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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대한 우울한 사랑
- 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파리를 사랑한 사상가 벤야민과 시인 보들레르. 그들과 함께 파리의 거리를 산책해보자. 파리에 대한 우울하고 열렬한 사랑!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수강료 : 49,000원 (적립5% : 최대2,450 원)
강사 : 김진영
구성 : 총 8강 | 30교시 | 15시간04분
교재 : 강의록 없음
수강 기간 : 6개월
지원사항 :
제작년도 : 2015년 | 고화질
 
 
정*혜 님
정*혜 님
정*혜 님
이 강좌는 벤야민의 보들레르에 관한 에세이,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를 통하여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정치 상황과 벤야민과 보들레르의 생각들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19세기 프랑스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시대를 읽어내는 힘을 기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처한 시대적 우울은 무엇인가? 벤야민과 보들레르의 우울한 사랑을 통해 성찰해보자.

파리에 대한 사랑,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1892-1940)


벤야민만큼 파리에 매혹당한 사람이 있었을까? 매혹은, 프루스트의 정의에 따르면, ‘감정의 중심을 타격당하는 일’이다. 청년시절 아버지와 함께 처음으로 파리를 알게 된 이후, 벤야민은 파리에 대한 사랑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파리의 마지막 증인’이 되기를 원했으며, 바로 그 소망 때문에 탈출의 기회를 놓치고 또 하나의 매혹 기제인 몰핀을 마시고 생애를 마감했다.


파리에 대한 벤야민의 사랑은 열렬했지만 우울한 사랑이었다. 그건 파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 개인적인 정서를 넘어서 역사철학적 정념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는 본질적으로 하이네와 쌍둥이다). 역사철학의 시선으로 응시할 때, 아름다운 근대의 파리는 몰락과 파국이 예정되어 있는 고대 로마의 판타스마고리일 뿐이었다. 마치 죽음보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아름다운 공주를 깨우려는 슬픈 왕자처럼 벤야민은 이미 사망 통지서를 받은 파리를 멜랑콜리와 알레고리의 시선으로 깨워 구출하려고 한다. 그리고 한 세대 앞선 19세기 말의 파리에서 자신과 동일한 소망을 품었던 한 시인을 발견한다. 그가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원조인 샤를 보들레르였다.




또 한 명의 우울한 사랑꾼, 샤를 보들레르 (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


보들레르 또한 파리와 우울한 사랑에 빠진 시인이었다. 바다에서 솟아나는 비너스처럼 대도시 군중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사랑의 매혹으로 시인을 사로잡는 <지나가는 여인>처럼 파리는 지극한 아름다움으로 빛나지만 이미 검은 상복을 입고 있다. ‘순간 속에서 영원한 사랑’을 남기고 군중 속으로 사라진 이 여인을 찾아서 보들레르는 군중 속으로 들어가 산보객이 되고, 넝마주의가 되고, 악마의 댄디가 되고, 도박꾼이 되고, ‘할 일이 없는 헤라클레스’처럼 우울한 영웅이 된다.


서정시가 더 이상 불가능해진 정치적 퇴행의 제2제정기 파리의 거리를 꿈과 우울, 상상과 지성이라는 절름발이 두 다리로 비틀거리며 만보하는 파리의 마지막 서정 시인 - 보들레르는 그러한 자신의 가엾은 모습을 근대의 갑판 위에서 뒤뚱이며 조롱당하는 날개 큰 알바트로스에 비유한다. 그러나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이 마지막 서정시들을 핀다로스의 올림포스 송가처럼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여는 알레고리적 서정시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 결과들이 보들레르에 대한 세 개의 에세이,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중앙공원>들이다.



애도하기의 철학


벤야민은 ‘희망은 과거 안에만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건, <역사란 무엇인가>의 한 명제가 말하듯, 억울하게 죽어서 과거의 무덤 안에 묻힌 채 잊혀진 죽은 자들의 정당한 원한을 기억하고 풀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희망은 먼저 꿈꾸었으나 실현될 수 없었던 죽은 자들의 꿈들을 깨워내어 실현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벤야민의 철학은 메시아주의에 앞서 애도의 역사철학이다.


