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고대철학 I

탈레스(Thales: 640-550 BCE 경)

1. 최초의 현인, 탈레스
최초의 철학은 오늘날 터키의 일부에 해당하는 밀레토스에서 시작되었다. 밀레토스 학파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하나는 자연(Physis)을 발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설명 방식보다는 이성의 작용을 통해 비판과 논쟁을 실천했다는 점이다.
전승에 따르면, 탈레스는 아버지 엑사뮈에스, 어머니 클레오볼리네 사이에서 태어났다.
탈레스는 현인(sophos)으로 불린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토박이 밀레토스 사람으로 명문가 출신이었다.
탈레스에 얽힌 일화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한 것이 유명하다. 예나 지금이나 철학 공부는 세상사에 절실히 필요치 않았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탈레스에게 힐문한다. 뭐하러 그런 짓거리를 하는가? 자기 앞가림도 못해 빈한하게 살고 있는 꼬락서니하고는..
철학은 아무 쓸모도 없다는 듯, 사람들이 탈레스를 가난하다는 이유로 비난하자, 탈레스는 비수기에 올리브 짜는 기계를 헐값에 임대했다. 사람들은 또 다시 비웃었다. 올리브가 나지도 않는 계절에 기계는 뭐 하러 임대할꼬? 탈레스는 묵묵히 비난을 감수했다. 계절이 바뀌어 올리브를 수확하는 시기가 되었다. 그런데 올리브는 전례 없는 대풍이 들어, 덩달아 올리브 짜는 기계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결과는? 탈레스는 떼돈을 벌었다고 한다. 탈레스는 세상의 비난을 감수하며 올리브의 작황을 여러 가지 데이터를 가지고 예측했던 것이다. 이 일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철학자들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원리를 탐구하고 원인을 찾아 캐묻는 인문학자들이 다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2. 아르케
그리스 철학을 공부할 때,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개념이 바로 아르케란 말이다. 아르케(arche)란 말은 ‘명령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아르코(archo)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이 말의 명사형 아르콘(archon)은 우두머리, 즉 폴리스의 집정관을 뜻한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려면 먼저 명령이나 지시가 있어야 하고, 누군가는 맨 앞에서 일을 진두지휘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아르케란 말은 대체로 원인, 근원, 원리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아르케의 라틴어 번역어가 프린시피움(principium)이고 영어에서는 프린시플(principle)이다.
결국 아르케(Arche)는 근원(根源)이나 원리(原理)라는 의미다. 아르케를 탐구한다는 것은 사물의 근원이나 시원을 찾아 케 묻는다는 뜻이 된다. 한자어 원(原)이란 말을 잘 보면 안에 샘 천(泉)자가 들어 있는데, 생각해 보면 샘이나 강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 그 근원을 찾는다는 의미가 된다. 원이란 말은 시초, 시작, 기원이란 의미를 갖는다. 이(理)라는 한자어는 구슬 옥(玉)자에 마을 리(里)자가 합쳐진 말이다. 里라는 글자는 마을을 구획하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으로, 종횡으로 선을 그어 마을의 범위를 확정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구슬에도 나름대로의 일정한 결이 나 있어 마치 마을을 구획하는 두렁의 모습을 띠고 있다. 결국 理자는 구슬에 나 있는 일정한 결을 의미하며, 이를 좀 더 추상화 하면 어떤 사물의 조직이나 구조를 의미하게 된다. 정리하면 원리, 즉 아르케를 탐구한다함은 그 시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구조나 조직을 규명한다는 의미가 된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원리란 다른 존재로 인해 생성되지 않는 것이라 정의했다. 원리란 그로부터 다른 삼라만상들이 나올 수는 있지만, 그 자체는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올 수 없는 것을 말한다.

