다. 한때 롤랑바르트의 현대의 신화라는 책을 보면서 이 사람이 사진을 찍게된다면 굉장히 무서울것이라는 생각을했다. 왜냐면 각 이미지들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년이 흐른뒤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었다. 롤랑바르트가 사진에 관하여 쓴 책이 있었다. 순간 이 책은 정말 무서운 책이라는 생각이들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달라진게 없었다 내가 이해를 못한것들이 대부분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수 있겠다. 그렇게 롤랑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를 저평가하고있었다. 그런데 이 강의를 통해 그 책의 위대함을 다시금 느끼게되었다.
역시 생각대로 무섭고 위대한 책이었다. 이러한 퀄리높은 강의를 제공해주신 아트앤스터디와 김진영 강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글로써 전하고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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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의 산책자와 함께 듣는 롤랑^^ |
m**mu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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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샘의 강의를 여러 개 열어놓고 듣고 있다보면 어느 새 침대에서 바깥을 향해 엎드려 누운 어린 마르셀이 되기도 하고, 엄마의 냄새라든가 손길을 기다리는 어린 유년의 시간을 기억해낼 수 있다.
문학적으로 다가서기에 더더욱 글쓰기가 행복해지고, 점점 롤랑 바르트와 발터 벤야민, 니체, 카프카를 향해 미로를 즐기게 된다.
주이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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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훌륭한 강의. |
t**hyen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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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루시다는 책으로만 보기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왜 어려웠는지, 이제 어떻게 보면 되는지. 그리고 놓치고 있던 부분은 무엇인지를 알수있게 됩니다. 반복적으로 되돌려보게 됩니다. 참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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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강의 감사드립니다. |
박*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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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내용의 책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어?'하고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를 읽었습니다. 제가 혼자서 읽으니 역시 큰 의미를 발견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좋은 선생님이 공부를 하는데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는 강의였습니다.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텍스트를 보니 '이게 이런 뜻이었구나....'하고 느꼈고 혼자 공부했으면 좋은 내용을 많이 놓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강의 앞으로도 계속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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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감명을 주시는 쌤...^^ |
강*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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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아드로노이후 바르트의 강의를 듣습니다. 간결하면서도 심오한 강의, 쉽고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강의. 감사드립니다.. 오프라인 강의도 꼭 듣고 싶습니다..^^ 꼭 뵙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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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깊어지고 싶습니다! |
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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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 감사합니다! 롤랑 바르트의 깊이있는 시선의 맥을 따라가는 여행 행복했습니다. 삶속에서 죽음을 응시하는 시선속에서 내 삶이 깊어지고 싶었습니다! 삶속에서 알게 모르게 정형화되고 코드화된 독해와 시선들로 매몰되지 않고 삶을 말랑말랑햐게 추구해야 할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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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평이 적다는것에대해 상당히 놀랍습니다. |
Y**nAhJoun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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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전공하는 학생입니다 방학때 짬내서 급하게 보고있는 중입니다 . 시간적 제약이 많았고 할일이 많았어도 저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강의였습니다 저의 롤랑바르트에 대한 이해가 참 부족했다는 느낌을 많아 받았습니다. 좋은 강의 많이 부탁드립니다 . 김진영 선생님 강의 몇개를 더봐야겠다는 생각이 확실히 드는 강의였습니다. 벤야민 아도르노가 정말 기대가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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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의 여운이 남아있을 때 키보드를 두드려야겠다 |
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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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의 여운이 남아있을 때 키보드를 두드려야겠다.
나는 그의 연구 업적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강의를 통해서 듣는 그의 아픔에 대해서는 잘 느껴진다.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를 읽으며 사진 만을 본다면 분명 어딘가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가 어머니를 잃고 난 후의 상태를 빼고는 이 책을 제대로 통과해 낼 수 없다. 물론 문화라는 '신화 시스템' 벗기기를 놓친다면 이 또한 완전한 읽기는 될 수 없을 거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이 강의를 개인적인 체험으로 읽는다. 읽으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다가온다. 아직도 첫 시간과 두 번째 시간의 여운에서 나는 빠져나오지 못했다. 아홉 번째 수업을 들은 오늘은 특히 더 첫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어쩌면 선생님의 바르트 읽기를 내가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온전한 내 느낌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이번 달(3월)부터는 롤랑 바르트의 또 다른 책, <사랑의 단상>을 들을 예정이다. 그의 글을 더 읽고 싶고, 내가 살아가고 나를 살게 하는 사랑이라는 끈을 잡고 싶기 때문이다.(또 어쩌면 김진영식 바르트 읽기를 연장하고 싶은 지도.)
김진영 선생님 특유의 철학하기가 오늘따라 멋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오늘은 꼭 이 말을 하고 싶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너무 멋지십니다.'(절대 남발하는 말 아닙니다.^^;)
김진영 선생님을 통해 롤랑 바르트의 지적 단계를 따라가 봤습니다. 선생님 강의는 잔잔하면서 찌르는 감동같은 게 있어요. 듣는 사이사이 망각하고 있었던 어떤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 돌아와 찌릅니다. 어떤 이미지가 아니라 말을 통해서 이런 경험을 한다는 건 좀 낯설기도 한데요. 바르트의 강의를 다른 선생님에게 들었다면 과연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발터 벤야민 강의를 들었을 때도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한 걸 보면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하달 수 밖에요. 난해한 이론들에 머리를 흔들다가도 이럴 때 철학의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참 섬세하면서도 세련된 학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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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 블로그 주소입니다 |
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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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 3강에 언급하셨던 선생님 블로그 주소입니다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올려요
건너가보셔요 ^^ http://blog.naver.com/dir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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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선생님의 강의를 거의 다 듣고 있는 열성팬인데, 지적도야 뿐아니라 사유의 확장을 가능케 하는 예시들과 고견에 강의 듣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듣고 있습니다 웃는달 (11.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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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를 수업을 통해 다시 알게 된 후 바르트가 친숙하게 다가오게 된다 |
m**w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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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앤스터디에서 김진영 선생님의 롤랑 바르트 강의를 듣고 있다.