보들레르의 시들에 대한 밀착 분석을 통해서 19세기 파리의 양아치 정치를 고발하고, 그 정치가 희생시킨 시대의 꿈들을 현재화하고자 했던 그의 '보들레르론'도 거기에 속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절망적 현실, ‘세월호’ 안에 묻혀 있는 죽은 자들의 원한과 꿈을 망각이라는 더 깊은 바다로 침몰시키려는 모든 시도들에 맞서서 우리가 지녀야 할 ‘애도의 정치학’ 또한 거기에 속할 것이다. 아닌가?


제1강 Ch. 보들레르에 대하여 (1) 중에서
제4강 <보들레르와 제2제정기의 파리> (2) 중에서
제5강 <보들레르와 제2제정기의 파리> (3) 중에서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 : 보를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 외 (발터 벤야민 선집 4)』
김영옥, 황현산 역 (도서출판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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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 차
  • 제 목
  • 시 간
  • 보 기
1강 Ch. 보들레르에 대하여 (1) 117분
1교시 -   보들레르의 인생 - 1 25분 1강 1교시 강의보기
2교시 -   보들레르의 인생 - 2 30분 1강 2교시 강의보기
3교시 -   보들레르의 시학 - 1 31분 1강 3교시 강의보기
4교시 -   보들레르의 시학 - 2 31분 1강 4교시 강의보기
주요내용 세월 time / the hours
병적 혐오감
파리, 우울, 사랑의 공간
2강 Ch. 보들레르에 대하여 (2) 101분
3강 <보들레르와 제2제정기의 파리> (1) 113분
4강 <보들레르와 제2제정기의 파리> (2) 130분
5강 <보들레르와 제2제정기의 파리> (3) 115분
6강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1) 110분
7강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2) 116분
8강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3) 102분
김진영 (인문학자, 철학아카데미 대표)
고려대 대학원 독문과를 졸업하고, 독일 프라이부르그 대학(University of Freiburg)에서 아도르노와 벤야민, 미학을 전공하였다. 바르트, 카프카, 푸르스트, 벤야민, 아도르노 등을 넘나들며, 문학과 철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많은 수강생들로부터 ‘생각을 바꿔주는 강의’, '인문학을 통해 수강생과 호흡하고 감동을 이끌어 내는 현장', ‘재미있는 인문학의 정수’라 극찬 받아왔다. 또한 텍스트를 재해석하는 독서 강좌로도 지속적인 호평을 받고 있다. 현재 홍익대, 중앙대, 서울예대 등에서 강의하며, (사)철학아카데미의 대표로 활동 중이다.
- 역서
『애도 일기』(롤랑바르트, 이순, 2012)
 
  • 번 호
  • 제 목
  • 작성자
<리뷰> 오색빛 구토, 산보객, 한 개인으로서의 죽음 정지혜
우수 [리뷰]세월 정*혜
세월

세월에는 총 세 가지의 뜻이 있다. 국어 사전에 명명된 것으로는 1. 지내는 형편이나 사정. 2. 흘러가는 시간. 3. 살아가는 세상. 어떤 순간과 흘러가는 시간들과 세상.

세월 Time.

