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폭정으로부터 벗어날 권리뿐만 아니라 그것을 예방할 권리도 가지고 있다.
- 존 로크 (220절)
‘여태껏 그래왔다’에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로 넘어가는 논리란 별로 설득력이 없다.
- 존 로크 (103절)
1. 존 로크(J. Locke)의 주목할 만한 이력(履歷) 하나
시인의 생애를 알아야만 시를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의 유년기 체험, 연애 경험, 생활고의 아픔, 혹은 수감생활 등을 모르는 상태에서도 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체험과 생의 이력을 알게 되면, 그만큼 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사실입니다. 시에는 어떤 형태로든 시인의 온갖 ‘생의 몸부림’이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이를테면, 이육사나 윤동주의 생애를 알고 그들의 시를 읽어보면, 더 깊고 넓게 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사학에서도 <역사책을 보기 전에 역사가를 먼저 보라>는 말이 전해집니다. 시를 감상할 때와 같은 이치로, 로크의 생애와 이력을 알면 로크가 힘주어 강조한 사상을 ‘더 자~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다 로크의 기본적인 프로필을 세세히 적지는 않을 작정입니다.(참고자료를 보려는 의지만 있으면 쉬 알 수 있으며, 번역서의 231-232쪽에는 연보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좋은 참고자료는 송규범, ?존 로크 : 삶과 시대? (과학과 문화 통권 5호, 2005), pp. 49-61. 여기서 말하는 통치론의 쪽수는 강정인, 문지영이 공동 번역하고 까치출판사에서 간행한 번역서를 말한다.
). 그 대신에 로크의 삶에서 내가 중요하다고 느낀 한 가지 이력에 대한 생각을 잠시 자유롭게 따라가 볼 참입니다. 사실, 시인의 경우에도 하나의 특정한 체험이 그의 다른 경험들을 압도하여 그의 시 세계 전반에 영향력을 끼치기도 하니까요!
로크는 1632년에 외가인 서머셋 인근의 링턴(Wrington)에서 태어났습니다. 경건한 청교도이자 시골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로크가 10살 때, 잉글랜드 서부 지역의 의회파 지도자인 알렉산더 포펌(A. popham)을 보좌하여 내전에 참여할 정도로 의회주의를 신봉했습니다. 로크는 아버지와 동지적 관계에 있던 포펌의 추천으로 당대 최고의 명문인 웨스트민스터 학교에 진학했고, 장학금을 받으면서 1652년 옥스퍼드대학에 (그 중에서도 으뜸가는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에) 입학했습니다. 로크는 1656년에 문학사를, 2년 뒤에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나, 젊은 날 그의 주된 관심은 화학실험과 의학에 있었습니다. 관찰과 실험에 입각한 새로운 ‘자연철학적’ 접근법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중에 런던에 와서 유행병과 천연두 연구의 권위자로 ‘17세기 최고의 의사’라는 평가를 받는 토마스 시더넘(T. Sydenham)과 공동 연구도 했고, 1674년에는 의학사 학위도 받습니다.)
로크(1632~1704)의 이력에서 무엇보다도 나의 눈길을 끈 것은, 1666년 여름 신병치료차 옥스퍼드를 방문한 앤터니 애쉴리 쿠퍼(Anthony Ashley Cooper, 1621~1683) 경(Lord)의 우연한 만남입니다. 이 만남 이후로 로크의 삶은 송두리째 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애쉴리 남작은 체구는 자그마했어도 당시에 이미 정치적 거물이었습니다(1672년에는 ‘샤프츠베리 백작’ 1세가 됩니다). 둘은 첫 만남에서 서로 호감을 느꼈고, 애쉴리는 로크를 자신의 가정주치의 겸 조언자로 런던에 있는 자신의 대저택인 엑시터하우스(Exeter House)로 초빙했습니다. 로크는 이를 받아들여서 15년간의 옥스퍼드 생활을 청산하고, 그 후로 8년간(1675년까지) 그 저택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은 왕정복고(1660년)에서 명예혁명(1689년) 시기까지 잉글랜드의 요동치는 정치세계에서 ‘애쉴리 사람’으로 살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로크와 애쉴리는 정치적으로 입헌군주제와 의회의 통치, 시민의 자유와 종교적 관용을 옹호한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뜻을 같이하는 동지적 관계에 있었습니다. 특히 애쉴리는 로크의 집도로 간의 농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살아난 이후로(1668년), 로크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로서 모든 면에서 로크를 ‘챙겨’ 주었습니다. 애쉴리는 1672년에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상서경(Lord Chancellor) 자리에까지 오르기도 했지만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찰스 2세가 절대왕권을 표방하는 프랑스와 손을 잡고 비밀리에 가톨릭 신자인 동생 요크 공(제임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결국에는 찰스2세에 맞서는 휘그당을 결성하고 절대왕권에 반대하는 정치적 리더가 됩니다. 애쉴리는 왕당파들의 모임인 '토리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탄압을 가하자 찰스 2세의 서자이자 제임스의 이복형제인 먼머스(Monmouth) 공을 즉위시키려는 거사를 꾸몄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네덜란드로 망명을 했다가 1683년 1월에 사망했다.
한편, 로크가 찰스 2세와 토리당에 반대하는 휘그파의, 그것도 강력한 주도자의 최측근으로서 현실정치에 관여했다는 것은, 그가 찰스 2세의 왕정복구, 제임스 2세의 왕위 계승 문제, 그리고 토리와의 경쟁 등의 정치적 문제를 “삶의 직접적 문제”로 받아들이며 살았음을 시사(示唆)합니다. 게다가 그는 휘그에 대한 탄압이 심해짐에 따라 1683년부터는 약 6년간 네덜란드로 국외망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긴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기도 했었습니다. 사람이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글을 쓴다면, ‘말해도 무탈하고 안 해도 별 탈 없는’ 무색무취한 내용으로 쓸 리는 만무하겠지요. 로크의 통치론은 당대 영국의 정치변동과 자신의 (사회적이자 물리적) 생사의 문제가 절실하게, 아니 절절하게 직결되어 있는 긴박한 상황에서 쓰여 졌습니다. 통치론의 집필 배경 및 집필년도(1783)와 출판년도(1790)의 차이에 관한 설명은 텍스트의 ?해제?에 잘 나와 있으므로 별도로 부연하지 않음.