바르트가 애도의 일기에서 말하는 멜랑콜리는 우울증과 다르다고 한다.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삶, 제 3의 삶으로 가는 것. '나는 슬픔 속에 있는 게 아니다. 슬픔 자체가 되어 버렸다.'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선생님이 번역하고 계시다는데, 아직 국내 출간은 안 됐고, 그런데 몇 장의 페이퍼를 들고 와서 지하철에서 읽는데 정말 멜랑콜리했다. 이게 멜랑콜리하다는 게 느껴졌다. 계속 읽어도 이 텍스트는 질리지 않고 새롭게 각인되는 것 같았다. 바르트를 수업을 통해 다시 알게 된 후 바르트가 친숙하게 다가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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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없음으로서의 메시지-사진 |
m**w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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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투디움」, 『사랑과 죽음 그리고 사진』: 코드 없음으로서의 메시지-사진
4장은 사진이 인류가 이미지를 문화화한 이래 사진은 해방적 기제로서, 혁명적인 이미지이며 언어가 아니지만 언어로 비유하자면 코드 없이(=no 메시지) but 우리에게 주어지는 메세지(말을 하는)라는 걸 다룬다.
바르트는 사진을 절대적 유사물(absolute analogon)이라 칭한다. 곧 이미지에서 사진 이미지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변형이 불가능하다. 사진 이미지는 옮겨갈 뿐으로, 연속적이며 동어 반복적이다.
반면 회화는 어느 개인의 주관성이 개입하고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옮겨 가는 과정이 불연속적이다.
우리는 사진에서 항상 무언가를 읽어낸다. 코드가 주어져있기 때문에 곧 코드가 있음 때문에 오는 메시지, 그리고 코드가 없음 때문에 오는 메시지로 존재하며 코드 시스템을 허물고자 했던 바르트로서는 당연히 후자가 중요한 것이다. 가령 전자는 인간은 사진 찍을 때 또는 찍힐 때 포즈를 만들고, 이는 의미화되어 있어 의식적으로 그에 맞춰 포즈를 만든다. 따라서 여기서 코드가 파생되기도 한다. 또한 사진이 전통적인 회화 미학을 따라 회화적인 심미성을 재현하려고 찍는 경우가 있다. 또는 단사진이 아닌 사진들을 시리즈화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쇼크 포토shock photo를 보면 우리에게 트라우마를 건드려 말을 할 수 없고 수용할 수 없게 하지만, 대개는 그 안에 이데올로기가 섞여 전달되면 모르는 사이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데, 그 이데올로기가 사건/충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닌 무력화시키는 가치 체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쇼크 포토는 의도적 전달이 아닌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사진이다. 곧 이는 전쟁 사진을 찍은 게 아니라 오히려 풍경 사진일 수 있다. 풍경 사진은 우리에게 아무 말도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정치적인 것은 진짜 정치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쇼크 포토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트라우마가 말을 못하게 하는 것 곧, 말이 막힌다는 것 외에 무한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과 등가 된다. 즉 너무 할 말이 많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오히려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부당한 정치, 이데올로기 정치는 어떤 말은 못하게 하고 어떤 말은 하게 하는 것으로, 진정한 정치성은 모든 말에 터부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곧 코드가 있는 사진은 무한한 말을 하게 하는 대신 일정한 말만 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쇼크 포토는 우리 사회에서 잘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쇼크 포토를 보고 그렇게 말을 많이 하게 된다면, 곧 내가 돌연 너무 많은 말을 허용 당하게 되어서 안전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어떤 범주에 들어가는 게 아닌 범주 없이 모든 것들과 만나게 되면서 위기를 느끼게 된다.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또 아무 것에도 기댈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진 이미지는 인류사 한 번도 없었던 이미지로 의미 생성의 자유를 띤다. 이는 신체 해체시키는 데 끝나는 게 아니라 지적인 행위를 활성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사진은 생성, 곧 자연적인 것으로서는 결코 코드화될 수 없고 무한하게 생성될 수밖에 없는데, 앞의 경우와 같이 의미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체하는 게 역설적으로 또한 사진 읽기이다. 바르트는 시니피앙스(의미 작용)를 가능하게 하는 혁명적인 이미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마 여기서 사진 읽기는 또한 독자의 주체적 개념을 다시 말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까지 강의를 거의 크게 수정하지 않고 추려봤는데, 사진이 시간을 담고 있음까지 가야지 사진에 대한 조금 더 명확한 이해를 얻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강의의 밀도가 높아 그것들을 완전히 정리하기 전에 육화해서 내 의견을 뱉는 데 대한 어려움이 있다.
사진이 있었던 사실을 담는다면, 결국 사진은 표현 이전에 현상으로 존재하고, 그것은 현실의 그 적확함을 가지고 현실을 보여주므로 예술이 아닌 현실로서 의미화되지 않는 해석의 날개를 펼쳐낸다고 보인다. 그렇기에 사진은 있었던 것, 있었음의 증표이고, 오히려 있지 않음의 유일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가운데 오직 사진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우리의 해석만이 무한하게 뻗어나갈 수 있음을 가리키며 곧 현상과 독자만이 남게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사진은 해석하는 주체가 존재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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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가르보의 얼굴, 애도일기’ |
m**w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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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죽음 그리고 사진』 3강「카메라 루시다」, ‘언어, 가르보의 얼굴, 애도일기’
아트앤스터디에서 김진영 선생님의 롤랑 바르트 강의를 듣고 있다. 1강과 2강에 이어서, 3강의 간단한 리뷰의 연재를 쓴다.
3강 강의는 조금 어려울 수도 지루할 수도 있다. 언어학에 대한 지식이 초반에 나오는데, 이건 지식 차원의 문제이고, 또 그렇지만 유용한 기초적 지식이기도 하니 꼭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반면 후반은 바르트의 내밀한 사고에 한층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바르트의 기호학은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더 나아가 현실 자체를 다루는 수단이 된다. 이날 강의에서는 먼저 언어에 대한 기초적인 이론에 대해 2장의 연장선상에서 배울 수 있었다.
언어는 크게 세 개의 의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랑그는 언어 형식이고, 빠롤은 랑그 안 언어 차이 속에서 selection과 composition을 한다. 곧 빠롤은 개인적 언어를 말한다.
언어는 paradigma(패러다임)와 sintagma로 나뉘기도 하는데, 패러다임은 랑그가 일정한 카테고리로 나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범주 아래 있는 단어들을 뽑아 이으면 singtagma가 된다.
마지막으로 denotaion(외시)와 connotation(공시)로 나뉘는데, 외시는 장미 하면 장미 이미지가 떠오름을 말한다. 곧 기표와 기의의 이론적인 작용이고, 공시는 장미 하면 장미 외에도 사랑 등 다른 내용이 떠올라 '의미가 확대 재생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외시의 의미 작용이 하나의 시니피앙이 되고, 그 시니피앙이 또 다른 의미를 물어오고 새로운 시니피앙이 됨을 말한다.
