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앤스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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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이란?
인문학은 삶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라고 생각한다. 삶에 대한 내 고민의 결정적인 지점마다 인문학의 어느 단어와 문장과 맞닿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의 방대함 속에서 매번 헤매지만 그러면서도 은근한 친근감과 든든함을 느낀다.

▷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아트앤스터디를 어떻게 알게 되었나?
학교에서 교양수업으로 미학강의를 들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전보다) 구체적으로 철학자와 그들의 사상에 대해 접하게 되었다. 그림 속에 담긴 풍부하고 다채로운 아름다움에 매료되었고 그것을 철학사상과 연결해 깊은 정신성과 독특한 해석을 찾아내는 일이 즐거웠다. 미학에 대해 더 배우고 싶어서 인터넷을 뒤지던 중 아트앤스터디를 알게 되었다.

▷ 무슨 일들을 해왔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학생으로서 공부 빼고 거의 다 해왔다. 내 삶의 화두는 나의 삶을 잘 가꾸는 것이다. 물론 ‘잘’이라는 말 속에는 다른 사람과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 인문숲 리뷰어 활동에 어떤 기대를 하고 있고, 실제로 해보니 어떤가?
리뷰어 활동은 나에게 작은 도전이었다. 그동안 내 생각과 글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일 없이 나만 간직하고 있었는데, 리뷰라는 활동을 통해 나를 드러내는 일을 해보고 있다. 수업을 들을 때마다 생각은 정처 없이 불어나고 생각과 글의 균형을 찾아서 매끄럽게 풀어내는 일이 어렵지만, 앞으로 ‘열심히’라는 미덕이나마 발휘하겠다.

▷ 듣고 있는 강좌 외에 관심 있는 강좌는? 혹은 이미 수강한 강좌가 있는지?
진중권 선생님의 <현대예술의 철학> 강좌로 아트앤스터디와 처음 인연을 맺었고, 조광제 선생님의 <회화의 존재론: 20세기 현대미술탐방> 강좌를 들었다. 요새는 전호근 선생님의 동양철학 강좌에 관심이 있다.

▷ 인문학 강좌가 실제 삶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현상의 이면만 훑고 어느 한 가치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대신에, 상황을 입체적이고 주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 내가 느낀 아트앤스터디, 그리고 내가 바라는 아트앤스터디는?
처음 아트앤스터디를 알게 되었을 때 수많은 인문학 강좌들과 깔끔하고 세련된 구성을 보고 매우 반가웠다. 직접 찾아가본 오프라인 배움터 인문숲은 아담하고 정겹고 친절했다. 앞으로도 이런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인문학도들의 갈증을 풀어줄 고마운 기회들을 마련해 주셨으면 한다.

연암의 글은 재미있다. 물 흐르듯 길고 유려하게 이어지는 문장도 재미있고, 무엇보다 그가 맛깔나는 입담으로 시원시원 쏟아내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이번에 연암은 한 성깔 하는(했던) "걸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역시나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는 그의 진정성이 진하게 배어 있어 결국은 '아~'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된다.

지키지 않음으로써 지킨다(이존당기 以存堂記)

어쩌다 보면 주변에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좋게 말하면 대범하고 나쁘게 말하면 경솔해서 본인은 악의가 없어도 자꾸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 가만 보고 있으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도 나오는, 그런 막걸리같이 걸진 사람. 연암이 살던 때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나 보다. 장중거라는 이름을 가진 자인데, 본래 거리낌 없는 성격에 술에 취하면 호방함이 민폐로 이어지는 유형의 사람이다. 그런데 그 민폐가 보통이 아니었는지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광생(狂生, 미친X)이라고 욕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를 감옥에 집어넣자는 소리까지 나오자, 중거는 지난날을 후회하며 사람들의 비방을 피하고자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기로 했다. 문 앞에 '이존(以存)'이라는 글자를 커다랗게 써 붙이고 말이다. 주역에 나오는 '용과 뱀이 숨는 것은 몸을 보존하기 위해서이다'라는 구절에서 취한 말이란다.

