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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덕을 조소하는 욕망의 승리
: 베네치아 카니발과 초창기 오페라

고대 유럽인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나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여러 신들을 섬겼다. 문학과 음악과 춤이 하나로 어우러진 고대 그리스 연극은 신에게 바치는 제사이자 인간을 위한 축제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서유럽을 지배하게 되면서 신들은 점차 지위를 잃었고, 중세의 음악, 미술, 연극은 기독교 유일신의 영광을 찬미하는 일을 최고의 가치로 정했다.
자연과학과 이성의 발전에 힘입어 예술이 다시 인간을 위한 것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대의 절정기에 ‘오페라’라는 새로운 예술이 태어났다.

최초의 오페라는 1600년경 피렌체 예술가와 귀족들의 스터디그룹 ‘카메라타’에서 제작되었다. 고대 그리스 연극 예술을 복원할 의도로 실험해본 종합예술이자 총체 예술이 오페라였다. 그리스 비극을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에, 극의 내용도 신화나 영웅담에서 가져왔다. 자신을 신화 속의 신이나 영웅과 동일시했던 당시 귀족들은 대관식이나 결혼식 축하연의 일부로 이 오페라를 공연하면서 평민들까지 궁에 초대해 천부(天賦)의 신분을 과시했다. 눈이 휘둥그래질 화려하고 사치스런 공연을 보여주며, “우리(귀족)는 너희(평민)들과는 종자부터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니 신분제도는 영원히 유지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평민들을 세뇌했던 것이다.

볼거리에 굶주려 있던 평민들은 귀족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오페라에 빠져들었다. 그러자 머리 좋은 장사꾼들은 오페라로 큰돈을 벌 가능성을 예감하고, 오페라 극장을 짓기 시작했다. 귀족의 궁정에 초대받아 가지 않더라도 입장료만 내면 얼마든지 오페라를 볼 수 있는 극장들이 탄생한 것이다. 1637년 베네치아에서 문을 연 최초의 공공 오페라 극장 ‘산 카시아노’는 당대 사람들이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을 대단한 특수효과를 사용해 관객을 사로잡았다. 평민들이 이런 노래극의 매력에 중독되자 오페라 극장은 빠른 속도로 늘어갔다. 귀족 계급의 실험 예술로 끝나버릴 수도 있었던 오페라라는 예술을 4백 년 넘는 세월 동안 살아남을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공공 극장이었으며 이 극장을 사랑한 평민 관객들이었다.

17세기 평민 수공업자들에게 오페라란 오늘날의 TV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예술성보다는 오락성에 방점이 있었다는 의미다. 초창기 오페라 극장은 오늘날처럼 여름 빼고는 일 년 내내 공연이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베네치아 카니발 시즌과 가을철 한때만 공연이 열렸다. 카니발 시즌은 바로 오페라 시즌이었고, 이때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나 프란체스코 카발리 같은 초창기 거장들의 신작 오페라가 무대에 올랐다.

‘고기’를 뜻하는 라틴어 단어 ‘카르네’와 ‘작별하다’라는 뜻의 ‘발레’가 합쳐져(carne+vale) ‘카니발’이라는 단어가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며 금육, 금식, 부부관계 금지 등의 금욕 생활을 해야 하는 사순절로 들어가기 전에 ‘재의 수요일’ 전날인 ‘마르디 그라’(mardi gras. 기름진 화요일)까지 마음껏 먹고 마시고 육체의 기쁨을 누리는 축제다.

억압과 금지가 강할수록 해방과 일탈의 환희는 폭발적이다. 교회 권력과 사회 규범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 깊숙하게 침투해 사생활까지 지배했던 위계 사회의 시대, 전쟁이나 전염병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과 위협의 시대에 카니발은 중요한 출구였다. 왕이 거지가 되고 거지가 왕이 되는 상하 관계의 전도를 통해 이 ‘뒤집힌 세계’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해방감을 알려주었다. 교회가 정한 공식적인 축제들은 세계 질서의 유지를 추구했지만, 카니발은 온갖 질서와 규범을 과감하게 무너뜨리면서 진정성 있는 인간관계를 추구했다. 그러나 카니발 시즌은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고 그 시기가 지나면 모두 다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했기 때문에, 카니발 역시 지배 계급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는 보수적 정치 수단의 일종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지 않는 세속적인 예술’이라는 이유로 로마 교황청의 미움을 샀던 오페라라는 예술이 바로 이런 카니발 시즌에 공연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종교와 사회의 억압으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된 본능적 욕망의 에너지는 ‘사회 규범을 무시한 방종한 사랑’이라는 형태로 무대를 채웠고, 오페라 극장을 메운 관객들은 미덕을 조소하는 욕망의 승리에 열광했다.

