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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 |
오색빛 구토, 산보객, 한 개인으로서의 죽음 |
정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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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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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세월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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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세월에는 총 세 가지의 뜻이 있다. 국어 사전에 명명된 것으로는 1. 지내는 형편이나 사정. 2. 흘러가는 시간. 3. 살아가는 세상. 어떤 순간과 흘러가는 시간들과 세상.
세월 Time.
눈물과 분노들이 이어지고 고발과 추적들이 잇따랐다. 노란 리본들이 휘날렸다. 누군가는 대책을,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두들 열에 들뜬 사냥개처럼, 한 번도 본 적 없는 목덜미를 찾아내고 싶어 안달했다. 북과 남 중 어느 쪽으로 더 저울이 치우쳐져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고 빈정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동네 스포츠 센터에서의 플래카드에는 ‘생존수영’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했다. 여행사의 적자가 이어지고, 불평하는 목소리에 이어 이를 비난하는 목소리들과 이 비난을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뒤섞였다. 노란색은 슬픈 색이 되어버렸다. 모두들 빨간 티셔츠를 입고 시청 광장에 모였다. 노란색은 희미해졌다. 모든 풍경들은 파노라마처럼 이어지지 못하고 깨진 꽃병처럼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전처럼 되돌릴 수 있을지 막막하고, 꽃병이 어떤 무늬였고 어떤 모양이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다. 벤야민은 보들레르가 도시 산책자의 전형이라고 했지만, 아도르노가 지나치게 사변적이라고 비난했던 벤야민이야말로 진정한 도시 산책자일지도 모른다. 그는 끊임없이 보았다. 그게 그의 임무였다. 책으로 고개를 숙이거나 눈물로 눈 앞을 흐리는 대신, 그는 흐려지지 않도록 눈을 깜박거리면서 파리를 보았다. 그 순간의 파리에서 그는 보들레르를 보고, 읽었다. 그가 만들고 싶어했던 건 이전의 꽃병이 아니었다. 꽃병이 입은 상처는 되돌릴 수 없다. 없었던 것처럼 만들 수 없다. 우리가 간과한 아주 조그만 부스러기가, 그 조그만 파편이 꽃병이 당했던 폭력을 증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무관심하게, 그리고 무의도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어떤 폭력들은 무관심하고 무의도적이었기 때문에 결과 앞에서, 참극 앞에서 말한다. 실수였고 착오였고 의도치 않았기 때문에 두 손을 들고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 모든 제스쳐가 얼마나 참혹하고 끔찍한 지, 우리는 그제서야 깨닫는다. 죄를 인정하는 폭력들은 이제 과거의 이야기, 전설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전설은 비뚤어지고 망가진 채 현대까지 굴러 들어왔다. 우리는 그 전설을 차고 물어뜯고 던진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결백해질 수 있다, 우리도 울고 억울해할 수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면죄권을 준다. 벤야민은 물질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경시되는, 자신이 상품이 되는 줄 모르고 상품을 욕망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고, 그들을 관찰했고 사랑했다. 아도르노의 혐오는 어쩌면 그 자신이 지적했던 병적 혐오감의 일부분일지도 모른다-이 쇼의 현장에서, 우리는 모두 유죄가 된다.
세월 The hours.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한 적이 있었다면 그건 미워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한 적이 있었다면 그건 미워하는 것이다. 넝마처럼 너덜너덜하게 찢긴 자신을 드러내 보이면서 잘못을 깨달으라고 윽박지르는 순간,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인생이 끝나버렸다는 걸-자신의 세계가 끝났다는 걸 깨닫는다. 복수가 허망하게 실패했다는 걸 깨닫는 건 바로 그 마지막 결단이 끝난 직후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못한다. 잃어버린 건 그들 자신 뿐이고, 세월은 덧없이 흘러간다. 두 소년이 장례식장 앞에서 서성인다. 이내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묻는다. 2층부터 갈래, 1층부터 갈래? 그러자 다른 한 명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몇 층부터 가든, 그들은 두 층을 다 돌아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선배나 후배, 친구들이 얼마나 잘 웃었는지, 꿈이 무엇이었는지 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것에 화를 냈고 어떻게 울었는지를 기억한다. 그들에게 마지막까지 남는 건, 그 동영상 속에서 누가 지른지 모르는 비명이다. 그 비명은 그 아이일 수도, 저 아이일 수도 있다.
버지니아 울프와 로라 브라운과 클래리사 보건은 시간의 잔인함을 깨닫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시간이 그냥 흘러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지 못한다. 아니, 상처가 아문다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아물고 이전의 상처가 아무렇지도 않은 게 된다는 것이 두렵다. 그들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삶이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미래에서 아문 상처를 보지 못하고 곪아 터진 상처를 본다. 벤야민은 파리 거리를 유유히 걸어다니는 보들레르를 보았다. 그건 그 자신의 사유이자, 상처였다.
세월.
어떤 단어로도 대체되지 못하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렸다. ‘거위의 꿈’이라는 흔한 노래 가사로는 수습되지 못한다. 이 세상 자체가 ‘세월’이다. 우리는 ‘죽음’ 의 에너지 앞에서 도망치라는 명을 받고, 순순히 도망쳐 목장으로 향하는 양떼들이다. 뿔이 꺾어지고 털이 깎이고, 이내 털만으로 만족하지 못할 때까지 얌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있을 것이다.
어떤 사유가 있고, 그 사유를 외우는 게 아니라 생각할 때 공부가 된다면. 그 공부로서 하는 사유가 우리에게 과연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 아니면 불행을 가지고 오는가.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숨이 턱 막히는, 이 더위 속에서 사람들은 떠들고 웃고 돌아다니면서 술을 먹는 등 축제처럼 즐기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그런데 그 순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지거나 생략되고, 모두들 눈살을 찌푸리며 등을 돌린다. 볼링 라인 위의 공처럼 어떤 제지도 없이 죽 미끄러져 가야만 하는데, 거터에 빠진 격이다.
병적 혐오감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다. 죽음은, 사실 외부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모두들 잊지 말자고 하면서도, 얼른 잊어버리기를 바란다. 적어도 우린 안전하다는 안도감과 함께. 과거에 대한 향수에 빠지자는 거냐는 아도르노의 비판에 매몰되어 과거를 부정하고 씻어버린다면, 그건 아도르노를 욕보이는 짓이다. 벤야민은 그저, 우리가 잊어버렸던 것을 마주보자고 한다. 우리가 잊어버리게 된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잊어버리고 싶어했던 그것, 우라시마 타로가 상자에서 꺼낸 건 이미 흘러간 세월들이 아니라 그를 낯설고 이상한 존재로 만들어 무력하게 만드는 그 세상이었다. 외국으로 떠나지 못하는 것, 이 곳에 잡아두는 것, 무력해지게 하는 이 장소에 머무르게 되는 건 자신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혐오하는 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라시마 타로가 상자에서 꺼낸 건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세상만이 아니라, 즐거운 용궁 생활을 뿌리치고 나올 만큼 소중했던, 그가 사랑했던 그 세상이었다. 파리는 그렇게, 벤야민에게 양가성을 지니는, 우울한 사랑의 공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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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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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실패의 미화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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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미화
[김진영 선생님의 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4강을 듣고]
안철수는 왜 정치에 실패했는가
‘노조 설립’에 대한 공략인 ‘노조 파괴’ 문건을 보면, 그들이 학습지 교사이든 마트 창고 직원이든 간에 대처나 예상 반응들이 다 비슷하다는 판단 하에 작성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프롤레탈리아들은 개별성을 잃은 물건들, 혹은 애완동물이나 다름없다. 망가진 물건들은 고치거나 내버리면 된다. 하지만 애완동물들은 버릇을 잘못 들이면 별다른 방법이 없다. 고육지책으로 ‘때리거나’ ‘훈련소’에 보낸다. 흥미가 잃으면 버린다. 괜찮다, 어차피 그들을 구조할 사람들은 따로 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눈물을 글썽이고 감동하며 아직 세상은 살만할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느끼게 된다. 그 희망이 독이다.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가 대놓고 드러내는 혐오들 중 하나는 바로 ‘집 주변’에 쓰레기장이 생기는 것이다. 냄새와 벌레, 그리고 건강이 나빠진다고 극구 반대한다. 그러면 과연 어디에 쓰레기장이 생겨야 하는 것일까? 상관없다, 그냥 우리 집 근처에만 안 생기면 된다. 남이야 암에 걸리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자신한테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는 생각에 더 울분이 터지고 누군가의 멱살이라도 잡아채고 싶어한다. 하지만 실제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건, 쓰레기장이 아니라 쓰레기장 근처에서 쓰레기와 똑같이 취급될 것 같은 자기 자신, 사실은 이 사회에서 쓰레기로 치부되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쓰레기를 줍는 넝마주이들 또한 똑같은 ‘쓰레기’로 여겨진다. 그들은 쓰레기를 버려진 것으로 취급하거나 가여워하지 않고, 그것들이 ‘쓸모 있다는 듯’이 군다. 모두가 잘났고 모두가 똑똑한 사회다 보니 자신의 판단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이들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정치에 대해 ‘다 똑같은 것들’이라고 논하면서 은근슬쩍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고 거리감을 두는 건 위선도 아니라 우둔함이다. 똑똑하다는 착각이 사람들을 우둔하게 만든다.
이는 정말 최근에 있던 재보궐선거에 대해 책임을 지고 물러난 안철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모범생이었고, 좋은 사업가였고, 좋은 아버지였다. 그는 늘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올곧았고, 희망에 가득 차 있었으며, 선의를 베풀고 싶어했다. 그는 이 시대의 엘리트 코스와 행운을 다 밟고 나아간 이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정치판에서 정치인들과 똑같은 ‘쓰레기’가 될 줄은 몰랐다. 아주 쉽게 ‘개혁 정치’를 논했고, 민주당과 손을 잡았을 때만 해도 자신은 여기에 물들기는커녕 이들을 개혁으로 이끌고 갈 수 있으리라고 쉽게 믿었다. 그 믿음은 사람들에게 희망이었고, 빛이었지만 동시에 우둔했기에 절망이었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지만, 그 나쁘지 않음으로 인해 스스로 절망하고 주변을 절망케 했다. 희망을 가진 건 잘못이 아니다. 개혁하려고 했던 것도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배운 대로, ‘순진함’을 지닌 채 그 곳에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자신이 펼칠 새 정치라고 생각했고, 그게 가능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믿었던 이미지의 대부분은 사업만이 아니라 뭐든지 성공하는 안철수였다. 그래서 그의 실패에 대해 더 가혹했다. 냉정한 비판의 시각 또한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신’에 젖는다. 왜냐하면 그 자신조차도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한테 희망을 갖는 동시에 그 희망이 배반당하면 더 심한 ‘모욕감’에 젖어버린다.
그런데 과연 정치가 있기나 한 것일까? 정치학이라는 게 가능할까. 그에 대한 의문은 그 누구도 가지지 않는다. 최악과 차악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에 사람들은 차악을 선택하는 대신 최악을 선택하고 편안해진다. 왜냐하면 차악에 희망을 걸어 좌절하느니, 최악을 선택해 불평이라도 마음껏 하고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이런 글에서 ‘개인적 의견’을 밝혀보자면, 내가 혐오하는 것은 적어도, 자신의 손은 깨끗하다고 믿는 사람이며 마치 자신의 정의가 실현된 것인 것마냥 쉽게 뿌듯해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그런 자신을 인지하지 못한 채 화만 내는 이들이 가장 최악이다. 그들은 실패를 미화하고, 미화된 실패를 자신의 것인양 전시하며 자랑한다.
모두가 문을 열지 않았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면 바로 바리케이드를 쌓는 배우들의 모습이었다. 혁명단의 대장 격인 앙졸라와 그의 친구들이 주변의 집으로 뛰어들어가거나 소리쳐 외친다. 그러자 창에서 가구들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투덜거리면서도 그들이 의자를 들고 나갈 때 손으로 키스를 보낸다. 마치 한바탕 축제라도 벌어지는 것 같다. 위고의 낭만적 시선이 개입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정말 영화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장면이다.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웃고 떠든다.