연암은 이를 보고 코웃음을 친다. "스스로를 해치는 것이 자기 몸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뿐더러,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해 방 안에만 머무르면 오히려 괜한 의심만 불러일으키니 연암이 보기에 참으로 가소로웠다. 의기소침해진 중거가 연암에게 자기가 어디에 숨어야 하느냐고 되묻자, 그에 대한 연암의 대답이 걸작이다.

"나는 자네의 몸을 그대의 귓구멍이나 눈구멍 속에 집어넣을 수 있으니 비록 천지가 크고 사해가 넓다 하나 그보다 더 넉넉할 수 없을 것이다. 자네는 여기에 숨고 싶은가? 사람과 사람이 사귀고 일의 이치가 들어맞는 데는 일정한 도리가 있으니 그 이름을 예라 한다. 자네가 자네 몸을 이기기를 마치 큰 적을 꺾듯 하여, 이것을 따라 절제하고 이것을 따라 몸가짐을 지켜서 그 차례에 맞는 것이 아니면 귀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면 몸을 숨김에 넉넉히 남은 곳이 있을 것이다. (중략) 마음은 귀나 눈보다 훨씬 범위가 넓으니 그 차례에 맞는 것이 아니면 마음속에서 움직이지 않게 하면 내 마음의 전체와 대용이 참으로 마음 사이를 떠나지 않게 되어 어디에 가든지 몸이 보존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중거는 몸을 숨길 안전한 곳을 찾으려는 데만 몰두하지만 연암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냈다.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는 원인을 중거 자신이 지니고 있으므로 그가 어디에 있든 사람들의 비방은 항상 그를 따라올 것이다. 비방을 멈추게 하고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에게 내재한 문제의 원인을 스스로 없애는 수밖에 없다. 그의 문제는 예의에 어긋난 방종한 행동과 말투이다. 그런데 그는 예의가 무엇인지 몰라서 지키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절제력이 부족하여 자꾸 정도를 넘어섰던 것이다. 게다가 그가 날마다 가까이 한 술과 건달 무리는 그를 점점 더 무분별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예와 정도를 넘어서려는 방종함을 스스로 절제하는 것만이 진정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예(禮)를 지키라는 연암의 조언은 지극히 유교적이다. 그런데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기발하고 재미있다. 중거가 지금의 위험만 피하고자 숨을 곳을 찾는 것이 얄팍한 술수일 뿐임을 연암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연암은 그것을 처음부터 비틀고 들어가는 대신에 중거의 눈높이에 맞춰 '정말로 숨기에 안전한 곳'을 일러주려 한다. 예에 어긋나는 것을 몸 안에 들이지 않는다면 비로소 그 빈자리에 스스로 몸을 들여서 보호할 수 있다,는 전개는 연암의 직관력과 스케일이기에 가능했다. 자칫하면 싱거운 잔소리로 들릴 법한 말에 갖은 양념을 쳐서 잡다하지 않고 맛깔스럽게 내오는 능숙함이 대단하다. 그의 능숙함의 근저에는 법고창신의 정신이 깔려있다. 몸을 몸 안에 숨겨라. 이것은 "천하를 천하에 감춰라"는 장자의 말을 중거의 상황과 '예'라는 키워드에 맞게 변용한 것이다. 현재의 흐름을 포착해내는 안목과 더불어 그 흐름에 맞춰 옛 것을 새롭게 되살려내는 법고창신의 정신. 그 덕에 중거는 "몸 안에 몸을 숨겨 보존하지 않음으로써 보존함"이라는 역설의 깨달음을 마음 깊이 얻을 수 있었다.

바위에 이름을 새겨봤자(발승암기 髮僧庵記)

이 글에서 연암은 김홍연이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연암이 풍악산에서 "나는 새의 그림자조차 끊어질 만큼 험준한 벼랑" 위에 새겨진 '김홍연'이라는 이름을 보게 된 것을 시작으로 가는 곳마다 그 세 글자와 마주치게 된다. 그런데 김홍연을 알게 되는 경위를 말하는 연암의 입담이 정말 재밌다.

