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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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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의 시인 백석

박선욱(시인 . 동화작가)


시단에 내던진 포탄 『사슴』

1936년 1월 20일, 백석은 경성 선광인쇄주식회사에서 100부 한정판 시집 『사슴』을 펴냈다. 조선 한지로 표지를 두른 양장본 시집은 본문 종이 또한 한지로 마감하여 고상한 격조를 자아냈다. 한국문학사에 기념비적 좌표를 남긴 이 걸출한 시집이 발간된 후 당대의 비평계는 찬탄과 격동으로 술렁였다. 단편소설 「그 모와 아들」이 신년 현상 공모에 당선되어 소설가로 등단한 지 6년 만이고, 시 <정주성>을 발표하여 시인으로서 첫 발을 내디딘 지 한 해 뒤의 일이었다.

1월 29일, 김기림은 <조선일보>에 실린 서평에서 시집 『사슴』의 출간을 두고 “새해 첫머리에 시단에 내던진 포탄”이라고 극찬했다. 그는 이 글에서, 훤칠한 미남자인 모던보이 백석이 출현하는 순간 그곳은 곧 예술가들의 도시인 파리의 몽파르나스처럼 바뀌는 환각에 사로잡힌다고 고백했다. 박용철은 『조광』 4월호에서 “백석의 시집 『사슴』”을 통해 “모어(母語)의 위대한 힘을 깨닫게 된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임화와 오장환 등이 백석을 비판했지만, 이효석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은 백석의 시 세계를 긍정해 마지않았다. 시집 『사슴』 출간 이후 백석은 문단의 기린아로 우뚝 서게 되었다.

식민지 조국은 커다란 감옥이었다. 가슴 속에서 죽순처럼 자라나는 시만이 질식할 듯한 나날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었다. 백석은 시 속에 허물어져가는 성터를, 사람들의 육성과 흥정이 오가는 시골 장터를 되살려 놓았다. 북방 민족의 정취가 서린 깊은 산골을, 싱싱한 갯내음 펄떡거리는 어촌의 활기찬 풍경을 손에 잡힐 듯이 그려 놓았다. 백석 시에 찍힌 문양들은 일견 낡은 것처럼 보이면서도 독특한 것이다.

그의 시에는 온갖 음식들이 등장한다. 음식은 인간의 생육과 번성을 직접적으로 돕는 삶의 자양분이다. 그의 시 <국수>에서는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감탄이 무의식적으로 발화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시각과 미각을 자극하면서 온몸을 통해 열광케 하는 것은 일용할 양식으로서의 구체성이다. 음식을 통해 반응하는 구체성은 각 지역의 방언과 토산물, 풍광들에도 고르게 적용되고 있다.

소박한 시어로 공동체 복원을 꿈꾸던 시인

백석은 유학 시절 유럽을 휩쓴 모더니즘 열풍을 일본에서 겪었고 영어와 러시아어 등 외국어도 매우 잘했다. 그럼에도 시 속에서 화려한 말과 세련된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평안북도 정주를 기반으로 한 고향 말을 거침없이 토해놓는 데 주력했다. 그의 이 같은 노력은 지방 언어의 영토를 확장시키는 역할로 이어졌다. <여우난골족(族)>이나 <고야>와 같이, 명절날 대가족이 어울렸던 일들을 유년의 시점으로 그린 시들에서는 백석 시의 지향점들이 잘 보인다. 농촌의 순박한 삶을 묘사함으로써, 일제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공동체의 복원을 꿈꾸는 시인의 열망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백석은 자신의 시 속에 지역의 방언들을 보석처럼 촘촘히 박아 놓고 있다. 이 같은 일련의 시도들은 중앙집권화한 표준어의 통제와 획일성을 벗어나 독자성을 획득한다. 그의 시 속에 나타난 방언들은 중앙의 대척점으로서의 변방이 아닌, 각 지역의 독자성이 살아 있는 무한대의 영역으로 뻗어나가는 원동력이다. 백석 시에 나타난 방언으로 인해 변방은 곧 각 지역의 중심으로 뒤바뀐다.

백석이 터뜨린 방언의 꽃망울들은 우리의 공동체적 원형을 복원시키는 비밀의 문이다. 그것은 우리 고유의 민족혼을 무너뜨리는 식민지적 상황에 맞서는 또 다른 문학적 대응 양식인 것이다.

1930년대, 일제는 만주 침략을 자행하는 한편,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밀어붙임으로써 조선인의 민족혼을 말살시키기 위해 광분했다. 숨이 막힐 듯한 그 상황에서 백석은 홀연히 만주로 떠났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것은 환멸과 공허, 외로움과 가난뿐이었다. 그는 만주에서 측량기사의 보조원, 농사꾼, 세관 직원 등으로 일했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백석은 이 무렵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를 읊으며 괴로워했고 <흰 바람벽이 있어>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절절히 노래하며 자신을 달구질했다. 또한,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며 희망을 풀무질했다. 다수의 국내 문인들이 친일로 돌아설 즈음, 그는 일본어로 된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고 끝내 붓을 꺾었다.

한국 시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백석

해방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그는 월북이나 납북이 아닌 재북 시인이다. 북한에서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현실적으로 시 쓰기가 어려웠다. 그는 번역에 몰두하면서 활로를 찾았다. 시를 쓸 수 없는 상황은 오래 지속되었다. 그가 절망 대신 택한 것은 동시와 동화시를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상 입은 창작열마저 얼마 안 가 꺾이고 말았다.

1959년 1월초, 백석은 당의 명령을 받고 삼수로 떠났다. 오지 중에서도 오지였던 삼수는 일종의 유배지이자 순치의 길을 걸어야 살아남는 하방 장소였다. 마흔여덟의 그는 그곳 관평리 농업협동조합의 축산반에서 양을 쳤다. 1996년 1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시인 백석은 8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살아생전의 그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았다. 하지만 시 속에서만큼은 달랐다. 그는 평북 정주의 방언들을 시 속에 마음껏 부려놓았고, 나아가 그것들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 때문에 그는 누구보다도 고향 언어의 풍요를 누렸던 시인으로 기억될 수 있었다. 그는 얼마 전 ‘한국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뽑혔다. 그에 대한 사랑이 일반 독자들뿐만 아니라 문인들 사이에서도 식을 줄 모른다는 증표이다. 백석의 시집을 펼쳐보라. 어느 구절에서건 별처럼 빛나는 시어들이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그 시어들을 음미하다 보면, 갓 피어난 꽃향기가 새록새록 피어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소개 박선욱 (시인 . 동화작가)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그때 이후』, 『다시 불러오는 벗들』, 『세상의 출구』를 냈으며, 『박선욱 선생님이 들려주는 백동수』, 『박선욱 선생님이 들려주는 김득신』, 『윤이상』, 『황병기』, 『모나리자 누나와 하모니카』, 『평화와 희망의 씨앗 김대중 대통령』, 『행복한 이티 할아버지』 등의 어린이책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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