그러나 바리케이드가 무너지고 정부군이 그들을 진압하러 달려온다. 혁명단원들은 집 문을 두드리며 간절히 열어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아무도 문을 열지 않는다. 모두가 문을 열지 않았다. 다음 날 피에 젖은 포석을 스펀지로 닦으면서 여인들이 나지막하게 노래를 부른다. 그들의 피에 젖은 금발, 힘없이 떨어진 손, 채 감기지 못한 눈꺼풀 사이로 보이던, 보석처럼 푸른 눈동자를 회상한다. 그들은 도망가기보다는 바리케이드 안에서 머무르려 했고, 마지막에는 ‘집’으로 회귀하려 했다. 더 좁은 곳으로 틀어박히려고 했다.
‘바리케이드’라는 우울의 공간, 한순간의 행복함 뒤에는 반드시 불행이 따를 것이라는 이 강박이 언제부터 태어난 것일까. 벤야민은 샤를부터 죽 내려온 혁명과 실패의 거듭된 역사 때문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한다. 희망은, 모든 실패의 선례들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며 그 허위성을 벗겨낼 수 있다는 것이고 절망은, 과거에 그랬듯이 지금도 또 실패할 거라는 것이다. 아무도 맞붙어 싸우려고 하지 않았고 문을 열어주려 하지도 않았다.
위고는 바리케이드의 마지막 장면은 철저하게 사실적으로 그렸다. 절망에 대해서는 끔찍할 정도로. 그렇지만 그는 바리케이드에서의 몰살 장면에서, 죽는 이들 중 몇몇을 부각시켰다.
앙졸라는 혁명단의 대장 격으로, 그의 이름은 ‘천사’라는 뜻이다. 그는 누구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끝까지 맞서 싸운다. 정부군들의 총구 앞에서도 그는 찬란하게 빛난다. 그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혁명단원들의 행동에 대해 비웃고 폄하했던 그랑테르였다.
아마도 그랑테르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 가장 유사할 것이다. 차가운 지식인들, 어차피 해봤자 시간 낭비이고,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뿐이며 여기에 있는 건 재미있어서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흔히 ‘쿨함’을 표방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랑테르는 앙졸라에게 말한다. ‘나도 너와 같이 가도 좋은가?’ 앙졸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순간 앙졸라는 정말 ‘천사’처럼 보인다. 그는 그랑테르에게 손을 내밀고, 그랑테르는 홀린 듯이 그의 손을 잡는다. 정부군의 총이 불을 뿜고, 그들은 창문을 등진 채 바닥으로, 바닥으로 떨어진다... 수업에서 언급된 바흐만의 말마따나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라는 것처럼. 사실 가장 냉정하고 차가운 지식인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앙졸라’를 바라고, 그에게 매혹되는 이들일지도 모른다.
반면 마리우스는 장발장에 의해 ‘하수도’로 빠져나간다. 분명 어떠한 빈틈이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스스로 자의에 의해서 빠져나온 게 아니라 장발장에 의해 빠져나온 것이다. 그의 마음은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죽은 채로 산다. 산 채로 죽어 있다. 비겁한 게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실패 앞에서 허망한 태도로 앉아 있다.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전투에 응한 게 아니다. 죽을 줄 알고 전투에 뛰어든 것이다. 그는 그걸 알았으면서도, 그게 증명되는 순간 깊은 회의에 잠긴다.
동정과 연민
영국이나 프랑스의 산보객과 파리의 제2제정기 시대의 산보객은 철저히 구분된다. 실제로 찰스 디킨스의 ‘밤산책’의 디킨스와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벤야민은 확연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디킨스가 걸어다니는 이유는 단순히 ‘잠이 오지 않아서’, 그리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이들은 그보다 확실히 아래에 위치한 사람들로 그는 그들을 동정하고 그들에게서 선한 구석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생트뵈브가 확실한 혐오감을 보여준 것과 사실 비슷한 축에 속한다. 하지만 벤야민은 그들에게 뭔가를 기부하지 않는다. 그 또한 가난한 이들에 속해 있다. 돈이든 정신이든, 다 가난하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논문 지원을 받아야 하며, 자신의 논문이 팔리기를 기대하며 최대한 논문을 맞춰서 써야 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 진흙탕에 어지러이 남은 발자국을 보았다. 문득 비바람을 견디며 몇겹의 세월이 흐른 후 지질학자에 의해 절벽 표면에서 발견된, 멸종된 생명체의 발자국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런 추측을 해보았다. 만약 이 진흙밭이 지금 이대로 돌처럼 굳어져서 수마년 동안 여기에 가려진 채 있게 된다면, 지구상에서 우리의 후세가 될 인간 종족은 전통의 도움 없이 이곳에서 찾아낸 흔적만 가지고 인간의 지력을 최대한 발휘해, 한 나라의 수도에서 아이들을 방치할 뿐만 아니라 바다와 육지에서 휘두르는 힘은 자랑스러워하면서 그 힘으로 아이들을 붙들어주고 구해주지는 않는 공공의 야만성을 가진 문명사회가 존재했다는 놀라운 추론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점이 궁금했다.
찰스 디킨스, ‘밤산책’ 124-125
하지만 점차 디킨스도 그 자신의 행보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의 행보는 ‘사회적으로 소외받은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동시에 그 자신 또한 그들에게서 자신의 유사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질성은 위험하다.
권력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정치적인 견해에 상관없이 모두가 죽음을 이용해 거래를 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을 고이 보관하고, 죽음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죽음을 최대한 이용한 다음 마지못해 떠나 보낸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찰스 디킨스 , ‘밤산책’ 158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면 벤야민은, 짧은 메모들을 휘갈겨 쓰면서 놓치지 않으려 한다. 과연 무엇을? 그들은 크게 눈을 뜬다. 눈을 감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충격과 공포이기 때문이고, 그로테스크의 그로테스크이기 때문이다. 감는 순간 우리는 어둠에게 먹히고 만다. 불면증을 야기하는 이 사회에서, 눈을 감아버리면 편할 이 사회에서 그들은 어둠에 먹히면서도 그 속을 탐사하는 피노키오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제페토 할아버지와 함께 빠져나올 길을 찾을 수 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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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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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2강 일방적이지 않은 통행로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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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하치장
쓰레기는 쓸모없는 것들의 무덤이다. 뒤죽박죽 섞여서 좀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쓰레기들을 정의한다면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쓰레기 더미 속에 있는 건 너무나도 다양하고 하나로는 일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안고 다녔던 미미 인형, 어제까지 아버지가 신고 다니던 양말, 노인의 틀니 철사, 반짝만 남은 고무장갑, 찢어진 노트들. 어느 누구도 그 압도적인 쓰레기의 숭고함에 손을 대지 못한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혐오한다. 쓰레기 하치장을 자신의 지역구에 두고 싶지 않다는 님비는, 사실 자신의 이익 문제보다는 자신의 청정한 생활이 쓰레기와 뒤섞일까봐 두려운 것이다. 뒤섞이는 순간, 자신의 삶도 쓰레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골라낼 생각도 하지 않고, 사람들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백지를 원하고, 스스로 백치가 되어간다. 쓰레기는 사실 그 잔해들에 대한 비겁한 변명, ‘쓰레기’라는 말로 단숨에 제껴 버리려는 손짓인 것이다. 잔해들 앞에서 망설이기보다는, 무조건 ‘결정’하고 넘겨 버리려고 한다. 관료주의적 사회에서는 더더욱이나 그럴 것이다. 일단 서류를 처리하면, 그 다음은 그 다음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지 자신의 책임 권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는 백열등의 흰빛 아래의 백치보다는 창밖에 서 있는 가난하고 남루한 가족에 관심을 두었다. 레스토랑 창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그들의 것이 아닌 향기가 난다. 그래서 그들의 유래조차 알 수 없고, 그들 자신조차도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멍청한 양배추 머리 인형들만 앉아 있는 셈이다. 하지만 창밖에 서 있는 가족들에게는 시간과 수많은 감정들을 뒤섞은 채로 끌고 다니고 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규정하는 ‘쓰레기’일 것이다. 그들의 알 수 없는 시선이 집요하게 창안을 훑고 있다는 걸, 모두들 외면하고 모른척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강력하다.
만약 쓰레기를 분류하고 그 잔해들의 역사와, 여운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그것들은 그 순간 쓰레기가 아닌 다른 것이 된다. 보들레르는 늙은 여인의 검버섯에서 젊었을 때의 방탕한 아름다움을 읽어냈고, 높고 쾌활한 여인의 웃음소리에서 한없이 잔인하게 권력을 행사하고 느끼는 흡족함을 느꼈다.
데카당스와 인간 사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들은 인간의 신체에 대해 끈질기고 집요하다. 연인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분명 뻔한 소설들이라면 아름답게 묘사할 텐데도 묘하게 비틀리고 꼬인 시선을 유지한다. 유혹의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낯설음은 사람들에게 불쾌함만을 주지는 않는다. 그 묘한 긴장감은 사실 보들레르의 시의 육체성만큼이나 당혹스럽다.
‘친구의 키스’라는 색다른 인사법, -여자의 입술을 빠는 대신에 입김을 마시는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하는 이상한 키스, -이것은 그 후 습관처럼 굳어져서 헤어질 때는 “그럼 안녕, 다시 올게요”하며 그녀가 입술을 내밀면 나는 그 앞에 얼굴을 내밀고 마치 흡입기를 향하기라도 하듯이 떡하니 입을 벌립니다. 그러면 그 입 속에 그녀가 후하고 입김을 불어넣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그것을 후우 하고 맛있다는 듯이 가슴 속 깊이 들여 마십니다. 그녀의 입김은 습기를 띠고 있어서 따뜻하며 인간의 폐에서 나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달콤한 꽃과 같은 향기가 났습니다.-그녀는 나를 매혹시키려고 입술에 살짝 향수를 발랐다고 했는데 그런 장치가 되어 있는 줄은 물론 그때는 몰랐습니다-. 나는 이렇게 그녀처럼 창녀가 되면 내장까지도 보통 여자와는 달라지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그녀의 체내를 통해서 그 입으로 나오는 공기는 이렇게 요염한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치인의 사랑’ 365
시와 소설의 주체는, 신이 아닌 인간이다. 서정시가 발달되든 그대로 멈춰 있든 단절되든 간에 그 시들이 이야기하는 건 인간이다. 자신의 형식이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근대 사회로 이동하면서 인간은 더 똑똑해졌는데 시와 소설 속에서는 별다른 똑똑함이 보이지 않는다. 다들 머저리가 되어버렸다. 보들레르는 인간의 상실된 똑똑함을 악에서 보았고, 그 악에서 점점 더 치열하게 구현되는 인간성을 발견했다. ‘악마주의’는 어쩌면 인간이 최소한 인간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기 위해 선택한 방법일는지도 모른다.
