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으로 다룰 시는 <거미>인데요, 설움의 정조로 이루어져 있는 시입니다. 작품을 한번 봐 볼까요?
여기에서도 설움이라는 단어는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나 이 설움의 실체가 분명치는 않아요. 다른 시들에서도 설움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시의 문맥을 따라가며 추정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 설움을 느끼고 견딘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그런 점에서 ‘내가
바라는 것’과 ‘설움’을 느끼는 것은 상반되는 현실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상이겠지요,
꿈이고 바람일 터입니다. ‘설움’에 대한 느낌은 생활 현실에서 연유한 것이 아닐까 싶네요. 다시 말해 ‘내가 바라는 것’과 전혀
다른 생활 현실이 ‘설움’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이 말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의 실체는 이 시에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생활의 비애를 느끼는 화자이기에 그것을 넘어서려는, 초월하려는 감정이 거기에는 실려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누군가 천상을 지향하지
않는 시인이 어디 있겠느냐고도 했습니다만 생활의 비애가 극에 달할수록 그 상반된 의지, 즉 그 어떤 초월의지, 자유의지, 상승의지
같은 것이 표출되기 마련이지요. 그런 점에서 이 대목은 존재론적 고독 같은 것도 느껴집니다. 이 시에는
자기연민의 감정 같은 것이 있습니다. 자신을 ‘늙어가는 거미’에 비유하고 있는 점도 그렇지만 그런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자각이
또 자기연민의 감정을 증폭시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설움의 풍경’은 자아 내부의 모습을
비유한 은유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시간적, 공간적 공백입니다. 사실 1연과 2연은 문맥의 흐름상 하나로 묶여야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의도적으로 행갈이를 했지요. 아니 단순한 행갈이의 차원을 넘어 연을 바꾸었군요. 행갈이와 연갈이는 왜
할까요? 휴지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연갈이 때문에 1연을 읽은 뒤 한참을 쉬었다가 2연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집니다.
문맥상 빨리 읽어야 하는데 이 연갈이 때문에 빨리 읽을 수가 없지요. 여기서 긴장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되지요. 그렇게 볼 때 1연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2연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현재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2연에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화자의 착잡한 심정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이지요. ‘나’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오랫동안 ‘설움에
몸을 태운’ 존재, ‘내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 설움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여기에는 자각이 있지요. ‘내가 바라는 것’이 있어서
설움을 느낀다고 하니까 자각이 있는 것이고, 그런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자각이 또 자신을 진저리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에는 설움에 몸을 태우고 있는 자신과 그런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내면의 자아가 겹쳐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그런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니까 이제는 그 ‘풍경’이 지긋지긋 할만도 하지요.
이 시의 제목이 ‘거미’이구요, 이 ‘거미’에는 시인의 존재가 투영되어 있습니다. ‘거미’는 시인의
감정이 이입된 대상물입니다. ‘거미’는 보통 악의 상징물이거나 내면을 응시하는 자아의 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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