눈물과 분노들이 이어지고 고발과 추적들이 잇따랐다. 노란 리본들이 휘날렸다. 누군가는 대책을,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두들 열에 들뜬 사냥개처럼, 한 번도 본 적 없는 목덜미를 찾아내고 싶어 안달했다. 북과 남 중 어느 쪽으로 더 저울이 치우쳐져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고 빈정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동네 스포츠 센터에서의 플래카드에는 ‘생존수영’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했다. 여행사의 적자가 이어지고, 불평하는 목소리에 이어 이를 비난하는 목소리들과 이 비난을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뒤섞였다. 노란색은 슬픈 색이 되어버렸다. 모두들 빨간 티셔츠를 입고 시청 광장에 모였다. 노란색은 희미해졌다.
모든 풍경들은 파노라마처럼 이어지지 못하고 깨진 꽃병처럼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전처럼 되돌릴 수 있을지 막막하고, 꽃병이 어떤 무늬였고 어떤 모양이었는지 기억할 수도 없다. 벤야민은 보들레르가 도시 산책자의 전형이라고 했지만, 아도르노가 지나치게 사변적이라고 비난했던 벤야민이야말로 진정한 도시 산책자일지도 모른다. 그는 끊임없이 보았다. 그게 그의 임무였다. 책으로 고개를 숙이거나 눈물로 눈 앞을 흐리는 대신, 그는 흐려지지 않도록 눈을 깜박거리면서 파리를 보았다. 그 순간의 파리에서 그는 보들레르를 보고, 읽었다. 그가 만들고 싶어했던 건 이전의 꽃병이 아니었다. 꽃병이 입은 상처는 되돌릴 수 없다. 없었던 것처럼 만들 수 없다. 우리가 간과한 아주 조그만 부스러기가, 그 조그만 파편이 꽃병이 당했던 폭력을 증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 폭력은 무관심하게, 그리고 무의도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어떤 폭력들은 무관심하고 무의도적이었기 때문에 결과 앞에서, 참극 앞에서 말한다. 실수였고 착오였고 의도치 않았기 때문에 두 손을 들고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 모든 제스쳐가 얼마나 참혹하고 끔찍한 지, 우리는 그제서야 깨닫는다. 죄를 인정하는 폭력들은 이제 과거의 이야기, 전설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전설은 비뚤어지고 망가진 채 현대까지 굴러 들어왔다. 우리는 그 전설을 차고 물어뜯고 던진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결백해질 수 있다, 우리도 울고 억울해할 수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에게 면죄권을 준다. 벤야민은 물질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경시되는, 자신이 상품이 되는 줄 모르고 상품을 욕망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았고, 그들을 관찰했고 사랑했다. 아도르노의 혐오는 어쩌면 그 자신이 지적했던 병적 혐오감의 일부분일지도 모른다-이 쇼의 현장에서, 우리는 모두 유죄가 된다.

세월 The hours.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한 적이 있었다면 그건 미워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한 적이 있었다면 그건 미워하는 것이다. 넝마처럼 너덜너덜하게 찢긴 자신을 드러내 보이면서 잘못을 깨달으라고 윽박지르는 순간,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인생이 끝나버렸다는 걸-자신의 세계가 끝났다는 걸 깨닫는다. 복수가 허망하게 실패했다는 걸 깨닫는 건 바로 그 마지막 결단이 끝난 직후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못한다. 잃어버린 건 그들 자신 뿐이고, 세월은 덧없이 흘러간다.
두 소년이 장례식장 앞에서 서성인다. 이내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묻는다. 2층부터 갈래, 1층부터 갈래? 그러자 다른 한 명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몇 층부터 가든, 그들은 두 층을 다 돌아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선배나 후배, 친구들이 얼마나 잘 웃었는지, 꿈이 무엇이었는지 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떤 것에 화를 냈고 어떻게 울었는지를 기억한다. 그들에게 마지막까지 남는 건, 그 동영상 속에서 누가 지른지 모르는 비명이다. 그 비명은 그 아이일 수도, 저 아이일 수도 있다.

버지니아 울프와 로라 브라운과 클래리사 보건은 시간의 잔인함을 깨닫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시간이 그냥 흘러가는 것을 참지 못하고,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지 못한다. 아니, 상처가 아문다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 상처가 아물고 이전의 상처가 아무렇지도 않은 게 된다는 것이 두렵다. 그들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삶이 변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미래에서 아문 상처를 보지 못하고 곪아 터진 상처를 본다. 벤야민은 파리 거리를 유유히 걸어다니는 보들레르를 보았다. 그건 그 자신의 사유이자, 상처였다.

세월.

어떤 단어로도 대체되지 못하는 고유명사가 되어버렸다. ‘거위의 꿈’이라는 흔한 노래 가사로는 수습되지 못한다. 이 세상 자체가 ‘세월’이다. 우리는 ‘죽음’ 의 에너지 앞에서 도망치라는 명을 받고, 순순히 도망쳐 목장으로 향하는 양떼들이다. 뿔이 꺾어지고 털이 깎이고, 이내 털만으로 만족하지 못할 때까지 얌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있을 것이다.

