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작년도 : 2015년 | 고화질
  • 지원사항 :
지젝과 그 적들
현대의 사유를 이끌어온 핵심적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유에 맞서는 지젝, 이들의 거침없는 논쟁의 장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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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  4강  |  16교시  |   7시간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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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의록 제공  
    • 6개월
  • 강사 : 마상룡
오늘날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 불리는 슬라보예 지젝이 현대 철학자들(들뢰즈, 푸코, 레비나스, 하이데거)과 논쟁하는 쟁점에 대해 알아본다. 철학의 대가들이 포착했던 시대적 문제점과 개념들을 파악하며, 이에 지젝이 제기했던 그들의 사유의 한계와 그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펼쳤던 비판적 논의에 대해 정리하고자 한다.


지젝의 철학적 논쟁, 한눈에 파악하기


지젝은 그동안 ‘헤겔-라캉-마르크스’ 사상과 철학의 고갱이를 독창적으로 재구성하여 온갖 분야의 첨예한 쟁점에 종횡무진 개입해왔다. 특히 현대 철학자들과 논쟁을 벌이며 자신의 철학적 관점과 방법론을 전개해왔는데, 이 수업에서는 지젝이 지적했던 철학자들의 사유의 의의와 한계를 평가해보고, 그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제기했던 지젝의 철학적 논쟁을 정리할 것이다.


철학적 논쟁은 삶과 사회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기존의 큰 패러다임을 좀 더 객관적으로 이해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사유나 이론틀을 정교하게 다듬어나가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기존의 주류나 비주류 사유들의 무비판적인 수용이나 냉소적 거부, 기존의 대안적 사유들의 한계 등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지젝과 함께 치열한 논쟁의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서로 대립하고 충돌하는 지점에 이르고, 그것의 가능성과 한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서로 간의 열띤 논쟁을 통해 상호 보완적 대화나 양립 불가능한 대립과 투쟁을 하기도 할 것이다.


이 강좌는 다양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두루 살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지젝의 날카로운 문제 제기를 함께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단순히 사상가의 이론을 익히는 것을 넘어서서, 직접 사유하는 힘을 기르게 될 것이다. 하나의 쟁점을 둘러싼 분과 학문들의 여러 관점과 방법론을 교차하며 두루 배우고, 창조적인 융합과 통섭을 가능케 하는 유연한 사고를 연습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저마다 자기 삶의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고 재구성해 나가는 계기로 삼을 수 있기를.


아울러 지젝의 철학을 ‘지금-여기’ 현대 사회의 핵심 문제를 진단하고 해결하기 위한 사유의 장치로 활용하는 능력을 기르자!