일상의 의미들에서 이것을 역추적하면 외시만이 남게 되는데, 의도, 목적, 집단의식에 의해서 현실에서는 의미들이 달라붙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믿음을 부여하는 코드 시스템을 낳는다.
이러한 고착되는 의미 시스템을 벗어나 기표와 기의의 자유로운 연관 관계를 통한 의미 생산을 하는 게 대표적으로 예술, 그리고 또 문학을 예로 들어본다면, 문학에는 metapher은유 metonymie환유의 두 차원이 있다. 그리고 이 기법을 통해 ‘전이’시키려는 것, 프로이트의 말을 따른다면 의사가 의자에서 내려와서 하나의 역할을 의사가 담당하는 것을 말한다. 둘의 위치가 의사와 환자의 역할로 고착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주어진 의미체계를 이탈해서 다른 의미로 전이되는 것을 가장 잘 드러나는 현상은 꿈으로, 꿈은 응집과 전위, 각각 나뉘어져 있는 것을 붙임, 또 달라붙어져 같이 가는 의미항이 따로 떨어져 움직이는, 이 두 가지 원칙에 의해 꿈이 움직인다는 게 프로이트의 꿈의 언어에서의 설명이다.
먼저 은유는 유사성의 원칙에서 기인하는데, 범주(앞서 말한 패러다임에서)에서 다른 범주를 선택하는 것인데, 근본적으로 이분법을 버리지 않는다. 사랑을 태양으로 은유함은 두 다른 단어를 유사성에 기초해 정신에서 잇는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미움이라는 반대말로서의 단어를 상정한다.
환유는 인접성의 관계를 가진 것으로, 노동운동이 한껏 일어났을 때 런던의 노동자들은 날이 갈수록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을 닮아 간다는 신문 기사가 실렸는데, 노동자와 그 집이 인접해 있는 것이다.
한편 signification 의미화와 signifiance 의미작용이 있다. 코드 시스템이 무한히 의미를 생산하지만, 근본적으로 코드 시스템에 들어가고 동어반복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의미작용이고 이것을 해체하고자 하는 게 바르트가 말한 의미화이다. 따라서 코드 시스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후자인 시그니피앙스가 중요할 것이다.
본격적으로 바르트의 책으로 돌아가면, 바르트는 가르보와 헵번의 얼굴을 비교해서 의견을 진행한다. 가르보의 얼굴이 이데아라면 헵번의 얼굴은 이벤트라 한다. 가르보는 눈과 코 등의 기본적인 이목구비만 갖추어서 피조물의 얼굴이 되고, 이는 보편성의 얼굴 기호를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헵번은 완벽한 헵번의 얼굴 그 자체로 소급되니 그 안에는 우리 모두의 의미로는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바르트의 의견도, 선생님의 정밀한 해석도 놀라웠는데, 개인적으로는 김태희의 얼굴이 후자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접근할 수 없고, 친숙하지 않으며 안정감을 주지 않는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가르보의 얼굴이란 것은 타자성을 갖되 우리에게 문을 여는 것이라는 생각. 이것은 예술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영화나 무대, 모든 배우에게도. 곧 개체성으로 환원되는 게 아니라 무한한 개체성과 만날 수 있는 것.
바르트가 애도의 일기에서 말하는 멜랑콜리는 우울증과 다르다고 한다. 죽음으로부터 나오는 삶, 제 3의 삶으로 가는 것. "나는 슬픔 속에 있는 게 아니다. 슬픔 자체가 되어 버렸다."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선생님이 번역하고 계시다는데, 아직 국내 출간은 안 됐고, 그런데 몇 장의 페이퍼를 들고 와서 지하철에서 읽는데 정말 멜랑콜리했다. 이게 멜랑콜리하다는 게 느껴졌다. 계속 읽어도 이 텍스트는 질리지 않고 새롭게 각인되는 것 같았다. 바르트를 수업을 통해 다시 알게 된 후 바르트가 친숙하게 다가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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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론으로 신화 벗겨내기- 기호론, 부드러운 매스 |
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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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가 생각난다. 마침 그 영화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주인공 할(Hall)은 미모의 여자를 밝힌다. 예쁜 여자가 아니면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에게 여자는 '미모의 소유자'와 등식이다. 외모 밝히는 게 어디 할 뿐이겠냐만, 어쨌든 유명한 상담사의 최면으로 이번에는 뚱뚱하거나 못 생긴 여자들만 그의 눈에 들어온다. 더구나 할의 눈에는 그녀들이 늘~씬한데다 최고의 미녀들로 보인다. 아름다움을 외면으로 판단하지 말고 내면을 들여다보라는 충고에 일종의 저주가 더해진 마법인 셈이다.
사실 하려던 얘기는 줄거리가 아니라 주인공 할이 생각하는 '여자=미모의 소유자'라는 등식이다. 외시(denotation)와 공시(connotation)을 이해하기에 좋은 예가 될까 싶어서다. 외시는 어떤 단어에 붙은 명시적, 지시적 의미이다. 공시는 외시를 둘러싸고 달라붙은 의미들이다. 가령, 장미의 외시는 우리가 떠올리는 꽃이다. 그러나 장미는 그런 지시적 의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의 화려한 포스터를 떠올려 보자. 장미는 사랑이요, 열정이요, 심지어 야하기까지 하다. 바로 이것이 장미의 공시적 의미이다.
다음 대화를 보자.
남1: 오, 나의 장미! 남2: 뭔 소리야? 장미가 어딨어? 남1: 내 사랑, 나의 장미. 너를 사랑해. 남2: 너 뭐 잘못 먹었냐?
남자1의 사랑고백은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그건 접어두고 가만히 생각해보자. 장미는 어쩌다가 사랑과 동의어가 되었을까? 남자가 장미 꽃을 주며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하면서부터? 그렇다면 그 남자는 어떻게 알고 장미로 사랑을 표현할 생각을 했을까?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남녀라는 이성애가 지배적인 이 사회에서 위의 대화는 그 자체로 대화로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당신이 이성애자라면 충분히 낯선 대화이다. 대다수에게는 너무나 낯선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성애자에게 위의 대화는 차라리 하나의 코미디로 여겨질 것이다. 문화는 이런 식으로 형성된다. 장미를 둘러싸고 달라붙은 의미들에 대해 우리는 질문하지 않는다. 이성애라는 코드는 의문을 떠올리기엔 이미 수많은 세월을 뚫고 두꺼운 코드로 장식되어 있다. 너무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 궁금해한다는 것조차 낯설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롤랑 바르트는 이처럼 기호론을 통해 하나의 지시적 단어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껍데기, 즉 코드를 벗겨내려 한다. 그러나 그는 언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당신이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을 들고 거리를 걷고 있다면 당신은 뜨거운 커피가 내뿜는 모락모락 연기 뿐 아니라 스타벅스를 둘러싼 기호, 이를테면 세련됨, 우아함, 댄디즘(남성일 경우) 등을 내뿜고 다니는 것이다. 바르트는 우리가 언어행위를 통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간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기호론이라는 매스로 이 사회, 단단한 코드 시스템으로 위장하고 있는 이 사회라는 신화를 벗겨내려 한다.
