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범일과 정취보살

◆ 범일의 탄생설화

▲ 국사성황당

대관령 옛길로 간다. 그곳 정상의 고갯마루에 있는 텅 빈 휴게소, 여기가 언제 그토록 번성했었든가 의아스럽다. 새로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이 휴게소는 버려져 있다시피 하다.
옛길은 시대를 물려주고 옛 이야기의 자리로 돌아간다. 시대에서는 물러서지만 세월은 묻어 있어서, 세월은 역사를 말한다. 역사라는, 인간이라는 이름으로 옛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서 대관령 옛길로 가 보았다. 텅 빈 휴게소에서 준비해 온 차를 한 잔 마신다. 커피 자판기도 고장 나 있다.
이곳에서 정상 쪽으로 난 샛길을 타고 올라가면 국사성황당이 나온다. 강릉 단오제가 열릴 때마다 성황신을 모시고 내려가는 곳이다. 음력 사월 보름에 사람들은 성황신을 찾아오는데, 단오제의 핵심은 사실 이 산신맞이에 있다고들 말한다.
여기에는 김유신과 더불어 산신으로 자리 잡은 또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범일(梵日,810～889) 국사이다. ‘국사성황’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승려가 산신으로 모셔지기란 매우 희귀한 일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 고개를 내려가 찾아 볼 곳이 있다. 바로 대관령 아래, 지금의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의 굴산사(堀山寺) 터이다.

▲ 굴산사 터

고개를 다 내려와 남대천 물이 길과 함께 나란히 달릴 즈음, 오른편으로 관동대학 안내 간판을 따라 꺾어 들어간다. 거기서부터는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어떻게 강릉이 예부터 이 일대의 큰 마을로 명성을 떨쳤는지 알 수 있을 만하다. 그런 들판을 한가히 가로지르는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보니, 아연 우뚝 선 당간지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옛 굴산사의 자취를 알려주는 하나뿐인 표지판이다.
출가와 중국 유학 등 범일의 공식적인 기록은 조금 뒤로 미룬다. 마흔이 넘어 고향에 돌아온 그가 거처한 절이 굴산사이다. 지금은 희미한 자취만 남긴 절터이지만, 대관령을 치어다보며 바다로 달려가는 들판에 덩그러니 서 있는 당간지주(보물 86호) 하나만으로도, 누구나 옛날의 위용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덩어리째 돌 하나를 온전히 써서 만든 이 당간지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여러 석재를 얼기설기 편집해 놓은 듯한 부도탑이 한켠 언덕에 서 있고, 거기 가까운 데에 범일의 어머니가 물을 마셨다는 우물 또한 석천(石泉)이라는 이름으로, 학이 아이를 감싸고 있던 바위가 학암(鶴巖)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에는 대관령으로 올라가 산신이 되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태어나 자란 범일은 강릉 사람들의 무엇이었단 말인가. 정말 처녀 잉태를 해서 이 세상에 왔더란 말인가.

▲ 범일 탄생 설화 : 처녀가 낳은 아이

굴산사 터는 지금 강릉 외곽에 자리 잡고 있지만, 이 마을의 한 처녀가 해가 뜬 표주박의 물을 마시고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다. 다름 아닌 범일의 어머니 이야기이다.

요 우에 굴산사라고 있넌데, 그 굴산사를 건설하기 전이지요. 고기에 인제 이씨가 살았넌지, 안씨가 살았넌지, 그건 모릅니다. 그 어머니 성은 모르는데, 그 어머니가 어느 촌가에 처녀인데, 아마 과년했던 모양이오.
그래 하루는 물을 일로 와서 물을 일라고서는 바가지다 물을 뜨니, 하늘서 동쪽에―말하자면 아침에 일찍 나갔던 모양이지요―해가 그만 그 바가지에 딱 당기거던요. 그래 이걸 먹은 뒤에 그래서 자연히 어린애를 뱄다 이거지요. 어린애 밴 지도 몰랐지요. 그래 열달쯤 나니 옥동자를 낳거던요.
그래 동네 사람이, 하아 아무 처녀가 어린애 낳다, 이러니 그 부모도 대단히 불명예시럽고 하니까 말이요, 그 부모도 모두 합작을 해서 그 한 바우―거그 가보면 큰 바우가 이렇게 예닐곱 게 있세요. 그 밑이는 모두 가리여서 비도 안 맞고 이런 뎁니다. 저도 어려서 놀로 많이 가고 이랬넌데―그래 거기다 놔 놓고는, 참 집에 내레왓다가, 애기를 죽으라고 말이야 갖다 놨넌데.
한 사날 후에 생각해 보니까, 이왕 죽었시면 어듸 묻어 주드래도 가 봐야겠다 해서, 그 어머니가 올라가 봤단 말이요. 올라가니 학이 확 날러가넌데, 보니 그 밑에 어린애가 있거던. 그래 인제 학이 품고 있단 말이요.
품고 앉았는데, 그래 뭘 멕였는지 가 보니까, 어린애가 킥킥 웃고 말이여, 아조 건강하단 말이여. 하아 이거 사람 도리가 아니구나, 이거 귀한 어린애니까 핵이들이 보호했시니까, 반다시 후세에 훌륭한 사람이 된다. 이래서 그 놈을 데레다 키웠거던요. 키워서 그 사람이 인제 장성해서 그래서 범일국사라는 훌융한 중이 됐어요.
굴산사란 절을 이룩한 것이 범일국삽니다.(임석재,『한국구전설화』4, 최덕규 제보, 1975. 11. 6에서)