3. 만물의 아르케는 물이다!
최초의 철학자들은 세계의 유일한 근원을 대부분 어떤 질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의 첫 문을 연 탈레스는 그 근원을 물이라고 말했다. 물론 탈레스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물은 그 본성 상 여러 가지 사물로 변형되기가 쉽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를 갖기가 용이하다. 그 일부분이 증발하면 공기가 되고, 그 공기에서 나온 가장 미세한 것이 에테르로서 빛을 내기도 한다. 물은 서로 붙어서 진흙으로 변해 땅으로 굳어진다. 이런 이유로 탈레스는 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4. 왜 물이었을까?
탈레스가 살던 시대는 아직 신화적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다. 물을 사물의 아르케로 본 탈레스는 특히 근동의 신화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던 것이다.
호메로스에 따르면 지구는 평평한 원반과 같았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오케아노스(Okeanos) 강물이 둘러 싸여 흐르고 있다. 지구 밑으로도 역시 오케아노스 강물이 흐르고 있다고 했다. 바빌론의 창조 신화는 어떤가? 태초에는 바다만 있었는데, 마르두크(Marduk)가 갈대로 뗏목을 만들었으며, 그 후에 흙을 만들어 뗏목위에 뿌렸다고 한다. 이집트 신화에서도 대지는 물 위에 떠 있으며, 물은 대지를 감싸며 흐른다. 탈레스 시대에 이미 물은 신화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이미지 가운데 하나였다.
탈레스는 이러한 신화적 사고방식에서 주목하면서, 우주의 아르케를 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때 조심해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물(H2O)로 봐서는 곤란하다. “세계는 물이다”라는 주장을 우리가 지금의 생각으로 이해하면, 유치하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 시대에는 물질, 생명, 영혼 등의 개념이 지금과는 달리 뒤 섞여 있었다. 물질과 생명도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으므로 오늘날 우리들의 시각으로는 다소 황당하지만, 사물의 근원을 추적해 보았다는 점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5. 최초의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의 시원에 관한 물음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시원에는 어디에나 거친 것, 조야한 것, 공허한 것, 추한 것이 들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탈레스를 철학의 아버지로 지목했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중요하다. ‘만물은 하나다.’라는 발상은 세상 만물의 다종다양한 현상의 이면을 꿰뚫는 단일한 원리에 주목한 발언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무수히 많은 다양함과 마주친다. 봄날의 꽃, 여름 소나기, 가을날의 스산한 바람, 겨울의 차가운 눈. 탈레스의 발언은 어찌보면 이러한 일상적이고 직접적인 인간의 경험에 폭력을 가한 것이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비로소 경험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시간과 공간의 간섭으로부터 독립되어 변하지 않는 확고한 원리를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탈레스는 감각적 차원에서 경험되는 사물을 넘어서 궁극적 본성을 찾고자 했다. 도대체 세계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단 말인가? 바로 이런 물음을 최초로 제기함으로써 이후의 철학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추상의 길을 열어 놓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단지 어떤 답을 내 놓았는가는 오히려 부차적이다. 사물이 작용하는 궁극적인 원리를 신화에서 빌려 온 상징과 우화를 빌리지 않고도 인간의 생각만으로 세계 자체의 원리에 따라 설명하려는 시도가 소중한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610-540BCE)

1. 아낙시만드로스도 탈레스와 마찬가지로 밀레토스 출신이고, 프락시아데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또한 그는 탈레스의 혈족이며 제자이며 후계자였다고 전해진다. 아낙시만드로스도 탈레스처럼 무엇이 모든 사물의 궁극적인 원리인가에 골몰하였다. 그러나 그는 탈레스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왜 물이라고 하는 물질을 만물의 근원이란 자리에 놓아야 하는가? 물이란 다양한 물질 가운데 하나일 뿐 만물의 근원으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였다. 당장 불을 생각해 보자. 물은 불을 생성시킨 다기 보다는 불을 없애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만물의 아르케를 어떤 구체적인 물질에서 찾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아르케를 특정한 자연물로 생각하면 상반된 성격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아페이론
다른 물질과 대립되지 않으면서 양적으로도 무한한 것은 무엇인가?
아낙시만드로스는 이것을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정의했다.
아페이론은 공간적으로 무한하고 뭐라고 딱히 규정되어 있지도 않은 것이다. 대립되는 것들 또는 일정하게 규정되어 있는 것들은 바로 이 무한하고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부터 생겨나서, 다시 사라지므로 아페이론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어 아페이론(apeiron)은 아페이루스(apeirus)라는 형용사의 중성 명사형이다. 아페이루스(apeirus)는 ‘정해지지 않은’, ‘규정되지 않은’이란 뜻이니까 아페이론(apeiron)은 무한정성, 무규정성 등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 말은 한계가 정해져 있지 않아 끝이 없이 무한정하다는 의미(the infinite, 시공간적 무한성)와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the indefinite, 특정한 성격이 주어지지 않음)를 가지고 있다.
아페이론이란 우선 페라스(peras)라는 개념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 페라스란 규정 경계, 극한이란 의미이다. 정리하면, 아페이론이란 페라스라는 말에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어 a가 붙어서 결국 ‘페라스를 부여받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규정이나 극한을 부여 받지 못한 존재가 페라스를 부여 받음으로서 마침내 일정(一定)한 질서를 갖춘 존재가 된다는 사고 방식이다. 하루를 예로 들어 보자. 하루는 보통 아침, 점심, 저녁으로 구분하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하루라는 시간에 페라스가 주어짐으로써 하루가 구분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한 상태가 지속되고 만다. 페라스란 일정한 매듭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다.