이처럼 현실세계에서의 삶 자체가 “정파적 주먹”의 세기(强度)에 의해 좌우되는 상태에서 저술되었기 때문에, 통치론은 순수한 학술적 탐구심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정파인 휘그의 정치적 입장과 행위에 명분을 제공하고, 이론적 기틀을 놓으려는 실제적 의도가 반영된 책이라고 말할 수 있지요. 통치론이 리바이어던과 비교해서 논리적 정합성과 체계가 다소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면, 통치론이 ‘왕위계승 배제 위기(Exclusion crisis)’라는 현실적 (정치)상황의 산물이었다는 점에서도 그 이유의 일단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내건 대의를 분명하게 옹호하면서 사회혁명의 도래를 고대했던 마르크스에게 과학적 논증(scientific reasoning)과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가 길항하면서도 삼투하였듯이, 로크에게도 ‘사상가로서의 로크’와 ‘이데올로그로서의 로크’가 ‘오버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로크의 통치론은 <법에 의한 지배 / 자의적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사이에서, 또 <보편적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 / 노동을 통한 부의 창출과 증대에 따른 차등적 소유권의 정당화>사이에서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우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2. 통치론독해 1 : 가볍게 읽기 – 계약은 제약(!)이다
자연 상태? 사회계약? 동의와 위임에 의한 정치사회의 수립? 국가권력의 창출? 인민의 저항권
“자연상태”, “사회계약”이라는 말 때문에 로크는 홉스와 흔히, 거의 습관적으로, 비교되지만 이 책에서 로크가 설정한 주적(主敵)은 사실 토머스 홉스가 아니라 당시 토리(Tory)의 이데올로그인 로버트 필머(Robert Filmer 1588~1653)였습니다. 필머는 사후에 출판된 가부장제론 Patriarcha(1680년)에서 가부장제적 권력의 연장선에서 국가권력의 ‘역사적 기원’을 설명하고, 아담의 직계후손이란 성서적 배경 속에서 국왕의 권력 소유권을 정당화하려고 했던 인물입니다. 로크는 필머의 왕권신수설 에 맞서, “자연상태”라는 “참된 기원” 이 책의 제목(시민정부의 참된 기원, 범위 및 그 목적에 관한 시론)에 포함된 “참된(true) 기원”이란, 필머가 전개한 <정치권력의 역사적 기원>과는 다른 “올바른” 기원을 탐구한 책이라는, 다시 말해서 필머의 이론이 그릇되고 잘못된 기원설임을 부각시키는 대비적 효과를 낳는다.
에서 출발하여 동의와 계약의 개념을 거쳐서 국가권력이 수립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성서 속의 아담이 아니라 역사 속의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를 실제적 준거로 삼아서 로크는 통치론 107절~111절에서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를 모델로 인류 최초의 시대에는 재산이 적었기 때문에 분쟁도 적었고, 법도 필요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인류사의 원형으로서, 성서에 묘사된 세계 밖에 알지 못했던 시대에 인디언 사회 모델의 사용은 그 자체가 획기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로크는 아메리카(인디언 사회)를 “아시아와 유럽의 초기 유형”(108절)으로 본다. 그에 주장에 의하면 이 사회는 <수렵-채집사회>이다. 책에 드러난 사회발전에 대한 로크의 주장을 정리하면, 사회는 <농업사회> → <상업교환사회>의 3단계로 발전하며 로크 당대의 사회는 세 번째에 해당된다. *덧붙임: 인디언이란 말은 이제는 Native American이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국가권력의 소유권은 인민에게 있다고 언명합니다. 이것은 토리에 맞서 휘그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적 투쟁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에 주목하면 로크의 통치론은, 논지의 선명함이 논리의 정합성보다 중요한, 요즘 말로 하자면 일종의 “시국선언문”의 성격을 띤 정치적 팸플릿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로크의 통치론을 단지 그가 당면한 정치상황적 과제와 관련해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책에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통치론은 제목이나 일별(一瞥, glance)과는 달리, <근대 자유주의, 법치주의, 의회주의의 내실(內實)>과 <근대 시민사회의 소유권적 기초>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책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대부분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구성되었으며, 로크가 자유주의의 시조로 불리는 사상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 책은 지금 여러분과 제가 사는 이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토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투시경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 투시경의 성능을 확인하기 전에, 로크의 이 책이 어떻게 “인민의 자유(좁게는 휘그)”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책인가를 살펴보는 게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째서? 일단 그렇게 읽어 나가는 게 쉽기 때문입니다.(그리고 그래야 로크가 ‘자유주의의 아버지’가 된 이유를 발견하기도 쉽습니다.)
우선 홉스 통치를 ‘베일에 싸인 신성한 제도’로 간주함으로써 애당초 검토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거나 혹은 검토를 초월해 있다는 주장을 홉스는 배격했다. 비록 절대군주정을 옹호했으나 그는 통치를 합리적인 분석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즉 홉스의 정치철학은, 종교개혁으로 인해 다시 애매해진 르네상스적 태도(대표적으로 마키아벨리의 리얼리즘)를 재연하였고, 정치이론을 종교의 지배에서 다시 끄집어낸 공이 있다.