롤랑 바르트의 신화학(론)은 부드러운 매스이다. 부드럽다함은 벗겨내기 작업이 엄청난 섬세함을 요구한다는 차원에서이고, 매스라함은 칼날이 무언가를 찢어냈을 때의 효과에 관한 것이다. 한 번 균열이 생긴 시스템은 쉽게 아물려 하지 않는다. 찢어진 자리는 더 벌어지고 벌어질 뿐이다. 과연 그는 어디까지 성공했을까? 또는 우리는 이데올로기 벗겨내기 작업을 제대로 이어가고 있을까?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의 주인공 할은 절친 덕분(탓)에 최면술사의 주문에서 깨어나 난감한 현실을 마주한다. 기네스 팰트로우의 몸매와 외모를 조금도 가지지 않은 못 생기고(사실 그런 것 같지 않지만) 뚱뚱한 애인의 모습에 할은 일단 달아나기부터 한다. 그러나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건 외모가 아니라 그녀의 '내면'임을 깨닫고~~~~.(이하 생략. 애초에 이 영화 얘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 앞으로 풀어가야 할 의문들
√기호의 해체를 통해 이데올로기라는 시스템을 벗겨내려 한 바르트는 과연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해체의 끝은 있는가? √언어코드로 구축된 사회를 언어로 벗겨낸다는 것이 성립 가능한가? √구조의 외부를 상정하지 않고 어떻게 구조를 부술 수 있을까?
오늘(2011.01.20) 수업에서는 바르트의 기호론이라는 무기가 가진 힘에 대해 1교시에 다루었고 2교시에는 바르트의 텍스트 <그레타 가르보의 얼굴>과 바르트가 죽기 얼마 전에 쓴 텍스트 <애도 일기>를 읽으며 그의 슬픔과 슬픔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추적해 들어가는 바르트 특유의 집요함을 보았습니다.
수업 시간에 다룬 걸 일일이 소개해 드리지 못해 아쉽습니다. 수업을 들으면서 느끼는 감정, 뭐라 설명하기 힘든 지적인 유희를 전달하기에 제 역량이 부족한 탓도 있구요. 들어보시길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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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자신의 몸을 매체로서 허락한다는 것 |
m**w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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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의 강의는 그 사람에 대한 철저한 탐독과 감각적인 수용과 마주함 내지는 맞닿음, 현실을 담보한 사고방식의 수용과 구현이 이뤄지는 과정의 총체화를 동반하고 있다 보인다.
롤랑 바르트의 삶과 그의 지적 여정을 파헤쳐 가는 데서 묘하게 선생님한테 바르트의 반영된 자아를 감지하게 되고, 그 지적 울타리를 바르트의 세계로 넓혀가며 과거를 현재로 소환, 묘하게 시간이 엮어드는 경험이 마력처럼 다가온다.
선생님은 일종의 바르트의 정신과 의지, 열정, 사고를 자신의 몸을 내주면서 무한하게 흘러나오도록 하고, 마치 바르트의 대변자가 된 양 생생하게 그의 이론을 풀어간다.
바르트가 육체 감각의 총체/총합으로서 신체적인 것을 통해 지적 행위를 하려고 했다는 것은 오늘 뭘 들었나가 아니라 어떤 몸 떨림이 있었나로 강의가 전해진다면 성공한 거라는 선생님의 말은 곧 바르트와 같은 맥락에서 강의를 지적 행위에 두고 싶은 강의에 대한 열의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바르트의 특성으로 카멜레온적, 날 섬, 불연속성/전복(끊임없이 영토화재영토화탈영토화)
전복시키는 것이 곧 글쓰기인데, 리딩=듣기를 간직하는 게 아니라, 불연속선상의 행위를 하는 것이 글쓰기인 것이다. 가령 책을 읽다 뭔가 motivation/impulse(충동)이 있은 후에 그것을 멈추고 글을 쓰게 된다.
바르트 스스로 자신을 세 단계로 지적캐리어를 이야기했는데, 선생님은 두 단계를 더해 바르트가 미처 갈음하지 못한 지적 체계를 구체화한다.
현대 사회는 곧 신화(퍼펙트한 시스템) 사회이고, 여기서 우리는 소비 주체(=역할 주체)로서 기능하며 코드화되어 살고 있다. 영화 매트릭스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다. 이 코드 시스템을 해체하고자 하는 게 바르트의 ‘테러리스트 크리틱’, 첫 단계이다.
두 번째는 도취의 시기로, 불편하게 만들기만 하는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서 시스템을 직접 행사하는 즐거움의 대상으로 바꿔내는 시기로, 기호론적&#8231;학문적 분석을 거치는 시기이다.
두 번째까지가 이론적&#8231;학문적 단계라면 이후는 에고이스트의 단계로, 사적인 글쓰기로서 성찰적인 측면을 담는 에세이 형태의 글들을 써내려가는 시기이다.『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롤랑 바르트』 등이 이 때 완성된다.
에세이는 가장 지적인 행위이자 총체적인 행위 감각도 드러내면서 지성도 동시에 드러내는 것이라는데, 보통 에세이는 가장 쉬운 글쓰기,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쓰기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은 빗나갔다.