"그 뒤 나는 나라 안의 명산을 두루 돌아다녀서 남으로는 속리산과 가야산에 오르고, 서로는 천마산과 묘향산에 올랐다. 궁벽하고 외진 곳에 이르게 되면 스스로 세상 사람들이 이르지 못한 곳 끝까지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늘 김홍연이 새겨놓은 글을 보게 되었는데 문득 화가 나 대관절 김홍연이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렇게 당돌하단 말인가 하고 꾸짖었다.

대체로 명산에 노닐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지극한 위험을 범하고 숱한 어려움을 물리치지 아니하면 기이하고 뛰어난 경관을 찾을 수 없다. 내가 평소에 지난날의 자취를 생각해보면 벌벌 떨면서 스스로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다시 산에 오를 때가 되어서는 홀연히 지난 번의 다짐을 잊어버리고 가파른 바위를 디디고 아득히 깊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썩어가는 나무다리와 말라버린 사다리에 몸을 붙이고서 종종 말없이 신명에게 빌어서 행여 스스로 돌아가지 못할까 벌벌 떨면서 두려워하다가 크게 새기고 붉은색 인주로 메운, 사슴 정강이 만한 글씨가 늙은 나뭇가지와 오래된 칡넝쿨 사이에 보이는 듯 마는 듯 서려 있으면 반드시 김홍연이었다. 그런데 이때에는 도리어 기쁜 마음이 마치 위험하고 어려운 때에 옛 친구를 만난 것 같아서 그 때문에 힘을 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기어 올라가곤 하였다."

개성을 존중한다는 오늘날에도 일정한 사회적, 상식적 기준이 있어서 여기에 어긋나면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다. 하물며 그 옛날, 떠돌아다니면서 험한 바위산마다 자기의 이름을 새기는 김홍연의 행적이 얼마나 기이하게 비쳤을까. 하지만 연암은 그에게 '괴상한 인물'이라는 딱지표를 붙이길 거부한다. 연암 자신도도 기이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기에 김홍연을 이해할 수 있던 것일까. 그는 우연히 만난 김홍연의 모습에서 젊은 시절의 호탕함을 알아채고 그를 인정한다. 저마다의 삶이 있고 저마다의 가치가 있을 수 있음을, 18세기를 살았던 연암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글에 의탁하여 세상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김홍연을 위해 연암은 게송을 짓는다. 연암의 붓을 통해 김홍연이라는 이름 석 자와 함께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포용을 마음속에 새겨볼 수 있다.

까마귀는 온갖 새가 다 검은 줄 알고, 백로는 다른 새가 희지 않은 것을 의아해 하는구나.
흰 새와 검은 새가 각기 옳다고 우기면 하늘도 그 송사에 싫증 내겠구나.
사람은 모두 두 눈이 갖춰져 있지만 한 눈을 감아도 잘 보인다.
어찌 꼭 두 눈이라야 밝게 본다 하겠는가. 한 눈뿐인 사람들 사는 나라도 있다 하네.
두 눈도 오히려 적다고 의심하여 도리어 이마에 덧붙이기도 하고,
다시 저 관음불은 모습을 바꾸면 눈이 천 개나 되는구나.
천 개의 눈이 다시 필요할 것인가? 장님도 검은 것은 볼 수 있다네.
김군은 병에 걸린 사람으로서 부처에 의지하여 자기 몸 보존한다네.
돈을 쌓아 놓고 쓰지 않는다면 거지의 가난과 다를 것이 뭐 있겠나.
뭇사람들은 각기 자기만족에 사는 법이니 꼭 서로 배울 것은 없지.
대심은 이미 뭇사람과 다른 길을 갔는데, 이 때문에 서로 의아하게 여긴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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