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 자체가 환(幻)
▲ 요술쟁이의 철학
요술쟁이는 수놓은 모직물 보자기를 탁자위에 펼쳐 놓았다. 보자기 한 구석을 약간 들어 주먹만한 자줏빛 돌
한 개를 집어내더니 칼 끝으로 조금 찔렀다. 그리고 돌 밑에 잔을 바치니 소주가 조금씩 흘러 내렸다. 잔이
차면 그치는데 여러 사람들이 다투어 돈을 꺼내 술을 사먹는다. 사괴공을 청하면 돌에서 사괴공이 흘러나오고,
불수로를 청하면 돌에서 불수로가 흘러나오며, 장원홍을 청하면 장원홍이 흘러나온다. 한 종류만 능한 것이 아니라
청하는 대로 응한다. 한 줄기 매운 향기가 위에 들어가면 불이 붉어진다. 연거푸 수십잔을 쏟더니 홀연히 돌이
없어져 버렸다. 그런데도 요술쟁이는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으며 멀리 흰구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돌이 하늘 위로 올라갔소이다.”
이같이 요술쟁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오고가며 요술을 부린다.
요술쟁이는 커다란 유리 거울을 탁자 위에 놓고 시렁을 만들어 세웠다. 이때 요술쟁이는 여러 사람들을 불러서
거울을 열어 구경하게 하였다. 여러 층 누각과 몇 집 전각이 단청을 곱게 했는데, 관원 한 사람이 손에 파리채를
잡고 난간을 따라 서서히 걸어갔다. 아름다운 계집들이 서넛씩 짝을 지어 혹은 보검을 지니고 혹은 금병을 들고,
혹은 생황을 불고 혹은 비단공도 차는데 구름 같은 머리와 아름다운 귀고리가 묘하고 곱기 비길바가 없었다. 방
안에 수많은 기물들은 종류마다 보배로운 것이어서 참으로 세상에서 부귀가 지극한 이들 같았다. 이에 사람들은
부러움을 참지 못하여, 서로 구경하기에 푹 빠져서 이것이 거울인 줄도 잊어버리고 뚫고 들어가려 했다.
이때에 요술쟁이는 구경꾼들을 꾸짖어 물리치고 즉시 거울 문을 닫아 오래 보지 못하도록 했다. 요술쟁이는 한가로이
걷다가 사방을 향하여 무슨 노래를 부르고는 또 거울 문을 열어 여러 사람을 불러 와 보라고 했다. 전각은 적막하고
누사는 황량한데 일월이 얼마나 지났는지 아름다운 여인들은 어디론가 가고 없고 한 사람이 침상 위에서 옆으로
누워 자는데, 옆에는 아무런 기물도 없었다. 손으로 귀를 받쳤고 정수리에서는 김 같은 것이 연기처럼 떠오르는데,
처음은 가늘고 끌은 둥글어서 모양이 마치 늘어진 젖통 같았다. 종규가 누이를 시집보내고 올빼미가 장가를 드는데,
버들 귀신이 앞에서 인도하고 박쥐가 기를 들이고는 이마에서 나오는 김을 타고 올라가서 안개 속에서 논다. 잠자던
자는 기지개를 켜면서 깨려다가 또 잠이 드는데, 갑자기 두 다리가 두 수레바퀴로 바뀌는데 바퀴살은 아직 채
덜 되었다. 이때에 구경꾼들은 섬뜩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어 거울을 가리고 등을 돌려 달아났다.
세계의 몽환이 본래 이와 같아서 거울 속의 염량 변천이나 꺽이고 끊어지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인간 세상의
가지가지 일들도, 아침에 무성했다가 저녁에 시들고 어제의 부자가 오늘은 가난해지고 잠깐 젊었다가 갑자기 늙는
것이 마치 꿈속에 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죽거나 사는 일이나 있거나 없는 일들까지 무엇이 참이요 무엇이
거짓이리오. 세상에 착한 마음을 지닌 사내와 보살심을 지닌 형제들에게 말하노니, 환영이 세상에 몽환 같은 몸으로
거품 같은 금과 번개 같은 비단으로 인연이 얽어져서 기운에 따라 잠시 머물를 뿐이니, 원컨대 이 거울을 표준삼아
덥다고 나아가지 말고, 차다고 물러서지 말며, 있는 돈을 흩어서 가난한 자를 구제할지어다.