3. 아페이론을 처음 철학사에 도입한 사람은 아낙시만드로스인데, 그는 스승 탈레스의 생각을 일정하게 비판하면서, 이 개념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탈레스는 만물의 아르케를 물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와 대비되는 불은 어떤가? 게다가 세상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공기나 흙은? 이 가운데 꼭 물만을 아르케로 봐야 한다는 생각은 너무 편협하지 않은가? 그래서 아낙시만드로스는 이런 개별적인 네 가지 물질보다 더 근원적인 것을 생각해 내게 되었다. 물론 이 때 아낙시만드로스는 경험을 통해서 이 개념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추론을 통해서 제시한다. 페라스가 부여되어 일정한 존재로 규정되기 이전의 상태인 아페이론을 생각해 낸 것이다.
아페이론이란 개념은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 시작되었지만, 그 이후로도 철학사에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는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세계를 포괄적이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시도 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아페이론은 카오스(혼돈)의 상태이며, 연속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에 비해 페라스는 코스모스(질서), 불연속의 상태를 의미한다.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588-525 BCE)

1. 아낙시메네스는 밀레토스 학파를 마지막으로 잇는 사람이고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이자 동료였다고 한다. 아낙시메네스는 만물의 아르케를 공기라고 생각했다. 즉, 아낙시메네스는 모든 것들이 공기에서 생겨나서 다시 공기로 분해된다고 보았다. 헬라스인들은 영혼(psych?)이 마치 끈처럼 사람을 결속해 준다고 생각했는데, 마찬가지로 바람과 공기도 세계 전체를 감싸고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이 숨을 쉼으로서 생명을 유지하듯이, 공기는 생명의 원리가 되는 셈이다.
“공기는 비물체(as?ma)에 가깝다. 그리고 이것이 유출되어서 우리가 생겨나기 때문에, 그것은 무한할 수밖에 없고, 결코 바닥나는 일이 없으므로 풍부할 수밖에 없다.”

2. 공기 - 희박과 응축(느슨함과 촘촘함)
헬라스어로 아에르(a?r)인 공기는 대개 어두운 안개를 의미하지만, 아낙시메네스의 아에르는 오늘날의 공기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아낙시메네스는 혼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처럼, 공기도 우주에 생명을 불어 넣는 아르케라고 생각했다. 더 나아가 아낙시메네스는 공기가 신적인 속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신들이 생겨나는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올림포스 종교를 자연철학에 포함시키려는 시도로 생각할 수 있다.
공기는 변화한다. 일정한 조건만 갖추어지면 여러 가지 형태를 띨 수도 있다. 그러니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공기가 어느 정도 희박해지면 불이 되고, 응축되면 바람, 구름, 흙, 물, 돌이 된다. 모든 것을 단 하나의 아르케로 설명하려는 밀레토스 학파의 이론에서는 모든 다양성의 근원은 바로 양적인 차이에 있는 것이다.

