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정신분석
지젝과 변증법적, 역사적 유물론
이 강좌는 지젝을 '변증법적-역사적-유물론의 갱신'이라는 용도로 다시 쓰고자 한다. 지젝이 이제까지 제기한 주요 논제들과 변증법적-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기획을 조우시켜봄으로써 지젝의 유용성, 가능성, 한계 등을 가늠해보고자는 것이다.
수강료 : 39,000원 (적립5% : 최대1,950 원)
나를 위한 사유, 정신분석학 : 39,000원 
강사 : 한보희
구성 : 총 18강
교재 : 강의록 제공
수강 기간 : 6개월
지원사항 :
제작년도 : 2009년 ( 일반화질 )
총 14명 참여
 
강*한 님
엄*희 님
변*영 님
국내에 지젝이 소개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우리는 아직 이 놀라운 '물건'의 파괴력와 잠재력을 십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라캉이 프로이트에게 그랬듯이, 또 지젝이 라캉에게 그랬듯이, 우리는 지젝을 발본적, 당파적으로 다시 씀으로써 비로소 지젝을 독해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강좌는 지젝을 '변중법적-유물론의 갱신'이라는 용도로 다시 쓰고자 한다. 지젝이 이제까지 제기한 주요 논제들과 법중법적-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기획을 조우시켜봄으로써 지젝의 유용성,기능성,한계 등을 가늠해보자는 것이다.

'지젝'은 우리에게 어떤 물음인가?

 

믿음에 관하여

 

"나는- 믿는다"는 진술은 결코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성립할 수가 없다. 논리는 언어로 구성된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I believe in God"라는 영어 문장을 직역해보면, "나는 하나님 안에서 믿는다"가 된다. 이 때 "믿는다"는 동사의 주어(주체)와 목적어(대상)는 그 경계와 위상이 대단히 애매하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인지, 하나님 믿음 속에 내가 있을 뿐인지 알 수 없는 그 상태, 일인칭 단수로서의 개인 혹은 주체로서의 "나"가 그 확고함을 상실하게 되는 지점에 믿음이라는 사태의 본성이 숨어 있다. 이 때 믿음은 하나님 안에 내가 있음을 "아는 것",즉 진리의 인식이 되기 때문에 주관적 믿음과 객관적 인식이라는 구분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아는 것이 믿는 것이고 믿으니까 알게 되는 것이다.

 

 

▶믿음에 의해 지탱되는 "연약한 절대"(The Fragile absolute)

 

지젝이 전하는 얘기들은 대부분 하나의 핵심적 질문. 즉 "어떻게 실재와 조우 할 것인가?"로 통한다. 1968년 파리 학생 시위가 혁명적 국면으로 고양되는 듯했을 때, 라캉은 "구조는 거리로 내려오지 않는다"는 학생들의 비아냥거림을 들어야 했다.

이에 대해 라캉은 "히스테릭한 사람처럼 당신은 새로운 지배자를 요구한다. 당신은 그것을 성취할 것이다." 환언컨대, '당신은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새로운, 그러나 여전히)구조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는 식으로 응수했다. 혁명은 실패했고 지루한 "일상의 지배"가 뒤를 이었으니 라캉의 말대로 구조는 다시 거리로 내려 온 것인지도, 아니면 원래 거리를 떠난 적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여기서 라캉이 말하는"구조"는, 라캉이 초기에 "주체"에 대해 주장했던 것처럼, 빗금 그어진, 결핍된, 균열과 수수께끼를 내장한,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어떤 것이고 우리의 믿음에 의해 지탱되는 "연약한 절대(the fragile absoulte)"이다.


 

▶큰 타자(BIG OTHER)

 

큰 타자는 상징적 질서의 권위가 있다고 가정되는 곳이다. 예를 들어,'나는 모임이 폐회되었음을 선포한다'고 말한다면, 이 말하는 행위의 요점은 모임이 폐회되었음을 큰 타자에 등록하는 것이다. 그러한 권위에 대한 믿음은 상징적 질서에 그것을 보강하는 부가적인 것이 있음을 가정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나 '큰 타자의 큰 타자(an other of the other)'가 있다는 생각은 정신병적이다. 큰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다.


 

▶큰 타자(the other)는 없다

 

지젝은 "큰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라캉의 명제를 거듭해서 강조한다. 지젝이 말하는 것은 "(지배)구조 없는 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적 열망도 심지어 그것의 실현조차도 아니다. 반대로 구조의 긍정, 연약하고 위태로우며 탈중심화 된 상태에 있는 구조(큰 타자의 부패)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유물론자의 정치적 지향이 되어야 한다.

지젝의 이런 주장 배후에는 사회주의 혁명이 어째서 전체주의적 폭압으로 전도되었는가에 대한 뼈아픈 성찰과, 거기에 더해, 그와 같은 실수를 재차 반복 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어떻게 혁명을 다시 사유하고 실천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모색-레닌의 정치적 결단과 행위의 윤리, 기독교적 사랑과 바울적 유물론 등등-이 깔려 있다.


 

▶너는 무엇을 바라는가?

 

대선 때마다 정권 교체라는 대타자의 욕망은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고 있으며, 믿고 뽑았던 사람의 뒷통수 치기에 대한 상처를 우리는 안고 있다. '너는 무엇을 바라는가?', 하고 우리는 그 상처에 물어야 한다.

우리가 이제부터 바꿔야 할 것은 정권 교체의 욕망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욕망의 자리를 점거하고 있던 노예의 주인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비워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로 참된 민주적 욕망과 공적 자유의 공기가 소통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실재윤리, 실재의 정치란 텅빈 공허(the void)라는 대타자 없는 실재의 공간을 우리의 자유의 욕망으로 채워가는 생의 정치학, 바로 그것이다. 

 

제1강 지젝의 정신분석학 중에서
제6강 라캉의 커뮤니케이션 이론 중에서
제9강 지젝이 말하는 믿음 중에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인간사랑,2002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인간사랑,2002
『항사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2001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2008
『혁명이 다가온다』,길,2006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
『지젝이 만난 레닌』,교양인 2008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2003
『법은 아무것도 모른다』,인간사랑,2009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