아우라의 실종
국가는 이제 누군가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새로운 것에 대해 열광하는 것도 잠시, 이윽고 또다른 새로운 것이 예고되고 지금의 새로운 것은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은 왜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가. 어떤 물건을 사용하고 어떤 취향을 가지느냐에 따라 인간의 첫인상이 결정되고, 또 인간의 삶의 방향이 보인다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점쟁이마냥 그렇게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타락한 ‘언어’는 바로 ‘새로움’일지도 모른다. 새로움은 이제 광고 카피의 문자로만 남아 버렸다. 성경에서 마주한, 이전에는 보지 못한 기적들은 ‘새로웠고’,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실증주의를 논하는 현대에서는 ‘아우라’가 한번 발현된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증거’를, ‘사료’를 원한다. 별자리가 구축되면서 한순간 ‘빛나는’ 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우라를 실종시킨 건 ‘그들’이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다. 의심이 점점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똑똑해지기보다는 멍청해졌고, 믿는 것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믿는다는 것을 광신과 똑같이 치부하면서, 광신자들과 믿는 자들을 싸그리 멍청한 사람들로 몰아버렸다. 벤야민 또한 태고주의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그는 절대 태고를 돌아가야 할 근원으로 본 게 아니었다. 다만 그는 태고를, 그 때 있었던 사람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고 루카치의 말마따나 ‘별을 보면서 길을 찾아가는 시대’를 되새기며 현대의 희망으로 가고 싶어했던 것이다. 현대사회는 믿으라고 말하면서 믿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믿지 않는다. 벤야민은 믿고 싶어했고, 끊임없이 그러길 바랬다. 설사 그게 마지막에는 스위스 국경에서의 절망으로 끝날지라도. 그의 마지막 행보는, 그마저도 ‘믿는다’라는 것이 얼마나 압도적인 어려움을 지니고 있었는지 말해주는 증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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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과 보들레르, 그리고 시대의 우울을 읽는 힘 |
이*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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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선생님의 깊이 있는 해설 덕분에 벤야민의 보들레르 에세이가 단순한 문학 비평을 넘어선 역사철학적 성찰임을 깨달았습니다. '파리에 대한 우울한 사랑'이라는 테마가 19세기 제2제정기의 현실과 오늘날 우리의 시대를 관통한다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특히 '애도의 철학'에 대한 논의는 최근 저에게 닥친 개인적인 상실감과 우울을 인문학적으로 승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강의를 듣는 내내 텍스트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생함을 느꼈습니다. 15시간이라는 긴 분량이었지만 지루할 틈이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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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보객'과 '넝마주의'를 통해 바라본 근대의 얼굴 |
박*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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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에서 다뤄진 산보객(Flaneur), 넝마주의(Chiffonnier), 댄디(Dandy) 등의 모티프들이 보들레르와 벤야민의 사유를 연결하는 핵심적인 고리임을 명확하게 이해했습니다. 보들레르의 시를 인용하여 근대 파리의 판타스마고리와 그 이면에 숨겨진 몰락의 징후를 읽어내는 강사님의 통찰력이 대단합니다. 강의 중 언급된 찰스 디킨스의 '밤산책'과의 비교도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강의를 들으니 당장 파리의 거리를 걸으며 벤야민의 시선을 따라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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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강의를 듣고 난 후, 파리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
김*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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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강의를 들으니 그때 보았던 화려한 파리 뒤에 숨겨진 우울하고 역사적인 정념을 이제야 깨달은 느낌입니다. 벤야민의 '멜랑콜리'가 단순히 개인의 슬픔이 아니라 역사철학적 정념이라는 설명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늘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강사님 말씀처럼 '희망은 과거 안에만 있다'는 역설적인 구절이 현재를 직시할 용기를 주었습니다. 정말 인생 강의라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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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도 높은 철학과 문학의 향연, 그러나 초심자에게는 난이도가 높을 듯 |
최*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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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강사님의 해박한 지식과 열정적인 강의는 최고였습니다. 벤야민, 보들레르 외에도 프루스트, 프로이트, 베르그송, 아도르노 등 다양한 사상가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했습니다. 다만, 배경지식이 부족한 분들에게는 다소 버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평소 벤야민 책을 몇 권 읽어본 경험이 있어 따라갈 수 있었지만, 인문학 입문자라면 사전 학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강의 내용의 질은 최상이지만, 난이도 때문에 중간 만족도를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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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시간의 강의, 몰입도는 높지만 집중력 유지가 힘들었습니다 |
한*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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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8강, 15시간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 '철학쇼츠'라는 이름과는 다소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내용 자체는 완벽하지만, 몰아서 듣기에는 부담스러웠습니다. 각 강의가 100분 내외로 긴 편이라, 출퇴근 시간에 쪼개 듣는 저로서는 흐름을 자주 놓치기도 했습니다. 물론 강의의 깊이를 위해서는 이 정도 시간이 필요했겠지만, '철학쇼츠'라는 명칭 때문에 기대했던 짧고 압축적인 강의는 아니었습니다. 다음에는 분절된 형태로도 제공되면 좋을 것 같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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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록이 없는 점이 아쉽습니다. 복습에 어려움이 있어요. |
정*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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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내용이 워낙 방대하고 인용되는 텍스트가 많아서 강의록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공되지 않아 아쉽습니다. 핵심 개념이나 인용 구절을 필기하느라 강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물론 강사님의 설명이 워낙 뛰어나지만, 텍스트 원전과 비교하며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었던 저에게는 큰 불편함이었습니다. 강의 내용 자체는 매우 만족스러워서 별 4개를 주고 싶지만, 자료 부족 때문에 만족도를 중간으로 낮춥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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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의 시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준 강의 |
이*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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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보들레르의 시를 단순히 '악의 꽃'이라는 제목 그대로 데카당스나 염세적인 시로만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강의를 통해 그의 시가 제2제정기의 정치적 퇴행과 역사적 절망에 대한 알레고리적 저항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지나가는 여인에게> 시를 '순간 속에서 영원한 사랑'이라는 벤야민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부분이 전율을 느끼게 했습니다. 시를 읽는 깊이를 더해준 최고의 강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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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정치학'이라는 주제가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
윤*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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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후반부에서 언급된 '애도의 역사철학'과 '애도의 정치학'에 대한 논의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아픔과 맞닿아 있어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세월호'를 언급하며 망각에 저항하는 태도를 강조하신 부분에서 강사님의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철학이 단순히 머리로 하는 사유가 아니라, 현실의 절망에 맞서는 윤리적 실천임을 깨닫게 해준 강의였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습니다. 정말 귀한 시간을 선물 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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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사유를 따라 파리의 뒷골목을 걷는 듯한 경험 |
고*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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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산보객, 아우라의 실종, 상품 주물주의 등 벤야민의 주요 개념들이 보들레르의 시와 19세기 파리의 역사적 현실을 통해 생생하게 설명되었습니다. 딱딱한 이론 강의가 아니라, 마치 강사님과 함께 파리 거리를 걷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벤야민의 철학이 메시아주의적 희망과 멜랑콜리적 우울을 동시에 안고 있다는 모순적인 지점까지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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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움'의 타락에 대한 비판이 통렬했습니다. |
홍*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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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강에서 다룬 '아우라의 실종'과 '새로움의 타락'에 대한 강사님의 통찰은 오늘날 과잉 생산과 소비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결국 개별성을 잃은 상품이 되는 과정이라는 해석이 충격적이었습니다. 강의를 듣고 나서 제 주변의 소비 패턴과 취향을 돌아보게 되었고, '오타쿠시즘'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인상적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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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구매 할인가로 저렴하게 들었지만... 이 가격에도 불만족합니다. |
오*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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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할인가로 수강료가 저렴했지만, 강의를 듣는 내내 강사님의 개인적인 해석이나 사견이 너무 많이 들어간 것 같아 불편했습니다. 물론 철학 강의에서 강사의 해석이 중요하지만, '안철수 정치 실패론', '세월호'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한 지나친 개입은 순수한 텍스트 분석에 집중하려는 저에게는 방해가 되었습니다. 학술적인 강의보다는 강사의 인문학적 단상을 듣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저는 이런 식의 강의 스타일은 선호하지 않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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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님의 열정은 좋았지만, 발음이 조금 아쉬웠어요. |
문*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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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님의 목소리 톤과 열정적인 태도는 좋았지만, 때때로 발음이 부정확하거나 말이 빨라져서 내용을 놓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철학 용어가 나올 때 발음이 명료하지 않아 되감기를 여러 번 해야 했습니다. 15시간짜리 긴 강의인 만큼, 음질이나 발음의 명료성에 좀 더 신경 써주셨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강의 내용의 깊이와 김진영 강사님에 대한 존경심은 변함없지만, 수강 환경 측면에서 중간 만족도를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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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철학을 통해 삶의 방향을 되돌아보게 해준 강의 |
서*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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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사랑'이라는 제목처럼, 제 삶의 멜랑콜리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 이 강의의 가장 큰 수확입니다. '살자를 거꾸로 하면 자살'이라는 슬로건에 대한 비판적 사유는, 지쳐서 하는 자살이 아닌 열정적인 저항으로서의 삶을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저 역시 이 시대의 무력함을 느끼는 한 사람이지만, 이 강의를 듣고 다시금 힘을 얻었습니다. 제 인생의 '변증법적 형상'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계속 복습할 예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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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렵고 난해해서 포기했어요. 저같은 입문자는 비추입니다. |
배*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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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3강까지 듣다가 포기했습니다. 평소 철학에 관심은 있었지만, 이 강의는 벤야민의 선집을 전제로 하는 강의라 그런지 너무 어려웠습니다. '판타스마고리', '데카당스', '알레고리' 같은 개념들이 배경 설명 없이 등장하여 따라가기 힘들었습니다. 강사님의 지식 수준은 매우 높으신 것 같지만, 입문자를 위한 배려는 부족했다고 느낍니다. 제 돈과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 불만족스럽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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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시즘을 '사랑의 능력'으로 해석한 점이 신선했어요. |
신*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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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에서 '오타쿠시즘'을 '상품 주물주의'에 매몰된 현대인이 역설적으로 '사랑의 능력'을 아직 잃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현상으로 해석한 부분이 매우 독창적이고 신선했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제가 좋아하는 특정 취미 활동에 대한 자존감이 높아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단순히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긍정적으로 재해석하여 희망의 단초를 찾으려는 벤야민적 시도가 강사님 강의에서도 느껴져 매우 좋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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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벤야민의 보들레르 |
김*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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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지금'일 뿐만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의 역사들의 중첩이지요. 오늘 외출복을 점검하기 위해 거울이 필요한 것처럼, 현재를 반추하기 위해 역사를 필요로 합니다. 그 와중에 만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내가 놓친 것 뿐만이 아니라, 놓쳤을 수도 있는 어떤 것이 다시 도래할 수도 있다는 어떤 우울한 희망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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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
벤야민 산책 그러나 치열하고 뜨거운 산보 |
김*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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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대한 우울한 사랑: 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 김진영
√ 인간이 인간을 무시하고 감옥에 가두는 비인간화, 인간이 아닌 것에 대한 발견. √ 옛 것을 공부하는 이유는 지금의 문제를 발견하려는 것. √ 울지 말고 세상을 노려봐야 한다. √ 사랑은 자연적으로 얻어낸 게 아니라 사람들이 발견한 것. √ 현실이 불가능해도 어김없이 살아내야 한다. √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작고 못생긴 난쟁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내 마음의 어딘가에 있는 줄도 몰랐던 센터에 화실이 꽂힐 때 격렬한 아픔과 함께 온다. √ 안에 살기 때문에 이름 붙일 수 없다. 객관화는 거리가 필요한데 물고기가 물을 이름 짓지 못하듯이. √ 독자: 반드시 그들을 향하고 있으나 그들을 도외시 해야 한다. 어쩌면 천적이다. √ 영웅이 살 수 없는 시대다. 우리 모두 다 똑같다. 누군가가 자기는 아니라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 여러분이 못하는 건 나도 못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안고 있는 불가능성은 나도 안고 있다 는 것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 똑똑해져야 한다. 바보역할 자주 하지 말고, 소문 소리 풍문에 휩쓸리지 말고. √ 살고 있는 나의 생의 조건의 심각함에 눈떠야 한다. 옛날에는 그럴 수도 있었다. 이 시대 는 그렇지 않다. √ 내가 얼마나 무력한가, 이것에 대한 솔직한 인식, 여기서부터 무언가가 나올 수 있다. √ 자신의 불가능성, 딜레마, 무력함을 승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용기다. √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왜냐면 누구나 그런 시대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집단적 문제의식으 로 연대할 수 있다. √ 오히려 서로가 아무것도 없기에 서로가 연민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 관상학적 시선과 파노라마적 시선 √ 강한 빛으로 관상학적 시선으로 얼굴을 크로즈업 하면 얼굴이 아니라 지도처럼 완전히 다 른 기호로 읽히게 만든다. 사람의 얼굴을 사물화된 얼굴로 보여준다. √ 오랫동안 무너지지 않았던 얼굴과 사물의 경계가 무너진다. √ 왜 영화인가: 매체 철학, 개인과 군중, 만보객과 군중, 군중과 상품과의 관계 √ 근대의 상품, 프롤레타리아 계급, 만보객의 운명의 유사성: 쓰레기의 운명(삶이 마치 죽은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것, 무의지적으로 서로를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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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김진영 선생님 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6강]살자를 거꾸로 하면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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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를 거꾸로 하면
[김진영 선생님 '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6강]
밤산책
보들레르는 만보객으로서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대도시에서 메타포를 찾아내려 노력했다. 그 메타포는 베를렌의 몽상적이고 신화적인 메타포가 아니라 예리하고 냉철한 현실의 메타포였다. 모두가 인지하지만 모른 척 하는, 휘장으로 가리는 진실을 드러내 보들레르는 그 허위만이 아니라 그 허위 속에 사는 자신까지 함께 내던졌다. 영웅은 자신의 모순을 직시하고 뛰어넘는 사람이다. 모두가 자신의 존재가 조금이라도 무너질까봐, 자기 존재의 허약성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한다면 보들레르는 그 허약성이 차라리 부서지길 바란다. 그의 모든 걸음은 시였고, 동시에 생존이었다. 집에 머물러 있다가 빚쟁이들이 찾아올까봐 나가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쳐다보면서도 빚쟁이들과 마주칠까봐 두려워하면서도 그 앞에서 능히 군중 속으로 도망칠 수 있다는 대담함, 절망적인 사회에 희망을 부여하고자 했던 자선가인 디킨스와는 다르다.