◆ 우리는 무엇으로 보는가?
▲ 환희기후지
이날 홍려시소경 조광련과 의자를 나란히 하고 요술을 구경했는데, 내가 조경에게 이렇게 말했다.
“눈이 시비를 분별 못하고 진위를 살피지 못한다면, 없어도 된다고 하더라도 좋을 것입니다. 항상 요술을 부리는
이들에게 속는 것은 눈이 망령되지 않다 할 수 없는데 눈으로써 밝게 본다는 것이 도리어 탈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요술을 잘하는 자가 있더라도 소경에게는 눈속임을 할 수 없을 것이니 눈이란 과연 일정한 것일까요.”(조경)
“우리 나라에 서화담 선생이란 분이 있는데, 그분이 길에서 우는 자를 만나 네 어찌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자가 대답하기를 ‘내가 세 살에 소경이 되어 이제 40년이 되었는데, 이전에는 걸음을 걸을 때는 발을 의지해서
보고, 물건을 잡을 때는 손을 의지해서 보았습니다. 목소리를 들어 누구인지를 분별할 때는 귀를 의지해서 보는
것이요, 냄새를 맡아 무슨 물건인지 살필 때에는 코를 의지해서 보는 것이었습니다. 딴 사람들은 두 눈만 가졌지만
나는 수족과 코 귀 모두 눈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한 구태여 수족과 귀와 코뿐이었겠습니까. 해가 이르고
늦은 것은 낮에 피로한 것으로 보고 물건의 형용과 빛깔은 밤에 꿈으로 보아서, 아무런 장애도 없고 의심과 혼란도
없었습니다. 이제 길을 걸어오다가 홀연히 두 눈이 맑아지고 동자가 저절로 열려 천지의 넓고 큼과 산천의 어지럽게
얼킴 등 만물이 눈을 가리고 여러 의심이 가슴을 막게 되었습니다. 수족과 귀와 코는 착각을 일으키고 뒤바뀌어
버려서 이전의 일정했던 감각을 잃고 보니, 살던 집을 잊어버려도 돌아갈 방법이 없으므로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화담 선생은 말하기를 ‘네가 네 길잡이에게 물어보면 길잡이가 응당 스스로 알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그가 ‘내 눈이 이미 밝았으니 길잡이에게 물어봐야 무엇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선생은 말하기를 ,‘도로 네 눈을
감으면 네가 선 자리가 곧 네 집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자면, 눈이란 그 밝음을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오늘 요술을 구경하는 데도 요술쟁이가 눈속임을 해서 속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보는 자가 제 자신을 속이는 것일
따름입니다.”(연암)
“요술의 술법은 비록 천변만화를 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요술이 있으니,
그것은 크게 간사한 자가 충성스러운 체하는 것과 향원이면서도 덕행이 있는 체하는 것일 겁니다.”(조경)
▲ 이목을 믿는 자는 병이 든다.
요술에서 속지 않기 위해서는 눈만을 너무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눈만을 믿는 순간 요술에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소경이 요술에 속지 않음은 이와 같은 이치다.
세상에 대한 인간의 인지 능력은 오로지 눈이나 귀에 의존하지 않는다. 온 몸 전체의 각각의 지각 기관들의 비율이
우리와 세계를 만나게 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그런데 눈이나 귀와 같은 두드러진 지각 기관에만 너무 의존할 경우
인간이 세상을 만나는 방식은 협소해 지고 결국 그 이외의 감각으로만 보이는 세계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근대의 시각 중심적 문화는 이러한 각각의 지각 기관들의 균형 잡힌 비율을 깨뜨려 우리와 세계의 만남에
있어 그 시작에서부터 일그러진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함은 바로 이와 같은
이치에 따름이다.
인간이 세상과 만나는 방식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각각의 지각 기관들의 관계와 배치 속에서 즉 그 사이에서 이루어지기에
사실 대상 세계는 원래 바깥에 외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각각의 지각 기관들의 만남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다.
마음이 밝다고 함은 바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각각의 지각 기관들이 균형 잡힌 비율로써 서로 만나고 있어 그
사이에서 밝은 세상을 발생시키고 있다는 의미이다. 즉 도는 사이에서 발생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