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앤스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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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이란?
작은 눈을 크게, 눈높이를 올리는 화장, 고정관념에 대한 먹칠, 인문학은 마스카라다.

▷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아트앤스터디를 어떻게 알게 되었나?
인문학은 늘 관심이 있다. 혼자 읽는 것과 강의로 듣는 것은 격하게 다르다. 아트앤스터디는 이재무시인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 무슨 일들을 해왔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어린이 책을 만들고 사회교육원 강사를 오랫동안 했다. 지금은 문예지 편집하고 시를 쓴다.

▷ 인문숲 리뷰어 활동에 어떤 기대를 하고 있고, 실제로 해보니 어떤가?
수업을 좀 더 열심히 듣게 된다. 아무래도 뭔가 써야 하니까 내적 충실이 더해진다고 할까.

▷ 듣고 있는 강좌 외에 관심 있는 강좌는? 혹은 이미 수강한 강좌가 있는지?
롤랑 바르트에 대한 모든 것에 관심이 있고, 요즘은 알랭 바디우의 『비 미학』에 관심이 있다. 이현우 <로쟈의 인문학 서재: 현대 러시아작가 7인을 만나다>는 이미 수강한 강좌다.

▷ 인문학 강좌가 실제 삶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인문학이 돈이나 직업이 된다면 이미 인문학은 유행이 되고도 남았을 것. 사유나 생각에 힘과 확신을 갖게 한다. 자신감을 주기도 하고…

▷ 내가 느낀 아트앤스터디, 그리고 내가 바라는 아트앤스터디는?
지금도 괜찮다. 강의실이 따뜻하고 다과가 준비되어 좋다. 고전라이브특강이 자주 열렸으면 좋겠다.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첫 강의에서 말랑말랑한 사랑이야기로 생각하지 말라던 위협은 불과 다섯 강의를 지나고 나서 롤랑 바르트의 ‘ㄹ’이 많이 들어간 혀가 꼬이는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이름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사랑의 주체’가 되는 순간이 올까? 한 장의 꽃잎이 꽃받침을 버리고 낙하할 때 전의 화려한 색깔과 탄성을 잃는 것처럼 세상은 현실과 유리된다. 그럼에도 그 순간 꽃잎은 편안하고 유유하다. 세상의 절정에서 문득 한 점으로 흩어질 때의 비현실적인 감각, 나는 과연 존재하기나 했었는가?

세상은 빈틈없는 시스템이다. 이런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살아간다. 잘살아 가기 위한 그들의 방식은 그냥 견디기(미련하지만 자신을 포기하면 제일 쉬운 방법이다.), 노력하기(스펙을 쌓는다든가, 성형을 한다든가.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성격을 고친다든가. 돈과 얼마간의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무기들이다.), 적극적으로 유희하기(개그맨이라던가 바보짓의 메타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몽상하기(꿈꾸기, 교회 가기, 등단하기, 문학이나 종교로의 이동은 시스템에서 다른 외부로 건너가지만 그 외부인 영역은 제도 안의 영역보다 더 충실하게 사회의 구조를 충실하게 수행한다.), 정신병원 가기, 정신병원이 싫다면 사랑하기(글쓰기, 소설이 아니라 소설적인 것, 드라마적인 것. 음악적인 것, 사랑의 유치함 속으로 추락하기),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생각보다 화끈하다. 그냥 견디기를 선택한 당신이라면 맨 마지막의 두 개를 권해 드리고 싶다. 정신병원 가기 혹은 사랑하기.

바르트식으로 사랑하기를 선택한다면 ‘사랑의 주체’가 되는 순간 현실과 유리된다. 그러나 미친 것이 아니므로 아직 ‘언어의 끈으로 세상과 있어져 있으므로 세상 안에서 유리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비현실적 상태 - 광기 담론을 할 때, 광기 무의식담론은 현실을 무시하고 하강 판타지다. 초현실적 상태 – 종교 담론, 선 담론, 자동기술 등 상승 판타지다.