와의 비교로부터 논의를 시작하지요. (로크는 홉스가 아니라 팔머의 이론에 맞서 아 책을 썼지만, 출간된 이후로 이 책은 늘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비교되어 왔습니다. 양자의 논의에서 자연 상태와 사회계약이라는 말이 공히 중요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홉스를 염두에 두고 로크의 사상적 위치를 가늠해보면, 로크는 정치이론을 신학에서 해방시키려고 했던 홉스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도 홉스의 사회과학적 연구방법으로부터 절대군주제의 옹호라는 결론을 따로 떼어내려고 노력한 사상가입니다. 그는 휘그적 입장에 서서 가톨릭교도였던 왕의 동생 요크 공의 왕위계승의 부당성을 비판하고(소위 ‘배제법안 위기’) 윌리엄 3세의 등극을 정당화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전부터 있어 왔던” 기존의 전통이나 인습적 사고에 반대하여 (‘여태껏 그래왔다’에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로 넘어가는 논변이란 별로 설득력이 없다.”(103절)) 인간을 기존의 사회에서 끄집어내어 자연상태에다 두고서, 즉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상태 내지는 부분으로 환원해서 논의를 펼칩니다. 현재의 정치권력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본래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고, 모든 인간이 자연적으로 어떤 원초적 상태에 있었던가를 고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연상태에 대한 로크의 탐구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로크가 생각한 <본래적인 것>, 즉 자연 상태는 홉스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홉스의 눈으로 보면, 로크의 자연 상태란 ‘사회상태’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야만적이고, 비합리적인, 제어하기 어려운 (인간의) 정념의 무대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성이라는 “자연법”이 있어서 모든 사람을 구속하고 지도합니다. 지도하다니, 무엇을? 인간은 모두 평등하고 독립적이며 아무도 타인의 재산(=생명, 자유, 자산)을 손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도합니다! 이처럼 로크에게 있어서 자연 상태는 이미 이성에 의해서 특징지어져 있습니다. 또한 로크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향유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그게 방종의 상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인간은 백치나 광인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인간은 이성적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비록 자신의 이성의 사용법을 알지 못하는 어린이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완전한 자유를 행사하지 못하지만, 결국은 이성적인 사리분별을 갖추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법(“하나님이 인류에게 준 공통의 규칙과 척도”:10절)을 알게 되기 마련이라고 로크는 보았습니다. 이처럼 자연상태를 이성적 사려분별을 갖춘 인간들이 사는 상태로 보았기 때문에, 로크의 자연상태는 인간 상호 간에 배려와 평등과 자유가 살아 숨 쉬는 평화의 상태입니다. 게다가 자연 상태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명, 자유, 자산에 대해 불가침의 권리를 지니고 있으며 일단 여기서 로크에게 소유권이란 정치사회 이전에 주어진 자연권이라는 대목에 주목을 하고 넘어간다. ‘정치권력=정부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원초적 권리를 국왕이 도대체 무슨 권리로 침해하느냐?’ 이게 로크의 절대군주에 대한 제1의 항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소유물을 침해하는 사람을 처벌할 자연권을 자연적으로(=당연히) 갖고 있습니다. ? 홉스가 자연 상태에 있는 인간을 덜 이성적이고 더 반(反)사회적이라고 보았다면, 로크는 더 이성적이고 훨씬 더 사회성을 지닌 존재로 보았습니다.
로크에 의하면, 인간들 중에는 이성이라는 자연법에 따르지 않는 일부 몰지각한 인간이 있습니다. (적대적 경쟁관계에 있는 집단은 언제나 서로를 ‘일부 몰지각한 넘들’이라고 부릅니다. 토리와 휘그의 명칭은 그런 표현의 잉글랜드 버전인 셈이지요).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 권력 하에 두고 그들의 자연권을 박탈하려고 시도합니다. 바야흐로 사악한 전쟁상태의 시작입니다. 자연권을 침해하고 자연상태를 위태롭게 한 침범자를 제재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정치사회/시민사회>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상태를 떠나서 함께 모여 하나의 정치사회(commonwealth=독립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신이 소유한 생명, 자유, 자산의 자연적 권리를 확고하게 지키고 공평무사한 재판권의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정부를 임명합니다. 로크는 이처럼 정부가 기존의 모든 권리를 수호할 목적으로 인민의 뜻에 따라서 창시된 것이라고 파악함으로써, 정부의 권력이란 <피치자의 동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자유주의적 사고의 지평을 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가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헛된 야망, 흉악한 소유욕, 사악한 탐욕, 아첨 등으로 인해권력을 남용하여 신탁에 반하는 행동을 하거나 입법부를 자의적으로 변경하여 인민들의 자연권을 훼손하거나 침해하려 들 위험이 있습니다. 무력을 내세워 법률에 대항하는 자들은, 전쟁상태로 되돌아가려 하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반란자(rebel)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들이 지닌 권위에 대한 명분, 그들 수중에 있는 무력의 유혹 그리고 그들 주위에 있는 아첨에 의해서 - 그러한 반란 행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그러한 해악을 방지하는 적절한 방법은 그러한 유혹을 가장 크게 느끼는 자들에게 그것이 지닌 위험과 부정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통치론 226절.
만일 사태가 이렇게 되면, 인간이 자기의 자연권을 도로 되찾고 전쟁의 신과 “하늘”(하늘도 자연이지요!)에 호소하며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로크는 주장합니다. 아니, 단지 주장하는 게 아니라 로크는 “그렇게 할 수 있음에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범죄이다”(218절)라고 잘라 말할 정도로 단호하게 역설합니다. 따라서 로크의 눈에, 월리엄 3세와 메리를 왕위에 오르도록 초청한 휘그당의 행위는 그와 같은 자연스러운 행위의 발동이자 (동양식으로 표현하면) 천지신명(天地神明)의 부름에 호응하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오, 휘그는 정당하고도 정당하도다(!)” 로크는 이렇게 주장한 셈입니다.
이상을 내용을 비유적으로 요약하면, 홉스는 사회를 원자들의 집합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원자(적 개인)들은 항상 충돌하고 까딱하면 상호간에 상대방을 산산조각 내려고 합니다. 따라서 충돌을 막아줄 외부의 강력한 힘(절대군주)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죠. 그러나 로크는 사회는 원자들의 집합이되, 원자들이 균형 잡힌 상태로 조절된 상태로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침입자가 있는 경우에 그것을 적절히 처리해서 상태를 안정시키는 역할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 정부가 그런 조정자와 안정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또는 적반하장(賊反荷杖)격으로 자신이 침입자가 되려 한다면, 그런 정부는 예방적으로든 사후적으로든 ‘때려 엎고’ 다른 정부를 세우야 합니다. 왜냐하면, 애당초 인민은 정부에게 권리를 양도한 것이 아니라 신탁한 것일 뿐이고, 정부는 신탁자의 뜻을 받들어야 모셔야 하는 수탁자(受託者)일 뿐이므로, 정부의 권력남용에 대한 인민의 저항과 정부의 타도는 결코 반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런 저항은 반역이기는커녕 당연할 뿐만 아니라 자명한 순리(順理)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로크는, 사회계약에 참여한 사람은 (동의의 산물인) 권력을 다시 특정한 인간에게 위임하는 신탁(trust)행위의 주체(신탁자)이자 수혜자이므로, 수탁인이 이 신탁에 역행한다면 (사회계약의 주체인) 인민이 거기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권리의 행사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로크는 지금부터 330년 전에, 이미 인민은 부당한 권력행사에 저항할 자유와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유는 누구에 의해서도 부인될 수 없다고 천명함으로써 로크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초석을 놓은 사상가로 추앙받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의 논리가 현실에서 수용되면서 남긴 결과가 지대한 덕분이기도 합니다. 즉 로크의 논리에 따라서 그 이후의 현실이 주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논리가 현실에 잘 부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8세기 후반에 자유주의가 영국의 주도적 이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현실적 여건이 무르익으면서 로크는 인간오성론을 쓴 철학자보다는 통치론의 저자라는 측면에서 더 유명세를 얻게 됩니다.)
