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강 일야구도하기 Ⅰ

◆ 다시 열하로

▲ 열하에서의 호출, 그리고 연암의 갈등

관내의 연경(북경)에 도착하였으나 황제는 만리장성 밖 열하, 피서산장에 있다. 황제가 관외에 있다는 사실이 일행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역사의 사실들은 황제가 없는 연경의 위태로움으로 인하여 연암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조선 사신단에 대한 황제의 특별한 총애로 결국 열하행이 조급하게 결정된다. 그러나 먼 길을 겨우 쫓아와서 안장을 끄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피곤이 채 가시지도 않은 연암은 열하행을 망설이게 된다. 그러나 열하의 특별함을 이야기하는 정사 박명원의 권유로 함께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그제야 인마를 점고해보니, 사람들은 모두 발이 부르트고, 말은 여위고 병들어 제때에 열하에 당도할 것 같지 않아 새로이 인원을 추린다. 연암 역시 장복이를 떨어뜨리고 창대만 데리고 가기로 한다. 장복은 이별을 슬퍼하며 작별을 고하는데 연암의 이별론이 장광설로 펼쳐진다.

▲ 연암의 이별론

인간의 가장 괴로운 일은 이별이요, 이별 중에서 생이별보다 괴로운 일은 없을 것이다. 대체로 하나는 살고 또 하나는 죽고 하는 그 순간의 이별이야 구태여 괴로움이라 할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예로부터 인자한 아버지와 효도하는 아들, 믿음 있는 남편과 아름다운 아내, 정의로운 임금과 충성스런 신하, 피맺힌 벗과 마음 통하는 친구들이 서로 죽음으로 이별할 때에 서로 손을 잡고 눈물지으며 뒷일을 부탁함은 이 천하의 부자, 부부, 군신, 붕우가 다 한가지로 겪는 일이요, 사라마다 한결같이 느끼는 순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이별의 괴로움은 하나는 가고 하나는 떨어지는 때의 괴로움보다 더하지 않다.

이별에 있어서는 그 장소가 또한 괴로움을 돋우는 것이니, 그 장소는 정자도 아니며, 누각도 아니며, 산도 아니며, 들판도 아니요, 다만 물을 만나서야만 격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 물이란 반드시 강과 바다처럼 커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도랑과 개천처럼 작아도 상관이 없다.

◆ 야출고북구기 夜出古北口記

▲ 조선 5천년 최고의 문장

연암은 감회에 젖어 만리장성을 넘었고 열하에 도착해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의 문장으로 다듬어 <야출고북구기 夜出古北口記>라는 제목을 붙였다. <야출고북구기 夜出古北口記>는 구한말인 1990년 <연암집>을 발간하면서 <열하일기>의 명문장들을 대거 발췌, 수록한 창강 김택영이 ‘조선 5천년 이래 최고의 명문장’으로 평가한 바 있고, 연암 자신도 “본국으로 돌아가는 날에 누가 열하 여행의 소감을 물으면 이 기록을 내보여서 머리를 모아 한 번 읽고 책상을 치면서 기이하다고 떠들어보리라”라고 했을 정도로 자신이 있어 했던 글이다.

▲ 밤에 고북구를 나서며. 夜出古北口記

연암 일행은 동북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사흘째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강행군이 이어지고 있다. 견마잡이 창대는 5일 밤 냇물을 건너다 말발굽에 발을 밟혀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해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연암은 하는 수 없이 직접 말고삐를 잡고 길을 나선다.
밀운을 지나면서부터는 오르막이 많아지며 지세가 가팔라지고, 계곡을 흐르는 물살아 사납다. 저녁에 석갑상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러 밥을 지어먹고는 다시 길을 떠난다. 이미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산길이 이어진다.
성城 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거리가 제법 번화하지만 이미 밤이 깊었으므로 자세히 구경할 수 없다. 술을 사서 조금 마시고는 곧 길을 떠난다. 성은 만리장성이 산 능선을 타고 지나는 곳에 세워져 있다. 이 성은 고북구라 불린다. 이곳으로부터 장성을 따라 동쪽으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는 700리요, 서쪽으로 거용관에 이르기까지는 280리인데 거용관과 산해관의 중간에서 장성의 요새로는 고북구가 가장 중요한 곳이다. 예로부터 몽고가 중원으로 쳐들어오는 입구가 되었기 때문에 세 겹으로 된 관문이 설치되어 있다.
밤이 이미 삼경이 되었다. 연암은 말을 타고 관문을 빠져나간다. 세 겹의 관문을 빠져나간 그는 장성 아래 말을 세우고 까마득한 성을 올려다본다. 높이가 10여 길이나 된다. 연암은 말에서 내려 붓과 벼루를 꺼낸다. 일행은 모두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어두운 성벽 아래 연암만 혼자 남았다. 달은 이미 기울고, 물소리는 요란하며, 가을바람은 처량하고, 반딧불은 이리저리 날아 혼자 있기 무서울 만도 하지만 연암은 오히려 흥이 난다. 조선사신으로는 최초로 만리장성을 넘어 국경 밖으로 나가는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장성에 이름 석자라도 쓸 요량으로 패도를 뽑아 벽돌 위의 짙은 이끼를 긁어낸다. 그런데 먹을 갈자니 물이 없다. 연암은 관내에서 술 마실 때 몇 잔을 남겨 안장에 매달아 놓았던 술을 별루에 쏟는다. 밝은 별빛 아래서 술로 먹을 갈고, 찬 이슬에 붓을 적시어, 장성을 어루만지며 몇 자 적기를,
“건륭 45년 경자 8월 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이 이곳을 지나다.”
서까래처럼 글자를 크게 쓰고, 만리장성의 고사도 시로 지어 멋들어지게 써 갈기고 싶지만 붓도 가늘고 먹도 모자라니 이렇게 흔적만 남길 수밖에 없다. 조선인 박지원은 감격에 겨워 이렇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별빛 아래 크게 한번 웃고는 “나는 서생으로서 머리가 희어서야 한 번 장성 밖을 나가는구나.”하고 탄식한다.
글쓰기를 마치고 사방을 둘러본 연암은 이곳이 역대로 치열한 전쟁터였음을 떠올린다. 당나라, 거란, 여진, 원, 명이 모두 이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군사를 주둔시켰다. 지금은 평온한 시절이지만 성 아래가 모두 과거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라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땅이 음산하다.
마침 달이 초승달이라 산 능선에 잠기며 떨어지려 하는데, 그 빛이 싸늘하기가 갈아세운 칼날 같다. 조금 후 달이 더욱 능선 아래로 기울자 뾰족한 두 끝만 남아 불빛처럼 붉게 변하면서 횃불 두개가 산 위에 꽂혀 있는 것 같다. 북두칠성은 이제 반이 관안으로 잠겼다. 벌레소리는 사방에서 일어나고 긴 바람은 숙연한데, 숲과 골짜기가 함께 운다. 짐승 같은 언덕과 귀신 같은 바위들은 창을 세우고 방패를 벌여놓은 것 같고, 큰물이 산 틈에서 쏟아져 흐르는 소리는 마치 군사가 싸우는 소리가 말이 뛰고 북을 치는 소리와 같다. 하늘 밖에 학이 우는 소리가 대여섯 번 들리는데, 맑고 긴 것이 피리소리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