◆ 범일의 생애

▲ 범일의 생애에 대한 공식 기록

범일의 가계(家系) : 다소의 이견이 있긴 하지만 오늘날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김주원(金周元) 쪽의 후손으로 보고 있음.

※김주원 - 원성왕(785～798재위)과의 왕위 다툼에서 진 다음 강릉으로 그 터전을 옮긴 유력한 왕족.『삼국유사』에서도 왕위쟁탈전 소개. 김주원의 강릉 이주로 인해 이곳에 김씨 성이 대성을 이룬 계기가 됨.

※범일의 어머니 - 토호 집안 출신으로 봄.

→ 그런 배경으로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범일이 이 지역에서 크게 활동할 수 있었다.
: 범일은 이름을 품일(品日)이라고도 하는데, 아버지는 명주도독을 지낸 김술원(金述元)이고, 어머니는 문씨이다. 태양을 머리 위로 받드는 꿈을 꾸고 13개월 만에 낳았다고 한다. 15세에 출가하였고, 20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이듬해인 831년 2월에 왕자 김의종과 함께 당 나라로 갔다.
범일의 중국 체류 기간은 17여 년이다. 그 무렵 선사들의 중국 유학 기간으로 본다면 평균적인 정도이다. 귀국한 범일이 명주 도독의 청을 받아 굴산사로 온 것은 851년이다. 귀국하고 4년 뒤의 일이거니와, 그 뒤에는 왕들의 이어지는 간곡한 요청에도 응하지 않고 절을 지켰다.

▲ 범일과 정취보살

『삼국유사』에서 범일은 어떤 이야기의 뜻 깊은 조연으로 한번 등장.
→우리는 그가 어떻게 성황당 산신이 될 만큼 민중의 지지를 받게 되는가 짐작.

중국에 유학하는 동안, 범일은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서 한쪽 귀가 잘린 어린 사미승을 만난다. 소년은 자신도 강릉 사람이라고 말하며, 고향에 돌아가거든 낙산사 앞 자기 집을 찾아 어머니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 부탁한다. 앞서 소개한 「낙산의 두 성인 관음과 정취 그리고 조신」조의, 범일이 정취보살(正趣菩薩)을 만나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신라로 돌아온 범일은 무심하게도 소년 사미승과의 약속을 잊어 버렸다. 사미승이 범일의 꿈속에 나타나 이를 원망한 것은 그로부터 8년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무슨 까닭으로 어린 아들을 중국 땅 먼 곳까지 보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지만, 범일이 찾아갔을 때, 뜻밖에 이 여자는 사미승만한 어린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었다. 그러면 이 아이와 소년 사미승을 연결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다. 아이는 개울가에서 늘 금빛 나는 동자와 함께 논다고 말한다. 불현듯 어떤 생각이 범일의 뇌리를 스친다. 어린 아들이 말한 곳으로 달려가 모래를 파보니 한쪽 귀가 잘린 정취보살상이 나왔다.

→ 중국이 아닌 신라 땅에서의 ‘보살 만나기’의 의미
: 신라인의 불교에 대한 철저한 주체성과 자주성을 알 수 있다.

▲ 정취보살

‘정취(正趣)’라는 말 그대로 극락 또는 해탈의 길로 빨리 들어서게 한다는 보살.
‘다른 길로 가지 않는다’, 또는 ‘목표를 향하여 묵묵히 걸어간다’는 뜻을 가짐. ‘무이행보살(無異行菩薩)’이라고도 함.

ㆍ정취보살은 『화엄경』의 「입법계품」에서 나옴.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만날 때 29번째로 등장. 관음보살을 만난 바로 다음.
선재동자가 보살의 길을 어떻게 갈 것인지 묻자,
“선남자여, 나는 보살의 해탈을 얻었으니, 보문속질행해탈(普門速疾行解脫)이라고도 부른다” 하고 대답.
→ 자신이 해탈로 향하는 넓고도 빠른 길을 얻었다는 말.

ㆍ범일이 만나고자 했던 보살의 상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고 해도 무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