3. 『통치론』독해 2 : 두텁게 읽기 - 시민사회의 기초로서 소유권 이론
로크는 생명, 자유, 자산을 소유물로 생각했으며 이를 재산이라는 표제어 아래에 포괄했습니다.(“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본래 타인의 침해와 공격으로부터 그의 재산(property), 곧 생명, 자유, 자산을 보존할 권력뿐만 아니라, 그 법을 위반한 사람을 심판하고, 처벌할 수 있는 권력도 동등하게 갖고 있다.”(87절)) 자유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상가가 정부 수립과 인권의 핵심에, 비유로서라도 재산을 놓았다는 사실은, 자유주의의 특성과 한계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로크가 소유권의 기초를 노동에서 구한, 저 유명한 “노동에 의한 소유”이론을 제시하게 된 직접적 계기도 로버트 필머의 주장에 대한 비판의 필요성이었습니다. 로버트 필머가 가부장제론 Patriarcha에서 제시한 주장은 국가는 가족의 자연적 위계질서의 연장이며, 정치적 의무는 아버지에 대한 복종의 의무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그는 성서의 역사서술을 근거로 시민사회와 정부의 발생사적 기원을 구성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i) 가족의 아버지가 그 자식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자연적 지배권”에서 “자연적 국가”로서의 “아버지의 정부”의 기초를 찾았고, ii)이러한 아버지 정부의 권위의 근거로 창세기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부여한 세상의 만물에 대한 “사적 지배권”을 들었습니다. 그는 소유권의 기원은 대지와 모든 생물에 대한 아담의 사적 지배권 속에 있다고 주장하여, 아담의 직계자손만이 소유하는 소유권에서 왕권의 근거를 찾았던 것이지요. 로크는 이런 필머에 대해 “만인”이 소유권의 주체이고, 따라서 또한 정치적 동의의 주체일 수 있다고 비판을 가합니다.
필머의 가부장제론에 대한 로크의 비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가족의 실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가족은 부부와 자녀만이 아니라 하인, 노예까지도 가족구성원으로 하는 가부장제적 대가족이었습니다. 유럽에서는 17세기까지 이런 가족 형태가 사회의 독립된 생산단위를 구성하고 있었는데, 가족 내에서는 <가장(家長)>만이 절대적인 권한을 갖는 경제적 처리권(소유권)의 유일한 주체였습니다. 당시 사용하던 ‘인민’이나 ‘개인’이라는 말도 실은 이와 같은 가족의 가장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며 시민사회에서의 교환-계약, 나아가서는 정치적 합의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도 <가장>뿐이었습니다(19세기 중엽까지는 선거권도 가장에게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필머의 가부장제론은 이런 당시 가족의 실태를 토대로 그것을 정치이론화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로크는, 통치론의 6장에서 소유권을 근거로 아내와 자녀라는 개개의 가족 구성원도 각기 독립된 소유권의 주체, 따라서 정치적 합의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로크는 자기보존, 소비의 필요성, 그리고 특히 노동이 재산권을 만들어낸다고(노동이 자연 상태에서 이루어지므로 재산권은 자연권이라고) 보았습니다. 실로 모든 사실의 사물에 상이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노동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향유하는 사물의 가치의 커다란 부분을 창출한다. … 자연의 사물은 공유(共有)로 주어지지만 인간은 그 자신의 인신, 행위 및 노동 의 소유주로서 자신 안에 소유권의 주된 기초가 되는 것을 지니고 있다. 통치론 40~44절(강조는 인용자)
그는 "모든 사람은 그 자신(person)이라는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그의 신체의 노동과 그의 손의 작업은 당연히 그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상의 광활한 대지에서 어느 특정 땅에 자기 소유의 노동을 투여한 사람은 그 산물에 대해서도 소유권을 갖는다. 사람은 자신의 노동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수렵과 채집을 하고, 농사를 짓거나 상업 활동을 한다. 따라서 그 결과물도 자신의 소유물이 된다>는 게 로크의 논리입니다.? 이처럼 로크에게 소유물이란, 자신(person=인격과 인신)의 투영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대상화, 객관화된 것이기 때문에 양도와 교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었죠.
그런데, 그가 자연 상태를 가정하면서 하인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도 눈길을 끌지만(로크가 이 점을 논증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점!) 정작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 볼 것은, 하인은 자신의 노동의 과실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로크의 발상입니다. 로크는 꼼꼼히 따지거나 치밀하게 재지 않고, 하인의 노동은 그들의 고용주가 소유한다는 사실을 당연으로 받아들입니다. 로크의 이런 관념이 유럽의 18세기 부르주아들의 소유의 세계관을 ‘엿보게’해 주는 창(窓)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는 나의 노동을 소유하기 때문에 나는 <나의 노동>과 <노동의 산물>에 대해 배타적 소유권을 갖는다. 그래서 그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있다. 소유권은 재산(소유)과 함께 가는 것이지 노동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논리 위에서 로크는 노동에 대한 권리는 그 ‘노동을 하는’ 주체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노동을 소유한’ 주인에게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로크는 5장에서 화폐형태로서의 재산의 축적과 그 귀결로서 불평등을 정당화합니다. 로크는 노동에 의한 소유의 이론을 제시할 때 처음에는 자연법에 의거한 제한조항을 기술한다. 1) 자신의 노동에 의한 것이어야 하며 2) 타인에게도 충분한 여지를 남겨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제한과 3)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제한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화폐>형태로서의 부의 <축적-소유>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곧 해제된다.