제1강 들뢰즈 vs 지젝중에서

제2강 푸코 vs 지젝중에서

제4강 하이데거 vs 지젝중에서
 
- 참고문헌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2005.
슬라보예 지젝, 『시차적 관점』,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슬라보예 지젝, 에릭 L. 샌트너, 케네스 레이너드, 『이웃』, 정혁현 옮김, 2010.
슬라보예 지젝, 『헤겔레스토랑』,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13.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질 들뢰즈, 『의미의 논리』, 이정우 옮김, 한길사, 1999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자본주의와 분열증2』, 김재인 옮김, 새물결, 2001
미셀 푸코, 『성의 역사-자기에의 배려』, 이영목 옮김, 2004
미셸 푸코, 『지식의 고고학』, 이정우 옮김, 민음사, 2000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옮김, 2003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다르게-본질의 저편』, 김연숙 옮김, 인간사랑, 2010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글방,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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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 차
  • 제 목
  • 시 간
  • 보 기
  • 1교시 - 들뢰즈1 vs 들뢰즈2 - 1
  • 24분
  • 1강 1교시 강의보기
  • 2교시 - 들뢰즈1 vs 들뢰즈2 - 2
  • 28분
  • 2강 2교시 강의보기
  • 3교시 - 과학, 예술, 정치에서 들뢰즈의 문제 - 1
  • 26분
  • 2강 3교시 강의보기
  • 4교시 - 과학, 예술, 정치에서 들뢰즈의 문제 - 2
  • 28분
  • 2강 4교시 강의보기
  • 주요내용
  • -철학적 논쟁의 의미와 가치
    -탈구조주의 현대철학
    -의식의 불가능성
    -들뢰즈의 문제의식과 철학적 구도
    -차이의 존재론 : 개념적 차이 / 개념 없는 차이
    -존재의 일의성
    -들뢰즈의 생기론
    -기관없는 신체와 신체없는 기관
    -들뢰즈와 가타리의 외디푸스 삼각형 비판
  • 1교시 - 푸코의 계보학를 넘어서 - 1
  • 26분
  • 2강 1교시 강의보기
  • 2교시 - 푸코의 계보학를 넘어서 - 2
  • 25분
  • 3강 2교시 강의보기
  • 3교시 - 자기를 배려하는 방식 - 1
  • 22분
  • 3강 3교시 강의보기
  • 4교시 - 자기를 배려하는 방식 - 2
  • 45분
  • 3강 4교시 강의보기
  • 주요내용
  •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순수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실천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판단력비판)-
    -푸코의 철학 방법론 ; 고고학과 계보학 (두 가지 분석 양식)
    -고고학적 분석과 사상사의 네 가지 차이점
    -주체화의 문제 설정 : 자유의 실천으로서의 자기 윤리
    -생체권력(biopower), 실존의 미학, 광기
    -훈육적 권력이론의 역설
    -민족주의는 담론의 산물인가, 그 이상인가
  • 1교시 - 타자의 얼굴 너머 - 1
  • 28분
  • 3강 1교시 강의보기
  • 2교시 - 타자의 얼굴 너머 - 2
  • 33분
  • 4강 2교시 강의보기
  • 3교시 - 절대적 타자성의 근원 - 1
  • 35분
  • 4강 3교시 강의보기
  • 4교시 - 절대적 타자성의 근원 - 2
  • 25분
  • 4강 4교시 강의보기
  • 주요내용
  • -하이데거와 레비나스의 차이
    -레비나스의 철학의 문제 : 현상 뒤에 숨어 있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
    -레비나스의 생애와 주요 저작 : 타자를 향한 존재론적 모험
    -타자의 얼굴의 현현과 그 의미
    -레비나스 윤리에 대한 스피노자적 관점에서의 비판
    -레비나스 윤리에 대한 반박 사례로서의 무젤만
  • 1교시 - 존재론적 진리와 존재적 차원의 오류 - 1
  • 29분
  • 4강 1교시 강의보기
  • 2교시 - 존재론적 진리와 존재적 차원의 오류 - 2
  • 38분
  • 5강 2교시 강의보기
  • 3교시 - 『존재와 시간』, 무엇이 문제인가 - 1
  • 24분
  • 5강 3교시 강의보기
  • 4교시 - 『존재와 시간』, 무엇이 문제인가 - 2
  • 33분
  • 5강 4교시 강의보기
  • 주요내용
  • -인간의 실존론적 존재구조
    -현존재의 존재방식
    -세계-내-존재(In-der-Welt-Sein)
    -존재론적 차이 :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
    -죽음을-향한-존재보다 앞선 것으로서의 죽음충동
    -하이데거 철학과 나치즘의 공통 오류
    -나치즘의 본질에 대한 환상과 착각
    -하이데거 철학과 나치즘의 관계
    -하이데거적 윤리의 근거 결핍
    -유한성 철학의 한계 : 죽음을-향한-존재보다 앞선 것으로서의 죽음충동
마상룡 (철학자)

고려대 교육학과와 동대학 교육대학원을 졸업하여, 현재 교육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탈근대철학연구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고려대 교양교육실 연구교수와 교육문제연구소 대안교육연구센터 전임연구원으로 역임했다. 또한, 고려대, 숙명여대, 제주대 평생교육원, 경기교육청 등에서 중고등 교사연구 교육에서 강사로 지냈다. 저서로는 『고금(古今)-그리고 고전(古典)은 미래다』, 논문으로 「지젝 주체이론의 교육적 의미」, 「라깡 정신분석의 사유에서 타자성의 교육적 함의 : 욕망과 타자성의 교육학을 위하여」 등이 있다.

