色·人文學
색, 도취와 탐닉, 위험과 제한에 대하여

7강. 하얀색 : 순수와 위선

풍요와 결핍

하얀색은 색 없는 색, 모든 색을 밀어내는 색이다. 하얀색은 아무 색도 보여주지 않는다. 빛의 스펙트럼을 모두 반사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얀색의 정체를 알 수 없다. 하얀색은 그러므로 자신을 감추고 있는 색이다. 역설적인 것은 하얀색은 다른 색의 빛을 비추는 순간 즉시 사라진다는 것이다. 하얀색은 어디에도 없다. 하얀색이 하얀색으로 있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배타성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가장 오염에 취약한 색이고 가장 자신을 잃기 쉬운 색이기 때문이다. 순백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순백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접촉해서는 안되며 무색의 빛을 제외한 어떤 색도 가까이 해서는 안된다. 아주 조금의 접촉만으로도 하얀색은 자신을 잃어버린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하얀색은 실제로 순백이 아니다. 하얀색의 스펙트럼도 꽤 넓어서 회색끼가 도는 하얀색, 노르스름한 하얀색, 붉으스레한 하얀색, 푸른빛이 도는 하얀색 등 다양한 하얀색이 있다. 색이 시각적인 것뿐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임을 감안하면 다양한 촉감이 여기에 보태진다. 어떤 하얀색은 눈을 찌르며 어떤 하얀색은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거친 하얀색이 있는가하면 매끈한 하얀색이 있고 차거운 하얀색과 따뜻한 하얀색이 있다. 이 모든 다양한 하얀색을 넘어 진정한 하얀색은 관념 속의 순백이다. 일본의 디자이너 하라 켄야는 하얀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하얗다고 느끼는 감수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을 찾아서는 안된다. 하얗다고 느끼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처음 만나는 하얀색은 어머니 젖의 색이다. 유백색(乳白色)은 따뜻하고 포근하다. 유백색은 배타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포용적인 이미지를 가진다. 젖빛은 풍요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젖빛의 하얀색은 알의 하얀색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때 하얀색은 둥글다. 젖빛 하얀색의 이미지에서 인도인들은 세상에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의 영물들의 이미지를 창조해냈다. 세상은 온통 젖의 바다로 되어 있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시작되기 전, 그 세계가 끝난 후에도 계속 존재하는 우주의 보존자인 비쉬누신은 이 젖의 바다에 누워 끝도 없는 잠과 꿈을 반복한다. 젖의 바다는 모든 존재를 낳는 근원이며 다시 낳은 것들을 거두는 근원의 근원이자 바탕의 이미지이다. 이 바다를 신들과 아수라들이 함께 휘젓자 풍요를 가져다주는 영물들이 튀어나왔다. 하얀 코끼리 아이라바타, 하얀 말 윳차이스바라, 불사와 영생의 음료인 하얀 소마 등이 생겨났다. 이 하얀 것들은 모두 우주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영적인 선물들이다. 여기서 하얀색은 우주적 모성의 이미지다.

조개 속으로 들어간 우라노스의 정액에서 태어났다는 아프로디테의 탄생신화 역시 생명의 정수와 관련된 태초의 풍요로움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이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유백색 진주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진주는 모성과 다산, 풍요를 가져다준다고 생각되었다. 하얀색 진주알 속에는 아름다움, 상처와 치유, 바다의 풍요로움, 어머니의 젖, 아버지의 정액의 이미지들이 뒤섞여 있다.

하얀색이 상처와 치유, 모성의 자애로움 손길의 이미지를 건드릴 때 ‘백의관음’이 탄생한다. 세상의 번민에 빠진 자를 구원한다는 관세음보살을 그리면서 고려인들은 ‘백의관음’ ‘수월보살’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하얀 옷을 입는 물과 달의 보살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남아있는 고려관음상의 옷 색은 하얀색이 아니다. 구지 하얀색을 찾는다면 겉에 드리워진 투명한 사라를 하얀색의 이미지로 볼 수도 있으리라. 고려인들이 느꼈던 관음의 하얀 옷은 하얀 달빛과 투명한 물빛에서 연상되는 모성의 하얀색이었을 것이다.