그리고 생존에 필요한 이상으로 소유를 증대하는 근거로 화폐의 발명-사용 및 교환경제의 성립에서 찾습니다. 썩지 않는 화폐의 발명은 사람들에게 소유물을 지속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불균등하고 불평등한 사유재산제와 같은 사물의 분배가 이루어지게 된 것도 인간이 금과 은에 가치를 부여하고 화폐의 사용에 암묵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이다. 통치론 48~50절
즉 그는 노동과 화폐의 이름으로 소유의 획득, 증대, 불평등을 정당화하는데, 이것은 재산의 획득과 증대의 자유를 추구하던 당시 근대적 부르주아의 입장에 부응하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소유가 증대하고 사회의 각 구성원 상호 간에 소유를 교환하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불평등이 심화되면, 당연히 사람들 사이에서는 소유를 둘러싼 투쟁도 격화되고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정당한’ 노동의 산물을 보호하고 소유물을 교환하는 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생겨납니다. 즉 교환=상업 활동을 유지, 보장하기 위한 법과 그것의 준수를 강제할 수 있는 기관으로서 정부의 설립이 필요하게 되는 거지요. 여기에서 성립하는 것이, 로크가 말하는 “정치사회로서의 시민사회”입니다. 로크에게 있어서 ‘정치사회로서의 시민사회’란, 각자의 소유를 보호하고 교환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동의에 기초하여 인위적으로 구성한 것입니다. 이처럼 로크에게 있어서 법률의 필요 근거는 소유의 증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로크의 주장을 뒤집어 정리하면, 우리들이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의 부를 소유하려면 화폐와 상업(교환)이 필수적이며, 화폐와 상업이 없는 나라에서는 아무리 생산해도 소유를 확대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생산력이 아무리 증대해도 화폐와 그것에 매개된 상업교역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면 부의 증대는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맙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로크의 사상에는 농업생산력의 상승을 전제로 하면서도 그것과는 단계가 다른 상품교환사회가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당시 잉글랜드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저항권을 다시 읽으면, <소유를 자유롭게 획득하는 활동>과 <그 성과의 자유로운 향유>를 방해하는 전제권력에 대항하여 자유로운 정부를 수립하려는 요구가 곧 저항권으로 정당화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로크는 정부가(군주가) 국민의 신탁에 반하여 정치사회의 목적인 “인민의 소유권” 보호를 방기하거나 그것을 침해하는 것은, 그 정부 자체가 “반역”을 일으켜서 국민과의 투쟁을 초래한 것이라고 파악함으로써 인민의 저항권을 당연히 행사해야 하는 하나의 권리(權利)로서 정당화하였습니다. 로크에게 소유권은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가지고 있었던 일종의 선(先)정치적 권리입니다. 로크는, 인간은 소유권을 가지고 시민사회에 들어왔고, 누구에게 양도하지도 않았다고 간주하고 소유권의 보호를 정치사회 결성의 핵심으로 부각시켰습니다(정치권력은… 재산을 규제하고 보존할 목적으로:3절). 전유(專有)는 성격상 개별적이지만 그것을 유효한 권리로 전환시키는 인정은 사회적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로크적 소유권은 사회적 제도이며, 정치질서가 아니라 사회와 동일시될 수 있습니다. 정치질서는 다분히 소유권이라는 사회적 제도에 의존하는 것이 됩니다. 즉 정치적 명령에 복종한다는 구성원들의 약속이 “정치적 계약”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소유권이라는 사회적 제도를 통해서 유효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로크는 ‘각각의 세대가 자유롭게 정치사회를 재구성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루면서도 재산상속제도를 근거로 해법을 제시합니다. 어떤 개인이 상속재산을 받아들였을 때, 그의 행위는 정치사회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유산을 향유하는 것은 법이 제공하는 보호에 의존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방식으로 로크에게 있어서 정치사회의 연속성은 경제적 소유의 영속화와 연결됨으로써만 확보됩니다. 셀던 윌린, 강정인, 이지윤 옮김, 정치와 비전(후마니타스), pp. 189-191.
따라서 로크는 소유권을, 사람들로 하여금 묵묵히 정치적으로 동의에 나서도록 강제하는 수단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다(부의 상속=재산을 포기하고 사회를 떠날 자유를 택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로크는 소유권 이론을 토대로 17세기 소유적 시장사회(possessive market society)의 형성기에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 사상가라는 평가(C. B. 맥퍼슨)가 나왔습니다.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수정주의’ 반론은, 그의 소유권 이론은 무제한적 재산축적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절대군주와 부패한 대의기구의 침해>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며(소유권 이론을 제시한 목적의 제한성), 그의 소유권 개념은 단지 재산축적의 자유만이 아니라 종교적 ? 시민적 자유를 포함하는 오늘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함의를 지닌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이에 대해서 다시, 수정주의 반론의 타당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로크의 사상에는 분명히 자본주의적 소유를 정당화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재반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소유권에 대한 로크의 강조가 어느 ‘정도’였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로크에게 자유란 <자기 자신과 자신의 것인 소유물에 대한 지배권>으로 표현되고, 재산(생명, 자유, 자산을 포함하는)은 곧 자유의 외적 현시(external manifestation)라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입니다. 소유권에 대한 로크의 해석은, 로크 사후(死後)인 18~19세기에 자본주의적 질서와 유산계급(재산소유자)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논거로 폭넓게 (미국과 프랑스에서까지) 수용되었습니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로크 이후의 역사는, 자유를 그 자신의 소유물로 파악하게 되면 그 다음에 한 개인의 자유의 크기는 (양화(量化)하기 쉽기 때문에 확연히 드러나는) 그가 가진 재산의 크기에 의해 평가된다는 것을 예시해주는 사례집과도 같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해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한 근대 유산계급에게 로크는 위대한 사상가이어야만 했습니다. 로크의 명성은 그의 탁월한 사유방식보다는 훌륭한 결과를 가져온 업적에 따른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정치와 비전 p. 183
4. 기본개념(자연상태, 사회계약, 자유, 대의제)으로 정리하기
자연상태
로크의 자연상태는 <일종의 사회상태>입니다. 왜 그런가? 개인은 자연상태에서 소유권을 갖고 있다는 로크의 주장에서부터 출발해 보지요. 소유권을 갖고 있다는 것은, 권리가 개인들 간에 상호 인정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권리가 인정된다는 것은 타인의 동의와 용인을 필요로 하는 일이므로, 로크의 자연 상태란 이미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사회)을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홉스의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철저히 개별적 존재로 살아가는 데 비해) 로크의 자연 상태는 부모-자식, 주인과 하인의 관계로 이루어진 이러저러한 사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크의 자연 상태는 단순히 (시민)사회와 대비되는 <사회 이전의 상태>가 아니라 ‘정치사회’와 대비되는 <정치사회 이전의 상태>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지영, 홉스와 로크(김영사) p.120. 이하의 내용은 이 책의 4장과 5장의 내용에 의지하여 작성한 것임을 밝혀 둔다. 좀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분은 위 책과, 서양근대정치사상사에 실린 같은 저자의 논문(?존 로크 : 자유주의의 사상적 토대), 그리고 ?자유주의와 근대 민주주의 국가-명예혁명의 정치사상?(한국정치학회보, 45집 1호)를 보시와요.