3. 아낙시만드로스의 제자였던 아낙시메네스의 입장을 살펴보자.
앞에서 보았듯이, 탈레스가 물을 아르케로 본 것은 매우 자의적이며 편협한 생각이었다. 그런가 하면, 아낙시만드로스가 아르케로 생각했던 아페이론은 논리적으로 추론될 수 있을지언정 딱히 손에 잡히는 개념은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아낙시메네스는 탈레스가 주장한 물보다는 추상적이지만, 아낙시만드로스가 주장한 아페이론보다는 한층 경험적이며 구체적인 원리를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결국 아낙시메네스에 이르러 만물의 아르케는 공기가 된다. 여기서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은 공기의 특성이다. 공기란 어떤 것인가? 물이나 불, 물, 흙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공기는 이런 요소들보다는 한 차원 더 심층적이다. 왜? 공기란 사람의 오감으로 아주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보다는 공기가 훨씬 더 구체적으로 확인될 수 있다. 초기 자연 철학자 세 사람의 이러한 연관관계를 생각해 보면, 철학은 그 태초부터 비판과 계승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460-360 BCE)

1. 데모크리토스는 기원전 460년경 이오니아의 식민도시 압데라에서 태어났고 이집트, 페르시아 등지를 여행하면서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며 깊은 학식을 쌓은 것으로 알려졌다. 아테네에 머문 기간이 짧아서 그 곳에서의 명성은 그리 높지 않았으며, 오늘날 약 300여 개의 단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를 원자론의 창시자로 알려지게 한 자연철학에 관한 부분들(약 60여개의 단편)보다는 윤리적인 내용들이 훨씬 더 많이 담겨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필적할 만한 방대한 저술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단편들 외에는 모두 망실되었다.

2. 데모크리토스의 사상은 먼저 엘레아 학파와의 대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다원론자들과는 달리 양적인 사고방식을 도입함으로써 근대 과학적 사유에 중요한 기틀을 정초한다. 파르메니데스 이래 엘레아 학파에서는 줄기차게 텅 빈 공간, 즉 허공의 존재를 부정해 왔다. 파르메니데스는 일자(一者)만을 인정한다. 만일, 허공이 존재한다고 하면, 존재 사이사이에 허공이 끼어들게 된다. 그러면 존재는 일자가 아니라 여럿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허공은 어떠한 물질도 아니므로 존재라 할 수 없다. 존재가 아닌 것을 존재라고 하면, 이는 곧 모순이다. 따라서 허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데모크리토스는 허공을 부정하는 엘레아 학파에 반발한다. 엘레아 학파의 생각대로 하면 도무지 운동을 설명할 길이 없다. 존재로만 가득 찬 우주에 아무런 빈틈도 없는데 운동이 생길 리가 없다. 존재들 사이사이를 허공이 메우고 있어야 그 빈틈으로 운동이 가능해 진다. 그래서 데모크리토스는 운동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허공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다.

3. 하지만 파르메니데스의 그림자는 쉽게 벗어 날 수 없었다. 데모크리토스의 존재 이해는 파르메니데스에게 상당한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아톰(atom)이란 말은 ‘없다’, ‘아니다’라는 의미의 ‘a’와 ‘나눈다’라는 의미의 ‘toma’가 합쳐져서, ‘더 이상 나누어 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실재하는 것은 생성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을 계승한 것이다. 원자는 더 이상 쪼개지지 않으며 눈에도 보이지 않는 미세한 입자다. 그 내부는 빈 곳이 없이 꽉 차 있으며 운동을 하고, 각각 다양한 모양과 크기, 정해진 위치가 있고 무게를 갖는다. 원자는 완전히 꽉 차 있어서, 자를 수도 분할할 수도 없으며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 안에 허공을 갖지도 않는다.
원자들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처럼 그 자체로 하나의 한정된 실재로서 생성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 그러나 원자들은 무수하게 존재하며 허공 속에서 끊임없이 운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근원들은 그 수가 무한하며, 자를 수도 없고(atomoi) 분할 할 수도 없으며(adiairetoi), 꽉 차 있기 때문에 영향을 받지도 않으며, 허공을 갖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4. 이런 원자의 특징에 비추어 보면,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의 역설은 설 자리를 잃는다. 제논은 사물을 무한히 분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만일 물질이 무한하게 분할되지 않는다면, 즉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최소 단위의 물질(아톰)이 존재한다면, 제논의 역설은 깨진다. 파르메니데스는 빈 공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운동이 불가능한데, 원자론에 따르면 원자들이 운동을 하려면 빈 공간(공허, 케논kenon)이 필요하다. 원자론에서 인정하는 것은 원자들과 빈 공간, 오직 이 두 가지 뿐이다. 데모크리토스의 논리는 철저하게 엘레아 학파와의 대결 속에서 피어났으며, 원자론을 통해 그들의 생각을 논파했던 것이다.

