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3-5] 이스라엘 이민자 엘리트의 이중적 언어개념

디아스포라 회당 내부의 중심적 가치가 유대주의적 편향을 강하게 띠게 되면, 회당은 ‘유대인다운 삶의 모범성’을 강조하게 된다. 한데 어떤 태도가 유대인다운 삶일까? 물론 율법을 성실히 지키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때 유대주의적으로 해석된 율법은 혈통주의적 배타주의의 성격이 보다 강하며 유대 전통의 절기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율법이다.「갈라디아서」 4장 10절의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는 행위나 5장 12절의 “할례를 가지고 선동하는 사람들” 같은 표현은 바로 유대주의적 배타주의가 강한 신앙의 양상들을 가리킨다.

한데 이러한 율법적 성실성에는, 말할 것도 없이 자산 능력이 포함된다. 가령, 공동체가 당국에 지불해야하는 조세나 기부금 등의 비용은 공동체 성원의 자발적 기부금을 통해 충당되었는데, 이는 남들보다 막대한 기부금을 지출할 수 있는 능력이 유대인다운 삶의 필요조건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도시 당국자들과 만찬을 나누며 공동체의 이권을 대변할만한 지식과 신분 또한 중요한 요소다. 즉 신분, 자산, 지식 등에서 고루 높은 수준의 사회적 위치가 회당 내부의 중심 가치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결국 회당은 ‘유대인다운 삶’을 사는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품격 있는 지위의 사람(남성)을 중심으로 하여 편재된다.
한편 ‘개종’은 유대인 사회의 품격에 동화된 이들 외에도, 적절한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지 못한 이들의 생존 전략의 차원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마치 러?일 전쟁 당시 양대 강국 군대가 평안도 양민에게 만행을 저지를 때 군대의 폭력을 피해, 그리고 밥을 얻어먹기 위해 교회로 피해 들어온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들을 선교사들은 ‘밥신자’라 부르며 ‘주변화’시켰고, 평양대부흥운동은 이들 주변화된 대상을 중앙의 신앙제도에 충성하는 대상으로 종속시키는 계기적 사건이었다. 마찬가지로 유대주으적 편향을 강하게 띤 회당 중심부가 저들 하층의 개종자들을 ‘이방인’ 혹은 ‘헬라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에게 회당 구성원으로서의 ‘주권’을 부여하지 않고 ‘하위주체’(subaltern)로서 대상화하는 담론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회당 안에서는 이런 호칭은 ‘유대인답게 살지 못 하는 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하여 저들은 회당체제의 변두리에 있는, 타인의 규정에 의해서만 존재가 규정되어야 하는 자이어야 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유대 혈통을 가진 사람들 중에도 사회적 약자, 혹은 중심부 가치에 불충한 자를 처벌하는 용어로서도 활용되었다. 요컨대 ‘유대인답지 못한 자’라는 규정은 종족적 함의를 넘어서 사회적 함의를 포함하여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적 성향이 강한 회당 안에서 ‘헬라인’은 ‘유대인다운 삶’이라는 규준에 턱없이 못 미치는 이를 지시하는 ‘비칭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필경「갈라디아서」의 수신자들이 그러한 유대주의적 디아스포라의 대표적 예일 것이다. 아직 제도화된, 독자적 공동체가 아닌 당시의 교회에서는 이런 배제-종속의 담론적 메커니즘은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을 테니, 의인론을 통한 바울의 담론 전략은 그리 유효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디아스포라 회당의 맥락에선 의인론은, 하느님이 율법을 매개로 하지 않고 모든 이를, 유대인 뿐 아니라 헬라인(이방인)을,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자유인뿐 아니라 노예도 의롭다고 인정해준다는 신학적 주장은 주권이 박탈된 하위주체를 재주체화하는 담론적 효과를 갖는다. 그런 점에서 의인론은 유대주의가 내포하는 배제의 메커니즘을 비판하는 바울의 현장의 신학적 언명이다. 그런 점에서 의인론은 ‘인권으로서의 신앙의 정치’를 담는 바울의 현장 신학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정리 및 결론:「갈라디아서」의 의인론, 그것은 바울의 예수 계승법의 하나다

바울의 이 구절에서 ‘헬라인’이라는 단어는 바로 이 유대주의 성향이 강한 디아스포라 공동체 내부의 개념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 ‘헬라인’이라는 말은 그 말 속에 담긴 일반적인 함의인 ‘고상함’이라는 사회적 특성과 계열을 이루지 않는다. 오히려 ‘헬라인-회당-유대인답지 못한 삶’이라는 의미의 계열 속에서 회당 밖의 일상적인 용례(‘고상한 신분의 사람’이라는 기의)와는 전혀 다른 뜻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회당 내의 변두리 녀석들’이라는 비하적 의미를 갖게 되었던 것이겠다. 이렇게 사회 일반의 함의에서 격조 있는 용어를 특수 집단 내에서 비하함으로써 그 집단은 자신의 우월감을 강화할 수 있고, 귀속집단의 정체성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회당의 중심부를 구성하는 이들은 회당적 규범체계를 형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는 이들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회당의 규범체계는 회당 중심부 집단의 사회적 위상과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이 규범체계는 회당의 변두리 사람들의 사회적 위상과는 긴장관계에 있게 된다. 그들은 유대주의적 배타주의에 따르면 ‘죄인’인 것이다. 해서 그들은 이런 디아스포라 공동체 내에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어서 천대받는 게 아니라, 죄인이어서 마땅히 그런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유대주의는 이런 반인권적인 행위의 중심 가치였고, 유대주의적 디아스포라 회당은 그런 반인권적 가치를 실행하는 하나의 체제적 범주였다.