어떤 사유가 있고, 그 사유를 외우는 게 아니라 생각할 때 공부가 된다면. 그 공부로서 하는 사유가 우리에게 과연 행복을 가져다 주는가. 아니면 불행을 가지고 오는가.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숨이 턱 막히는, 이 더위 속에서 사람들은 떠들고 웃고 돌아다니면서 술을 먹는 등 축제처럼 즐기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그런데 그 순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지거나 생략되고, 모두들 눈살을 찌푸리며 등을 돌린다. 볼링 라인 위의 공처럼 어떤 제지도 없이 죽 미끄러져 가야만 하는데, 거터에 빠진 격이다.

병적 혐오감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다. 죽음은, 사실 외부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모두들 잊지 말자고 하면서도, 얼른 잊어버리기를 바란다. 적어도 우린 안전하다는 안도감과 함께. 과거에 대한 향수에 빠지자는 거냐는 아도르노의 비판에 매몰되어 과거를 부정하고 씻어버린다면, 그건 아도르노를 욕보이는 짓이다. 벤야민은 그저, 우리가 잊어버렸던 것을 마주보자고 한다. 우리가 잊어버리게 된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잊어버리고 싶어했던 그것, 우라시마 타로가 상자에서 꺼낸 건 이미 흘러간 세월들이 아니라 그를 낯설고 이상한 존재로 만들어 무력하게 만드는 그 세상이었다. 외국으로 떠나지 못하는 것, 이 곳에 잡아두는 것, 무력해지게 하는 이 장소에 머무르게 되는 건 자신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혐오하는 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라시마 타로가 상자에서 꺼낸 건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세상만이 아니라, 즐거운 용궁 생활을 뿌리치고 나올 만큼 소중했던, 그가 사랑했던 그 세상이었다. 파리는 그렇게, 벤야민에게 양가성을 지니는, 우울한 사랑의 공간이다.
우수 [리뷰]실패의 미화 정*혜
실패의 미화

[김진영 선생님의 벤야민의 보들레르 읽기 4강을 듣고]


안철수는 왜 정치에 실패했는가



‘노조 설립’에 대한 공략인 ‘노조 파괴’ 문건을 보면, 그들이 학습지 교사이든 마트 창고 직원이든 간에 대처나 예상 반응들이 다 비슷하다는 판단 하에 작성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프롤레탈리아들은 개별성을 잃은 물건들, 혹은 애완동물이나 다름없다. 망가진 물건들은 고치거나 내버리면 된다. 하지만 애완동물들은 버릇을 잘못 들이면 별다른 방법이 없다. 고육지책으로 ‘때리거나’ ‘훈련소’에 보낸다. 흥미가 잃으면 버린다. 괜찮다, 어차피 그들을 구조할 사람들은 따로 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눈물을 글썽이고 감동하며 아직 세상은 살만할지도 모른다는 실낱 같은 희망을 느끼게 된다. 그 희망이 독이다.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가 대놓고 드러내는 혐오들 중 하나는 바로 ‘집 주변’에 쓰레기장이 생기는 것이다. 냄새와 벌레, 그리고 건강이 나빠진다고 극구 반대한다. 그러면 과연 어디에 쓰레기장이 생겨야 하는 것일까? 상관없다, 그냥 우리 집 근처에만 안 생기면 된다. 남이야 암에 걸리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자신한테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는 생각에 더 울분이 터지고 누군가의 멱살이라도 잡아채고 싶어한다. 하지만 실제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건, 쓰레기장이 아니라 쓰레기장 근처에서 쓰레기와 똑같이 취급될 것 같은 자기 자신, 사실은 이 사회에서 쓰레기로 치부되는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쓰레기를 줍는 넝마주이들 또한 똑같은 ‘쓰레기’로 여겨진다. 그들은 쓰레기를 버려진 것으로 취급하거나 가여워하지 않고, 그것들이 ‘쓸모 있다는 듯’이 군다. 모두가 잘났고 모두가 똑똑한 사회다 보니 자신의 판단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이들을 보면 한심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정치에 대해 ‘다 똑같은 것들’이라고 논하면서 은근슬쩍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고 거리감을 두는 건 위선도 아니라 우둔함이다. 똑똑하다는 착각이 사람들을 우둔하게 만든다.