장르의 차이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보들레르는 시인이며 보는 족족 메타포를 찾아내고자 한다. 그에게 메타포란 순간적으로 붙잡아야 하는 반딧불이며, 그 반딧불은 잡은 후 며칠만에 꺼지고 만다. 디킨스는 소설가이며 그는 나중에서야 모든 감상을 마친 뒤에 구성을 짜서 글을 쓴다. 우리가 모든 일기를 ‘즐거웠다’로 쉽게 끝내려고 하듯이, 그 또한 그런 감상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요즘 종종 생각하는데, 그런 시각에 귀가하는 일이 런던에서 가장 비참한 일은 아니며, 런던에서 가장 형편없는 지역이라고 해서 집 없는 노숙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필요하면 어디에서 온갖 악과 불행을 찾을 수 있는지 잘 알게 되었다. 다만 그것들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서, 내가 노숙자처럼 수 킬로미터의 거리를 그것도 혼자서 외롭게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절대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찰스 디킨스, 밤 산책 25-26
오히려 그런 감상에 빠져야 사회 복지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으로서의 ‘주체성’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앞에서는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먼저 밝히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뒤로 미뤄둔다. 그들의 비참함과 아이러니컬한 유머를 그대로 쓰면서 그들의 그러한 ‘유머’보다는 비참에만 초점을 맞춘다. 디킨스는 관찰자에 불과하며 당사자가 될 수 없다. 반면 보들레르는 그 관찰자이자 당사자로 ‘시니컬한 유머’를 구사할 수 있다. 보들레르는 낮 산책이든 밤 산책이든 끊임없이 돌아다녔다면 디킨스는 순전히 ‘잠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자선 욕구’를 채우기 위해 빈민들을 관찰하러 다닌다. 실제로는 ‘위험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빈민들이 그렇게 흉악하지 않고 불쌍한 존재라는 듯이 말하지만, 사실 ‘밤산책’은 그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흉악해 보이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수은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풍경은 우리 나라의 대기업 공장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아주 쉽게 그 사람들과 우리를 분리시키고, 그들이 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들이며, 그들을 마냥 불쌍해하며 나중에는 지겨워할 자격도 없다. 그들은 우리이며, 우리는 그들이다. 디킨스는 후반부에서 ‘말하지 않겠다’라고 쓰는데, 이는 그 자신의 한계를 마주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들을 관찰하는 게 목표였지 그들의 입장이 자신의 입장이 되는 걸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정치적인 견해에 상관없이 모두가 죽음을 이용해 거래를 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을 고이 보관하고, 죽음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죽음을 최대한 이용한 다음 마지못해 떠나 보낸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찰스 디킨스, 밤 산책 158
공원에서
공원은 꿈이 있었던 흔적이자 꿈이 어떻게 조롱당했는지 보여주는 공간이다. 군악대가 트럼펫을 불어도 그 곳에는 어떤 환호와 박수도 쏟아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꿈꾸었던, 그들에게 키스를 보낼 어린 소녀‘였던’ 노파들만 앉아 있을 뿐이다. 그들은 제2제정기의 사회로부터 쓰레기라고 조롱당하고 버려졌으며 그들의 댄스 파트너는 노파들 뿐이다. 이게 그들의 노력에 대해 주어진 보답이다. 그러나 보들레르는 ‘트럼펫’ 소리를 통해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트럼펫은 새로운 서정시의 등장이다. 군인-시인들은 새로운 서정시를 통해 몰락한 서정시에서 새로운 서정시로 건너간다. 하루 반짝 기념비에 불과했던 공원은 진정한 기념의 공원이 된다. ‘이행’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하다고 연거푸 주입당해왔던 ‘이행’이.
살자를 거꾸로 하면 자살
가장 가증스러운 슬로건이라고 생각했던 자살 예방 문구는 바로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였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의 자살과 삶은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지나지 않는다. 자살하는 이들의 병증이 부각되며 그들의 정신적 병이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것처럼, 그들이 비정상인 것처럼 비춰지고 있다. 그들을 위해 물리적인 약을 먹여야 하며 정신병원에 처넣어 괜한 ‘베르테르 효과’를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벤야민은 자살에서 열정을 보았지만, 현대의 자살에서는 어떠한 열정도 보이지 않는다. 삶은 죽음을 강요한다. ‘자고 싶으면 죽은 뒤에 자라’라는 폭력적인 말은 그만큼 열심히 하라는 긍정적인 뜻으로 알아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현대의 자살은 지쳐서 하는 자살일 뿐이다. 어떠한 영웅성도 없다. 한국 소설 중 한 때 ‘획기적’이라고 주목받았던 ‘표백’이라는 소설에서는 시대에 어떤 파란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단체 자살을 기획하는 이들이 나온다. 하지만 그들의 자살은 어떠한 파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만큼 사회는 견고해졌고 교활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건 바로 우리였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고 누구를 겨냥할 수도 없다. 끈질기게, 어떻게든 버티려는 삶은 결국 그 자신을 죽이면서 사는 삶일 뿐이며-살자를 거꾸로 하면 자살이라는 말로 패러디할 수 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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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리뷰어> [김진영 선생님 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5강] 불안한 경관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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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경관
-김진영 선생님 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5강
명상하는 산책자와 망상하는 산책자
숲속을 돌아다니면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밤하늘을 보면서 북극성을 따라가면 되던 시기에도 고난은 있었을 것이며 관념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을 것이다. 칸트는 정해진 곳에 정해진 시간 동안 산책을 하면서 나름의 체계를 세웠고 현대까지도 그 생각들이 인정받았지만, 동시에 그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들이 있었다. 벤야민은 빠져나가는 것들을 주목한다. 칸트는 거시를 통해 미시사를 판단하려 했고, 벤야민은 미시사를 통해 거시사를, 몰락해 가는 문명들을 바라보고자 했다. 벤야민도 소용 없었고 지금도 세계는 몰락하지 않고 있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몰락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죽음은 자다가 자신도 모르게 죽거나, 사고를 당해서 한순간에 죽거나. 어쨌든 어떤 여파로 인해 질질 끌면서 괴로워하다가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은 무엇보다도 잔인하게 찾아온다.
우리는 우리 사이에 벽을 나누고 계급을 나누어 적대시했다. 부르주아는 프롤레탈리아를 현혹시킬 때, 이전에 그들이 상품 교역을 할 때와 마찬가지의 방법을 썼다. 찬란하고 예쁜 유리 장난감들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땅과, 물건과, 나아가 그들까지 거래하려 했다. 프롤레탈리아는 예쁘고 빳빳한 새 지폐로 유혹당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상품을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또다시 그 유혹에 빠져든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말은 너무나도 유혹적이고, 정승같이 벌어서 개처럼 쓰라는 말은 두렵다. 이러한 슬로건을 내거는 이들은 점점 더 영리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적인가 의문시해봐야 한다. 우리는 적의 모습을 닮고 싶어하고 그들과 우리의 공통점을 어느샌가 발견하게 된다. 그 공통점이란 ‘불안’이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시에서 현대식의 멋진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커플과 유리창 너머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가난한 이들 사이에 유리 한 장만을 두었을 뿐이다. 그들에게 공통된 적은 바로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죽음과 몰락. 그러나 모두 그 진실을 보고 싶지 않아하고, 그들이 축적한 부를 그 너머까지 가지고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드라마 ‘욕망의 불꽃’에서 집안을 쥐고 흔드는 늙은 회장은 매년 스위스로 전용기를 타고 날아가서 일년씩 수명 연장 치료를 받는다. 사람들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쓴다.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가 있어야만 모든 지위가 안정되고 획득되기 때문이다. 그가 없어진다면 그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는 시체로서라도 살아 있으라는 암묵적인 시선을 받는다. 그는 죽음의 권리를 박탈당함으로써 죽음에게 정복당한다. 어디선가 많이 본 게 아닌가, 우리의 신문 속에서?
날 좋아해줘
모든 기업의 자기 소개서의 전략은 남들과의 차별화를 또렷하게 보이되 남들만큼 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참신한 신입사원을 모집하면서 경력직을 뽑는다는 말만큼 모순적인 말이다. 이에 호응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사람들은 경력을 만들기 위해 해외로 나가고 바삐 움직인다. 그러지 못한다고 박탈감을 느끼며 스스로의 생을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개성을 판단하는 건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옷차림, 머리, 장신구에서 올까. 아니면 좋아하는 물건이나 브랜드에 열광한다거나 무언가에 박식해서 늘 사람들에게 지식을 늘어놓는다거나 하는 걸까. 그런데 그런 걸로 치자면 어디선가 자신의 도플갱어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여름 유행 원피스라는 말에 사서 입고 해변가에 갔다가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만나면, ‘기분이 나빠진다’라고 말한 친구가 있었다. 그 사람이 자신보다 더 어울리는 것도 싫고 자신보다 안 어울리는 것도 싫다는 것이다. 그러면 옷을 만들어 입고 다니라고 조언했다가 많이 혼났다.
현대 사회에서의 개성이란 결국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개성이다. 자신이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도 남이 하면 기분 나빠한다. 자기 자신만 만족하면 될 텐데도 남이 자신의 개성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화를 낸다. 부르주아의 선반에는 근대성의 획일화에 은근히 반항하는 기질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역으로 획일화에 따르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최근 인터넷에서는 ‘잊혀질 권리’라는 서비스의 입법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누구는 개성을 표현하고 싶어서 블로그를 만드는 반면 누군가는 자신의 모든 흔적들을 다 지우고 싶어한다.
오타쿠시즘
상품 주물주의는 기존 마르크스의 상품에 대한 부정적 인식-판타스마고리아-이 아닌 벤야민 식으로 이해해 본다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이다. 상품을 통해 그 모순성을 깨닫는 동시 상품에게 매혹된다. 요즘의 연애는 아주 영리하게 해야 한다. 함부로 쫓아다니면 스토커가 되고 경찰서에 끌려 갈 수 있으며,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면서 스스로를 도끼로 자처하며 열 번 찍고 나무가 안 넘어간다고 불을 지르는 사람이 있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사랑의 주체는 자신이 끝내 실패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다. 상품이 사랑을 받는 것은, 그들이 돈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안전한 사랑’에 대한 안심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카드 패를 쥐고 있는지 답답해 하며 연애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고 이게 ‘그린 라이트’인지 ‘레드 라이트’인지 알려달라고 하나하나 물어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그린 라이트로 판단되어야 접근을 할지 말지도 또 물어본다.