그렇다면 “사회와 정치사회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는데요, 이에 대해 로크는 권력의 성격 차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즉 가족사회에서 행사되는 권력과 정치사회에서 발휘되는 권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법률의 제정과 집행, 공권력의 사용 등의 정치권력은 오직 위정자(magistrate)만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크의 자연 상태’에서 개인은 이런저런 관계를 맺고 있지만, 거기에는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정자, 다시 말해 “권위를 가진 공통된 재판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치사회와 다르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정치사회로 진입하는 이유는 엿볼 수 있습니다(123절, 127절). 홉스는 폭력적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인간의 자연 상태를 특징짓는 힘으로 파악하고 그것이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명예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반면에, 로크는 자연 상태에서 발생하는 불안과 위험은 권리들의 충돌가능성과 무엇보다도 그것을 조정할 권위의 부재로 인한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인민들은 스스로의 동의에 의해서(112절)” 법률을 제정하고, 그것을 공평무사하게 집행할 재판관, 그리고 그 집행을 적절하게 확보해주는 권력을 지닌 “하나의 정치체”를 제정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로크적 의미에서 구성원 모두의 동의에 의해서 제정된 입법권, 그 입법권이 제정하고 전체 구성원에게 적용되는 법률, 공통의 재판관과 공권력을 지닌 “하나의 정치체”를 이루고 있지 않은 모든 상태는 다 자연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크는 자연상태를 과거에는 물론, 현재에도 장차 미래에도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국제관계가 바로 이런 의미의 자연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정치체”로서 공동체는 계약에 동의한 당사자들의 집단이므로 그것과 개별구성원, 혹은 공동체가 권한을 위임한 대표와 개인들 간에 어떠한 위계적 관계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구성원 개인의 동의와 위임을 기원으로 하는 공동체 내의 입법권(자)와 집행권(자)은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하는 지배자가 아니라 계약의 직접적인 구속을 받으면서 맡겨진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일종의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로크의 개인은 계약 이후에도 평등한 지위와 자유를 잃지 않습니다. 나 자신의 동의가 없는 한 어느 누구도 나를 정당하게 지배할 수가 없고, 또 나는 거기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원칙에서 보면, 현실세계에서 경험하게 되는 지배-복종이란 결국 내가 나를 지배하고 또 내가 나에게 복종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회계약과 통치계약
사실, 로크나 홉스는, 루소와 달리 “‘사회계약”이라는 말을 명시적으로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그들이 사회(/국가)의 성립을 자연 상태의 개인이 맺는 계약으로 설명한다는 점에서, 즉 그들이 말하는 계약이란 게 사회를 창출하는 계약이라는 점에서, 통상 그들을 사회계약론자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물리적 시간의 한계와 집약적 논의의 효용성을 고려하여, 사회계약과 관련해서는 루소 편에서 보다 자세히 다룬다. 여기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서 홉스, 로크, 루소가 사회계약을 통해 구현하려 한 통치체제만을 간단히 비교-정리한다. 사회계약론을 통해서 홉스가 <리바이어던에 의한 절대 권력의 통치>를 구상했고, 루소가 <인민의 자치공동체>를 제안했던 데 비해 로크는 <인민의 대표에 의한 통치체제>를 제시했다.
그런데 사회계약은 사실 두 개의 관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사회계약과 소위 통치계약(통치행위를 발생시키는 계약, 혹은 정부를 구성하는 계약=정부계약)이 그것입니다. 사회계약의 당사자는 구성원 각자인 반면에, 통치계약의 당사자는 통치자와 신민이 됩니다. 유의할 점은 사회를 이루어 살기로 한 계약(사회계약)이 필연적으로 (즉, 자연적으로) 통치계약을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회계약의 결과로 수립된 공동체가 통치자와 신민의 구분 없이 더불어 지배하고 지배받으며 자치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면 계약 당사자들 간에 굳이 통치계약을 맺을 필요는 없습니다(루소의 사회계약론이 그렇지요). 그렇지만 통치계약은 개념상 사회계약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통치계약이란 오로지 통치행위와 그것에 필수적인 정치권력을 창출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통치계약이 성립되려면, 먼저 잠재적 신민집단 및 통치의 ‘부담’을 떠안을 잠재적 통치자의 존재가 계약이전에 존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통상 로크의 사회계약론이라고 부르지만, 로크에게 사회계약은 이 두 관념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로크는 만장일치의 사회계약을 통해서 일단 형성된 공동체가 다수의 의지와 결정에 따라 그 공동체를 움직일 정부를 수탁자로 임명하고 공동체의 권위를 위임하여 통치를 행하도록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사회계약 이후 위임과 신탁에 의한 입법부 및 정부의 구성을 재차 설명하고 있는데, 이때의 위임과 신탁은 일종의 통치계약입니다. 요컨대 로크의 사회계약론은, 자연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사회계약과는 별도로, 사회계약 이후에 혹은 적어도 거의 동시에 <공동체 구성원>과 <그들의 대표> 사이에 맺어지는 이른바 통치계약의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관념이 로크의 사상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통치계약이라는 관념은 통치자(혹은 정부)를 불리하게 구속합니다. 이런 통치의 신탁에는 이론상 3명의 당사자, 즉 통치를 맡긴 <신탁자=인민>, <신탁자의 수혜자=이것도 인민이다>, 그리고 <수탁자=정부>가 전제됩니다. 수탁자는 신탁의 수혜자에 대해 일정한 의무를 이행하기로 하는 계약을 신탁자와 체결합니다. 그러나 신탁의 수혜자는 계약의 당사자는 아니다. 따라서 신탁의 수혜자에 관한 한 수탁자는 오직 의무만 질뿐이지요. 반면에 수혜자는 수탁자에 대해 권리만 지닐 뿐 아무런 의무도 지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탁으로서 통치계약은 통치를 담당하는 쪽의 일방적인 의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정부의 활동과 권한을 엄격하게 제한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로크의 사상이 미국에서 널리 수용되었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미국에서 <총기규제법안>에 반대하는 목소리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초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탁자인 동시에 신탁의 수혜자인 공동체는 신탁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정부에 대해서 그 존재를 원천적으로 무효화하는 데까지 책임을 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입법권과 국왕대권의 충돌에 관한 그의 설명에서도 확인됩니다.