선생님은 엄마는 놀이터 벤치에서 아이가 노는 것을 지켜보는 운동장, 놀이터와 같은 존재, 있음 그 자체로 성립되는 존재라고 했다. 여기서 개인적으로도 어머니에 대한 다양한 은유적 심상이 작동하는 것 같은데, 이는 분명히 존재론적 차원에서의 규명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의존은 직접적인 맞닿음 측면에서 성립되기보다 오히려 정신의 쏠림 현상 같은 게 아닐까, 개인적 사고의 범위의 폭이 측정되는 경계선까지의 공기 같은 외피가 아닐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단계가 네 번째 바르트의 단계라면, 다섯 번째는 『애도일기』를 쓰는, 변증법이 승화시키는 약간의 사기성 어린 정신 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이라면, 비변증법적인 죽음에 맞서게 된 시기이다. 네다섯 번째는 바르트의 후기 스타일로 분류할 수 있다. 아도르노는 모든 삶이나 저작 속에는 두 계의 단계밖에 없는데, 전 단계/후 단계가 그것으로, 죽음을 변증법적으로 경험하느냐 아니면 비변증법적으로 체험하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카메라 루시다』는 굉장히 멜랑콜리하고 상실의 슬픔에 젖어 있는 반면 ‘밝은 방’이라는 뜻처럼 자결하면서 삶 승리하는 엑스타시 그것이 엄마라는 외침을 표현한다.
여기서 상승 판타지(상승성 지님, 승화의 단계까지 빛을 찾아 가는, 미래주의가 되어 버림, 행복 미래에 있는 지금 과거에 있지 않은 연기됨)와 하강 판타지의 흥미로운 구분의 지점이 언급된다.
여기서 프로이트 역시 상승 판타지에 의해 하강 판타지(=무의식)를 해체하려는 의식 통해 무의식 치료하려는 것에 가깝다고 분석된다.
개인적으로 이 하강 판타지는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바르트는 대단한 카피이스트이기도 한데, 바로 프루스트에게서 영향을 크게 받았다. 어린 시절 응석을 받아준 유일한 사람이 할머니여서 구두끈을 매다가 할머니의 돌아가셨던 순간이 가장 분명한 순간으로 오는 프루스트의 경험이 바르트에게서도 반복되고 있다. 보통 마들렌 체험으로 이야기되는 무의지적 기억은 이렇게 쾌락만이 아닌 고통도 해당된다.
무의지적 기억으로 바르트를 나눈다면 네 번째 단계가 바르트가 쾌락의 엑스타제에 머물러 있는 시기라면, 다섯 번째는 고통의 엑스타제에 머물러 있는 단계이다.
『Trauer und Melancholie』(애도와 멜랑콜리)라는 프로이트 책 이름(개념)은 한 번도 담론 체계에서 정의되어 본 적은 없다는데, 선생님식으로는 하강 판타지라고 했다. 정상적인 삶을 와해&#8231;정지시키는 리비도적 흐름, 곧 광기와 관련되는 것, 외부 언어가 감당하지 못하는 것, 더 이상 아르바이트Arbeit가 안 되고 계속 빠져들어가는 수밖에 없는 상태가 멜랑콜리이다. 멜랑콜리와 궤를 이루는 죽음 충동을 선생님은 하강 판타지로 정의한 것이다. 이 하강 판타지에 선생님은 경도되어 있다 했는데, 프루스트 역시 마지막 생을 자신의 침대로 들어가 세상으로 나오지 않았다 한다.
교육의 시기를 바르트는 세 개로 구분하는데, 아는 걸 가르치는 시기=보통의 강연, 두 번째 모르는 걸 가르치는 시기=스터디, 세 번째가 잃어버리는 시기, 가르친 걸/기억을 망각(verlernen)하게 하는 것, 지식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래서 사실은 기억해야 했던 것을/잊어야 했던 것을/밀려난 무엇들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라고 했다.
세 번째는 자발적 사유/생성적 사유/vita nuova(끊임없이 리비도가 이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호를 이야기 위해 언어에 대한 개념 변천들을 짚는 시간이 이어졌는데, 1 언어 철학 2 언어학 3 기호론이 그것으로, 기호론에 오면 f. saussure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하는 데서 시니피에라고 이야기한 것은 또 하나의 시니피앙일 뿐이라는 시니피앙이 시니피앙을 확대 재생산하는 관계가 빚어진다.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은 소쉬르를 접목했지만 특별한 점은 언어에만 접목시킨 소쉬르와 달리 사회 전체로 기호를 확장시킨다.
바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기호 외부로 나가지 못 하게 짜놓은 것-코드 시스템을 탈코드화시키는 것으로, 바르트는 구조주의자로서 기호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뒤집는 게 아니라고 한다.
스투디움과 푼크툼 역시 이분화시키는 게 아니라 푼크툼은 스투디움을 횡단할 때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코드 시스템을 횡단/관통/해체할 때 나타나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는 안에서만 사고가 가능, 곧 외부가 없다는 사고를 한다.
이날 강의는 정말 많은 것들이 이야기됐고, 언어학에 대한 철학의 변천사를 알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벤야민이 언어철학의 단계에서 언어의 감각을 회복해야 했다는 주장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언어의 무한한 생성 작용도 이해하며 데리다의 차연 과정으로 생각이 건너갈 수 있었던 것 같다. 푼크툼과 스투디움의 이분법적 생각을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유용했다.
바르트는 코드 시스템을 해체하고자 했다는 것은 바르트의 가장 중요한 특성 같으면서 또 다른 키워드, 바르트의 5번째 단계와 맞물려 있는 하강 판타지는 뭔가 중요한 깨달음을 제공한 것 같다. 일곱 장이 넘는 강의 기록을 대강 잘라 정리하는데, 이 안에 파묻혀 버리는 것 같다. 2시간 여 강의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지식 체계를 제공할 수 있는지 새삼 다시 놀랍다는 생각이 드는 두 번째 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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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
롤랑 바르트의 지적 커리어 |
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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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을 통해 롤랑 바르트의 지적 단계를 따라가 봤습니다. 선생님 강의는 잔잔하면서 찌르는 감동같은 게 있어요. 듣는 사이사이 망각하고 있었던 어떤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 돌아와 찌릅니다. 어떤 이미지가 아니라 말을 통해서 이런 경험을 한다는 건 좀 낯설기도 한데요. 바르트의 강의를 다른 선생님에게 들었다면 과연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발터 벤야민 강의를 들었을 때도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한 걸 보면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하달 수 밖에요. 난해한 이론들에 머리를 흔들다가도 이럴 때 철학의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참 섬세하면서도 세련된 학문이에요.
