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돌프 루스는 '모든 예술은 에로틱하다'
• 파리의 오르세이 미술관.
• 관람객에게 기념 사진촬영 1순위로 꼽히는 도발적이며 에로틱한 작품.
• 포르노에 가까운 이 작품이 19세기 사실주의 대가 귀스타브 쿠르베의 작품. '세계의 근원'이라 불리는 이 그림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노골적인 문제작.
• 미성년자 불가의 '위험한 X 그림'의 탄생은 140여년 전. 1899년 격동기의 파리·터키의 외교관이자 콜렉터인 카릴 베이(Khalil Bey)가 당대 최고인 쿠르베에게 특별한(?) 그림 한점을 주문했다
• 목적은 혼자 엉큼하게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조건은 '벌거벗은 여인을 앞에서 그리되 혁신적이고 감동적으로 깜짝 놀랄 만한 방식'으로 그려줄 것을 요구했다.
• 그리하여 이 불경한 주제의 작품은 온갖 파괴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회화는 반드시 그 시대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며 통렬하게 기성 체제의 위선을 비판했던 쿠르베. 이 그림의 영향은 대단했다.
• 남성과 여성 전시에 감초처럼 끼는 것은 물론 많은 패러디 작품을 낳기도 했다. '세상의 근원'이란 소설에는 "남자들은 감히 성기를 그리지 못했어.
• 그건 바로 그 남자들이 거기서 나왔기 때문이지. 그들은 자기들이 나온 곳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거든…"과 같은 패러독스한 표현이 있는가 하면, 오를랑은 '전쟁의 근원'이라는 작품에서 가랑이를 벌린 두 다리 사이로 우뚝 솟은 남성의 성기를 그렸다.
• "나는 신이 세상을 창조하듯 이 그림을 그린다"고 선언한 쿠르베에게나 우리에게나 이 여성의 성기는 '세계의 근원'이자 젖과 꿀이 흐르는 생명의 근원지다. 이것이 그가 "그 음부는 바로 나"라고 말한 이유다.
• 이 작품을 누가, 어디에 소장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뜻밖에 120여년 만에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1981년 사망한 다음, 유품 가운데 이른바 'X'라고 불린 그림이 한점 발견됐다.
• 이것이 바로 국가에 환수된 '세계의 근원'이었다.
• 1955년 라캉은 이 그림을 구하기 위해 1백50만프랑(약 2억4천만원)이라는 거액을 주었으며 그림을 감추기 위해 이중 그림이 있었다는 것 등이 훗날 알려지면서 신비감은 더했다.

쿠르베 [Gustave Courbet, 1819.6.10~1877.12.31]
프랑스의 화가. 견고한 마티에르와 스케일이 큰 명쾌한 구성의 사실적 작풍으로 19세기 후반의 젊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하여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하고 일상생활에 대해 섬세히 관찰할 것을 촉구했다.
스위스 국경 가까운 프랑슈콩테주 오르낭 출생. 1840년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연구를 위해 파리로 나왔으나 얼마 후 화가를 지망하여 화숙(畵塾)에 다니며 회화습작에 몰두하는 한편 루브르미술관에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파의 거장들의 작품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1844년 살롱에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하고, 1849년 《오르낭의 매장》에서는 이색적 화재를 인정받았으나 1850년의 《오르낭의 장례식》은 화단의 평론을 양분하는 물의를 일으켰다.
지나치게 실경 묘사에 치우친 불경스런 희화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돌 깨는 사람들》(1849),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노작 《화가의 아틀리에》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이 작품의 출품을 거절당하자 몽테뉴가에 손수 가옥을 짓고 입구에 '사실주의'라는 큰 간판을 걸고서, 이 작품을 비롯한 40여 점의 자작품을 전시하여 자신의 예술상 입장을 도전적으로 표명하였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적 입장은,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 혁신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의 밀도를 촉구한 점에서 미술사상 가장 큰 의의를 남긴 것이다.
대표작 《나부와 앵무새》(1866) 《사슴의 은신처》(1866) 《샘[泉]》(1868) 《광란의 바다》(1876) 등이 있다.