오타쿠들은 ‘상품’의 가격보다 상품에 매혹된다. 그들은 그 상품을 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며 상품을 가진 이에 대해 질투와 선망을 아낌없이 보낸다. 이에 대해 한심하다느니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보는 이들도 많지만, 적어도 그들은 그들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어느 순간 ‘도취감’에 빠진다. 그들은 뭔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의 주체가 멸망한 현대에서 어쩌면 사랑은 조그만 물줄기로 흘러서 아주 깊고 굴곡진 곳으로 흘러 떨어져 고인 것이 아닐까. 오타쿠의 사랑이 옳다고 말할 수 없지만 틀리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들은 적어도 사랑의 능력을 아직 잃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허위적 베일 너머에 가려진 진실을 감수하고서라도 또다시 사랑을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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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보들레르 읽기 4강: 실패의 미화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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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의 미화
[김진영 선생님의 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4강을 듣고]
안철수는 왜 정치에 실패했는가
‘노조 설립’에 대한 공략인 ‘노조 파괴’ 문건을 보면, 그들이 학습지 교사이든 마트 창고 직원이든 간에 대처나 예상 반응들이 다 비슷하다는 판단 하에 작성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프롤레탈리아들은 개별성을 잃은 물건들, 혹은 애완동물이나 다름없다. 망가진 물건들은 고치거나 내버리면 된다. 하지만 애완동물들은 버릇을 잘못 들이면 별다른 방법이 없다. 고육지책으로 ‘때리거나’ ‘훈련소’에 보낸다. 흥미가 잃으면 버린다. 괜찮다, 어차피 그들을 구조할 사람들은 따로 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눈물을 글썽이고 감동하며 아직 세상은 살만할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느끼게 된다. 그 희망이 독이다.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가 대놓고 드러내는 혐오들 중 하나는 바로 ‘집 주변’에 쓰레기장이 생기는 것이다. 냄새와 벌레, 그리고 건강이 나빠진다고 극구 반대한다. 그러면 과연 어디에 쓰레기장이 생겨야 하는 것일까? 상관없다, 그냥 우리 집 근처에만 안 생기면 된다. 남이야 암에 걸리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자신한테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는 생각에 더 울분이 터지고 누군가의 멱살이라도 잡아채고 싶어한다. 하지만 실제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건, 쓰레기장이 아니라 쓰레기장 근처에서 쓰레기와 똑같이 취급될 것 같은 자기 자신, 사실은 이 사회에서 쓰레기로 치부되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쓰레기를 줍는 넝마주이들 또한 똑같은 ‘쓰레기’로 여겨진다. 그들은 쓰레기를 버려진 것으로 취급하거나 가여워하지 않고, 그것들이 ‘쓸모 있다는 듯’이 군다. 모두가 잘났고 모두가 똑똑한 사회다 보니 자신의 판단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이들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정치에 대해 ‘다 똑같은 것들’이라고 논하면서 은근슬쩍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고 거리감을 두는 건 위선도 아니라 우둔함이다. 똑똑하다는 착각이 사람들을 우둔하게 만든다.
이는 정말 최근에 있던 재보궐선거에 대해 책임을 지고 물러난 안철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모범생이었고, 좋은 사업가였고, 좋은 아버지였다. 그는 늘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올곧았고, 희망에 가득 차 있었으며, 선의를 베풀고 싶어했다. 그는 이 시대의 엘리트 코스와 행운을 다 밟고 나아간 이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정치판에서 정치인들과 똑같은 ‘쓰레기’가 될 줄은 몰랐다. 아주 쉽게 ‘개혁 정치’를 논했고, 민주당과 손을 잡았을 때만 해도 자신은 여기에 물들기는커녕 이들을 개혁으로 이끌고 갈 수 있으리라고 쉽게 믿었다. 그 믿음은 사람들에게 희망이었고, 빛이었지만 동시에 우둔했기에 절망이었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지만, 그 나쁘지 않음으로 인해 스스로 절망하고 주변을 절망케 했다. 희망을 가진 건 잘못이 아니다. 개혁하려고 했던 것도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배운 대로, ‘순진함’을 지닌 채 그 곳에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자신이 펼칠 새 정치라고 생각했고, 그게 가능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믿었던 이미지의 대부분은 사업만이 아니라 뭐든지 성공하는 안철수였다. 그래서 그의 실패에 대해 더 가혹했다. 냉정한 비판의 시각 또한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신’에 젖는다. 왜냐하면 그 자신조차도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한테 희망을 갖는 동시에 그 희망이 배반당하면 더 심한 ‘모욕감’에 젖어버린다.
그런데 과연 정치가 있기나 한 것일까? 정치학이라는 게 가능할까. 그에 대한 의문은 그 누구도 가지지 않는다. 최악과 차악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에 사람들은 차악을 선택하는 대신 최악을 선택하고 편안해진다. 왜냐하면 차악에 희망을 걸어 좌절하느니, 최악을 선택해 불평이라도 마음껏 하고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이런 글에서 ‘개인적 의견’을 밝혀보자면, 내가 혐오하는 것은 적어도, 자신의 손은 깨끗하다고 믿는 사람이며 마치 자신의 정의가 실현된 것인 것마냥 쉽게 뿌듯해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그런 자신을 인지하지 못한 채 화만 내는 이들이 가장 최악이다. 그들은 실패를 미화하고, 미화된 실패를 자신의 것인양 전시하며 자랑한다.
모두가 문을 열지 않았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면 바로 바리케이드를 쌓는 배우들의 모습이었다. 혁명단의 대장 격인 앙졸라와 그의 친구들이 주변의 집으로 뛰어들어가거나 소리쳐 외친다. 그러자 창에서 가구들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투덜거리면서도 그들이 의자를 들고 나갈 때 손으로 키스를 보낸다. 마치 한바탕 축제라도 벌어지는 것 같다. 위고의 낭만적 시선이 개입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정말 영화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장면이다.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웃고 떠든다.
그러나 바리케이드가 무너지고 정부군이 그들을 진압하러 달려온다. 혁명단원들은 집 문을 두드리며 간절히 열어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아무도 문을 열지 않는다. 모두가 문을 열지 않았다. 다음 날 피에 젖은 포석을 스펀지로 닦으면서 여인들이 나지막하게 노래를 부른다. 그들의 피에 젖은 금발, 힘없이 떨어진 손, 채 감기지 못한 눈꺼풀 사이로 보이던, 보석처럼 푸른 눈동자를 회상한다. 그들은 도망가기보다는 바리케이드 안에서 머무르려 했고, 마지막에는 ‘집’으로 회귀하려 했다. 더 좁은 곳으로 틀어박히려고 했다.
‘바리케이드’라는 우울의 공간, 한순간의 행복함 뒤에는 반드시 불행이 따를 것이라는 이 강박이 언제부터 태어난 것일까. 벤야민은 샤를부터 죽 내려온 혁명과 실패의 거듭된 역사 때문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한다. 희망은, 모든 실패의 선례들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며 그 허위성을 벗겨낼 수 있다는 것이고 절망은, 과거에 그랬듯이 지금도 또 실패할 거라는 것이다. 아무도 맞붙어 싸우려고 하지 않았고 문을 열어주려 하지도 않았다.
위고는 바리케이드의 마지막 장면은 철저하게 사실적으로 그렸다. 절망에 대해서는 끔찍할 정도로. 그렇지만 그는 바리케이드에서의 몰살 장면에서, 죽는 이들 중 몇몇을 부각시켰다.
앙졸라는 혁명단의 대장 격으로, 그의 이름은 ‘천사’라는 뜻이다. 그는 누구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끝까지 맞서 싸운다. 정부군들의 총구 앞에서도 그는 찬란하게 빛난다. 그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혁명단원들의 행동에 대해 비웃고 폄하했던 그랑테르였다.
아마도 그랑테르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 가장 유사할 것이다. 차가운 지식인들, 어차피 해봤자 시간 낭비이고,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뿐이며 여기에 있는 건 재미있어서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흔히 ‘쿨함’을 표방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랑테르는 앙졸라에게 말한다. ‘나도 너와 같이 가도 좋은가?’ 앙졸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순간 앙졸라는 정말 ‘천사’처럼 보인다. 그는 그랑테르에게 손을 내밀고, 그랑테르는 홀린 듯이 그의 손을 잡는다. 정부군의 총이 불을 뿜고, 그들은 창문을 등진 채 바닥으로, 바닥으로 떨어진다... 수업에서 언급된 바흐만의 말마따나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라는 것처럼. 사실 가장 냉정하고 차가운 지식인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앙졸라’를 바라고, 그에게 매혹되는 이들일지도 모른다.
반면 마리우스는 장발장에 의해 ‘하수도’로 빠져나간다. 분명 어떠한 빈틈이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스스로 자의에 의해서 빠져나온 게 아니라 장발장에 의해 빠져나온 것이다. 그의 마음은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죽은 채로 산다. 산 채로 죽어 있다. 비겁한 게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실패 앞에서 허망한 태도로 앉아 있다.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전투에 응한 게 아니다. 죽을 줄 알고 전투에 뛰어든 것이다. 그는 그걸 알았으면서도, 그게 증명되는 순간 깊은 회의에 잠긴다.
동정과 연민
영국이나 프랑스의 산보객과 파리의 제2제정기 시대의 산보객은 철저히 구분된다. 실제로 찰스 디킨스의 ‘밤산책’의 디킨스와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벤야민은 확연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디킨스가 걸어다니는 이유는 단순히 ‘잠이 오지 않아서’, 그리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이들은 그보다 확실히 아래에 위치한 사람들로 그는 그들을 동정하고 그들에게서 선한 구석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생트뵈브가 확실한 혐오감을 보여준 것과 사실 비슷한 축에 속한다. 하지만 벤야민은 그들에게 뭔가를 기부하지 않는다. 그 또한 가난한 이들에 속해 있다. 돈이든 정신이든, 다 가난하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논문 지원을 받아야 하며, 자신의 논문이 팔리기를 기대하며 최대한 논문을 맞춰서 써야 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 진흙탕에 어지러이 남은 발자국을 보았다. 문득 비바람을 견디며 몇겹의 세월이 흐른 후 지질학자에 의해 절벽 표면에서 발견된, 멸종된 생명체의 발자국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런 추측을 해보았다. 만약 이 진흙밭이 지금 이대로 돌처럼 굳어져서 수마년 동안 여기에 가려진 채 있게 된다면, 지구상에서 우리의 후세가 될 인간 종족은 전통의 도움 없이 이곳에서 찾아낸 흔적만 가지고 인간의 지력을 최대한 발휘해, 한 나라의 수도에서 아이들을 방치할 뿐만 아니라 바다와 육지에서 휘두르는 힘은 자랑스러워하면서 그 힘으로 아이들을 붙들어주고 구해주지는 않는 공공의 야만성을 가진 문명사회가 존재했다는 놀라운 추론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점이 궁금했다.
찰스 디킨스, ‘밤산책’ 124-125
하지만 점차 디킨스도 그 자신의 행보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의 행보는 ‘사회적으로 소외받은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동시에 그 자신 또한 그들에게서 자신의 유사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질성은 위험하다.