롤랑 바르트가 콜레쥬 드 프랑스에 교수 취임 강연에서 마지막 쯤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가르치는 데는 3단계가 있다. 첫 단계는 교육의 시기, 즉 아는 걸 가르치는 시기이다. 두 번째는 연구하는 시기로 모르는 걸 가르치는 시기다. 세미나 활동이 대표적인 예죠.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시기이니까요. 마지막 단계는 잊어버리는 시기다. 지금까지 배운 걸 잊어버리는 시기. 잊어 버린다는 것은 그동안 망각하고 있던 것을 다시 깨우기 위함입니다. 약간의 지식, 약간의 지혜, 그리고 되도록이면 많은 사유(sapientia). 신체적 사유를 통해 끊임없이 나오는 어떤 생산적 사유를 불러오기 위함입니다. 이런 사유를 바르트는 <vita nuova>로 명명하는데요. 바르트 자신이 가르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비타 누오바적 사유라고 합니다. (가장 어려운 걸 원하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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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강생 모두가 왁자지껄 웃었네요 |
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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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김진영 선생님 때문에 선택한 강의다. 선생님의 벤야민 강의를 듣고 나는 롤랑 바르트로 건너왔다.
모든 책은 다른 책을 참고하여 쓰여진다. 그 책이 엿 본 다른 책들을 따라가다 보면 ''책들의 책''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책은 또 다른 책을 부르고 어느새 책들의 미로에 빠진다.
김진영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후로는 그 공식이 조금 바뀌었다. 선생님의 강의를 듣다 보면 ''책들의 책''에 다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물론 순전히 나의 몫이지만...)
1. 시작하기 앞서
사진 이론 수업인 줄 알고 온 수강생들이 많을 거라며 말문을 여셨다. 롤랑 바르트, 그는 누구인가? 그는 주로 문학비평에서 활동했지만 다방면에 재능이 있었다. 사진, 회화, 음악...성악가를 꿈꾸었고 피아노를 잘 쳤다고 한다.
웃음 1. 바르트는 슈만을 즐겨 연주했다고 하는데 선생님 말씀으로는 그 정도면 음악 취미가 그다지 높은 건 아니란다.^^
바르트는 주로 단편을 썼다. ''단편''이란 조각 글을 말하는데, 언젠가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왜 바르트가 짧은 글을 즐겨 썼는지 이제야 알겠다''고. 그가 단편을 쓴 것은 바르트 특유의 사유 방식에서 기인한다.
그의 글쓰기는 ''미끄러지기, 빠져 나가기, 탈주, 끊임없이 이동하는 불연속적 사유''를 통과하고 나온 결과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각 조각을 잇는 봉합선을 찾는 게 중요하다.
"저자는 죽고 독자가 태어났다."
바르트는 책을 잡으면 끝까지 읽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저자는 죽고 독자가 태어났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이제부터 독자 마음대로 읽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글을 끝까지 읽고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행위는 정체성의 강요이다. 코드를 읽는 것은 자유로운 방식의 읽기라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거다. 그것은 독자를 일종의 소비자로 전락시키는 읽기이다. 따라서 바르트가 말한 ''독자의 탄생''은 ''읽는 독자''가 아니라 반대로 ''쓰는 독자''이다.
벤야민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독서란 행위는 그를 둘러싼 환경을 경험하고 그것과 자신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독서는 쓰여지지 않은 것을 읽는 것이다.
2. 바르트와 <카메라 루시다>
마르셸 프루스트, 퍼스 등 바르트가 직접 거론한 이들 외에 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은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은 사진을 예술(회화)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다. (회화에는 아우라가 있지만, 사진에는 없다.) ''나는 한 장의 사진이 중요하다''는 바르트의 말에도 이와 비슷한 함의가 들어있다. 그는 작가라는 권력을 와해시키고자 했다. 그렇기에 <카메라 루시다>는 단지 사진에 관한 단상이 아니라, 가치체계를 고수하려는 기득권층을 해체하려는 의도가 깊이 내재되어 있는 글이다. (그래서 읽어내기 참 어렵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카메라 루시다>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밝은 방''이다. 알고 보니 제목에 역설이 숨어 있었다. 사진기의 기원이자 카메라의 어원이 된 것은 기원 전에 출현한 카메라옵스큐라(cameraobscura;라틴어로 어두운 방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어두운 방의 지붕이나 벽 등에 작은 구멍을 뚫고 그 반대쪽의 하얀 벽이나 막에 옥외의 상을 거꾸로 찍어내는 장치이다.
바르트는 어두운 방을 뜻하는 카메라 옵스큐라를 뒤집어 밝은 방으로 바꾸었다. 위대한 예술(회화)은 위대한 비밀을 감추고 있다. 옵스큐라는 따라서 회화의 비밀스러움을 가리킨다. 반대로 사진은 또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사진은 나체이다. 그대로를 다 보여준다. 바르트가 사진에 대해 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카메라에 대한 권력(신화)의 해체작업이다.
선생님은 작가의식을 가지고 <카메라 루시다>를 읽으면 부딪친다고 하셨다. 바르트는 오히려 끊임없이 우리를 뒤따라다니고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망령을 떠나 카메라 루시다를 만나라고 말하고 있다고. 그것이 바로 ''풍크툼''이라고. (이 부분에서 나는 부딪히고 말았다. 풍크툼에 대해 뭔가 잘못 알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ㅠ)
3. 바르트의 삶 - 사적 세계와 지적 세계의 끈
해군 장교인 아버지가 한 살에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할머니, 이모에 둘러싸여 프랑스 남서부, 바이욘(Bayonne)이라는 지역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파리로 옮겨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아카데미 세계에 들어갈 만큼 명석했지만 1934년 폐결핵으로 기회를 놓친다. 피레내 산맥 등지에서 휴양하며 많은 독서를 했다고. 1941-48 폐결핵이 재발한다. 그러나 이 시기가 오히려 바르트를 만들었다. 방대한 지적 탐색을 가능하게 한 시기였으므로. 프랑스어 교사 등을 하며 이곳저곳을 떠다니다가(방랑은 아님) 1976년, 드디어 꿈에 그리던 ''꼴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로 취임하게 된다. 미셸 푸코의 적극 추천으로 가능한 일이었단다.
푸코와 바르트는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를 교수 자리에 적극 추천하는 이 모습에 선생님은 ''참 멋진'' 일이 아니냐며 미소를 지으셨다. 우리에게는 보기 드문 일이기에.
어머니 사망(1978년) 후 쓴 책이 <카메라 루시다>. 그의 마지막 저작인 이 책은 어머니에 대한 ''애도'' 작업이기도하다. 어머니의 사진들을 정리하는 작업에서 시작해 어머니의 어린 시절 사진인 <온실 사진>에서 마침내 사진의 본질을 발견한다. "어머니를 만났다."는 사진을 통한 무의지적 기억이다. 바르트는 2년 후 미테랑(프랑스 전 대통령)이 주관하는 오찬에 갔다 길을 건너던 중 트럭에 치여 병원에 실려갔으나, 한 달 후 사망한다. 그의 의사의 말에 따르면 바르트는 마음 속에서 치료되길 거부했다고 한다. 그에게서 살겠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고. 결국은 애도 작업을 통해 치유에 이르지 못한 셈이 되었다.