이는 정말 최근에 있던 재보궐선거에 대해 책임을 지고 물러난 안철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모범생이었고, 좋은 사업가였고, 좋은 아버지였다. 그는 늘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올곧았고, 희망에 가득 차 있었으며, 선의를 베풀고 싶어했다. 그는 이 시대의 엘리트 코스와 행운을 다 밟고 나아간 이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정치판에서 정치인들과 똑같은 ‘쓰레기’가 될 줄은 몰랐다. 아주 쉽게 ‘개혁 정치’를 논했고, 민주당과 손을 잡았을 때만 해도 자신은 여기에 물들기는커녕 이들을 개혁으로 이끌고 갈 수 있으리라고 쉽게 믿었다. 그 믿음은 사람들에게 희망이었고, 빛이었지만 동시에 우둔했기에 절망이었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지만, 그 나쁘지 않음으로 인해 스스로 절망하고 주변을 절망케 했다. 희망을 가진 건 잘못이 아니다. 개혁하려고 했던 것도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배운 대로, ‘순진함’을 지닌 채 그 곳에 뛰어들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자신이 펼칠 새 정치라고 생각했고, 그게 가능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믿었던 이미지의 대부분은 사업만이 아니라 뭐든지 성공하는 안철수였다. 그래서 그의 실패에 대해 더 가혹했다. 냉정한 비판의 시각 또한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신’에 젖는다. 왜냐하면 그 자신조차도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누구한테 희망을 갖는 동시에 그 희망이 배반당하면 더 심한 ‘모욕감’에 젖어버린다.

그런데 과연 정치가 있기나 한 것일까? 정치학이라는 게 가능할까. 그에 대한 의문은 그 누구도 가지지 않는다. 최악과 차악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에 사람들은 차악을 선택하는 대신 최악을 선택하고 편안해진다. 왜냐하면 차악에 희망을 걸어 좌절하느니, 최악을 선택해 불평이라도 마음껏 하고 포기하겠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이런 글에서 ‘개인적 의견’을 밝혀보자면, 내가 혐오하는 것은 적어도, 자신의 손은 깨끗하다고 믿는 사람이며 마치 자신의 정의가 실현된 것인 것마냥 쉽게 뿌듯해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건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그런 자신을 인지하지 못한 채 화만 내는 이들이 가장 최악이다. 그들은 실패를 미화하고, 미화된 실패를 자신의 것인양 전시하며 자랑한다.





모두가 문을 열지 않았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면 바로 바리케이드를 쌓는 배우들의 모습이었다. 혁명단의 대장 격인 앙졸라와 그의 친구들이 주변의 집으로 뛰어들어가거나 소리쳐 외친다. 그러자 창에서 가구들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투덜거리면서도 그들이 의자를 들고 나갈 때 손으로 키스를 보낸다. 마치 한바탕 축제라도 벌어지는 것 같다. 위고의 낭만적 시선이 개입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정말 영화에서 유일하게 ‘아름다운’ 장면이다. 모든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웃고 떠든다.

그러나 바리케이드가 무너지고 정부군이 그들을 진압하러 달려온다. 혁명단원들은 집 문을 두드리며 간절히 열어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아무도 문을 열지 않는다. 모두가 문을 열지 않았다. 다음 날 피에 젖은 포석을 스펀지로 닦으면서 여인들이 나지막하게 노래를 부른다. 그들의 피에 젖은 금발, 힘없이 떨어진 손, 채 감기지 못한 눈꺼풀 사이로 보이던, 보석처럼 푸른 눈동자를 회상한다. 그들은 도망가기보다는 바리케이드 안에서 머무르려 했고, 마지막에는 ‘집’으로 회귀하려 했다. 더 좁은 곳으로 틀어박히려고 했다.