5. 두 가지 인식
인식에는 먼저 감각을 통한 인식과 다음으로 사고를 통한 인식이 있다. 이 때 이성에 따른 인식이야말로 ‘적법한 인식’이 된다. 왜 그런가? “더욱 미세한 것에 대해서 탐구해야 할 때는 적법한 것이 뒤따라 나온다. 적법한 것은 더욱 미세한 것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각에 의존하는 인식(色聲香味觸)은 ‘서출(庶出)적 인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더 작은 것에 대해서 더 이상 볼 수도 들을 수도 냄새 맡을 수도 맛볼 수도 접촉에 의해 감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데모크리토스에게서 감각과 이성, 감각과 사고는 진리 인식을 위한 상호 보조 장치임을 보여준다. 감각은 불분명하고 실재에서 멀어져 있어도 감각적 현상은 사고 과정에서 필수적이다. 기본적으로 감각과 사고가 전혀 별개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인식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이어주는 것이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의 기본적인 관심은 전통적인 물활론에 대한 엘레아의 비판에 의해 운동도 변화도 없이 정지해 버린 세계를 끊임없이 운동하면서도 없어지지 않는 현실세계를 구제해 내는 것이었다. 데모크리토스는 말한다. “페르시아의 왕국을 갖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원인설명을 찾아내고 싶다.”

6.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원자들은 그 자체로는 운동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허공 속에서 크기나 무게 등의 차이에 따라 저항, 충돌, 이동 이라는 필연(anank?)에 의해 회오리를 일으켜 회전하면서 비슷한 것들끼리 따로 분리되면서 세계(kosmoi)가 생성된다.
엠페도클레스는 4가지 종류의 리조마타가 다양한 비율로 결합하면서 만물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고, 아낙사고라스는 물질의 수만큼이나 많은 스페르마타가 섞이고 분리되면서 만물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두 철학자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차이점은 무엇일까?
엠페도클레스와 아낙사고라스의 원소들은 기본적으로 질적인 차이를 통해서 모든 현상을 설명한다. 물, 불, 공기, 흙. 이것들은 분명 각기 다른 성질들을 갖는다. 무수하고도 질적으로 다른 씨앗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데모크리토스에 오면 원자들은 모두 동일하기 때문에 질적인 차이는 없다. 다만 원자들 사이에 양적 차이 즉 형태, 크기 등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만물의 다양성을 원자들 사이의 양적 차이로 설명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이후 근대자연과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되어 서양에서 과학혁명의 도화선이 된다(정성적 사고에서 정량적 사고로의 전환).
예를 들어보자. 손가락을 물 안에 넣어보자. 별 무리 없이 손가락은 물을 뚫고 지나간다. 이번엔 나무토막에 손가락을 넣어보자. 안 들어간다. 왜 그럴까? 물을 구성하고 잇는 원자의 양과 나무를 구성하는 원자의 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무를 구성하는 원자들은 단단하게 배열되어 있는데 반해서 물은 엉성하게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춧가루는 맵다. 원자가 양적으로 촘촘하게 엮여 있어서 혀를 찌르기 때문이다. 설탕은 달다. 원자가 부드럽게 배열되어 있어 혀에 자극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도 이 원리를 벗어 날 수 없다. 영혼도 원자들의 덩어리일 뿐이다. 영혼이 다른 물체들에 비해 특별한 점이 있다면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들은 가장 미세하기 때문에 가장 민활한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정도뿐이다. 물체와 영혼과의 차이도 결국은 원자들의 양 차이에 불과하다. 그런데 데모크리토스는 신체에 비해서 혼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데모크리토스가 말하는 혼이란, 혼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덩어리이다. 혼의 평안함이란 혼의 원자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혼의 원자 구조는 선천적으로 타고 나서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 배움을 통해서 혼의 존재 방식을 더욱 더 좋은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520-440 BCE)

1. 파르메니데스는 초기 그리스 철학사에서 매우 독특하고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의 철학과 더불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의 철학은 이후 그리스 철학은 물론이거니와 서양 철학사 전반에까지 기나 긴 빛과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리스 철학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개념에 줄기차게 반론을 제기했지만, 종국적으로 그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파르메니데스는 남부 이탈리아에 새로 개척된 도시 엘레아에서 이주민 2세로 태어났다.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 엘레아의 입법에도 관여했으며, 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당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한 존경받은 인물이었던 것 같다. 다른 초기 사상가들과는 달리 파르메니데스의 글들은 상당히 온존하게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그의 단편은 크게 세 부분 ‘서시’, ‘진리편’, ‘의견편’으로 나누어진다.