 
  • 번 호
  • 제 목
  • 작성자
우수 참고할만한 하이데거의 책 N 서평 강*승
얼마 전 세미나에서 친구들과 읽었던 책인데 재밌어서 서평을 쓴 게 있어요. 그냥 재미로 읽어주세요. 참고로 아래 제 글에 등장하는 알랭바디우에 대한 강의는 아트앤스터디 서용순 선생님 강의가 들을만 하고요. 저도 많이 은혜받았어요~ ^^







하이데거의 언어, 그 시적 언어를 탐하다







- 언어로의 도상에서 (하이데거, 신상희 역, 나남출판, 2012)를 읽고











시가 안 읽히고 어렵다고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긴 하다. 그래도 요즘에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하루에 한 두편이라도 읽으려고 애를 쓴다. 뭔가 일이 안 풀릴 때, 종종 시는 그런 내게 다가와 누구도 알려주지 않은 것, 한번도 말해주지 않은 것을 비밀처럼 속삭이고 간다. 나만 힘든 건 아니구나, 이 순간에도 시를 짓는 그 누군가도 한잎 바람에 부끄러워하기도, 절망하기도 하면서 밤을 새우고 있구나, 하면서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는데 그 느낌이 싫지 않다. 오히려 위안이 된다. 이렇게 나의 존재의 답답한 유한성을 넘어서 타자와 어울려 숨 쉬고 있다는 것 또한 이 세계가 내게 준 선물 아닐까. 내가 항상 감사해야 할.



시가, 소설이, 밥먹여 주느냐고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혹은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난 밥만 먹고 살 수 없노라고 되려 큰소리 치면서 책을 읽고 또 뭔가를 끄적이면서 시간을 보내던 때가 있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거나 친구들과 카페에서 실컷 수다를 떨고 나서도 뭔가 허기진, 내가 정작 말하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몰려들 때가 있다. 그럴 때 시는 가장 난처한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것까지, 얼굴이 화끈거리도록 말해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다나 잡담보다 이런 시가 주는 독특한 경험들이 나를 오히려 깨어있게 하고 충만하게 하는 것이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프랑스 사상가 알랭 바디우가 얼마전에 한국을 찾았다. 공개 강연이 있다길래 부랴부랴 가서 귀동냥을 하고 왔다. 그의 강연은 마침 ‘시’에 대한 것이었다. 그는 ‘시’라는 게 일상 언어 밖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시는 우리의 일상적 언어, 공간, 시간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부재하는 것, 시적인 것,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을 아예 일치시켜 버린다. 이 말은 좀 어려운데 그가 쉽게 설명해 주었다. 바디우가 예를 든 ‘푸른 기타’라는 시어를 보면, 우리는 일상에서 기타를 기타로 경험하지 ‘푸른 기타’ 로 경험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예민하게 사물을 바라보고 사물과 친밀하며 사물의 언어, 사물이 말하는 바를 들으려 한다. 사물이 말을 한다니?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사물이 먼저 존재하고 언어는 그것을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라고 한다. 사물은 언어와 동시에 있거나 아니면 언어가 발견되어야 비로소 사물이 존재(『언어로의 도상에서』, 신상희 역, 나남, 2012, p. 217 ; 이후에는 페이지만 표기) 한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사물은 언어와 함께, 언어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사물과, 존재와 함께 세계에 거주하며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말한다. 그런데 이 사실을 포착할 수 있는 힘은 시인에게 있다. 세인으로서 우리는 정보적인 언어, 이성과 논리로 계산 가능한, 합리적인 언어만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세계의, 대지의 존재의 울림, 사물의 말을 들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푸른 기타’라는 시어에서는 실제 기타와 이 시적으로 말해진, 예술적 기타 사이에 더 이상 구분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 둘은 완벽히 하나인 것이다. 이런 일치, 를 우리는 꿈꾸지만 시는 이 일치를 실현시킨다. 일상에서 나는 나 이외의 외부의 사물이나 사람과 구분하고 이로써 (외부와)단절, 소외를 경험 한다. 그래서 우리 현대인은 늘 우울 하고 타자와 소통이 안 된다고 불평하기도, 다투기도 한다. 우리는 나를 둘러싼 세계와(존재들, 사물들, 타자들과)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을까. 진정한 소통은 정말 예술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외부 사물이나 타자와의 ‘일치’는 냉정하게 말해 현실에서는 정신병의 논리 구조이기도 하다. 내 마음은 호수요 처럼 시적, 예술적 맥락이 아니고서 가령 ‘내가 호수요’ 하면 나는 당장 정신병원에 갇힐 것이다. 하지만 시에서는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 말하자면 시는 현실 질서에 복종하지 않는다. 그는 꿈꾼다. 현실 세계에서 꿈꾸고 상상하는 일은 위험하며(지금과 다른 체제를 상상한다든지 하는 것은) 밥벌이가 안 되는 무용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시짓고 사유하는 일을 멈추어야만 할 것인가.