‘바리케이드’라는 우울의 공간, 한순간의 행복함 뒤에는 반드시 불행이 따를 것이라는 이 강박이 언제부터 태어난 것일까. 벤야민은 샤를부터 죽 내려온 혁명과 실패의 거듭된 역사 때문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한다. 희망은, 모든 실패의 선례들을 통해 현실을 바라보며 그 허위성을 벗겨낼 수 있다는 것이고 절망은, 과거에 그랬듯이 지금도 또 실패할 거라는 것이다. 아무도 맞붙어 싸우려고 하지 않았고 문을 열어주려 하지도 않았다.

위고는 바리케이드의 마지막 장면은 철저하게 사실적으로 그렸다. 절망에 대해서는 끔찍할 정도로. 그렇지만 그는 바리케이드에서의 몰살 장면에서, 죽는 이들 중 몇몇을 부각시켰다.

앙졸라는 혁명단의 대장 격으로, 그의 이름은 ‘천사’라는 뜻이다. 그는 누구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끝까지 맞서 싸운다. 정부군들의 총구 앞에서도 그는 찬란하게 빛난다. 그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혁명단원들의 행동에 대해 비웃고 폄하했던 그랑테르였다.

아마도 그랑테르는 현재 우리의 모습과 가장 유사할 것이다. 차가운 지식인들, 어차피 해봤자 시간 낭비이고,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뿐이며 여기에 있는 건 재미있어서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흔히 ‘쿨함’을 표방하는 사람들. 하지만 그랑테르는 앙졸라에게 말한다. ‘나도 너와 같이 가도 좋은가?’ 앙졸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순간 앙졸라는 정말 ‘천사’처럼 보인다. 그는 그랑테르에게 손을 내밀고, 그랑테르는 홀린 듯이 그의 손을 잡는다. 정부군의 총이 불을 뿜고, 그들은 창문을 등진 채 바닥으로, 바닥으로 떨어진다... 수업에서 언급된 바흐만의 말마따나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라는 것처럼. 사실 가장 냉정하고 차가운 지식인이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앙졸라’를 바라고, 그에게 매혹되는 이들일지도 모른다.

반면 마리우스는 장발장에 의해 ‘하수도’로 빠져나간다. 분명 어떠한 빈틈이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스스로 자의에 의해서 빠져나온 게 아니라 장발장에 의해 빠져나온 것이다. 그의 마음은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죽은 채로 산다. 산 채로 죽어 있다. 비겁한 게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실패 앞에서 허망한 태도로 앉아 있다. 그들은 죽음을 불사하고 전투에 응한 게 아니다. 죽을 줄 알고 전투에 뛰어든 것이다. 그는 그걸 알았으면서도, 그게 증명되는 순간 깊은 회의에 잠긴다.



동정과 연민



영국이나 프랑스의 산보객과 파리의 제2제정기 시대의 산보객은 철저히 구분된다. 실제로 찰스 디킨스의 ‘밤산책’의 디킨스와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벤야민은 확연히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디킨스가 걸어다니는 이유는 단순히 ‘잠이 오지 않아서’, 그리고 거리에서 마주치는 이들은 그보다 확실히 아래에 위치한 사람들로 그는 그들을 동정하고 그들에게서 선한 구석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생트뵈브가 확실한 혐오감을 보여준 것과 사실 비슷한 축에 속한다. 하지만 벤야민은 그들에게 뭔가를 기부하지 않는다. 그 또한 가난한 이들에 속해 있다. 돈이든 정신이든, 다 가난하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논문 지원을 받아야 하며, 자신의 논문이 팔리기를 기대하며 최대한 논문을 맞춰서 써야 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 진흙탕에 어지러이 남은 발자국을 보았다. 문득 비바람을 견디며 몇겹의 세월이 흐른 후 지질학자에 의해 절벽 표면에서 발견된, 멸종된 생명체의 발자국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런 추측을 해보았다. 만약 이 진흙밭이 지금 이대로 돌처럼 굳어져서 수마년 동안 여기에 가려진 채 있게 된다면, 지구상에서 우리의 후세가 될 인간 종족은 전통의 도움 없이 이곳에서 찾아낸 흔적만 가지고 인간의 지력을 최대한 발휘해, 한 나라의 수도에서 아이들을 방치할 뿐만 아니라 바다와 육지에서 휘두르는 힘은 자랑스러워하면서 그 힘으로 아이들을 붙들어주고 구해주지는 않는 공공의 야만성을 가진 문명사회가 존재했다는 놀라운 추론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점이 궁금했다.