3-1. 바르트의 personality(정신세계)
들뢰즈가 근대라는 거대한 담론을 해체하고 소담론으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라는 중심을 해체하겠다는 의미였다. 중세 시대에 그 자리에 ''신''이 있었다면, 근대에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만큼 서구에서 ''아버지''라는 존재는 나와 대립 관계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명명했다.
그러나 바르트에게는 그런 강박관념이 없었다. 일찍 돌아가셨으므로 아버지는 어머니를 통해 존재했다. "나의 아버지는 시끄럽지 않다." &#65279;어머니를 통해 존재하는 아버지는 바르트를 억압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바르트의 정신세계의 특성과 만나게 된다.
파리가 그에게 타락한 쁘띠 부르주아의 세계, 감각이 제거되고 외부를 향해 닫혀 있는 세계라면, 바이욘은 냄새, 감각이 살아있는 세계, 고독한 단자적 존재지만 외부를 향해 열려 있는 세계다. 떠다니는 주체란 바로 이런 존재를 말한다. 바이욘에서 외부로 나가는 길, 고속도로와 지하도와 산길 중 바르트는 산길을 좋아했다. 이 길은 육체를 통해 경험하는 길이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과 상관없이 그저 구경하는 길이다. 정신을 통하지 않고 산길에 있는 것들과 직접 접촉하는 세계이다. 순전한 유희(주이상스)를 위한 길이다.
그가 좋아하는 말 중에 ''아르바이트''가 있다. 이 말은 자본주의적 의미의 근대적 노동이 아니라 탈자본주의적 의미의 노동의 탈피이다. 그의 글쓰기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유희로서의 아르바이트이다.
선생님 말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노동할수록 가난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의 능력을 탓한다. 정당한 교환관계에 대한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 벤야민은 이를 ''분노와 증오''를 통해 해야 한다고 말했다.
&#65279;"나에게 사진은 adventure(모험)이다." 일종의 지도 없이 떠나는 여행. 안내를 착실히 따라가는 건 모험이 아니다. 자본주의적 의미체계에서 볼 때 전혀 무의미한 이 신체적인 경험들이 바르트에게는 즐거움, 주이상스를 가저다준다.
바이욘의 산길을 지나가며 접촉하는 세계, 글쓰기, 사진은 모두 ''유희''와 만난다. 정신을 탈각하고 육체를 통해 경험하는 어떤 것들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시간이 지나니 맥락을 잊어버렸다. 이런 ㅠ.
&#65279;3-2. 바르트의 글쓰기와 폐결핵
이 부분부터는 선생님의 개인적인 생각이라며 생각해보자고 하셨다. 그의 글쓰기는 끊임없이 미끄러지기, 다른 영역으로 건너가기이다. 그는 끊임없이 변신한다. 폐결핵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웃음 2. 그의 글쓰기는 ''치고 빠지기''다. 그의 주변인들이 이런 그의 스타일을 보고 그랬단다, ''바르트 또 뭐 하고 있냐고''. 이 부분에서 수강생 모두가 크게 웃었다.
폐결핵으로 아카데미 진입 욕망이 좌절되면서 일종의 강박 현상의 이중성이 발생한다. 그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컴플렉스와 함께 그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이 결합한다. 지적 자부심이 강한 그인만큼 튀는 행동을 통해 아카데미 세계의 시선을 끈다. 바르트의 이론적 특성들을 이렇게 바라볼 수도 있다고.
3-3. 성적 정체성과 바르트의 지적 커리어
바르트는 게이였다. 그에게 평생 여자는 어머니 밖에 없었다. 바르트에게 어머니는 세 가지 시니피앙을 지닌다. 자신을 낳았고 길러 주었다는 면에서는 어머니요. 그러나 평생을 함께 했던 파트너라는 점에서는 부인이요. 나중에 사진 속에서 발견하는 어머니는 (진짜로 낳을 수는 없지만) 자신이 낳은 딸이 되었다고 말한다. 바르트에게 이론과 성적 정체성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성적 정체성은 내밀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고통이 그렇듯이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아픔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함부로 얘기할 수는 없다. (동성애의 리얼리티가 뭔지 사실 우리는 모른다. 다만 이성이라는 전제 위에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뿐이고 거울 그림으로 비추어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서로 다른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그건 그들만이 아는 것이다.)
함부로 얘기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그렇더라도 우리는 그의 성적 정체성이 그의 객관적인 이론 세계나 정신 세계와 어떤 식으로 만나는지 따져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바르트가 소위 쁘띠 부르주아적 문화를 코드 시스템으로 이름 짓고 그것으로부터 이탈하는 경험이나 행위를 탈코드적이라고 했다면 탈코드적 경험의 이론적 경도는 호모섹슈얼리티가 가지고 있는 비정상적으로만 가지고 있는 어쨌든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는 성적 문화에 대한 프로테스트이다. 풍크툼은 나만 아는 것이다. 그것은 담론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탈코드적인 특별함, 담론의 불가능성을 바르트의 성적 정체성과 연결시켜 볼 수 있는 것이다.
호모섹슈얼리티의 또 다른 바르트적인 의미는 끊어지지 않고 흐르는 리비도, 다시 말하면 탈코드적인 의미의 끊임없는 생산이다. 자연은 생산과 소멸이라는 두 개의 바퀴로 굴러간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성애가 발생한다. 자연의 생산 원칙이 결혼제도로 건너오면 적법성을 가진 생산체계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아이를 낳는 순간 리비도 관계는 끝난다.
웃음 3. 결혼을 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 전혀 그렇지 않다. 아이를 낳는 순간 둘 만의 리비도 관계는 끊어진다. 이건 어쩌면 굉장히 비극적인 일이다. 그런데 동성애 관계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애정관계가 양자로만 남기 때문에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무언가 끊임없는 생산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바르트가 얘기하고 있는 시니피앙스다. 끊임없는 의미생산.