하이데거는 서구의 합리적인 이성이, 비밀스럽고 수수께끼적인 사유나 시적 언어를 추방하고 세계를 계산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일상 언어로 바꾸어 균질화해 지배가능한 세계로 환원해 버렸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합리적 이성의 사유방식, 말하기 방식은 결국 전쟁을 가져왔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세계를 주도하고 사물을 지배한다는 관념이 팽배한 서구 사회에 하이데거는 선언한다. 서구는 교만하게도 인간이 말한다고 믿었지만 그는 반대로, 인간이 아니라 ‘언어가 말한다’고.



인간이 아니라 언어가 말을 한다니. 우리는 이 난처한 발언에 다가가기 위해 그의 언어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인간은 말한다, 깨어있을 때도 꿈속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말한다. 침묵할 때도. 인간에게 말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언어로의 도상』, p. 15). 말하는 자로서 인간은 존재한다. 우리는 도처에서 언어와 마주친다(p. 17). 그래서 언어는 ‘관계’이며 그 자체로 ‘세계’이다. 우리는 언어 안에 체류(p. 19)하고 표현(p. 21)한다. 그렇게 우리 인간 존재는 언어적으로 이 세계와, 사물과 관계하고 대화한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의 일상어는 대개 잡담이고 수다로 오염되어 있다. 잡담으로 본래적 자기(죽을 존재로서, 아픔과 불안의 존재로서의)를 은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렇지 않다. 시인은 가장 순수한 언어(p. 24)로 말한다. 시인은 일상적 언어로는 인간 존재의 본질,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지 못한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래서 그는 한번도 말해지지 않은 것, 아직 사유해보지 않은 것,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을 말한다. 시인은 사물을 호명하면서 자신은 물론 현존하는 사물(이름 없이 현존하지만 부재하는 상태로 있던)이 도래하게 하고 돌연 생기하게 하며 하늘과 땅, 죽을 자들과 신적인 것들을 모두 자기에게로 모아들인다(p. 32). 시인은 이렇게 세계 자체를 호명한다. 그리고 그 세계와 ‘친밀’해진다. 이렇게 사물들은 (가장 순수한)언어에서, 즉 시에서, 세계를 낳고 세계와 사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관통(p. 36)한다. 이렇게 인간의 언어, 말함은 자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p. 49). 인간의 언어는 세계와 함께, 곧 말하는 게 아니라 세계를 통과해 ‘말해지는 것’이다. 순수한 언어는 그렇게 세계의 본질, 존재의, 사물의 본질에 가까운 곳에 있다.







그렇다면 세계의 본질, 사물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서구 유렵의 형이상학은 사물과 존재의 본질을 ‘확정’하려 했다. 아마 서구 형이상학은 그런 것을 찾으려고 헛되이 애쓰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자신의 본질에 있어서 아직 확정 되지 않은 것(p. 67)이 인간의 존재 방식이며 사물의 존재 방식이다. 인간과, 사물, 세계는 그저 길 위에, 도상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길 위에 모든 (신적, 존재적)비밀이 있다. 그곳에는 죽은 자도 있고, 죽을 자도 있으며, 결별한 이도 있고, 아픔을 가진 자도 있다. 죽은 자는 단지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현존하는 것의 모음(p. 81)이다. 길 위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응축되어 있고(하이데거는 일직선적인 시간관을 거부하면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근원적으로 단일성을 가진다고 보았다. 한 존재의 ‘존재해옴’의 방식은 그의 미래에 속한다. 과거는 현재를 경유하여 미래의 타자인 자기에게 열려 있고 이런 시간은 어떤 한 시점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죽은 자, 죽을 자들, 도래할 자들이 공존하는데, 순수한 언어는 그들을 모두 불러 세운다. 하지만 서구의 합리적 이성은 이런 일을 불가능하며 수수께끼적이며 비밀스러운, 한갓 꿈 같은 얘기일 뿐이라며 배제해왔다.