모성의 하얀색의 이미지를 보다 더 잘 드러내는 것은 백자 달항아리다. 달을 닮은 형상은 알과도 닮았고 항아리의 하얀색은 유백색에 가깝다. 배타적인 흰색, 차거운 흰색이 아니라 따스하고 부드러우면서 다른 색들을 포용한 것과 같은 두터운 하얀색이다. 조선의 백자와 공예품을 좋아했던 일본의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흰빛이라 해도 저 싸늘하고 날카로운 순백의 명나라 자기와 얼마나 다른가 말이다. 그것은 언제나 연한 물빛을 하고 있든지 혹은 분백에 싸여있으며 또는 음울한 회백색을 띠고 있다. 거기에는 안을 향해 가라앉으려는 마음의 드러남이 있지 않은가.” 조선의 아름다움을 ‘비애미’라고 칭했던 그는 아마도 일본인의 미의식의 그림자를 투사했던 것같다. ‘비애미’는 조선의 색감보다는 오히려 일본의 색감에 더 잘 어울리는 듯 하다. 일본의 색감은 단정하고 선명하고 깨끗하지만 날카로워서 벨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조용하고 단정한 일본인들의 미의식의 뒤편에는 슬픔이 깃들어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민족이 좋아했다던 하얀색은 ‘소색(素?)’이라 불리는 흰색이다. 이 색은 천연섬유 그대로의 상태에서 나오는 하얀색을 말한다. 가공이나 착색을 거치지 않은 자연의 하얀색이다. 당연히 순백이 아니다. 소색의 ‘소(素)’란 ‘누에에서 빼내는 원사가 원사 그대로 내려오다’라는 의미에서 생겨난 ‘없을 소’이다. 말하자면 명주의 색인 것이다. 천연 명주의 색은 누르스름한 광택이 도는 하얀색이다. 광목도, 명주도 모두 순백이 아니라 흐린 베이지에 가깝다. 당연히 차거운 흰색이 아니라 부드러운 흰색이다. 그러나 색을 감각의 문제가 아니라 관념의 문제로 여겼던 성리학자들은 ‘소색’을 중용의 색이라 여겼다. 공자의 <후소회사(後素繪事)>에는 이런 말이 있다. “다섯 가지 색은 소색이 중개역할을 하고 다섯가지 덕은 예가 중개역할을 하는 것으로 예는 오덕 중에 하나요, 소색은 오색 중에 하나인 까닭이다.” 그러나 색이 감각적 취향을 너머 관념의 표지가 될 때 이데올로기의 표현으로 사용되고 당연히 제한과 억압의 굴레를 걸치게 된다. 조선의 하얀색도 그러했다. 울긋불긋한 색은 점잔치 못하며 유치하며 천박하다는 편견이 동반되게 된 것이다.

백색 이데올로기

하얀색은 빛을 가장 잘 반사한다. 하얀색의 속성은 빛의 수용이 아니라 빛의 거부, 빛의 반사다. 하얀색이 빛을 거부하므로 역설적으로 가장 빛나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하얀색은 빛의 표지로 사용된다. 이것이 색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빛은 하얀색으로 작열한다. 하얀색은 눈을 멀게 한다. 그러나 강렬한 빛은 우리에게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며 이질적인 것을 아무 것도 허용하지 않는 배타성은 초월적인 이미지를 남긴다. 하얀색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저 너머에 있는 것,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신, 오염을 허용하지 않는 투명함, 깨끗함, 순수의 이미지를 낳는다.