• 성기 그림의 안전을 위해 초현실주의 화가 마송에게 위장용 덮개 그림을 주문해서 사고를 피했다. 쿠르베가 이 불온한 그림을 감추기 위해 '불로냐 성'이라는 풍경화를 덮개 그림으로 삼았던 것처럼.
• 1896년 1월 4일 (프랑스) - 1987년 10월 27일
그 후, 《센강변의 처녀들》(1856) 외에 많은 수렵도, 거치른 바다풍경, 나부(裸婦) 등을 제작하였으나 1871년 파리코뮌 때, 나폴레옹 1세 동상의 파괴책임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객사하였다. 그의 견고한 마티에르와 스케일이 큰 명쾌한 구성의 사실적 작풍은 19세기 후반의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클로드 모네 [Claude Monet, 1840.11.14~1926.12.5]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인상·일출(日出)》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인상파란 이름이 생겼다. 햇빛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 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인상파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파리 출생. 소년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화가 부댕을 만나, 외광(外光)묘사에 대한 초보적인 화법을 배웠다. 19세 때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스위스에 들어가, 피사로와 사귀었다. 2년간 병역을 치르고 1862년 파리로 귀환, 글레르 밑에서 A.르누아르, A.시슬레, F.바지유 등과 사귀며 공부하였다. 초기에는 G.쿠르베와 E.마네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를 그렸으나 점차 밝은 야외에서 풍경화를 그렸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 런던으로 피신, 이때 J.터너, J.컨스터블 등의 영국 풍경화파의 작품들에 접했다. 이것은 명쾌한 색채표현이란 점에서 커다란 기술적 향상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적 입장은,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 혁신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의 밀도를 촉구한 점에서 미술사상 가장 큰 의의를 남긴 것이다. 대표작에 《나부와 앵무새》(1866) 《사슴의 은신처》(1866) 《샘[泉]》(1868) 《광란의 바다》(1876) 등이 있다.
한편 1878년에는 센강변의 베퇴유, 1883년에는 지베르니로 주거를 옮겨 작품을 제작하였고, 만년에는 저택 내 넓은 연못에 떠 있는 연꽃을 그리는 데 몰두하였다. 작품은 외광을 받은 자연의 표정을 따라 밝은색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지 않는 대신 '색조의 분할'이나 '원색의 병치(倂置)'를 이행하는 등, 인상파기법의 한 전형을 개척하였다.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의 뉘앙스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려는 그의 작화(作畵)의도는 《루앙대성당》 《수련(睡蓮)》 등에서 보듯이 동일주제를 아침·낮·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연작한 태도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밖에 《소풍 The Picnic》 《강 The River》 등의 작품도 유명하며 만년에는 눈병을 앓았다. 1926년 폐암으로 86세에 세상을 떠났다.
폴 세잔 [1839.1.19~1906.10.22]
프랑스의 화가. 인상파작업을 했으나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작풍이 더욱 발전하여 후에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로 일관했다. 20세기 회화의 참다운 발견자로 칭송되고 있으며, 입체파(cubisme)는 세잔 예술의 직접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다.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출생.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린시절 친구 E.졸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59년 아버지의 권유로 엑상프로방스의 법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1861년 그만두고 졸라의 권유로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로 학교를 옮겼다. 여기에서 C.피사로, A.기요맹 등을 알게 되고, 후에 인상파화가들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한때 미술학교 시험에 실패하여 실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72년 퐁투아즈에서 헤어졌던 피사로와 만나 다시 그림에 전념하기 시작하고 인상파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단지 반관전(反官展)이라는 입장에서 동조하는 정도였으며, 학풍에서는 C.모네나 피사로에서 볼 수 있는 순수한 외광파(外光派)에 속하지는 않았다.