권력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정치적인 견해에 상관없이 모두가 죽음을 이용해 거래를 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을 고이 보관하고, 죽음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죽음을 최대한 이용한 다음 마지못해 떠나 보낸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찰스 디킨스 , ‘밤산책’ 158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면 벤야민은, 짧은 메모들을 휘갈겨 쓰면서 놓치지 않으려 한다. 과연 무엇을? 그들은 크게 눈을 뜬다. 눈을 감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충격과 공포이기 때문이고, 그로테스크의 그로테스크이기 때문이다. 감는 순간 우리는 어둠에게 먹히고 만다. 불면증을 야기하는 이 사회에서, 눈을 감아버리면 편할 이 사회에서 그들은 어둠에 먹히면서도 그 속을 탐사하는 피노키오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제페토 할아버지와 함께 빠져나올 길을 찾을 수 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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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파리에 대한 우울한 사랑: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3강 리뷰- 병든 꽃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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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꽃
-김진영 선생님의 '파리에 대한 우울한 사랑: 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3강을 듣고
여당과 야당의 구분
SNS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우스갯소리 중 하나, 하지만 묘하게 설득력 있어서 그냥 웃어넘기기엔 찜찜한 이야기. 딸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여당과 야당을 어떻게 구분하면 되죠? 아버지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한다. 대통령이 여, 하고 반기면 여당이고 야, 하고 경고하면 야당이야. 묘하게 말이 되기도 하면서 탁월하게 웃긴 이야기고, 동시에 영화 촬영장처럼 번잡스러운 현실이 떠올라 씁쓸해진다. 어쩌다가 우리는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근대성이라는 악마는 무엇을 떨어뜨린 걸까.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신과 ‘파우스트’를 두고 내기를 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가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한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원하는 건 무엇인가. 근대 사람들은 끊임없는 발전과 화려한 불야성의 도시를 원한다. 그들이 이룩해 놓은 윤택하고 아름다운 삶을 원한다. 악마와의 거래는 성사되었고, 신만이 가능했을 법한 ‘창조’를 이루었다.
악마가 떨어뜨린 독이 퍼지는 건 한 순간이었다. 가짜 오만이라는 독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상품이라는 걸 모르고 상품들의 거리를 거닐었고 같은 사람도 상품으로 취급했다. 악마주의 아닌 위선이었다. 보들레르가 본 건 메피스토펠레스의 노래에 맞춰 꼭두각시처럼 춤을 추면서 그걸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몸에 매달린 실을 알지 못한다. 처음부터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는 위고처럼 시민들이 되고자 한 게 아니라 거리를 두고 ‘구경하는 산보객’으로서 군중 속에 파고들고자 했다. 그는 악마의 힘을 배웠다. 가짜 오만이 아닌 진정한 오만으로 기존의 언어를 기호로 타락시키고, 모든 가치들을 유행으로 뒤로 미루어 버리고, 아름다움 속에서 죽음을 보라고 강조하고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에서 냄새 나는 쓰레기를 본다. ‘파우스트’는 악마를 하인으로 부리며 악마의 힘을 휘두를 때 행복해지고 싶어했지만 그의 삶은 지옥이었고 쓰레기산이었다. 필레몬과 바우키스의 삶은 그에게 먼 언덕과 같았다. 보들레르의 즐거운 절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도 바울
가짜 오만은 독이 되어 사람들에게 ‘강한 자신’을 주장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들 중 자기계발서의 장르를 망치는 공식은 자신을 이미지화해 광고로 내세우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계발서를 쓰면서도 사실 자신이 계발되었다는 걸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이들의 인정을 바란다. 자기계발서라는 말은 자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이 계발하기를 바란다거나 자기가 계발한 사례를 적는 게 아니라 자기를 계발하기 위한 이기적인 책으로서 오용되고 있다. 찬란하게 빛나는 영웅이 없는 시대에 영웅이라고 주장한다. 영웅은 결국 장미의 기사처럼 희생되어야 한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감히 희생되지 못한다. 자신을 위해 타인을 희생하는 걸 정당화하면서 그게 ‘자기 계발’이라고 주장한다. 모순적인 말이다. ‘자기계발서’라는 말은 하나의 의미로 굳어져 타락해 버렸다.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하는 이들이 쓴 ‘계발’을 장려하는 글들은 사실상 매장되어 버렸다.
사도 바울의 효력은 그의 과거 직업이나 예수의 후광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선교를 하러 다니면서 곧 받을 심판의 두려움이나 그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사실 그건 악마도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악마가 하지 못하는 게 있다. 악마는 오만한 존재로, 그는 그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못하는지’ 말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한껏 낮춘다. 그건 억지로 낮추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자신을 원래대로, 땅 위로 다시 내려놓는 것이다. 그러한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 압도적인 재앙의 현실에서, 우리는 글을 쓰면서 선동을 촉구하고 호소하며 세상을 개벽천지로 뒤집자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이 말이 현실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조롱이 숨어 있다. 공장처럼 찍어나오는 저항들, 우리는 쉽게 희생자에게 감정 이입을 한 뒤 화장실을 나오면서 손을 닦듯이 그들을 치워버린다. 손을 닦기 전에야 우리는 짧게 깨닫는다. 우리가 얼마나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인지, 하지만 손을 닦으면서 그러한 깨달음도 얼른 씻어내 버리고 나오는 것이다. ‘독자에게’라는 서시로 포문을 연 보들레르의 비아냥거림은 아마도 그런 ‘꼼수’를 부리는 독자들에게 향하는 질책이자 위안일 것이다. 자신이 숨기고 싶어했던 비밀을 이미 ‘상대방이 알고 있다’라는 걸 깨달았을 때서야 우리는 가면을 벗는다. 그제서야 하늘을 보는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기록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한계를 ‘여행’에서 읽어냈다고 말한다. ‘네 독을 우리에게 쏟아 기운을 북돋워주렴! / 이토록 그 불꽃이 우리 머리를 불태우니, / ’지옥‘이건 ’천국‘이건 아무려면 어떠랴? 심연 깊숙이 / ’미지‘의 바닥에 잠기리라,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여행‘ 후반부) 보들레르는 천국 대신 지옥에 가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죽음이라는 늙은 선장에게 키를 맡기고. 벤야민은 보들레르는 죽음 대신 생을, 미지의 바닥 대신 또렷하게 천국을 향해 나아가야 했다고 말하지만 과연 그러한 한계에 부닥치는 건 보들레르 한 명 뿐이었을까. 그렇게 보자면 벤야민도 결국은 그 한계를 깨닫지 않았는가. 오히려 보들레르는 천국도 지옥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악마의 힘을 얻었고, 그 힘은 신의 힘과 동일한 것이었다. 천국-신, 지옥-악마로 표상된다면, 그 둘 중 꼭 한 곳으로 가야 한다는 건 결국 그가 얻은 힘의 무력화를 표하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미지의‘ 바닥은? 우리는 천국과 지옥을 모른다. 보슈의 그림도 화차도 지옥을 설명해 줄 수 없다. 미지의 바닥은 인간만이 갈 수 있는 또다른 세상일지도 모른다. 신도 악마도 아닌, ’인간‘으로서. 신과 악마가 인간의 한계를 죽음으로 정해두었다면 그 죽음을 이용해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왜 인간은 죽음의 이미지에 경악하면서도 매혹되는가.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왜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가. 벤야민은 한탄하면서도, 동시에 그 변증법적 너머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우리가 사회이론에서의 프로이트 이론이 갖는 비중에 대해 세세하게 판단하는 거소가 매우 똑같은 정도로, 어떤 경우이든 사회학의 주관적-경험적 측면에 대해서, 그리고 개인들과 집단들의 동기 부여를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 대단한 정도로 많은 결실을 맺었던 이론이었습니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처음부터 이른바 공식적인 중심 문제들에 집중했더라면, 프로이트의 이론이 전개되었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는 결코 전개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이론은 다만 이른바 ”현상 세계에서 식탁에 남아 있는 것처럼 남아 있는 것“에-이 표현은 프로이트가 직접 만든 표현입니다-시선을 돌림으로써 프로이트 이론이 되었던 것이 실제가 된 것입니다. 같은 연관 관계에서 벤야민의 저작들도 함께 언급하고 싶습니다. 벤야민의 저작들은 오늘날 사회학, 무엇보다도 특히 문화에 대한 비판 이론에게 매우 특별할 정도로 강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저작들이 갖고 있는 기본 원칙은 이른바 경전의 밖에 머물러 있는 소재들과 현상들에 관련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소재들과 현상들이 벤야민의 기본원칙에 충실하면 할수록, 그것들은 더욱 더 많은 결실을 맺는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것, 눈에 띄지 않는 것, 공식적인 주제 설정의 의미에서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에 대한 파악에는 본질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시각을 잠재적으로 함께 가져가는 것이 당연히 속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점을 여기에서 첨언하고 싶습니다. 프로이트의 저작들과 같은 저작들의 배경에 포기와 배제의 역사로서의 문명사에 대한 관심이 궁극적으로 놓여 있지 않다면, 또는 벤야민의 구상들의 배경에 사회적으로 필연적인 가상으로서의 ‘변증법적 형상’의 이론이 놓여 있지 않다면, 그러한 이론들이 점화되었던 근거가 된 형상들은 결코 밝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을 통해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앞에서 내가 언급한 경우가 아닌 경우에 추상적으로 사회에 다가와 형성된 관념들이 변용되게 됩니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프리즘-문화비평과 사회’ 제 2강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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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파리에 대한 우울한 사랑: 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2강 - 일방적이지 않은 통행로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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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이지 않은 통행로
-김진영 선생님 파리에 대한 우울한 사랑: 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2강
쓰레기 하치장
쓰레기는 쓸모없는 것들의 무덤이다. 뒤죽박죽 섞여서 좀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쓰레기들을 정의한다면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쓰레기 더미 속에 있는 건 너무나도 다양하고 하나로는 일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안고 다녔던 미미 인형, 어제까지 아버지가 신고 다니던 양말, 노인의 틀니 철사, 반짝만 남은 고무장갑, 찢어진 노트들. 어느 누구도 그 압도적인 쓰레기의 숭고함에 손을 대지 못한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혐오한다. 쓰레기 하치장을 자신의 지역구에 두고 싶지 않다는 님비는, 사실 자신의 이익 문제보다는 자신의 청정한 생활이 쓰레기와 뒤섞일까봐 두려운 것이다. 뒤섞이는 순간, 자신의 삶도 쓰레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골라낼 생각도 하지 않고, 사람들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백지를 원하고, 스스로 백치가 되어간다. 쓰레기는 사실 그 잔해들에 대한 비겁한 변명, ‘쓰레기’라는 말로 단숨에 제껴 버리려는 손짓인 것이다. 잔해들 앞에서 망설이기보다는, 무조건 ‘결정’하고 넘겨 버리려고 한다. 관료주의적 사회에서는 더더욱이나 그럴 것이다. 일단 서류를 처리하면, 그 다음은 그 다음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지 자신의 책임 권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는 백열등의 흰빛 아래의 백치보다는 창밖에 서 있는 가난하고 남루한 가족에 관심을 두었다. 레스토랑 창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그들의 것이 아닌 향기가 난다. 그래서 그들의 유래조차 알 수 없고, 그들 자신조차도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멍청한 양배추 머리 인형들만 앉아 있는 셈이다. 하지만 창밖에 서 있는 가족들에게는 시간과 수많은 감정들을 뒤섞은 채로 끌고 다니고 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규정하는 ‘쓰레기’일 것이다. 그들의 알 수 없는 시선이 집요하게 창안을 훑고 있다는 걸, 모두들 외면하고 모른척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강력하다.
만약 쓰레기를 분류하고 그 잔해들의 역사와, 여운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그것들은 그 순간 쓰레기가 아닌 다른 것이 된다. 보들레르는 늙은 여인의 검버섯에서 젊었을 때의 방탕한 아름다움을 읽어냈고, 높고 쾌활한 여인의 웃음소리에서 한없이 잔인하게 권력을 행사하고 느끼는 흡족함을 느꼈다.
데카당스와 인간 사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들은 인간의 신체에 대해 끈질기고 집요하다. 연인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분명 뻔한 소설들이라면 아름답게 묘사할 텐데도 묘하게 비틀리고 꼬인 시선을 유지한다. 유혹의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낯설음은 사람들에게 불쾌함만을 주지는 않는다. 그 묘한 긴장감은 사실 보들레르의 시의 육체성만큼이나 당혹스럽다.