이탈리아 크레모나에서 태어난 작곡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는 오페라 탄생 초창기에 <오르페오>(1607)와 <아리아나>(1608) 같은 작품으로 장르의 수준을 높였고, 베네치아에 공공 오페라 극장이 세워진 이후 다시 <율리시즈의 귀향>(1640), <포페아의 대관(戴冠)>(1642) 같은 성숙한 걸작을 발표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 수에토니우스의 역사서 <12명의 케사르>, 디오 카시우스의 <로마사>, 작자 미상의 희곡 <옥타비아> 등을 원작으로 삼아 조반니 부세넬로(Giovanni Francesco Busenello, 1598-1659)가 대본을 쓴 오페라 <포페아의 대관>은 1642-1643년간 베네치아 카니발 시즌에 초연되었다. AD 60년, 네로 황제 치하의 로마 제국을 배경으로 해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최초로 오페라에 등장시킨 작품이다.

로마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황후 아그리피나는 전남편 사이에서 낳아 데리고 온 아들 네로(A.D. 37-68)가 17세 때 클라우디우스 황제를 독살하고 아들을 황제로 즉위시켰다. 독살되기 전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자신의 딸 옥타비아를 네로와 결혼시켰는데, 그 후 네로는 자신과 절친한 귀족 오토의 아내 포페아에게 반해 옥타비아를 암살하고 포페아와 재혼한다.
황후가 되려는 야망에 불탔던 포페아는 적극적으로 네로를 유혹해 그기 옥타비아를 버리고 자신을 택하게 만든다.

이 소재로 몬테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 <포페아의 대관>의 프롤로그 장면에서는 의인화된 ‘행운’과 ‘미덕’이 서로 잘났다고 언쟁을 벌인다. 그러나 사랑의 신 에로스는 이제부터 펼쳐질 네로와 포페아의 이야기에서 보듯 자신이 바로 세상을 다스리는 주인이라고 큰소리를 친다. 네로와 포페아가 저지른 일은 분명한 악행이지만, 카니발의 최고 가치는 본능을 존중하는 에로스의 성취였기 때문에 ‘욕망의 일방통행’인 이들의 사랑은 합리화되었고, 행위에 대한 도덕적 평가는 사라졌다.


<포페아의 대관>은 실제 역사의 주인공들 외에 병사, 유모, 하녀 등의 평민 계급을 오페라에 등장시켜 당시 공공 극장을 찾은 수많은 평민 관객을 배려했다. 특히 포페아의 유모 아르날타의 아리아에는 신분과 계급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담겨 있다.

몬테베르디의 제자이며 동시대 작곡가로 오페라 41편을 발표한 카발리(Francesco Cavalli, 1602~1676)는 놀라운 극적 효과와 음악적 수준에 도달해 17세기 베네치아 오페라 발전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카니발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은 그리스 신화의 ‘메데이아’ 이야기를 패러디한 <지아소네>(이아손)로, 1649년 산 카시아노 극장에서 초연했다. 소재는 신화에서 가져왔지만 오페라의 실제 내용은 16-17세기 연애와 결혼관을 보여준다. 방만한 성적 유희, 연애와 결혼에 관련한 남녀의 성 역할('남자의 목표는 여성의 몸, 여자의 목표는 남성의 지갑')을 표현하고 있는 대본은 바로크 오페라의 특징인 ‘과장과 허장성세’에 유희적 성격을 가미했다.

이 작품 역시 욕망의 사랑에 면죄부를 주며 카니발 시즌의 오페라 극장 관객을 만족시키는 사명에 충실했다. 여기서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 버림받고 절망하는 본처가 아니라 탁월한 성적 매력으로 본처에게서 남편 이아손을 빼앗아간 요부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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