합리적 이성은 옳고 그름, 낮과 밤, 슬픔과 기쁨이라는 식으로 대립하는 것들만 알지 그 둘이 어떻게 어우러져 있는지는 애써 눈감아왔다.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미워하기도 하며 가장 힘들게 무엇인가를 하면서 몸은 고통스럽지만 그 가운데서 만족, 쾌락을 얻기도 한다. 이런 지점은 이성으로 이해하기 불가해한데 하이데거는 마치 이러한 대립의 불가능성이 점령한 곳에 언어의 본질, 존재의 본질이 머문다고 본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언어와 더불어 경험한다는 것은, 언어의 말 걸어 옴에 관여해 들어가고 그것에 스스로 순응함으로써 고유하게 관계한다(p. 210)는 것이다. 경험한다는 것은 내가 주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자립적으로 한다는 게 아니라 이렇게 세계에 던져진다는 것이며 알 수 없는 어떤 심연의 그 (신비의)세계를 체험하고 깊이 관여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체념이나 불안, 아픔을 그저 대상화하지 않고 아예 체념이 ‘되고’, 아픔이 ‘되어’ 버린다. 체념은 단순히 부정적인 것일까.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일종의 긍정(p. 321)이다. 존재는 자신의 유한성, 세계의 유한성을 외면하면서 그것들을 도착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유한성, 죽음, 아픔, 고통 등을 철저히 받아들임으로써 자기 존재의 본질에 다가간다. 이렇게 성숙한 단계로 들어가면 그곳에는 존재의 부정이 아니라 존재에의 긍정(자기를 거부하지 않음; p. 321)이, 그러한 세계와 어울림, 죽음과도 친밀해질 수 있음을 배울 수 있다. 죽음을 고려해야 하는 존재는 바로 그 이류로 인해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 안에서만 비로소 (비본래적 자기로부터)본래적 자기에로 몰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시인의 이러한 체험이, 즉 본래적 자기를 되찾음으로써 세계의 비밀에 다가가는 체험을 통해 세계와 어울리고 감응함으로써 자신의 유한성에서 벗어나 본래적 자기의 비밀을 품고 있는 세계와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시인은 ‘언어를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언어로부터 달아나는 대신, 언어에 이르는 길은 언어를 언어로 경험’(p. 346)하도록 한다. 그는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고 지나간 것을 소환하며, 도래해야 할 것을 부른다. 시인들의 언어는 단순한 수다나 잡담과는 다른 것이다. 잡담은 존재의 본질을 망각한 언어일 뿐이다. 존재 즉, 무한한 잠재성을 지니고 무한한 차이와 생성, 가능성들을 지닌 존재는 시적 언어, 즉 가장 순수한 언어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존재는 존재자와 달리 ‘무엇’이라고 규정된 존재도 아니고 결정된 존재도 아니다. 하지만 세인으로서의 우리에게는 이런 존재를 호명할 언어가 없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존재를 선생님, 친구, 동료, 애인, 아버지로 호명할 수는 있지만 그 존재가 본래적으로 어떤 존재인지는 망각하고 있다. 내 앞에 보이는 존재, 회사 동료가 있다고 하자. 그는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나는 그를 보이는 대로, 그저 나의 회사 동료로 본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의 아빠이거나 남편이며 삼촌이거나 아들이기도 하다. 이렇게 한 존재란 다양한 차이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란 가장 불명료한 개념이다. 그는 분명 ‘컵이 존재한다. 강아지가 존재한다’와는 다르게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존재를 그저 내 눈앞에 보이는대로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나의 사물처럼 ‘무엇’(당신은 무엇으로 규정되는가, 의사? 판검사? 등등으로 우리는 구분되고 폭력적으로 위계지어진다)으로 그렇게 존재한다고 믿는다. 왜 그럴까. 하이데거는 이런 질문을 제기한 어쩌면 최초의 인물이다.



하이데거는 서구의 사상적 전통이 이러한 존재에 대해 망각하고 눈에 보이는 존재자에만 관심을 기울였다고 주장한다. 눈에 보이는 대로 사물을, 심지어 사람까지 재단하고 구분하고 계산하고 지배하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인간에 대한 인간 지배는 날로 극악해지고 인간의 자연 지배 또한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이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을 에너지 저장고처럼 여기고 마구 파헤치고 인간의 장기와 성까지도 상품처럼 사고 팔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이 급격하게 개발하면서 내뿜는 먼지들은 우리에게도 매일매일 찾아온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일은 우리가 존재를 망각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았다(참고,『존재와 시간』, 이기상 저, 살림, 2008).