보티첼리의 그림 <프리마베라>에는 하얀색 옷을 입는 세 명의 여신이 춤을 추고 있다. 이들은 ‘카리테스(Karites)’라 불리는 우아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아글라이아, 에우프로시네, 탈리아 라 불리는 이 세 명의 여신은 각각 밝음, 기쁨, 충만함을 의미한다. 이들은 태양빛의 신인 헬리오스와 달빛의 신인 아이글레의 딸들이다. 중앙에 서있는 베누스가 주재하는 세계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빛으로 나타나고 빛에서 우아함을 구성하는 세 가지 속성이 드러난다. 이들의 하얀색 옷은 당연히 빛의 아름다움이자 우아함의 표지이다.

보티첼리의 시대였던 르네상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18세기 유럽의 신고전주의 시대 역시 그리스적인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당대의 독일의 미술사가였던 빈켈만은 고전적 아름다움을 이렇게 정의했다. “깊은 샘에서 떠 온 순수한 물과 같이...다른 모든 성분을 깨끗이 제거한 것” 그가 생각한 고전적 아름다움은 당시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고고학적 발굴 붐과 더불어 새로이 주목받게 된 그리스의 유적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과 신상들은 모두 하얀색으로 보였고 18세기 독일인의 눈에 보인 그리스는 백색의 그리스였던 것이다. 백색의 토가를 걸치고 광장을 거닐며 토론을 일삼고 건강한 육체를 칭송했던 그리스인들의 이미지는 18세기 독일인들이 만들어낸 가상이다. 실제의 그리스는 온갖 색으로 칠해진 도시였으며 그들은 백색 보다는 다양한 색으로 물들인 옷들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저너머의 ‘순수’를 추구하고 싶었던 당시의 독일인들은 그리스를 백색으로 그려냈다. 빈켈만이 고전적 아름다움의 모토로 생각한 것은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라는 백색의 관념이었다.

여기가 아닌 저기, 온갖 색들과 감각으로 뒤범벅이 된 지상이 아니라 관념과 이상의 빛을 발하고 있는 저편의 초월적인 곳을 꿈꾸었던 지식인들은 백색의 세계를 예찬했다. 순백의 세계는 관념의 세계다. 물들지 않은 깨끗함, 더럽혀지지 않는 순수함은 영원의 옷을 입고 저편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영원한 순수, 영원한 하얀색이라는 의미를 지닌 ‘에델바이스(Edelweiss)’를 부르던 나치 치하의 독일 장교의 내면에서도 순백의 세계는 살아있었다. 그런데 이 흰색이 무지막지한 폭력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20세기 초 유럽을 전쟁터로 뒤바꾼 집단적인 광기는 바로 ‘순수’의 이상과 관련된다. 순수한 아리안 족의 혈통을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된 대학살이 그 증거다. ‘순수주의’는 반생명적인 무서운 폭력을 내포하고 있는 병적인 이데올로기다. 순수의 이데올로기는 배타적 편견을 내포하고 있다. ‘순수’는 실제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과 생명은 순수하지 않다. 살아있다는 것은 섞이는 것이고 오염되는 것이다.

‘순수주의’의 이데올로기는 20세기 위생학에서도 등장한다. 위생관념은 백색으로 표현된다. 인체에 병을 일으키는 세균의 정체가 발견되고 그 세균의 증식을 억제할 수 있는 항생제가 개발되고 인류는 그 이전과는 다른 의미의 건강함을 누리게 되었다. 소아사망률이 급격하게 줄었고 오랫동안 인류를 위협하던 전염병의 위험으로부터 상당부분 안전해졌다. 항균과 세균박멸이라는 모토는 위생관념이라는 신조어와 함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대의 전파와 함께 세계로 퍼져나갔다. 병으로부터의 구원이 가능해지는 듯이 보였다. 이 위생적인 근대는 백색의 이데올로기와 함께 전파되었다. 병원, 의사, 약사 모두 하얀색을 걸쳤다. 깨끗함, 청결함이 선진적인 생활의 표지가 되었다. 흙과 자연은 비위생적인 것이 되었고 자연 상태의 동물과 식물 역시 그랬다. 근대적 발전은 더러운 것과 차단된 생활을 하는 것, 더러운 것과 접촉하지 않는 것, 세균으로부터 격리된 것을 의미했다.