“법률의 지시가 없어도, 심지어 법률을 위반하면서까지” 국왕이 행사할 수 있는 국왕대권에 관한 14장의 언급은, 흔히 입법권에 대한 로크의 관점과 상충되지 않느냐는 질문을 낳습니다. 로크는 법이 예견할 수 없거나 규정하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 군주가 정부의 신탁과 목적에 적합하게 사용하는 대권은 충분히 용인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크가 보기에 자기 시대 제임스 2세의 경우처럼) 그렇지 않은 대권 행사는 제한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여기서, 위에 강조한 부분이 대권행사를 제약 혹은 제한하는 기준이 됩니다. 로크의 강조점은 입법권에 의한 국왕대권의 제한/제약에 놓여 있습니다.
대권이란 군주가 재량껏 사용하는 권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대권 자체도 입법권으로 내용을 명확히 규정되고 제한되어야 합니다. 대권 행사의 목적이 [<인민의 복지>=<공공선>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국왕은 대권을 많이 사용해도 인민이 용인할 수 있지만, 그 목적이 [<인민의 복지>=<공공선>을 침해]하는 것이라면 묵시적으로 허용되는 권력은 제한되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로크 당대에는 국왕대권(집행권)과 입법권이 충돌할 경우에 대비하여 명문화된 규정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충돌 시 지상의 재판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로크는 말하고 있지만, 그의 논지를 연장해 보면, 양자의 분쟁은 대체로 “대권이 아닌 것을 대권”이라고 주장하는 군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대권에 관한 로크의 특징적 관점은, 인민의 “자기의 보존과 자유”를 파괴하는 대권은 잘못된 대권이며 따라서 공공선을 지향하는 (상위의) 입법권에 의해서 마땅히 규정되고 제한되어야 하는 (하위의) 집행권으로 볼 수 있다는 데 잘 드러나 있습니다.(이상은 14장)
이런 로크의 논리를, 현대적 사례로 설명하자면, 헌법과 법률이 충돌해서 모순이 생긴 경우에는 상위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크의 정치 체제는 그 내적 권력 간의 모순성으로 인해, 사회적 갈등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는 내적 권력의 모순성”이란 군주의 자의적인 대권행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논리적으로 폭로하고, 그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권이 아니라 입법권(=공공선의 보존이란 목적을 추구하는 국가권력)이 우위에 놓여야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인민의 동의와 계약에 의해 성립된 입법권으로 대권을 제약하려는 것이 로크의 의도인 것이죠. 통치계약이란 곧 대권제약이며 ‘왕의 의회’가 아니라 ‘의회 속의 왕(Prerogative in Parliament)’이라는 점을 분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만약 (현존하는) 입법부마저도 국왕의 잘못된 대권 행사에 야합하고 동조하는 경우에는, 인민이 저항권을 발동하여 새로운 입법부를 설립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 것입니다(222절). 로크에게 있어서, 집행권과 입법권은 현상적으로 충돌할 수 있지만, 그런 충돌을 해결하는 원리는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인민이 동의와 계약을 통해서 통치계약을 맺게 된 애초의 목적에 의해서 정당/부당이 결정되어야 하며, 결정권은 원리적으로 인민 개개인에게 있다!> 이런 원리인 것이죠.
로크의 자유 개념
로크에게 자유란 제 멋대로 하는 방종이 아닙니다. 자유를 개인의 무제약적인 욕망 추구를 장려하는 이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로크의 관점에서만 보자면, 자유로운 인간이란 그 자신의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인간이며, 이성(의 능력)이란 영원한 구원을 찾고 얻을 수 있도록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존재원리이자 본성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질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에 대한 가정(상상-사상)은 곧 부자유하고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과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로크 당대의 맥락에서 보면, “평등한 자유를 지닌 모든 인간의 동의에 의한 정부수립”이라는 원리의 제시는, 결국 군주의 권력이 가부장권으로 이해되고, 짐이 곧 국가라는 발상이 신의 명령으로 정당화되던 그 자신의 시대에 대한 도전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물론, 로크가 사용한 “모든 인간”이란 표현은, 실제로는 일정 정도의 재산을 소유한 자를 뜻했습니다. 이것을 놓고 로크가 인간의 범주에 일정한 한계를 두었다고 비판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주에 어떤 제한(그것이 재산이든, 교육수준이든, 외모든, 인격이든 혹은 이성이든 간에)을 설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사람을 바라보기란 오늘날에도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까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이 큰 울림을 주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인 상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렇다면, 로크의 주장과 관련하여 생산적인 논의를 낳을 수 있는 핵심은, 제한 자체를 두었다는 ‘지적질’이 아니라 어떤 제한이 다른 어떤 제한보다 과연 보편적인지-인간적인지를 ‘따지는 일’일 겁니다.
로크의 대의제(代議制, Representation)는 민주적인가
정부의 형태는 입법권이 누구에게 맡겨지는가(=신탁되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로크에게 대의제는 군주정, 과두정은 물론 민주정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주정이란 입법권이 보다 많은 다수에게 맡겨지는 것일 뿐 대의제(=대표에 의한 통치)라는 성격은 변하지 않습니다. 즉 직접 참여냐 대표에 의한 참여냐 하는 주권행사의 방식에서 보면, (즉 루소적 관점에서 보면) 로크의 아이디어는 ‘민주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적인’의 관건이 입법의 불평부당성과 보편성에 있다고 한다면, 즉 지배와 복종이 인민들 사이에 번갈아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추첨제와 같은) 확보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로크의 대의제는 민주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기실, 로크가 두려워한 것은 입법권과 집행권이 한 사람(집단)의 손에 집중되는 것보다 그것의 지속적인 행사였습니다. 따라서 로크는 권력분립(‘삼권분립’)보다는 공동체 다양한 성원들이 “적법하게 소집”되어 번갈아 법을 제정/개정하는 일에 참여하고, 그럼으로써 누구든 법을 제정하는 입법자인 동시에 그 법에 복종하는 신민이 되도록 하는 것을 자신의 대의제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물론 <“적법하게 소집”하는 방식>입니다. 로크는 그런 방식이 부재(不在)한 상태에서 그것이 필요하고 타당하다는 것을 강조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그런 방식의 하나가 제도화된 상태에서 그것의 구체적 운영에 따른 문제점이나 모순을 그가 말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온당한 비판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의 진술의 무게중심은, <입법권이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에 고정되는 경우(불균등하게 분배되거나 절대 다수 인민의 배제를 유발하는 경우)에는 대표선출방식 자체를 인민들에 의해, 인민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럴 권리가 인민에게 있다>는 주장에 놓여 있습니다.