서구의 이성적, 합리적 언어와 달리 순수 시적 언어는 보이는 대로의 사물에만 관심을 갖는 게 아니다. 시적 언어는 사물의 현존 이면에, ‘이미’ 그 사물에 다가가며 호명함으로써 앞으로 ‘도래하게’ 하며, 현존재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는 언어인 것이다. 그 언어는 정보적 언어(정보화된 언어는 기술적으로 계산하는 본질 속으로 균일하게 정돈되어 나가다가 서서히 ‘자연언어’를 포기 하는 상태에 이르게 한다. p. 373)와 다르며 존재를 결정하고 규정짓는 언어와도 다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적 언어는 기본적으로 결여이고 결핍일 수 있지만 이 결여는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결여, 공, 비어 있음은 ‘열린 곳’(데즈카 도미오, p. 395)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곳, 열린 곳은 비밀의 장소, 말하자면 실재의 영역이라고도 부를 만한데 이 영역은 대립을 넘어선 제 3항으로서의 ‘문턱’의 공간, ‘경계’의 공간 쯤 되지 않을까 싶다. 이 공간은 합리적 이성이 만들어 놓은 ‘대립’을 무너뜨린다. 남성/여성, 안/밖의 대립들 말이다. 가령, 그동안의 여성주의가 여성의 본질을 규정해 놓고 남성 때문에 여성적 본질이 발현되지 못했다고 말할 때 범하는 우는 여성의 본질이라는 것을 실체화해서 고정 불변의 무엇으로 여김으로써 여성의 무한한 잠재성을 가두어 놓는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본질주의적 함정에 스스로 빠져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저항과 위반의 논리가 ‘거짓된 위반의 모델’(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역, 401~403쪽)이라면 어떨까. 그래서일까. 지젝은 이런 식의 이항 대립 구도(여성 대 남성)를 버리고 하나의 내속적 자기 곤궁으로서의 다른 하나, 라는 구도를 고집했다.



쉬운 말로 ‘여성’이라는 기표는 그 자체로 아무런 균열이나 그 자체 안에 간극을 가지고 있지 않은 순수한 기표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이데거식으로 존재의 본질적 차원에서 여성이라는 기표 이면에는 여성 그 자신의 무한한 내속적 차이, 간극을 통해 생성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여성과 남성의 대립 구도로 사태를 볼 것이 아니라 이렇게 존재의 본질적인 차원에서 사태를 파악한다면 저항의 논리를 넘어설 수 있다. 권력 없이는 어떠한 저항도 없고 금지가 욕망(위반에 대한 욕망)을 생산(<까다로운 주체>, 404~406쪽)한다면 자기 자신의 내속적 곤궁을 통해서, 즉 자신의 내재적 부정성과 결핍을 통해서 외부(타자, 자신의 대립항)와 만날 때 세계는 다르게 지각될 수 있다.



더 이상 낡은 방식으로 남성이 없는 세계라는 유토피아에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여성 자신의 근본적 구성적 상실, 혹은 결여를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결여의 장소는 하이데거식으로 언어의 장소이고 존재의 본질(규정되지 않은, 길 위의 존재)의 장소일 것이다. 이곳은 분명 불안의 장소이고, 카오스의 장소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실제 삶에서, ‘시에서 못지않게 아마 정치에서도, 하나의 사건이 존재할 때마다 우리는 원리의 와해를 목격하며 이런 원리의 붕괴가 동시에 원리와 역사 사이의 연결을 재구축하게 만드는 것을 목격’(『공산주의의 현실성』, 브루노 보스틸스, 갈무리, 2014, p.240)한다. 우리는 늘 ‘실재’(라캉이 말한 것처럼 상징화될 수 없는 영역, 문턱, 경계의 영역) 속에서, ‘사건’ 속에서 산다. 메타적 차원에서 우리는 존재할 수 없고 사태를 직시할 수 없다. 이 ‘실재의 장소’에서, 즉 ‘문턱’의 자리에서 무한한 차이와 생성의 과잉이 지금과 다른 세계를 불러올 수 있는 길목을 열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곳에서 존재의, 언어의 본질을 찾아다닌 것은 아닐까. 존재의 본질, 진리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곳이 진리와 비진리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장소가 아닐까. 하이데거라면 진리와 비진리를 대립시키기 보다 이 둘이 서로가 서로를 품을 수 있는 세계야 말로 말 그대로 본래적 세계라 할 것 같다. 전통적으로 본질은 고정불변의 속성으로 이해되었지만 하이데거에게 본질이나 진리는 ‘동사’이다. 근원적인 언어가, 시적 언어가 사물들을 그것의 본질에 이르도록 한다면 그것은 사물이 길 위에서 우리를 습격하도록 한다는 것이며, 언어가 우리를 사물과 함께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 근원적 언어는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세계에 처해 있도록 하며 세계가 존재들의 존재 방식에 따라 정렬되어 있고 조직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참고, 하이데거, 마크 래톨, 웅진 지식하우스, 2010, p. 174).