깨끗함의 표지로 건축에 백색을 사용한 것은 르 코르뷔제였다. 그는 백색에 미쳐있었다. 그의 백색 예찬을 보자. “집이 온통 흰색일 때 아무 것도 거스르지 않고 사물의 모양이 부각된다. 사물의 입체감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색깔 또한 뚜렸해진다. 석회의 흰색은 절대적이며, 흰 종이 위에 쓴 글씨처럼 모든 게 또렷하게 기록된다. 숨김이 없고 정당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집을 흰색 도료인 리폴린으로 칠하자고 외치며 현대적인 건축물의 주조색을 흰색으로 바꾸어놓으려 했던 장본인이다. “흰색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아름다운 것이다....그것은 진솔하다. 깨끗하지 않거나 가짜를 놓을 경우에 금방 눈에 띠게 되어 아름다움을 판정하는 엑스선과도 같다. 흰색은 영원한 재판관이며 진실의 눈이다.” 그의 백색 예찬은 그리스 여행의 감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얀색으로 빛을 발하는 파르테논 신전의 유적이 그에게 흰색 이상 세계에 대한 영감을 제공해준 것이다. 하얀색을 선호하는 개인의 취향은 뭐라 말할 것이 못되지만 르 코르뷔제의 현대적 건축물이 근대의 수입과 함께 수입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당시 유럽의 이상세계 속에 백색의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개인적 취향과 선택을 넘어 근대적 관념의 그림자를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해석된다. 결벽증의 백색은 근대의 신경증을 대변한다.

백색의 근대는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근대의 수출과 수입 과정에서 무지와 폭력, 지배와 착취의 그림자가 어른대는 것처럼 백색의 미적 취향에도 그 그림자가 어른댄다. 백색의 이상주의는 순수한 정신과 선의 관념의 예찬과 함께 전파된다. 그러나 삶은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도 순수하게 선한 것도 아니다. 순수하게 깨끗한 것도 아니며 순수하게 빛나는 것도 아니다. 하얀색이 순수라는 이상적 관념과 결합될 때 하얀색은 생명을 낳는 힘을 잃어버린다. 순수한 백색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리는 표백을 하고 탈색을 한다. 그러나 표백과 탈색은 모든 유기물의 박멸과정이자 모든 색의 박멸과정이기도 하다. 흰색의 가운을 입은 의사들의 칼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데 가담한다면, 흰색의 옷을 입은 박멸자들이 무수한 생명들을 위생관념을 실현하기 위해 살육하고 도살한다면. 질병과 오염, 전염에 대한 공포는 흰색의 구원자를 필요로 한다. 오염되지 않은 세상을 위해 하얀색의 구원자들은 박멸의 대리인이 된다. 남북전쟁 당시 인종주의자들이 그러했고 나치와 일본의 제국주의의 위생학에 공헌한 의사들이 그러했다. 실험실의 과학자들이 그러하고 생명을 다루는 실험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광우병과 조류독감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외치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이 때 백색의 이데올로기는 절멸의 이데올로기, 반생명의 이데올로기로 둔갑한다.


색이 사라지면 삶도 사라진다. 색이 사라지면 생명도 사라지며 우리의 오감은 무의미해진다.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다. 색이 사라지고 감각이 사라지는 곳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색과 감각을 무시하거나 색과 감각을 억압하거나 색과 감각에 위험의 딱지를 붙이는 문화는 생명과 삶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다. 우리는 감각을 억압하고 감각을 제한하는 규정들을 거절할 필요가 있다. 감각의 풍요를 누릴 권리는 삶을 향유하고 사랑할 권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