2.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변화’라는 개념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환상에 불과하다. 왜 이런 환상에 빠지는 걸까? 감각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오직 감각으로만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세계가 변화한다는 생각은 감각 때문에 생기는 가상(假象)일 뿐이다. 따라서 변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속견(俗見)에 빠져들고 만다. 우리가 나아갈 방향은 진리의 길이다.
파르메니데스의 논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존재’만이 존재할 뿐, 그 이외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 즉 ‘무(無)’를 존재한다고 말하는 순간 모순에 빠지고 만다. 무슨 말인가? 파르메니데스 식으로 말하면, “There is nothing” 이란 말은 모순이다. nothing이 존재한다(is, be 동사, 존재 표시)니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말을 아무 불편 없이 사용한다. 왜 그럴까? 파르메니데스는 존재 동사(헬라스어 einai)가 사실은 두 가지 의미, 즉 ‘있다(존재)’라는 의미와 ‘이다(계사, 주어 술어 연결)’라는 의미를 둘 다 가진 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존재 동사를 오직 ‘있다’라고만 이해했던 것이다.
둘째, 모든 변화, 즉 생성이나 소멸은 없다. 역시, 우리의 상식적 경험을 깨는 발언이다. 세상 만물은 시시각각 변화하는데 파르메니데스는 이것이 잘못된 인식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생성(becoming)’이란 무엇인가? ‘무’로부터 뭔가가 생겨난다는 것인데, 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파르메니데스에게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소멸은 어떤가? 마찬가지다. 어떤 존재가 다시 무로 된다는 말도 성립하지 않는다. 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존재는 하나(一者)이며, 연속적이다. 무(無)와 마찬가지로 허공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존재를 나누어 연속을 끊어주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세계는 하나의 일자(一者)로 존재할 뿐이다.

3. 실재는 완전하고 불변하며 영원한 존재로 구성.
저 한 떨기 꽃을 보라. 붉은 색을 머금은 이파리가 그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꽃잎도 화려했던 색은 바래가고 물기를 담은 파릇한 줄기도 시시각각 스러져 마침내 그 생명을 다 하고 만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花無十日紅)! 시간의 폭력 앞에 무너져 내리는 저 꽃잎의 존재를 우리는 뭐라 부를 수 있을까? 정말 저 꽃잎이 존재했다고 진정 말할 수 있을까? 색은 바래가고 꽃잎은 시들어 마침내 그 생명을 다 한다.
이에 파르메니데스는 단언한다. 생겨나는 그 무엇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왜냐면 뭔가가 생겨났다는 말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왜 불가능 한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거니와, 마찬가지로 사라지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는데, 이 또한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뭔가가 생겨났다가 이내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참일 수가 없다. 모든 변화와 다양성은 부정된다. 운동은 불가능하다. 이후 철학사의 거장들은 파르메니데스가 쳐 놓은 거미줄에 걸려 나름대로의 묘안을 찾아 헤매야만 했다. 헤겔은 “파르메니데스야말로 고유한 의미에서 철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4. 이오니아인들은 실재(있음)를 말할 때, 타 온타(ta onta)라고 복수형을 사용했다. 즉 실재란 다양하게 존재하는 구체적인 사물들이란 의미다.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은 실제로 눈앞에 현존하는 자연적인 실재들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바로 그런 존재들의 밑뿌리를 파고들어 근거를 찾으려고 했다. 자연철학자들에게 존재란 그 기원과 원리가 무엇이든 간에 가시적 형태를 띤 수많은 사물들로 나타난다. 그러다가 파르메니데스에 이르러 존재는 처음으로 단수형 ‘토 온(to on)’으로 표현된다. 이 사소한 변화는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적어도 철학사적으로 따져보면. 왜 그런가? 존재를 복수형에서 단수형으로 표현했다는 문제는 존재를 정의하는 새로운 개념이 도래했음을 나타내 준다. 이제 문제는 더 이상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는 존재자들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유일한 존재 일반이다. 이러게 되면 이제 존재는 더 이상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 포착하는 다양한 사물들이 아니라 경험을 넘어서 로고스를 통해 파악해야 하는 그 무엇이 된다.
고대인들은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혼돈으로부터 질서가 생겨나는가?” 이제 최초의 철학자들은 이렇게 묻는다. “자연 안에 불변하는 것은 무엇인가? 실재의 아르케는 무엇인가? 인간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하고 표현할 수 있는가?” 문제를 보는 시각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이 사소한 물음은 그 동안 인간의 사고가 얼마나 바뀌었으며 세계를 바라보는 지평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사유를 종교로부터 물려받은 신비적 관념들로 시작한다. 우주의 생성, 사랑, 증오, 대립자들 사이의 결합과 투쟁. 하지만, 이런 세속적인 언어로는 존재의 영구적 기반을 탐구하고픈 욕구를 더 이상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파르메니데스의 이론은 왜 중요할까? 파르메니데스가 단수형 존재를 말하는 순간, 감각적 세계와 순수 사유의 논리적 요구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선언한 셈이다.