문제는, 우리가 하이데거의 언어나 존재에 관한 사유를 단지 포스트모던식으로 무조건적 비결정성, 끝없는 열림, 차이를 향한 무한한 긍정만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읽어야 할까.



아니면 오히려 세계의 비결정성 자체의 ‘비어 있음’을 대신함으로써 시인처럼 그것 자체를 ‘체험’함으로써 세계에 ‘개입’할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일까. 당연히 후자이다. 현실 세계의 언어가 가진 폭력적 균질성, 서구 합리적 이성의 불합리성을 넘어, 세계를 실재적 혼란과 과잉으로 인식함으로써 언어의 본질에,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 그것들과 오히려 적극적으로 친밀한 관계 맺기. 이성 중심 세계가 지금껏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했던 것을 시적 언어로, 존재의 언어로 말하자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존재가 말과 사물 사이(한가운데, 경계, 문턱의 영역)에, 사물과 세계가 공존하는 친밀성의 영역에(p. 37) 존재하면서 사물 세계와 함께 변화해가고, 또 존재가 자립적(자율적)이고 유한한 합리적 이성적 주체가 아니라 사물과, 세계와 함께 화합하는 주체로 거듭나면서 본래적 자기와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세계의 길 위에서 가능하다. 그 길은 내가 아니라 ‘세계’가, 언어가 말하는 길, 아직 끝나지 않은 길, 언어의 도상이다.
우수 하이데거는 왜 나치에 동조했을까 전*우
하이데거는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자'를 부각시키면서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시하는 서구 형이상학을 비판했다. 서구의 근대적 이성, 합리성, 과학성이 신비한 것,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부재하는 것을 망각했지만 이는 하이데거에겐 폭력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존재자가 다가 아니다. 얼마전에 오랫동안 함께 공부했던 선배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항상 쾌활한 사람이었고 우리 모두 그럴리가, 믿지 못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 보이지 않는 것, 그런 것들이 이런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기본적인 사상이 뭐가 문제라는 것일까. 그는 왜 나치에 동조할 수 밖에 없었을까. 지젝은 이 문제를 그의 사상의 내적 논리에서 찾는다. 지젝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기술문명, 과학성을 비판하면서 기술 자체의 조작과 착취의 성질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 결과 그 (기술의)사용을 주도하는 자본의 동학을 보지 못했거나 은폐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치와 하이데거의 공통된 오류는 결국, '정치 경제를 기술, 과학의 문제로 환원했고 이로써 자본주의 자체의 모순, 그 내적 동학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이러한 사유의 틀의 바탕에는, 하이데거가 개인적 현존재의 본래적 결단으로부터 공동(체)의 결단으로 이행이 있었다. 그는 초기에 현존재의 본래적 결단을 중시했다. 그러던 그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운명에 개인을 복속시킨 데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분명 전체주의 논리로 빠져들 수 밖에 없는 논리 구조였다. 그는 왜 이런 논리적 전환을 감행했던 것일까.

그는 '영웅'에 대한 낭만주의적 향수가 있었던 듯한데, 그가 근대적 개인의 결단을 중시했지만 그의 무의식에는 전근대적 영웅 모델에 대한 아련한 향수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일까. 그에 따르면 영웅은 개인적 결단과 공동체의 운명의 결단을 일치시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 유형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히틀러에게 투영된 것일까.

아무튼 지젝은 하이데거 사유의 내적 논리를 추적하면서 그가 나치와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그의 이론적 결함 내지는 곤궁이 무엇이었는지를 탐색해서 앞으로 우리는 이런 오류를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고 과거의 사상들을 배워야 하는 이유이다.

4강으로 짧게 지젝이 문제 삼고 있는 사상가들을 짚어 보았다. 재미있었고 유익한 시간들이었다. 지젝은 워낙 어려워서 공부하는 사람들도 그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텍스트 중에 하나인데 선생님이 내공 있는 분이시고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셔서 지젝을 혼자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앞으로도 지젝 강의가 더 많이 열려서 공부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알려져서 사유를 확장하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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