그런 유대주의의 아들인 바울도 전향하기 이전에는, 갈릴래아 출신의 시골뜨기들이 떠벌린다는 저 자칭 메시아라는 이의 주장이 너무나 역겨웠던 것 같다. 저들은 한갓 유대사회의 쓰레기 같은 존재에 다름 아닌 자들인데, ‘자칭 메시아’인 자가 저 죄인들에게 구원을 선언했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겠다.
이렇게 유대주의적 회당의 규범적 준거인 ‘유대인다운 삶’이라는 가치는 유대교적 공동체, 특히 본국보다 유대적 율법에 더욱 근본주의적인 교포사회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강조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주변부 사람들에 대한 멸시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멸시가 아니라 죄인에 대한 멸시로 해석된다. 즉 저들의 사회적 고통을 은폐하는 기재가 바로 바울에게는 ‘유대주의적 율법’이었던 것이다.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율법을 준수한다는, 일종에 ‘몸에 새기는 선서’다. 해서 바울은 그토록 할례를 비난했다. 거기에는 차별을 조장하는 논리인 율법의 폭력성이 은폐되어 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불연듯 깨달았던 모양이다. 예수가 그에게 다가온 것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해서 그는 과거에 회당 중심부의 가치를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듯이, 이제 목숨을 바쳐 회당에서 밀려난 이들을 위해 일하게 된 것이다.
바울의 의인론은 바로 이러한 회당 체제의 은폐된 폭력성에 대항하는 투쟁 담론이다. 그것은 중심-주변을 재생산하는 회당적 규범에 대한 저항이며, 그것이 바로 ‘율법에 대한 부정’ 선언으로 표현된다. 아마도, 그는 성공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꿈꾸었던 공동체는 차별을 조장하지 않는 윤리에 의해 묶인 사회였을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바울은 규범 자체를 거부하고자 하지 않았다. 그 역시 규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유대교적의 규범체계를 부정한 것은 그 속에 담긴 배제주의의 틀을 문제시하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예수를 계승한 이임에 틀림없다.

보론:「로마서」의 의인신학의 전략에 관한 하나의 가설

「갈라디아서」가 쓰인 이듬해 쯤 바울은「로마서」를 쓴다. 로마의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공동체에 보내는, 일종의 자기 추천서다. 여기에서 그는 다시 그 특유의 의인론을 설파한다. ‘갈라디아의 교회들’은 그가 잘 알고 있는 예수공동체였다. 그는 이들에게「갈라디아서」를 써 보내면서, 갈라디아 도시들에 있는 유대주의적 디아스포라 회당의 반인권적 배타주의에 대항하는 하나의 투쟁의 신학, 그 논리를 구성한 바 있다. 그런데「로마서」에서는 무엇 때문에 그러한 논리가 필요했던 것일까.
우선 바울은 그때까지 로마에 가본 적이 없다. 그는 소문으로만 그 도시에 관해 들었을 것이고, 또 소문으로만 그 도시의 이스라엘 디아스포라에 관해서 알고 있었다. 특히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통해서 그 도시에 관해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아굴라(Ακυλας)의 부인인 브리스가(Πρισκα)는「사도행전」에서는 브리스길라(Πρισκιλλα)로 표기되어 있는데(18,2⋅18⋅26), 아굴라는 그리스 본도 출신의 유대인이었고, 아내의 혈통은 알 수 없다. 이 부부는 이탈리아에서 천막제조공으로 살다가 클라우디우스(글라우디오, 재위 41~54) 황제의 추방령으로 고린도에 왔다가 바울과 동역자가 되었다고 한다(「사도행전」 18,2~3). 흥미로운 건 이들이 제2성서에 나오는 6번의 용례 중, 네 번에서 아내인 브리스가(브리스길라)가 아굴라보다 먼저 언급되고 있다(「사도행전」 18,18⋅26; 「로마서」 16,3;「디모데후서」 4,19 / 반면「사도행전」 18,2와「고린도전서」 16,19만이 남편이 앞서 있다.) 이것은 아내가 초기 그리스도운동의 더 유명한 사역자였음을 의미한다.