5. 로크의 『통치론』대한 마무리 단상(短想)
휘그는 1688-89년의 중대한 사건을 통해서 잉글랜드 국민들의 ‘정당하고 천부적인 권리들’을 보존할 수 있었고, 국가가 ‘노예상태와 파멸’에 빠지는 것을 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임스 2세의 전제정치에 맞서 휘그당은 국민의 전통적 권리를 성공적으로 지켜냈다고 자부했습니다. 잉글랜드를 위협한 제임스 2세와 토리의 일련의 공세에 맞섰던 여타의 휘그당원들과 마찬가지로, 로크도 <폭정에 대한 저항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제시할 필요성>과, <이런 이론이 1640년대의 소요나 1685년 먼머스 반란과 같은 대중소요를 고무하지 않도록 해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고심했습니다. 그런데, 17세기 잉글랜드의 정치적 갈등과 논쟁의 이면에는 자유와 재산의 관계가 깔려 있었습니다. 17세기를 거치면서 잉글랜드에서는 재산이 정치적 권리와 자유를 누리는 핵심적 자격요건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장 중요한 ‘스펙’이 된 셈이지요. 17세기 잉글랜드에서는 “자유 국민은 태어나면서부터 그들의 땅에 대해 상속 자격이 있는 것처럼, 그들이 종사하고 그것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산업 활동의 자유에 대해서도 그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태어난 영국인 free born Englishmen”으로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할 권리만이 아니라 국가 자체를 통제할 권리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앤서니 아블라스터, 조기제 역, 서구 자유주의의 융성과 쇠퇴(나남) pp. 295-296. 이하의 다른 인용문도 이 책에서 인용한 것임
여기서 문제는 <누가 태생적 자유인 혹은 자유국민의 범주에 들어가는가>입니다. 전체 여성이 제외되었음은 물론이며 하인과 도제들은 그들의 주인에 너무 의존하기 때문에 자유인이 될 수 없다는 게 당시의 일반적 믿음이었습니다. 임금노동은 자유의 상실을 포함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더 많은 사람들이 빈곤과 의존상태로 밀려나는 상황에서 그들이 정치참여의 권한을 갖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의존 때문이라는 주장이 전개되어 유산계급의 호응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풍토에서는 빈민이 정치적 국가의 구성원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시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노비가 과거시험을 볼 수 없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요. 다음의 주장을 보십시오. “사람이 가난하고 비열할수록 숨 쉬는 일에 관심을 가질 뿐, 공공의 이익에 대해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1565년, Sir Thomas Smith)." 결국, 재산이 개인의 독립에 불가결한 기초라는 주장에서(지금 여기서는 그런 주장이 웃기는 소리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요!) 보면 무산자나 빈민은 자유인과 같은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급진주의자 격인 공화주의자들도 정부체제의 안정성은 정부가 사회의 실제적 재산분배를 반영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재산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탱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재산은 이제 국민들에게 있습니다. 정부의 통치는 거기에 있어야 합니다. 모든 정부는 재산 위에 수립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빈민들이 정부를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1659, Captain Adam Baynes)"
로크도 재산권을 중시하는 17세기 후반 잉글랜드의 지적 분위기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잉글랜드 내전(/영국혁명)이나 명예혁명은 소유권, 즉 사유재산의 권리와 그것을 보호해줄 정치권력의 수립을 향한 움직임이었고, 자유를 재산과 번영 둘 다와 습관적으로 연계시키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사실 로크 식의 자유주의의 기본 방침은 신중과 타협입니다. 로크에 대한 나의 평가가 ‘관용’적이지 못하다고요? 그렇다면, 휘그 역사의 위대한 전통을 계승하였고, “1688년의 혁명을 영국인이 행한 가장 위대한 일”이라고 평가한 액튼 경의 평가를 보십시오. “새 당의 핵심은 타협이다. 그들은 다소 실망스럽다. 중도노선을 너무 좋아한다. 그들의 철학은, (아니) 그보다 그들의 철학자 존 로크는, 항상 온당하고 분별 있다. 그러나 (술에) 물탄 듯하고 느리고 빈약하다.” 앞의 책, p. 300에서 재인용. 한편, 오늘날, 로크의 소유권 이론의 내적 함의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이론이 아메리카 인디언을 상대로 영국 이주민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이론이라는 사실이다. 즉, 제국주의적 팽창을 옹호하고 다분히 서구 중심적 시각을 견지한다는 것이다. 토지소유권을 발생시키는 노동을 특정한 형태(경작과 울타리치기)로 규정하고 이런 방식으로 이용되지 않는 땅은 ‘비어 있는 황무지’와 마찬가지라고 본 것은, 서구 중심적 관점에서 인디언들 특유의 노동방식과 재산관념을 부정하고 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을 정당화한 전형적인 예라 할만 하다.
물론, 로크의 통치론은 우리가 익히 정치학 관련 교재에서 읽었을 법한, (그러고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음직하기에 상술하지 않은) 여러 긍정적 유산을 남겼습니다. 이를테면, 로크는 통치론을 통해서 자연 상태로부터 정치사회의 기원을 설명함으로써 국가는 가족의 자연적 위계체제의 연장이라는 주장을 ‘퇴출’시켰고, 피치자의 ‘동의와 계약에 의한 정부’ 수립의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이후 정치권력은 통치자의 소유물이 아니며 개인은 오직 자신의 자유롭고 독립적인 동의에 의해서만 지배를 받는다는 자유주의의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정치권력이 있어서 사회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있어 정치권력이 성립될 수 있다는 근대적 사고도 로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부는 사회로부터의 수탁자(≠수권자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에 불과하며 인간에게는 부당한 권력에 대해서는 저항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는 저항권의 정당성을 천명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로크의 빛나는 여러 사유들 가운데 로크의 자유에 대한 강조에 한결 더 눈길이 갑니다. 거기에는, 저마다의 개인이 지배와 통치의 대상(對象)인 신민(臣民)이 아니라 지배와 통치를 신탁하는 주체(主體)인 시민(市民)일 때 자유로운 인간이다, 라는 2013년 지금 여기에서 새삼 의미 있게 느껴지는 전언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로크의 견해나 로크에 대한 해석에 동의하든 않든, 로크의 통치론은 이런 식으로 ‘지금 여기’ 내가 처한 역사적 상황 읽기를 채근한다는 점에서 고전이라 불러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통치론이 독자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도 330년 전의 (유럽) 사회와 오늘의 (한국) 사회를 겹 대어 읽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켰기를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