제논(zenon, 335??-263?? BCE)

1. 역설의 제왕
플라톤에 따르면, 기원전 449년경에 소크라테스, 파르메니데스, 제논 이렇게 세 사람이 만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제논은 대략 기원전 489년경에 태어났다고 추산할 수 있다.
엘레아의 시민, 모든 것의 비난자, 혀가 둘 달린 제논(제논이 즐겨 사용하는 양도 논법의 특성을 빗대서 쓰는 말), 모든 철학적 공론에 강하고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자.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이자 애인. 엠페도클레스가 수사술의 창시자라면, 제논은 변증술의 창시자.
기원후 10세기에 완성된 백과사전 <수다>에 따르면, 제논은 엘레아의 참주 네아르코스(또는 디오메돈)을 축출하려고 모의하다가 발각돼 심문을 받던 중 스스로 자신의 혀를 끊어 참주에게 뱉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맷돌에 으깨어져 죽었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페리클레스가 한 때 엘레아 사람인 제논의 제자였으며, 이 철학자는 상대방을 재난에 빠지게 하는 반론 기법을 완성시켰다.”

2.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제논의 역설은 그 자체로 얼마나 정교하고 완성도 높은 논증 방식이었나를 평가하기 이전에 후대의 여러 학자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이 없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는 무한이나 그와 관련된 개념들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었다. 자연철학자들에게는 물질의 최소 크기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20 세기에도 무수한 수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제논의 역설을 둘러싸고 시간, 공간, 무한의 문제에 관한 논쟁을 그치지 않았다.
(1) 모든 운동이란 있을 수 없다.
A----E----D--------C---------------B
A에서 B까지 움직이려면 반드시 선분AB의 중점 C를 지나야 한다. 또 C까지 가려면 선분 AC의 중점 D를 지나야 한다. 이와 같이 그 중점을 계속 지나야 하는데, 그런 점들은 무한히 많으므로 A에서 B까지 영원히 갈 수 없고, 따라서 운동이란 있을 수 없다.

(2) 아킬레스(Achiles, 아테네의 유명한 달리기 선수)는 앞에 도망가는 거북이를 영원히 잡을 수 없다.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처음 있던 점까지 가면 거북이는 이미 어느 정도 전진해서 좀 더 앞에 가 있다. 또 그 점까지 가면 이미 거북이는 좀 더 앞에 나가 있다. 이렇게 계속 전진해 나가면 영원히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잡을 수 없다.

(3) 공중을 나는 화살은 움직이지 않고 정지하고 있다.
움직이는 화살이 어느 특정한 지점 A에 왔을 때, 그 위치에 순간적으로 정지하고 있다. 또 다른 특정한 점 B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로 B에 순간적으로 정지하고 있다. 또, C, D, E, ......등 계속 그 위치에 순간적으로 정지하고 있으며, 이런 일들이 순간적으로 연속하여 일어나는 것이지 화살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제논의 패러독스들은 시간과 공간은 무한히 나눌 수 있고 움직임은 불연속의 조합이라고 믿었던 당시의 철학자들에게 파문을 던졌다. 제논의 패러독스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데는 2천년이 넘게 걸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궤변’으로 낙인찍어버린 후로 어느 정도 사장됐던 제논의 패러독스는 칸토르의 무한론으로 극복되기에 이른다.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530-470 BCE)