주목할 것은 그들이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이탈리아에서 추방되었다는 점이다. 많은 연구자들은 로마시의 이스라엘인 디아스포라 사회 내에서 벌어진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간의 갈등이 소요로 전개된 것에 대해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추방하는 것으로 사태를 진정시켰다는 견해를 편다. 그것은 로마제국 초기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가 쓴 『 황제전』(De vita Caesarum)에 나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로마에서 유대인을 추방한 것은 ‘크레스투스(Chrestus)’의 선동으로 야기된 소요 때문이라는 기록에 대한 해석에 기초하고 있다. 하지만 수에토니우스가 알려주고 있는 정보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 간의 갈등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디아스포라 내에서 발생한 소요로 황제가 칙령을 내렸다면 그것은 디아스포라 내부에 한정된 갈등 문제가 아니라 도시에서 발생한 사회적 소요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그 배후에, 흥미롭게도, 크레스투스라는 이름이 있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 ‘크리스투스’, 즉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다는 데 견해를 같이 한다. 그렇다면 예수파가 주동이 되는 이스라엘 인들의 모종의 집단행동이 있었고, 그것을 황제가 제압한 뒤 관련자들이 처형 등 실형이 있었고, 혐의가 적거나 미미한 이들은 추방하는 일이 있었다고 하는 게 보다 타당한 해석이겠다. 그리스도가 팔레스티나에서 주후 30년대에 로마군에 의해 처형된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제국 내 각 이스라엘계 디아스포라 사회에서 반로마적 집단행동에 그리스도를 추앙하는 이들이 관여되어 있었다는 것은 개연성이 있다. 로마시에서도 마찬가지겠다. 그렇다면 아마도 이것은 상당히 정치적인 집단행동일 것이다. 그리고 반로마의 상징이 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 가운데는 민중적 급진주의자도 포함되었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죽었다. 그의 죽음이 황비인 아그리피나의 독살로 인한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런 소문은 그의 말년의 치세가 여의치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하여 네로가 그를 이었을 때 선황제의 많은 포고는 흐지부지되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로마도 되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이, 그러니까 이 부부가 추방되어 고린도에서 머물던 때에 그들은 바울의 동료가 되었다.
바울이「로마서」를 집필했을 때(55/56년경)는 네로(재위 54~68)가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다. 그리고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로마에 온 지 얼만 안 된 때다. 새 황제는 아직 어렸고(17세에 즉위) 집권 기반이 탄탄하지 않았지만, 그의 측근에는 세네카, 티겔리누스, 부루스 등 유능한 신하들이 있었다. 그리고 즉위 직후 아르메니아를 침공한 바르티아의 군대를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군사정치적 업적도 있었다.
주목할 것은 이 새 황제는 전임자와는 달리 보다 친 대중적 이미지를 강화하려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가 원로원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원수정 이후 원로원은 지속적으로 최고통치자의 최대의 경쟁자였다. 하여 황제들은 적지 않은 회유책을 쓰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많은 원로원 의원들을 숙청했고, 속주 출신의 신귀족들을 원로원에 위촉하곤 했다. 네로 황제 치하에서 속주 출신으로 원로원 의원에 위촉된 이는 무려 42명이나 되었다. 선대황제가 15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무려 세배 가까운 가감한 인적 교체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당대의 풍자시인인 유베날리스가 대중은 “빵과 서커스, 두 가지만을 열망한다”고 비아냥댄 것처럼, 대중을 그들 자신의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만났고 대중의 지지를 호소하는 친 대중적 정치를 적극적으로 폈다. 심지어 그는 로마 엘리트들이 그렇게 경멸했던 배우가 되어 무대에 서기도 했고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당대의 명문가의 대표적 인물로, 철학자이자 법률가이고 행정가인 소 플리니우스(대 플리니우스의 조카)는 네로를 가리켜 ‘배우 황제’라고 조롱했다. 또한 그는 제전과 검투를 포함한 축제를 대폭 늘렸다. 앞서 인용한 유베날리스의 비난은 이러한 대중적 축제의 일상화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매일 벌어지는 귀족들의 축제를 비난한 적이 없었다. 그는 단지 대중이 즐기는 여흥만을 비난했다. 반대로 네로는 대중에게 축제를 통해 많은 음식과 여흥을 베풀었고, 이를 통해 대중은 잠시나마 부자의 향락적 생활에 동참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원로원에 대항하는 그의 일관된 정치의 일환이다.

