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에서 근대까지의 아이스테시스
고대의 철학자들은 아이스테시스를 추상의 능력인 이성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폄하했다. 고대의 철학자들은 그것을 주로 인식론적 이유에서 오류의 근원으로 폄하했고, 이후 중세의 신학자들은 육체의 쾌락과 관련, 도덕적 이유에서 그것을 악의 근원으로 경멸했다.
아이스테시스에 대한 고대인들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경멸, 아이스테시스의 주체인 몸에 대한 중세인들의 도덕적 경멸은 근대 합리주의 철학 속에서 세속적인 형태로 종합되어 이론화한다. 근대 철학의 창시자인 데카르트는 이성과 감각을 대립시켜, 감각은 오류의 근원이고 정념은 이성으로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합리주의적 급진성이 근대라는 한 시대의 에피스테메를 이루며 이제까지 유지되어 왔고, 탈근대의 철학자들은 바로 여기에 반기를 들고 있는 것이다.

◆ 바움가르텐과 근대미학의 원형
근대미학은 합리주의의 태내에서 아이스테시스의 부활과 함께 탄생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아이스테시스를 이성의 지배 아래 종속시키는 한에서의 부활이었다.
오늘날 미학이란 학문의 이름을 준 바움가르텐의 ‘Aesthetica’는 감각적 지각이라는 뜻인데, 그는 이를 <저급한 인식의 學>이라 부른 바 있다. 감각적 지각은 이성의 하위에 배치되고, 예술은 철학에 간단히 종속되고 만다. 그 결과 감각에 대한 이성의 우위, 예술적 진리에 대한 철학적 진리의 우위라는 근대미학의 원형이 성립한다.

◆ 현대의 감각론: 유물론적 감각론과 미디어의 감각론
바움가르텐이 합리주의의 관점에서 감각을 이성의 아래로 포섭했다면, 들뢰즈는 감각을 감각 그 자체로, 존재론적으로 복권하려 한다. 즉 기존의 관념론적 접근에서 벗어나 유물론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감각이 이성과 관계 맺지 않고 순수한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은 미학 사상 최초의 사건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후 벤야민과 맥루언 등에게서 새로운 탈근대적 미학 이론이 펼쳐지게 된다.

◆ 시각과 청각의 특권적 지위

감각의 요소: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평형감각, 통각)

대부분의 문명권에서는 시각과 청각이 감각요소 중 가장 특권적인 지위를 갖는다. 예술 역시 시각과 청각을 대상으로 한다.

서양 문명의 두 기둥
헬레니즘: 시각 중심의 문화 ↔ 헤브라이즘: 청각 중심의 문화

◆ 감각의 위계질서
고대에서 근대까지는 감각에 위계 질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중 시각에 가장 높은 위상을 부여한 까닭은 눈이 신체의 가장 높은 곳, 즉 땅(육체)이 아닌 하늘(영혼)에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상과 직접 접촉해야 하는 다른 감각들과 달리 비(非)물질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상위를 차지했다. 시각과 청각은 물질과 멀리 떨어져서도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명권의 인간이 물질을 경시하고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에 들어와 시각의 절대성에서 벗어나 하위 개념이었던 촉각이나 후각 등을 부각시키려는 탈근대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 탈근대: 촉각의 부상
현대 미학의 두 기둥인 유물론적 감각론과 미디어의 감각론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바로 촉각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생명을 가진 모든 동물은 촉각을 가지고 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동물들은 있으나 촉각이 없는 생명체는 없다. 여기서 모든 감각의 근원은 촉각이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촉각이 모든 감각의 밑바탕이며, 다른 감각 요소는 촉각에서 분화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촉각은 인간의 고귀한 영혼을 증명하는 시각과 청각과 달리 지극히 육체적이고 동물적인 감각으로 치부되어 지금껏 폄하되어 왔다.
이후 근대 철학에 대한 반발로 대대적인 패러다임의 전복이 일어나는데, 감각론에 있어서 그 전복은 바로 기존에 갖고 있던 시각에 대한 절대성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촉각이라는 감각이 복권되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 고대 그리스의 감각론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미 시각과 청각에 특권적인 지위가 주어져 있었다.
호메로스의 헤시오도스는 시지각을 가리키는 ‘idein'을 감각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크세노파네스는 “신은 온전히 눈이고, 온전히 정신이며, 온전히 귀다.”라고 하였으며, 에피카르모스는 “오직 오성만이 보고, 오직 오성만이 듣는다. 다른 것은 귀가 먹고 눈이 멀었다.”라 하였다. →사물을 온전히 인식하는 감각기관은 눈과 귀 뿐.

◆ 고대 그리스 감각론의 특징
흥미로운 것은, 고대 그리스인들은 감각을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향한 능동적 작용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에 의하면 듣기는 영혼으로부터 따뜻하고 섬세한 공기의 흐름이 용출하는 것이고 보기 역시 눈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빛이 뿜어져 나와, 그 빛이 대상을 감싸고 만져서 파악하는 것이다. 또 피타고라스는 감각을 4원소(물/불/공기/흙)와 연관시켜 설명했다.
“눈은 불에서 나온 빛을 받아들이고, 귀는 공기의 소리들을 지각한다.”

◆ 대립에서 동일성으로
초기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감각론은 ‘대립’의 원리, 즉 감각은 감각하는 것과 감각되는 것의 대립을 통해 성립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엠페도클레스는 이를 ‘동일성’으로 설명한다. 가령 눈은 원소 물과 불을 함유하고 있어 불을 통해 밝은 것을 보고, 물을 통해 어두운 것을 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최초로 후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이어지는 주객동일성의 원리가 표명된다.

◆ 데모크리투스의 감각론: 감각과 이성의 분리
데미크리투스에게서 최초로 감각과 이성의 구별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인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진정한 인식과 어두운 인식. 어두운 인식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인데, 어두운 인식이 더 자세히 보거나 듣거나 냄새맡거나 맛을 보거나 만질 수 없어 더 섬세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때, 그때는 감각들 대신에 더 섬세한 인식기관이 소유한 진정한 인식이 등장한다.”
여기서 최초로 감각과 인식의 인식론적 대립이 등장한다. “흔히들 색깔과 달콤한 것과 쓴 것이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오직 원자와 빈 공간뿐이다.” 진정한 현실은 아톰과 빈 공간 뿐이며, 나머지는 다 허상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원자론적 감각론에는 대단히 현대적인 요소가 있다. 가령 세계가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가상이라는 최근의 미디어 미학의 발상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