1. 존재와 생성
이제 철학은 다시 한번 이후의 역사에 거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스캔들에 휩싸인다. 어찌 보면 서양 철학사 전체는 바로 이 문제를 둘러싸고 벌인 투쟁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존재와 생성”
이 문제를 둘러싸고 먼저 생성의 입장에서 물꼬를 튼 사람은 헤라클레이토스이다. 에페수스 사람 헤라클레이토스는 블로손의 아들이거나,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헤라콘의 아들이다. 그는 인간들의 견해야말로 아이들의 장난거리라고 말할 만큼 어느 누구보다도 오만 방자했다. 게다가 누구나 추앙하고 존경하는 당대의 현자들, 예컨대, 헤시오도스, 호메로스, 피타고라스 등에게 맹렬한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사람들을 싫어해서 산 속에서 은둔했고 풀과 나뭇잎을 먹으며 살았다. 대중의 갈채와 동시대인들의 환호성에 매몰차게 등을 돌린 체 철학의 오솔길로 걸어 들어갔다.

2. 판타 레이(panta rhei)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먼저, 판타 레이(panta rhei), 즉 만물은 흐른다라고 이해할 수 있는 만물유전설(萬物流轉說)이다(플라톤에 의해 정리). 또 하나는 만물의 근원 질료를 불에서 발견해 낸 인물로 평가하면서 밀레토스 자연학의 계승자로 평가하는 시각이다(아리스토텔레스의 정리).
차가운 강물에 발을 담가 보자. 상류에서 흘러온 강물은 내 발을 적시고는 다시 하류를 향해 하염없는 여정을 떠난다. 상류로부터 물은 끊이지 않고 하류로 흘러내린다. 그러니 같은 강물이 두 번 다시 내 발을 적시는 일은 없다. 적어도 자연 법칙이 여지없이 통용된다면. 무슨 뜻일까? 상기해 보자. 이전의 철학자들은 스스로는 변하지 않으면서도 세계의 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아르케를 찾으려 했다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하지 않는 세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 이르러 세계를 동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3. 불에 매료된 사나이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하는 존재를 불이라고 생각했다. 얼핏 보기에 밀레토스 학파의 철학자들처럼 만물의 아르케를 다시 찾아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불은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론을 설명하면서 우주의 각 부분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우주 전체의 운행 원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의 우주론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불이라고 할 수 있다. 우주는 일정한 척도에 따라 끊임없이 타오르고 잦아드는 불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관찰하면서 이 과정을 대립되는 힘들의 투쟁(헤겔 변증법에 영향을 줌)으로 정리했다. 당대의 사람들은 완전하며 영속적이어서 돌처럼 견고한 뭔가를 인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매 순간의 빛과 어둠, 쓰라림과 달콤함은 마치 두 명의 검투사가 내뿜는 섬광의 파편에 불과할 뿐이다. 대립자의 투쟁에서 모든 생성이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특정한 성질이 지속적인 것처럼 나타난다면, 한 쪽의 순간적인 우위만이 나타난 것일 뿐이다. 투쟁은 이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된다. 하여, “전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이고, 모든 것의 왕이다. 그것이 어떤 이들은 신으로 또 어떤 이들은 인간으로 드러내며, 어떤 이들은 노예로 또 어떤 이들은 자유인으로 만든다.”

4. 변화와 투쟁의 원리 - 로고스
변화와 투쟁은 아무렇게나 무질서하게 일어나지 않는다. 이 때, 원소들 사이의 균형을 유지시키는 질서를 떠받치는 힘은 바로 로고스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충고한다. 나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고 로고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그러면 지혜가 생겨 만물이 하나임을 알게 된다고.
로고스의 의미는 세계 전체를 하나로 묶어 놓은 숨은 질서이며, 만물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법칙이다. 그러므로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로고스 개념은 만물 가운데 가장 실재적인 것은 영혼이며 그 영혼의 가장 중요한 속성은 사유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에 따르면 로고스는 자연의 보편적인 법칙인 동시에 사회와 인간의 행위를 지배하는 법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