애를 낳지 않으면 기득권층이 유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렇게 애 낳으라고 야단이라구...^^) 모두가 애를 낳지 않으면 사회는 무너진다. 혁명이 다른 게 아니다. (이 부분부터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하심^^...기록하지 않겠다. 수강생 모두가 왁자지껄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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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
m**w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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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는 대학교 시절 처음 접했다. 문화학 분석 도구로서 기호학을 공부하며 교수님의 권유로 소쉬르를 공부하다, 롤랑 바르트까지 이어진 것, 당시 독일 이름 롤란트로 독일 예명을 지었을 만큼, 롤랑 바르트는 친숙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김진영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생생하게 더 구체적인 인물로 되살아났다.
처음 선생님이 하신 말씀에는 바르트가 강조한 독자라는 개념은 쓰인 것을 그대로 읽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쓰는 독자, ‘글쓰기’하는 독자로의 의미를 내세운 것이라 한다. 곧 읽는 행위와 쓰는 행위는 거의 다른 게 아니라는 것이다.
원래는 자본주의화되면서 태어난 이데올로기 개념인 독자는 근현대인에게 강요된 정체성, 곧 생산 주체가 아닌 소비 주체가 되어 얼마나 소비할 수 있는가가 내 삶의 자격이 된 시대를 말하는 것으로, 바르트의 독자 개념은 거기서 벗어나기(탈코드화) 위한 하나의 전략인 것이다.
강의를 훌쩍 건너뛰면 바르트의 쓰는 독자는 지각하는 주체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 같다. 즉 바르트가 바이욘 고장 묘사에서 고속도로, 고가도로 아닌 지하 밖으로 나가는 산길로 넘어가는 유년 시절의 세 번째 길은 마치 교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 같다고 했는데, 교통과 경험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가다가 구경하는 데 그 길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의 육체를 통해서, 언제나 접촉을 통해서 가능한 게, 신체라는 이름으로 구체적인 매개를 통해서 대상과 교류가 지각인데, 그런 지각을 성립시켰던 게 바이욘의 길인 것이다. 곧 글은 계속 읽는 것으로 점철되는 게 아니라 멈춰서 쓰는 순간이 중요하고, 이를테면 이것이 푼크툼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런 독자가 쓰는 독자가 되는 것이다. 어쨌건 간에 바르트에 의해 주체의 개념이 이전되고 확장되며, 또한 독자 역시 격상되는 것 같다. 그리고 포스트모던의 하이퍼미디어의 개념 역시 열리는 데 한 지점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다.
바르트는 또한 미끄러지는, 빠져나가는, 새어나가는 탈출하기의 사유를 보여주었다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이는 강의 후반에 다가가며 점점 폐렴으로 인해 요양 시절 지식 습득의 시간을 겪은 반면 엘리트층으로 편입하지 못 한 그가 끊임없이 튀는 전략을 구사해야 했다는 정신분석학적 분석에 어느 정도 더 내밀하게 바르트에 다가가는 것 같았다. 이건 개인적으로 직장에 들어가지 못 하고, 졸업 이후 한 곳에 안주할 수 없는 어떤 절박한 처지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갖게 되는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바르트는 마르셀 프루스트, 벤야민, 퍼스의 인덱스론의 영향 관계를 많이 받았다는데, 벤야민은 바르트가 언급하지 않았지만, 은밀하게 그 영향 관계를 추정해볼 수 있다 한다. 아트 앤 스터디에는 『들뢰즈씨, 영화관에 가다 『시네마 Ⅰ』읽기』라는 강의 역시 열리고 있는데, 이 강의에서도 들뢰즈 이전에 벤야민에 대해 중요하게 다루는 것을 보고 일련의 상관관계를 읽을 수 있었다.
우리가 기존에 바르트의 좋아하는 책 중에, 『사랑의 단상』은 바르트가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유서의 성격을 갖는다고 한다. 그리고 바르트를 카멜레온이라 칭할 만큼 그는 다양한 지적 프로세스 거쳐서 『카메라 루시다』라는 책에 도달하고, 푸코/데리다/블랑슈 등 동시대 후기구조주의로 건너가는 대신 그들과 섞일 수 없는 부분이, 모던 이후 포스트모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 할 때, 그는 탈모던적 모더니스트의 미묘한 지적 정체성을 갖고 있고, 역사, 주체, 이성 등의 개념을 부정하는 대신 주체라는 개념은 고수했다고 한다. 여기서 떠다니는 주체, 흔들리는 주체, 부유하는 주체 등의 기존의 주체 개념을 수정, 전유하게 된다.
lucida, 루시다는 바로 환하게 빛난다는 뜻으로, 카메라 옵스큐라의 어두운 의미, 곧 이는 회화, 비밀스러운 의미, 기독교의 신과 연관되는데, 바르트는 사진에서 그것을 해체하는 의미로 쓰는 것이다. 빛과 어둠의 테마는 앞으로도 중요한 서구 철학을 이해하는 요소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온다.
첫 돌 되기 전에 아버지가 전사했던 바르트는 어머니에 대한 의존이 강했다 한다. 어머니는 어머니이자 부인, 마지막에는 딸로서 느껴졌다고 바르트는 언급한다는데,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가 미테랑 대통령 오찬에 참가했단 당한 교통사고 이후 치료에 대한 의지를 갖지 않고, 죽음을 맞았다는 것이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의존도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중심, 주체, 권위=신, 모던의 의미성을 갖는다면, 바르트는 특이하게도 아버지가 없는 까닭에 아버지의 모습도 어머니의 매개를 통해 접했고, 부드러움의 상징인 어머니를 긍정하면서도 아버지의 모습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위치에 있을 수 있었고, 그것이 아마도 주체를 긍정한 까닭과 연관되지 않나 싶어졌다.
이미지는 두 개가 있는데, 접촉을 통해서 또 정신적 관계로만 만들어지는 이미지가 그것이다. 그런데 사진은 빛을 받아 이미지가 생겨나는 것이므로 접촉으로 생겨나는 것이라 한다. 이는 사진의 중요한 특성을 알려주는 것 같다.
김진영 선생님의 강의는 느린 듯한 말투로 조금 지루할 수도 있다는 말을 흘려들은 적도 있는데, 그 느린 듯한 말투에 중요한 의미들이 마구 튀어나와 이를 사유하는 데는 오히려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어려운 철학 사상을 문자로만이 아닌 그의 삶과 자의식에 견주어 살펴보는 것은 의외로 그의 철학이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던져주며 철학을 지식으로 사유하지 않게 하는 재미를 준다. 김진영 선생의 바르트 강좌 역시 그러했다. 일강은 그렇게 바르트에 대해 친숙해지는, 바르트를 환유 차원에서 접근하는 그런 시간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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