찰스 디킨스, ‘밤산책’ 124-125



하지만 점차 디킨스도 그 자신의 행보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그의 행보는 ‘사회적으로 소외받은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동시에 그 자신 또한 그들에게서 자신의 유사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질성은 위험하다.



권력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정치적인 견해에 상관없이 모두가 죽음을 이용해 거래를 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죽음을 고이 보관하고, 죽음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죽음을 최대한 이용한 다음 마지못해 떠나 보낸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찰스 디킨스 , ‘밤산책’ 158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면 벤야민은, 짧은 메모들을 휘갈겨 쓰면서 놓치지 않으려 한다. 과연 무엇을? 그들은 크게 눈을 뜬다. 눈을 감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충격과 공포이기 때문이고, 그로테스크의 그로테스크이기 때문이다. 감는 순간 우리는 어둠에게 먹히고 만다. 불면증을 야기하는 이 사회에서, 눈을 감아버리면 편할 이 사회에서 그들은 어둠에 먹히면서도 그 속을 탐사하는 피노키오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제페토 할아버지와 함께 빠져나올 길을 찾을 수 있었을까.
우수 [리뷰] 2강 일방적이지 않은 통행로 정*혜
쓰레기 하치장

쓰레기는 쓸모없는 것들의 무덤이다. 뒤죽박죽 섞여서 좀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쓰레기들을 정의한다면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쓰레기 더미 속에 있는 건 너무나도 다양하고 하나로는 일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안고 다녔던 미미 인형, 어제까지 아버지가 신고 다니던 양말, 노인의 틀니 철사, 반짝만 남은 고무장갑, 찢어진 노트들. 어느 누구도 그 압도적인 쓰레기의 숭고함에 손을 대지 못한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혐오한다. 쓰레기 하치장을 자신의 지역구에 두고 싶지 않다는 님비는, 사실 자신의 이익 문제보다는 자신의 청정한 생활이 쓰레기와 뒤섞일까봐 두려운 것이다. 뒤섞이는 순간, 자신의 삶도 쓰레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골라낼 생각도 하지 않고, 사람들은 그저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백지를 원하고, 스스로 백치가 되어간다. 쓰레기는 사실 그 잔해들에 대한 비겁한 변명, ‘쓰레기’라는 말로 단숨에 제껴 버리려는 손짓인 것이다. 잔해들 앞에서 망설이기보다는, 무조건 ‘결정’하고 넘겨 버리려고 한다. 관료주의적 사회에서는 더더욱이나 그럴 것이다. 일단 서류를 처리하면, 그 다음은 그 다음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지 자신의 책임 권한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는 백열등의 흰빛 아래의 백치보다는 창밖에 서 있는 가난하고 남루한 가족에 관심을 두었다. 레스토랑 창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그들의 것이 아닌 향기가 난다. 그래서 그들의 유래조차 알 수 없고, 그들 자신조차도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멍청한 양배추 머리 인형들만 앉아 있는 셈이다. 하지만 창밖에 서 있는 가족들에게는 시간과 수많은 감정들을 뒤섞은 채로 끌고 다니고 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규정하는 ‘쓰레기’일 것이다. 그들의 알 수 없는 시선이 집요하게 창안을 훑고 있다는 걸, 모두들 외면하고 모른척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강력하다.

만약 쓰레기를 분류하고 그 잔해들의 역사와, 여운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그것들은 그 순간 쓰레기가 아닌 다른 것이 된다. 보들레르는 늙은 여인의 검버섯에서 젊었을 때의 방탕한 아름다움을 읽어냈고, 높고 쾌활한 여인의 웃음소리에서 한없이 잔인하게 권력을 행사하고 느끼는 흡족함을 느꼈다.