‘친구의 키스’라는 색다른 인사법, -여자의 입술을 빠는 대신에 입김을 마시는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하는 이상한 키스, -이것은 그 후 습관처럼 굳어져서 헤어질 때는 “그럼 안녕, 다시 올게요”하며 그녀가 입술을 내밀면 나는 그 앞에 얼굴을 내밀고 마치 흡입기를 향하기라도 하듯이 떡하니 입을 벌립니다. 그러면 그 입 속에 그녀가 후하고 입김을 불어넣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그것을 후우 하고 맛있다는 듯이 가슴 속 깊이 들여 마십니다. 그녀의 입김은 습기를 띠고 있어서 따뜻하며 인간의 폐에서 나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달콤한 꽃과 같은 향기가 났습니다.-그녀는 나를 매혹시키려고 입술에 살짝 향수를 발랐다고 했는데 그런 장치가 되어 있는 줄은 물론 그때는 몰랐습니다-. 나는 이렇게 그녀처럼 창녀가 되면 내장까지도 보통 여자와는 달라지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그녀의 체내를 통해서 그 입으로 나오는 공기는 이렇게 요염한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치인의 사랑’ 365
시와 소설의 주체는, 신이 아닌 인간이다. 서정시가 발달되든 그대로 멈춰 있든 단절되든 간에 그 시들이 이야기하는 건 인간이다. 자신의 형식이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근대 사회로 이동하면서 인간은 더 똑똑해졌는데 시와 소설 속에서는 별다른 똑똑함이 보이지 않는다. 다들 머저리가 되어버렸다. 보들레르는 인간의 상실된 똑똑함을 악에서 보았고, 그 악에서 점점 더 치열하게 구현되는 인간성을 발견했다. ‘악마주의’는 어쩌면 인간이 최소한 인간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기 위해 선택한 방법일는지도 모른다.
아우라의 실종
국가는 이제 누군가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새로운 것에 대해 열광하는 것도 잠시, 이윽고 또다른 새로운 것이 예고되고 지금의 새로운 것은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은 왜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가. 어떤 물건을 사용하고 어떤 취향을 가지느냐에 따라 인간의 첫인상이 결정되고, 또 인간의 삶의 방향이 보인다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점쟁이마냥 그렇게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타락한 ‘언어’는 바로 ‘새로움’일지도 모른다. 새로움은 이제 광고 카피의 문자로만 남아 버렸다. 성경에서 마주한, 이전에는 보지 못한 기적들은 ‘새로웠고’,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실증주의를 논하는 현대에서는 ‘아우라’가 한번 발현된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증거’를, ‘사료’를 원한다. 별자리가 구축되면서 한순간 ‘빛나는’ 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우라를 실종시킨 건 ‘그들’이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다. 의심이 점점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똑똑해지기보다는 멍청해졌고, 믿는 것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믿는다는 것을 광신과 똑같이 치부하면서, 광신자들과 믿는 자들을 싸그리 멍청한 사람들로 몰아버렸다. 벤야민 또한 태고주의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그는 절대 태고를 돌아가야 할 근원으로 본 게 아니었다. 다만 그는 태고를, 그 때 있었던 사람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고 루카치의 말마따나 ‘별을 보면서 길을 찾아가는 시대’를 되새기며 현대의 희망으로 가고 싶어했던 것이다. 현대사회는 믿으라고 말하면서 믿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믿지 않는다. 벤야민은 믿고 싶어했고, 끊임없이 그러길 바랬다. 설사 그게 마지막에는 스위스 국경에서의 절망으로 끝날지라도. 그의 마지막 행보는, 그마저도 ‘믿는다’라는 것이 얼마나 압도적인 어려움을 지니고 있었는지 말해주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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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 '파리에 대한 우울한 사랑-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1강: 세월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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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세월에는 총 세 가지의 뜻이 있다. 국어 사전에 명명된 것으로는 1. 지내는 형편이나 사정. 2. 흘러가는 시간. 3. 살아가는 세상. 어떤 순간과 흘러가는 시간들과 세상.
세월 Time.
눈물과 분노들이 이어지고 고발과 추적들이 잇따랐다. 노란 리본들이 휘날렸다. 누군가는 대책을,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두들 열에 들뜬 사냥개처럼, 한 번도 본 적 없는 목덜미를 찾아내고 싶어 안달했다. 북과 남 중 어느 쪽으로 더 저울이 치우쳐져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고 빈정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동네 스포츠 센터에서의 플래카드에는 ‘생존수영’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했다. 여행사의 적자가 이어지고, 불평하는 목소리에 이어 이를 비난하는 목소리들과 이 비난을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뒤섞였다. 노란색은 슬픈 색이 되어버렸다. 모두들 빨간 티셔츠를 입고 시청 광장에 모였다. 노란색은 희미해졌다.
모든 풍경들은 파노라마처럼 이어지지 못하고 깨진 꽃병처럼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전처럼 되돌릴 수 있을지 막막하고, 꽃병이 어떤 무늬였고 어떤 모양이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다. 벤야민은 보들레르가 도시 산책자의 전형이라고 했지만, 아도르노가 지나치게 사변적이라고 비난했던 벤야민이야말로 진정한 도시 산책자일지도 모른다. 그는 끊임없이 보았다. 그게 그의 임무였다. 책으로 고개를 숙이거나 눈물로 눈 앞을 흐리는 대신, 그는 흐려지지 않도록 눈을 깜박거리면서 파리를 보았다. 그 순간의 파리에서 그는 보들레르를 보고, 읽었다. 그가 만들고 싶어했던 건 이전의 꽃병이 아니었다. 꽃병이 입은 상처는 되돌릴 수 없다. 없었던 것처럼 만들 수 없다. 우리가 간과한 아주 조그만 부스러기가, 그 조그만 파편이 꽃병이 당했던 폭력을 증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무관심하게, 그리고 무의도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어떤 폭력들은 무관심하고 무의도적이었기 때문에 결과 앞에서, 참극 앞에서 말한다. 실수였고 착오였고 의도치 않았기 때문에 두 손을 들고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 모든 제스쳐가 얼마나 참혹하고 끔찍한 지, 우리는 그제서야 깨닫는다. 죄를 인정하는 폭력들은 이제 과거의 이야기, 전설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전설은 비뚤어지고 망가진 채 현대까지 굴러 들어왔다. 우리는 그 전설을 차고 물어뜯고 던진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결백해질 수 있다, 우리도 울고 억울해할 수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면죄권을 준다. 벤야민은 물질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경시되는, 자신이 상품이 되는 줄 모르고 상품을 욕망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고, 그들을 관찰했고 사랑했다. 아도르노의 혐오는 어쩌면 그 자신이 지적했던 병적 혐오감의 일부분일지도 모른다-이 쇼의 현장에서, 우리는 모두 유죄가 된다.
세월 The hours.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한 적이 있었다면 그건 미워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한 적이 있었다면 그건 미워하는 것이다. 넝마처럼 너덜너덜하게 찢긴 자신을 드러내 보이면서 잘못을 깨달으라고 윽박지르는 순간,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인생이 끝나버렸다는 걸-자신의 세계가 끝났다는 걸 깨닫는다. 복수가 허망하게 실패했다는 걸 깨닫는 건 바로 그 마지막 결단이 끝난 직후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못한다. 잃어버린 건 그들 자신 뿐이고, 세월은 덧없이 흘러간다.
두 소년이 장례식장 앞에서 서성인다. 이내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묻는다. 2층부터 갈래, 1층부터 갈래? 그러자 다른 한 명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몇 층부터 가든, 그들은 두 층을 다 돌아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선배나 후배, 친구들이 얼마나 잘 웃었는지, 꿈이 무엇이었는지 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것에 화를 냈고 어떻게 울었는지를 기억한다. 그들에게 마지막까지 남는 건, 그 동영상 속에서 누가 지른지 모르는 비명이다. 그 비명은 그 아이일 수도, 저 아이일 수도 있다.
버지니아 울프와 로라 브라운과 클래리사 보건은 시간의 잔인함을 깨닫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시간이 그냥 흘러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지 못한다. 아니, 상처가 아문다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아물고 이전의 상처가 아무렇지도 않은 게 된다는 것이 두렵다. 그들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삶이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미래에서 아문 상처를 보지 못하고 곪아 터진 상처를 본다. 벤야민은 파리 거리를 유유히 걸어다니는 보들레르를 보았다. 그건 그 자신의 사유이자, 상처였다.
세월.
어떤 단어로도 대체되지 못하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렸다. ‘거위의 꿈’이라는 흔한 노래 가사로는 수습되지 못한다. 이 세상 자체가 ‘세월’이다. 우리는 ‘죽음’ 의 에너지 앞에서 도망치라는 명을 받고, 순순히 도망쳐 목장으로 향하는 양떼들이다. 뿔이 꺾어지고 털이 깎이고, 이내 털만으로 만족하지 못할 때까지 얌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있을 것이다.
어떤 사유가 있고, 그 사유를 외우는 게 아니라 생각할 때 공부가 된다면. 그 공부로서 하는 사유가 우리에게 과연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 아니면 불행을 가지고 오는가.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숨이 턱 막히는, 이 더위 속에서 사람들은 떠들고 웃고 돌아다니면서 술을 먹는 등 축제처럼 즐기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그런데 그 순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지거나 생략되고, 모두들 눈살을 찌푸리며 등을 돌린다. 볼링 라인 위의 공처럼 어떤 제지도 없이 죽 미끄러져 가야만 하는데, 거터에 빠진 격이다.
병적 혐오감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다. 죽음은, 사실 외부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모두들 잊지 말자고 하면서도, 얼른 잊어버리기를 바란다. 적어도 우린 안전하다는 안도감과 함께. 과거에 대한 향수에 빠지자는 거냐는 아도르노의 비판에 매몰되어 과거를 부정하고 씻어버린다면, 그건 아도르노를 욕보이는 짓이다. 벤야민은 그저, 우리가 잊어버렸던 것을 마주보자고 한다. 우리가 잊어버리게 된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잊어버리고 싶어했던 그것, 우라시마 타로가 상자에서 꺼낸 건 이미 흘러간 세월들이 아니라 그를 낯설고 이상한 존재로 만들어 무력하게 만드는 그 세상이었다. 외국으로 떠나지 못하는 것, 이 곳에 잡아두는 것, 무력해지게 하는 이 장소에 머무르게 되는 건 자신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혐오하는 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라시마 타로가 상자에서 꺼낸 건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세상만이 아니라, 즐거운 용궁 생활을 뿌리치고 나올 만큼 소중했던, 그가 사랑했던 그 세상이었다. 파리는 그렇게, 벤야민에게 양가성을 지니는, 우울한 사랑의 공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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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대에서 보들레르 시의 의미를다시 생각해보게하는 강의 |
홍*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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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젊은 시절에 세상에 대해 잘 모르고 읽었던 보들레르의 시가 많은 시간을 살고 난 뒤에 이제사 이해가 가고 공감이 갑니다. 이 모든 것이 김진영 선생님의 강의 덕분입니다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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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불안한 경관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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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경관
-김진영 선생님 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5강
명상하는 산책자와 망상하는 산책자
숲속을 돌아다니면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밤하늘을 보면서 북극성을 따라가면 되던 시기에도 고난은 있었을 것이며 관념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을 것이다. 칸트는 정해진 곳에 정해진 시간 동안 산책을 하면서 나름의 체계를 세웠고 현대까지도 그 생각들이 인정받았지만, 동시에 그 사이를 빠져나가는 것들이 있었다. 벤야민은 빠져나가는 것들을 주목한다. 칸트는 거시를 통해 미시사를 판단하려 했고, 벤야민은 미시사를 통해 거시사를, 몰락해 가는 문명들을 바라보고자 했다. 벤야민도 소용 없었고 지금도 세계는 몰락하지 않고 있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몰락은 한순간에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죽음은 자다가 자신도 모르게 죽거나, 사고를 당해서 한순간에 죽거나. 어쨌든 어떤 여파로 인해 질질 끌면서 괴로워하다가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은 무엇보다도 잔인하게 찾아온다.