1874년 제1회 인상파전에 출품한 작품에서 보여준 빛과 색의 배합은 한층 인상파작가로 접근해 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으나 제3회 인상파전을 고비로 차차 인상파를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작풍이 더욱 발전하여 후에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그는 20세기 회화의 참다운 발견자로 칭송되고 있으며, 피카소를 중심으로 하는 입체파(cubisme)는 세잔 예술의 직접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을 구분하면 《목맨 사람의 집》(1872)이 그의 전기작품(인상파) 중에 손꼽히는 걸작이며, 《에스타크》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등은 원숙기의 작품이며 《목욕하는 여인들》《생 빅투아르산》 등이 대표적인 후기작품들이다. 그 밖에 정물에 관한 그림과 초상화에도 많은 걸작을 남겼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3.30~1890.7.29]
네덜란드의 화가. 인상파와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으로 강렬한 색채와 격렬한 필치를 사용하여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
작품에 《빈센트의 방》《별이 빛나는 밤》《밤의 카페》등이 있다.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브라반트 북쪽에 위치한 그루트 준데르트(Groot Zundert)라는 작은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테오도루스 반 고흐)는 목사였다. 그의 어머니(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는 1857년에 그의 동생을 낳고 아버지의 이름을 따 테오도루스라고 이름 지었다. 1864년 빈센트는 부모와 떨어져 기숙학교에 다녔는데 가난으로 15세 때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1869년 빈센트는 숙부가 운영하는 구필화랑 헤이그 지점에서 판화를 복제하여 판매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당시 빈센트는 모범적이고 성실한 청년으로 인정받았다. 1873년부터는 빈센트의 동생인 테오도 브뤼셀 지점 구필화랑에서 일하게 되었다. 1873년 3월 빈센트는 헤이그를 떠나 구필화랑 런던지점으로 발령을 받아 영국에 머물렀으며 1875년부터는 파리지점에서 일하였다. 빈센트는 런던에서 부터 신비주의에 빠져 화랑일을 소홀히하였다. 빈센트에게는 오로지 하나님밖에 없었으며 그는 결국 화랑에서 해고당하였다.
하지만 암스테르담 신학대학에 낙방하였고 전도사 양성학교에서도 그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여겨 6개월간 평신도로서 전도활동만을 허가하였다. 빈센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보리나주로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최하층민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오두막에서 지내며 전도활동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그의 광신도적인 기질과 격정적인 성격 때문에 결국 교회로 부터 전도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80년 실의에 빠진 빈센트는 그동안 계속 해온 습작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빈센트는 미술공부를 위해 다시 파리로 갔다. 드로잉에 관한 기초 지식이 부족했던 빈센트는 라파르트라는 5살 아래의 미술학도에게서 드로잉을 배웠다. 이후 빈센트의 외사촌이자 헤이그화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톤 모베의 화실에서 유화를 그리게 되면서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이 시기에 빈센트는 그동안 열광했던 종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목사인 아버지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는 과격한 성격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작은 충고에도 심각한 상처를 입곤했다. 그런 그의 성격 때문에 그에게 그림을 지도하던 안톤 모베와도 절교하게 되었다.
빈센트는 크리스틴이라는 매춘부 출신의 여자와 동거를 하며 지냈는데 그녀는 알콜 중독에 매독 환자였다. 빈센트의 가족은 그가 크리스틴과 지내는 것을 우려하였고 동생 테오는 그녀와 헤어지기를 강요하였다.
마침내 빈센트는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언제나 노동자·농민 등 하층민의 생활과 풍경을 그렸다. 초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은 이 무렵의 작품이다. 1886년 화상점원으로 일하고 있는 동생 테오를 찾아서 파리에 나온 빈센트는 코르몽의 화숙(畵塾)에서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를 알게 되었다.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판화에 접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렘브란트와 밀레풍(風)의 어두운 화풍에서 밝은 화풍으로 바뀌었으며, 정열적인 작품활동을 하였다.
자화상이 급격히 많아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그러나 곧 파리라는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1888년 2월 보다 밝은 태양을 찾아서 프랑스 아를로 이주하였다. 아를로 이주한 뒤부터 죽을 때까지의 약 2년 반이야말로 빈센트 반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였다. 그는 그곳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였으며 《아를의 도개교(跳開橋)》<해바라기> 걸작을 제작했다.
한편 새로운 예술촌 건설을 꿈꾸고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그곳으로 올 것을 끈질기게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장 폴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되었으나 성격차이가 심하여 순조롭지 못하였다. 그해 12월 빈센트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켜 고갱과 다툰 끝에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그 후 빈센트의 생활은 발작과 입원의 연속이었으며, 발작이 없을 때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그려댔다. 발작과 그림 제작에 지쳐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 찾아간 것은 1890년 5월이었다.