데카당스와 인간 사이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들은 인간의 신체에 대해 끈질기고 집요하다. 연인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분명 뻔한 소설들이라면 아름답게 묘사할 텐데도 묘하게 비틀리고 꼬인 시선을 유지한다. 유혹의 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낯설음은 사람들에게 불쾌함만을 주지는 않는다. 그 묘한 긴장감은 사실 보들레르의 시의 육체성만큼이나 당혹스럽다.

‘친구의 키스’라는 색다른 인사법, -여자의 입술을 빠는 대신에 입김을 마시는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하는 이상한 키스, -이것은 그 후 습관처럼 굳어져서 헤어질 때는 “그럼 안녕, 다시 올게요”하며 그녀가 입술을 내밀면 나는 그 앞에 얼굴을 내밀고 마치 흡입기를 향하기라도 하듯이 떡하니 입을 벌립니다. 그러면 그 입 속에 그녀가 후하고 입김을 불어넣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그것을 후우 하고 맛있다는 듯이 가슴 속 깊이 들여 마십니다. 그녀의 입김은 습기를 띠고 있어서 따뜻하며 인간의 폐에서 나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달콤한 꽃과 같은 향기가 났습니다.-그녀는 나를 매혹시키려고 입술에 살짝 향수를 발랐다고 했는데 그런 장치가 되어 있는 줄은 물론 그때는 몰랐습니다-. 나는 이렇게 그녀처럼 창녀가 되면 내장까지도 보통 여자와는 달라지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그녀의 체내를 통해서 그 입으로 나오는 공기는 이렇게 요염한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치인의 사랑’ 365

시와 소설의 주체는, 신이 아닌 인간이다. 서정시가 발달되든 그대로 멈춰 있든 단절되든 간에 그 시들이 이야기하는 건 인간이다. 자신의 형식이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근대 사회로 이동하면서 인간은 더 똑똑해졌는데 시와 소설 속에서는 별다른 똑똑함이 보이지 않는다. 다들 머저리가 되어버렸다. 보들레르는 인간의 상실된 똑똑함을 악에서 보았고, 그 악에서 점점 더 치열하게 구현되는 인간성을 발견했다. ‘악마주의’는 어쩌면 인간이 최소한 인간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기 위해 선택한 방법일는지도 모른다.

아우라의 실종

국가는 이제 누군가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새로운 것에 대해 열광하는 것도 잠시, 이윽고 또다른 새로운 것이 예고되고 지금의 새로운 것은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은 왜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가. 어떤 물건을 사용하고 어떤 취향을 가지느냐에 따라 인간의 첫인상이 결정되고, 또 인간의 삶의 방향이 보인다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점쟁이마냥 그렇게 말한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타락한 ‘언어’는 바로 ‘새로움’일지도 모른다. 새로움은 이제 광고 카피의 문자로만 남아 버렸다. 성경에서 마주한, 이전에는 보지 못한 기적들은 ‘새로웠고’,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실증주의를 논하는 현대에서는 ‘아우라’가 한번 발현된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증거’를, ‘사료’를 원한다. 별자리가 구축되면서 한순간 ‘빛나는’ 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우라를 실종시킨 건 ‘그들’이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다. 의심이 점점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똑똑해지기보다는 멍청해졌고, 믿는 것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믿는다는 것을 광신과 똑같이 치부하면서, 광신자들과 믿는 자들을 싸그리 멍청한 사람들로 몰아버렸다. 벤야민 또한 태고주의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그는 절대 태고를 돌아가야 할 근원으로 본 게 아니었다. 다만 그는 태고를, 그 때 있었던 사람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었고 루카치의 말마따나 ‘별을 보면서 길을 찾아가는 시대’를 되새기며 현대의 희망으로 가고 싶어했던 것이다. 현대사회는 믿으라고 말하면서 믿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믿는다고 말하지만, 사실 믿지 않는다. 벤야민은 믿고 싶어했고, 끊임없이 그러길 바랬다. 설사 그게 마지막에는 스위스 국경에서의 절망으로 끝날지라도. 그의 마지막 행보는, 그마저도 ‘믿는다’라는 것이 얼마나 압도적인 어려움을 지니고 있었는지 말해주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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