그러나 사랑의 순간은 탈현실적 상태이다. 도시가 풍경으로 보일 때 내가 외부가 될 때 친숙함과 낯섦의 감각의 변증법이 생긴다. 사랑에 빠지면 어떤 상태를 보여주려 한다. 편지를 쓰거나 편지를 쓰는 상태, 광기의 포즈. 그러나 본질적 고독의 상태에서는 포즈가 없다. 가장 광기에 근접해 있다. 문장은 이 순간에 탄생한다. 휘겨에서 프레그먼트가 발상으로 반짝하는 것이 아니라 광기로부터 건져 올려 낸 슈만의 마지막 소나타처럼.

사랑의 주체는 예민하다. 살갗이 벗겨진 사람이다. 시니피에로 포장되지 않은 날것의 시니피앙, 욕망의 속살, 그 자체인 시니피앙. 살갗 없는 시니피앙의 주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농담’이다. 시니피에를 시니피앙으로 연결시킨 모든 것은 농담이다. 농담을 모르는 주체는 ‘진지함의 주체’다. 진지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물적 진지함과 진지스러움(정신, 도덕, 교양, 포즈로서의 진지함).

텍스트에도 두 가지가 있다. moderner Text - 지적인, 추상적인, 의미적인, 육체적인 것이 정신화된 텍스트들, 이 농담의 텍스트들. 그리고 anachronischer Text - 진부한 텍스트 ‘읽혀질 수 있는 텍스트’, 이것은 포장하지 않은 직설이다. 그러므로 음란하다. 음란한 것은 독서를 강요한다. 포장이 익숙해서 감춰진 것을 읽으려 하지만 헐벗은 텍스트는 노력하며 읽어야 한다.

신체적인 것이 정신화되지 않은, 상상적인 것이 추상화되지 않은, 피부 없는 속살이 시니피앙이 의미의 시니피에로 환원되지 않은 순박한, 유치한, 진지한 텍스트. 과거의 낭만적 가슴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랑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현대적 텍스트는 자기를 분석하며 현대적 러브스토리를 갖지만 낭만적 주체들은 외과적 텍스트이다.

표현(Ex +pression). 속살을 밖으로 짜내다란 뜻의 즉물적인 이 말은 현재 가장 코드화되어 있다. 내 사랑을 어떻게 글쓰기 할 것인가. 사랑의 글쓰기는 나를 둘로 나누는 일이다. 사랑하는 나와 글 쓰는 나, 사랑의 안에 있는 나와 사랑의 밖에 있는 나. 그래서 사랑의 글쓰기는 사랑을 탐색하기와 동일한 딜레마에 빠진다. 그 사람의 육체를 탐색할수록 매혹이 사라지는 딜레마. 마찬가지로 사랑에 대해 글을 쓸수록 사랑하는 나는 사라지는 딜레마. 사랑하는 나는 없어지고 사랑에 대해서 글을 쓰는 나만이 남게 되는 글쓰기의 혐오감. 뒤를 돌아보자, 코드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면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다가가는 글쓰기는 어떤 것일까?

사랑이 글이 된다면 그 글은 상상적인 것의 언어, 아담의 언어, 육체적인 언어, 자연의 언어, 모든 정신적인 것들도 남김없이 말해지는 언어, 유토피아의 언어일 것이다. 이 언어에 도착하기 위해선 언어의 신화로부터 깨어나기, 그러나 언어의 신화를 포기하지 않기, 그렇게 깨어나면서 언어의 진창(mottel)과 맞서기, 글쓰기가 아무것도 가져다줄 수 없음을 긍정하기, 시작만이 있는 글쓰기, 광기의 글쓰기일 것이다.

인간은 homo-signifiant다. 기호를 만듦으로써 모든 것이 기호로써 생산된다. 이것은 아담의 언어이며 육체적 언어이며 상상적인 것의 언어이며 자연의 언어이다. 자연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인데 감각 그 자체의 언어 속에는 감각의 모든 것들이 다 발현된다. 당신은 어떤 언어로 사랑을 쓰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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