지금은 온 세계가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정열적인 작풍이 생전에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인상을 처음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준 것은 1903년의 유작전 이후였다. 따라서 그는 20세기 초의 야수파 화가들의 최초의 큰 지표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네덜란드에 가장 많이 있는데, 40점 가까운 자화상 이외에도 《빈센트의 방》《별이 빛나는 밤》《밤의 카페》《삼(杉)나무와 별이 있는 길》 등이 유명하다.



폴 고갱 [Paul Gauguin, 1848.6.7~1903.5.8]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이다.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으로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고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非)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했다.
1848년 6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클로비 고갱은 《르 나시오날》이라는 신문의 정치부 기자였다. 1848년 2월 프랑스혁명이 일어나 공화정이 되면서 프랑스는 정치적 혼란기를 겪게 된다. 클로비 고갱은 이때 페루의 수도인 리마로 이주해서 신문사를 차리기로 계획하고 가족을 데리고 페루로 이주한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페루로 이주하는 동안에 심장병으로 사망한다. 폴 고갱의 어린 시절은 이렇게 페루 리마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리마에서 보낸 시기는 1849~1854년까지 였으며 리마에서 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1854년 고갱의 가족은 프랑스로 돌아와 오를레앙에 정착하게 된다. 오를레앙은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그의 가족은 가난하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렸다. 1865년 12월 고갱은 선박의 항로를 담당하는 견습 도선사(사관후보생)가 되어 상선(商船)을 타고 라틴아메리카와 북극 등 많은 곳을 여행하였다. 1871년 그가 인도에 있을 때 어머니 알린 고갱의 사망소식을 듣게 된다. 1872년 선원생활을 그만두고 파리로 돌아와 증권거래점의 점원이 되어 점원생활을 하였다. 그의 일자리는 어머니의 친구인 구스타브 아로자라는 여인이 마련해준 것이었다.
1873년에는 덴마크인 여성인 메테 소피 가트와 결혼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졌고 에밀(1874), 알린(1877), 클로비(1879), 장 르네(1881) 폴(1883) 5명의 아이가 생겼다. 이 무렵부터 회화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여 특히 인상파의 작품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가 미술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그의 후견인이었던 어머니의 친구 구스타브 아로자라는 여인의 영향이었다. 그는 미술품 수집뿐만아니라 조금씩 직접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27∼28세부터는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876년 처음으로 살롱에 출품하여 C.피사로(1830∼1903)를 사귀게 된 것을 계기로 1880년 제5회 인상파전 후로는 단골 멤버가 되었다.
1882년 프랑스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수많은 실업자가 발생하고 주식거래인인 그의 직업도 불안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때 고갱은 전업 화가가 되기위해 이를 피사로와 의논하였다. 피사로의 소개로 P.세잔, A.기요맹(1841∼1927) 등과 친교를 맺어 화가가 될 결심을 굳히게 된다. 이듬해인 1883년 35세에 증권거래점을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 생활비가 저렴한 루앵으로 이사를 하였다. 그는 주식거래인 시절에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였고 그러한 재능으로 화가로서 성공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화가로 살아가면서 생활이 어려워지게 되었고 아내와 사이가 나빠졌으며 한때는 처가가 있는 코펜하겐에 갔으나 결국 처자식과 헤어져 파리로 되돌아왔으며 이후 한동안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
파리에서 고독한 시간을 보내던 고갱은 1886년 6월 도시생활에 지쳐 브르타뉴의 퐁타방으로 이사하였다. 이사를 하게된 동기는 보다 그림에 전념하기 위해서 였다. 그곳에서 종래의 인상파풍 외광묘사(外光描寫)를 버리고 차차 고갱 특유의 장식적인 화법을 지향하였고 토속적인 토기류 도자기 제작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 시기의 작품은 후일 P.세뤼지에, M.드니, P.보나르 등, 후일 나비파(Nabis 派)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토기에서 비롯된 그의 원시적인 관심은 1887년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섬으로 향하게 된다.