우리는 우리 사이에 벽을 나누고 계급을 나누어 적대시했다. 부르주아는 프롤레탈리아를 현혹시킬 때, 이전에 그들이 상품 교역을 할 때와 마찬가지의 방법을 썼다. 찬란하고 예쁜 유리 장난감들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땅과, 물건과, 나아가 그들까지 거래하려 했다. 프롤레탈리아는 예쁘고 빳빳한 새 지폐로 유혹당한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상품을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절망에 빠진다. 그리고 또다시 그 유혹에 빠져든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말은 너무나도 유혹적이고, 정승같이 벌어서 개처럼 쓰라는 말은 두렵다. 이러한 슬로건을 내거는 이들은 점점 더 영리해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적인가 의문시해봐야 한다. 우리는 적의 모습을 닮고 싶어하고 그들과 우리의 공통점을 어느샌가 발견하게 된다. 그 공통점이란 ‘불안’이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시에서 현대식의 멋진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커플과 유리창 너머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가난한 이들 사이에 유리 한 장만을 두었을 뿐이다. 그들에게 공통된 적은 바로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죽음과 몰락. 그러나 모두 그 진실을 보고 싶지 않아하고, 그들이 축적한 부를 그 너머까지 가지고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드라마 ‘욕망의 불꽃’에서 집안을 쥐고 흔드는 늙은 회장은 매년 스위스로 전용기를 타고 날아가서 일년씩 수명 연장 치료를 받는다. 사람들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쓴다.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가 있어야만 모든 지위가 안정되고 획득되기 때문이다. 그가 없어진다면 그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는 시체로서라도 살아 있으라는 암묵적인 시선을 받는다. 그는 죽음의 권리를 박탈당함으로써 죽음에게 정복당한다. 어디선가 많이 본 게 아닌가, 우리의 신문 속에서?
날 좋아해줘
모든 기업의 자기 소개서의 전략은 남들과의 차별화를 또렷하게 보이되 남들만큼 한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참신한 신입사원을 모집하면서 경력직을 뽑는다는 말만큼 모순적인 말이다. 이에 호응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사람들은 경력을 만들기 위해 해외로 나가고 바삐 움직인다. 그러지 못한다고 박탈감을 느끼며 스스로의 생을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개성을 판단하는 건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옷차림, 머리, 장신구에서 올까. 아니면 좋아하는 물건이나 브랜드에 열광한다거나 무언가에 박식해서 늘 사람들에게 지식을 늘어놓는다거나 하는 걸까. 그런데 그런 걸로 치자면 어디선가 자신의 도플갱어를 만나게 되지 않을까? 여름 유행 원피스라는 말에 사서 입고 해변가에 갔다가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만나면, ‘기분이 나빠진다’라고 말한 친구가 있었다. 그 사람이 자신보다 더 어울리는 것도 싫고 자신보다 안 어울리는 것도 싫다는 것이다. 그러면 옷을 만들어 입고 다니라고 조언했다가 많이 혼났다.
현대 사회에서의 개성이란 결국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개성이다. 자신이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도 남이 하면 기분 나빠한다. 자기 자신만 만족하면 될 텐데도 남이 자신의 개성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화를 낸다. 부르주아의 선반에는 근대성의 획일화에 은근히 반항하는 기질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역으로 획일화에 따르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최근 인터넷에서는 ‘잊혀질 권리’라는 서비스의 입법을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누구는 개성을 표현하고 싶어서 블로그를 만드는 반면 누군가는 자신의 모든 흔적들을 다 지우고 싶어한다.
오타쿠시즘
상품 주물주의는 기존 마르크스의 상품에 대한 부정적 인식-판타스마고리아-이 아닌 벤야민 식으로 이해해 본다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이다. 상품을 통해 그 모순성을 깨닫는 동시 상품에게 매혹된다. 요즘의 연애는 아주 영리하게 해야 한다. 함부로 쫓아다니면 스토커가 되고 경찰서에 끌려 갈 수 있으며,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면서 스스로를 도끼로 자처하며 열 번 찍고 나무가 안 넘어간다고 불을 지르는 사람이 있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사랑의 주체는 자신이 끝내 실패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다. 상품이 사랑을 받는 것은, 그들이 돈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안전한 사랑’에 대한 안심일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카드 패를 쥐고 있는지 답답해 하며 연애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고 이게 ‘그린 라이트’인지 ‘레드 라이트’인지 알려달라고 하나하나 물어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그린 라이트로 판단되어야 접근을 할지 말지도 또 물어본다.
오타쿠들은 ‘상품’의 가격보다 상품에 매혹된다. 그들은 그 상품을 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며 상품을 가진 이에 대해 질투와 선망을 아낌없이 보낸다. 이에 대해 한심하다느니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쳐다보는 이들도 많지만, 적어도 그들은 그들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어느 순간 ‘도취감’에 빠진다. 그들은 뭔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랑의 주체가 멸망한 현대에서 어쩌면 사랑은 조그만 물줄기로 흘러서 아주 깊고 굴곡진 곳으로 흘러 떨어져 고인 것이 아닐까. 오타쿠의 사랑이 옳다고 말할 수 없지만 틀리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들은 적어도 사랑의 능력을 아직 잃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고, 허위적 베일 너머에 가려진 진실을 감수하고서라도 또다시 사랑을 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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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살자를 거꾸로 하면 |
정*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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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를 거꾸로 하면
[김진영 선생님 '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6강]
밤산책
보들레르는 만보객으로서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대도시에서 메타포를 찾아내려 노력했다. 그 메타포는 베를렌의 몽상적이고 신화적인 메타포가 아니라 예리하고 냉철한 현실의 메타포였다. 모두가 인지하지만 모른 척 하는, 휘장으로 가리는 진실을 드러내 보들레르는 그 허위만이 아니라 그 허위 속에 사는 자신까지 함께 내던졌다. 영웅은 자신의 모순을 직시하고 뛰어넘는 사람이다. 모두가 자신의 존재가 조금이라도 무너질까봐, 자기 존재의 허약성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한다면 보들레르는 그 허약성이 차라리 부서지길 바란다. 그의 모든 걸음은 시였고, 동시에 생존이었다. 집에 머물러 있다가 빚쟁이들이 찾아올까봐 나가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쳐다보면서도 빚쟁이들과 마주칠까봐 두려워하면서도 그 앞에서 능히 군중 속으로 도망칠 수 있다는 대담함, 절망적인 사회에 희망을 부여하고자 했던 자선가인 디킨스와는 다르다.
장르의 차이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보들레르는 시인이며 보는 족족 메타포를 찾아내고자 한다. 그에게 메타포란 순간적으로 붙잡아야 하는 반딧불이며, 그 반딧불은 잡은 후 며칠만에 꺼지고 만다. 디킨스는 소설가이며 그는 나중에서야 모든 감상을 마친 뒤에 구성을 짜서 글을 쓴다. 우리가 모든 일기를 ‘즐거웠다’로 쉽게 끝내려고 하듯이, 그 또한 그런 감상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요즘 종종 생각하는데, 그런 시각에 귀가하는 일이 런던에서 가장 비참한 일은 아니며, 런던에서 가장 형편없는 지역이라고 해서 집 없는 노숙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필요하면 어디에서 온갖 악과 불행을 찾을 수 있는지 잘 알게 되었다. 다만 그것들은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서, 내가 노숙자처럼 수 킬로미터의 거리를 그것도 혼자서 외롭게 돌아다니지 않았으면 절대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찰스 디킨스, 밤 산책 25-26
오히려 그런 감상에 빠져야 사회 복지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으로서의 ‘주체성’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앞에서는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먼저 밝히고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뒤로 미뤄둔다. 그들의 비참함과 아이러니컬한 유머를 그대로 쓰면서 그들의 그러한 ‘유머’보다는 비참에만 초점을 맞춘다. 디킨스는 관찰자에 불과하며 당사자가 될 수 없다. 반면 보들레르는 그 관찰자이자 당사자로 ‘시니컬한 유머’를 구사할 수 있다. 보들레르는 낮 산책이든 밤 산책이든 끊임없이 돌아다녔다면 디킨스는 순전히 ‘잠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자선 욕구’를 채우기 위해 빈민들을 관찰하러 다닌다. 실제로는 ‘위험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빈민들이 그렇게 흉악하지 않고 불쌍한 존재라는 듯이 말하지만, 사실 ‘밤산책’은 그의 편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흉악해 보이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수은 공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풍경은 우리 나라의 대기업 공장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아주 쉽게 그 사람들과 우리를 분리시키고, 그들이 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들이며, 그들을 마냥 불쌍해하며 나중에는 지겨워할 자격도 없다. 그들은 우리이며, 우리는 그들이다. 디킨스는 후반부에서 ‘말하지 않겠다’라고 쓰는데, 이는 그 자신의 한계를 마주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들을 관찰하는 게 목표였지 그들의 입장이 자신의 입장이 되는 걸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정치적인 견해에 상관없이 모두가 죽음을 이용해 거래를 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을 고이 보관하고, 죽음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죽음을 최대한 이용한 다음 마지못해 떠나 보낸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찰스 디킨스, 밤 산책 158
공원에서
공원은 꿈이 있었던 흔적이자 꿈이 어떻게 조롱당했는지 보여주는 공간이다. 군악대가 트럼펫을 불어도 그 곳에는 어떤 환호와 박수도 쏟아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꿈꾸었던, 그들에게 키스를 보낼 어린 소녀‘였던’ 노파들만 앉아 있을 뿐이다. 그들은 제2제정기의 사회로부터 쓰레기라고 조롱당하고 버려졌으며 그들의 댄스 파트너는 노파들 뿐이다. 이게 그들의 노력에 대해 주어진 보답이다. 그러나 보들레르는 ‘트럼펫’ 소리를 통해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트럼펫은 새로운 서정시의 등장이다. 군인-시인들은 새로운 서정시를 통해 몰락한 서정시에서 새로운 서정시로 건너간다. 하루 반짝 기념비에 불과했던 공원은 진정한 기념의 공원이 된다. ‘이행’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하다고 연거푸 주입당해왔던 ‘이행’이.
살자를 거꾸로 하면 자살
가장 가증스러운 슬로건이라고 생각했던 자살 예방 문구는 바로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였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의 자살과 삶은 종이 한 장 차이밖에 지나지 않는다. 자살하는 이들의 병증이 부각되며 그들의 정신적 병이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것처럼, 그들이 비정상인 것처럼 비춰지고 있다. 그들을 위해 물리적인 약을 먹여야 하며 정신병원에 처넣어 괜한 ‘베르테르 효과’를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벤야민은 자살에서 열정을 보았지만, 현대의 자살에서는 어떠한 열정도 보이지 않는다. 삶은 죽음을 강요한다. ‘자고 싶으면 죽은 뒤에 자라’라는 폭력적인 말은 그만큼 열심히 하라는 긍정적인 뜻으로 알아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현대의 자살은 지쳐서 하는 자살일 뿐이다. 어떠한 영웅성도 없다. 한국 소설 중 한 때 ‘획기적’이라고 주목받았던 ‘표백’이라는 소설에서는 시대에 어떤 파란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단체 자살을 기획하는 이들이 나온다. 하지만 그들의 자살은 어떠한 파장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그만큼 사회는 견고해졌고 교활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건 바로 우리였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고 누구를 겨냥할 수도 없다. 끈질기게, 어떻게든 버티려는 삶은 결국 그 자신을 죽이면서 사는 삶일 뿐이며-살자를 거꾸로 하면 자살이라는 말로 패러디할 수 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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