아무튼 그 덕에 네로는 대중적 지지도가 대단히 높았던 황제였다. 그가 황실에서 살해된 직후 잠시 집권했던 군벌들인 오토나 비텔리우스는 네로의 무덤에 참배하는 제스추어를 했던 것도 그의 인기 때문이다. 그의 치세기에 그리스 방문을 기획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그를 지지하는 로마의 대중들이 ‘황제여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라고 무수히 외쳐대자 포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심지어 그의 대중주의는 속주지역에까지 확산되어, 그가 죽은 뒤에도 서부의 속주들의 대중 사이에서는 네로가 살아 있고 때가 되면 그가 되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요컨대 네로는 메시아론의 주인공이기까지 했다.
그런 황제가 즉위했고, 초기부터 아직 그리 과감하지는 않았어도 그의 대중주의는 로마시 대중들의 공간 구석까지 퍼져나갔다. 귀족들과 유력층들의 공간에서 살았고 그들 사이에서만 스캔들의 주인공이었던 다른 황제들과는 달리 그는 대중 현상의 주인공이었다. 요컨대 그는 황제 중심의 대중주의를 퍼뜨리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그 도시로 바울은 서신을 보낸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 특유의 민중주의적 신학인 의인론을 설파한다. 그 내용은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민중주의자라는 것이다. 그것이 전혀 생소하지 않은 것은 불과 5,6년 전에 그리스도 대중주의가 이 도시의 이스라엘 디아스포라 공동체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겠다.
바울은 바로 그런 경험과 전 이해를 가진 이들에게 그리스도 민중주의의 본질을 전하고 있다.「갈라디아서」처럼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주변부에 포진한 이들에게도 조건 없이 은혜를 베풀어 모두에게, 높은 자나 낮은 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의’ 곧 하느님의 정의를 나누어주는 것, 그런 이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것은 황제의 메시아주의보다 더 철저한 메시아주의다. 그리고 황제가 위에서 베푸는 그리스도였다면, 예수는 더 낮은 곳에서 더 낮은 자와 함께 하는 그리스도다. 하여 황제의 대중주의가 황제를 주체로 하고 대중으로 하여금 그의 지지자게 되게 하는 수동적 메시아주의라면, 바울의 그리스도는 대중 자신을 주체로 하는 적극적 메시아주의였다.
그러나 아마도「로마서」의 수신자는「갈라디아서」처럼 그런 밑바닥 대중이 아니라,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일부 엘리트였던 것으로 보인다. 14장에 반영된 믿음이 강한 자 대 약한 자의 논쟁은, 연일 벌어지는 축제음식 먹기를 거절하고 그 축제에 참여하지 않으며, 이스라엘 신앙적 절기와 그 음식만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전통주의자가 약자이고 그것에서 자유로운 이가 강한 자이다. 이는 앞의 ‘표3-4’의 I-A 대 II-A의 대립과 유사하다. 이 표가 이민자 사회의 엘리트들의 귀속의식에 관한 것임을 감안하면, 도시 사회와 교포 사회 모두에서 강한 귀속을 가진 강한 자 대 교포 사회에만 귀속성이 강한 약한 자의 대립을 의미한다. 이때 전자는 그리스도 급진주의와 관련이 있는 엘리트라고 한다면, 바울의「로마서」의 수신자는 로마의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그리스도 파 가운데, 엘리트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들은 정치적 급진주의자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급진주의가 공동체 전체의 위기와 환란을 초래했다. 그렇게 반란 이후 보복의 재앙을 겪은 사회에서는 반전 논리 혹은 평화주의 논리가 강하다. 바울이 13장에서 주장하는 황제의 권력에 대한 복종은 바로 현실의 체제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에 대해 소극적인 비폭력주의자들의 논조와 닮았다. 물론 그것은 궁극적인 저항 포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종말론자의 잠정적인 비저항주의에 가깝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바울의 의인론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의 민중주의가 정치적 저항에만 정향되어 있다거나 통치의 시각에서만 정향된 기존의 민중주의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그의 민중주의는 대중의 밑바닥 경험에서 출발해서 그것의 가능성을 현장 신학으로 구현하려 하고 있다. 거기에서 오늘 우리는 시민권 중심의 민중주의가 아닌, 민중의 인권론의 전거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