퐁타방에서 알게된 젊은 화가 샤를 라발과 함께 파나마를 거쳐 마르티니크섬에 도착하지만 곧 향수병에 시달리게 되고 이듬해 파리로 돌아왔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이때 제작된 작품은 원시주의적 미술로 파리에서 주목을 받게되었다. 파리에서는 고흐, 로트레크 등을 알게 되었으며, 특히 고흐와의 우정이 돈독했으며 고흐의 동생 테오의 추전으로 고흐와 함께 남프랑스의 아를에서 '노란집'이라는 화실에서 같이 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예술적 견해로 종종 대립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고 고흐가 귀를 자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두사람의 우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 후 다시 브르타뉴 퐁타방으로 가서 《황색의 그리스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의 작품을 제작하였고, 조각·판화·도기(陶器) 제작에 전념하였다. 이때부터 고갱은 원시적이고 야생적인 것에 관심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 퐁타방이 번잡하게 느껴져 더욱 한적한 바닷가의 작은 마을인 르풀뤼로 이주하였다.
고갱은 점차 파리 아방가르드 화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1889년 개최된 파리만국박람회에서 많은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이 전시회에 출품된 아시아와 남태평양의 이국적인 풍물에 열광하였고 열대지방의 원시적인 생활을 동경하였다. 점차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하여 가다가 마침내 1891년 2월 그의 작품을 처분하여 원시세계로의 여행자금을 마련하였다. 코펜하겐에 들러 그의 가족들을 만나고 그해 4월 1일 마르세이유를 출항하여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네버모어 Nevermore》《타히티의 여인들》《언제 결혼하니?》 등은 만년의 작품들이다.
고갱은 약 2개월간의 항해를 마치고 1891년 6월 9일 타히티섬 파페에떼 항구에 도착하였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산업혁명으로 오염된 서양의 문명의 벗어나 소박하고 순수한 자연의 예술을 추구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원시인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수단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하지만 타히티 파페에떼는 그의 이상과 달리 척박한 곳이었다.
고갱은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파페에떼는 식민지 지배자들과 술주정뱅이 백인들이 득실거리는 실망스러운 곳이었다. 고갱은 그해 9월에 파페에떼를 떠나 마타이에아 섬으로 옮겼다. 이곳에서 고갱은 안정을 되찾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가 그의 예술을 완성시켰다. 하지만 점차 가난과 빈곤, 고독에 시달려 가기 시작했다. 고갱은 파리로 돌아가 가족들과 재회하기를 갈망했다. 1893년 6월 4일 그는 타히티를 떠나 그토록 그리워하던 프랑스로 향했다.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1893년 11월 10일 고갱은 타히티에서 그린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어 세인의 관심을 끌었지만 상업적으로는 실패하였다. 고갱은 자신이 경험한 타히티섬의 원시적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해 책을 집필하였고, 인정받지 못하는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와 소개를 위해 그림을 목판으로 제작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이러한 문제가 그에게는 매우 절박한 것이었다. 그가 프랑스로 돌아온 1년 동안 깊은 좌절감만 쌓여갔다. 코펜하겐의 그의 가족들도 그에게 냉담했다. 고갱은 다시 타히티섬으로 돌아갈 것으로 결심하였고 1895년 6월 말 프랑스를 떠나 다시 남태평양으로 향했다. 이 당시 파리에서 열렸던 그의 작품은 피카소 등 젊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타히티 파페에떼에 돌아온 고갱은 병마에 시달렸고 파리에 머무는 동안에 겪었던 처절한 패배감으로 우울증에 빠져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때 마지막 유언으로 여기며 제작한 그림이 유명한《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이다. 1901년 마르키즈제도의 히바오아섬으로 자리를 옮겼을 무렵 매독과 영양실조로 그의 건강은 더욱 나빠져 있었다.
이곳에서 정착하여 집을 짓고 '쾌락의 집'이라고 불렀다. 그는 이곳에서 《부채를 든 여인》 《해변의 말 탄 사람들》등의 작품을 남겼다. 1903년 5월 8일 심장마비로 생애를 마쳤다. 그의 상징성과 내면성, 그리고 비(非)자연주의적 경향은 20세기 회화가 출현하는 데 근원적인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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