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강 라캉주의적 반이론과 정치적인 것의 경계

라캉주의와 좌파이론의 재구성


1. 정신분석학이라는 과학

벤야민이 언급한 ‘만보자’는 근대적 주체이자 도시중간계급이었다. 근대는 도시의 세계였고, 이 세계에 사는 이들은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았다.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 종교를 폐지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종교는 유지되었지만, 예전처럼 독립적 영역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종교는 경제활동을 위한 ‘대체보충’으로 활용되었을 뿐이다. 오늘날 교회를 떠올려보라. 교회에 과연 신앙심 때문에 가는가? 아니면 복을 빌러 가는가? 교회 가면 경제적으로 성공한다는 경험적 신화들이 교회로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 그대로 종교는 상징형식으로 남아서 자본주의 경제에서 충족할 수 없는 결여들을 보완하고 있는 셈이다. 종교가 담당했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과학이다. 근대는 한 마디로 자본의 세상이자 동시에 과학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과학은 근대 이후 인간의 사유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직접적으로 과학은 인간 존재의 물질조건을 변화시켰고, 이에 따라 사유 활동의 기반을 새롭게 구성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과학은 기본적으로 “성장을 원한다”(Conjectures 291). 이런 측면에서 과학은 ‘진보’에 대한 욕구이기도 하다. 칼 포퍼(Karl Popper)의 지적은 과학으로 인한 물질적 진보의 측면보다, 이런 과학의 진보가 가져오는 정신활동의 결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포퍼의 논의는 바로 지속적인 과학의 성장이라는 측면이 어떻게 “과학 지식의 이성적이고 경험적인 특성에 본질적”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말하자면, 문제는 어떻게 과학의 진보가 과학 지식을 이성적이고 경험적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포퍼에 따르면 과학 지식의 진보는 “관찰의 축적”이라기보다, “훨씬 더 낫고 만족스러운 과학이론”을 반복적으로 제출해서 기존의 과학이론을 대체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292).
이런 생각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진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환상(幻像)의 미래?(“The Future of an Illusion”?에서 프로이트는 과학을 종교적 신념과 대립시키면서 과학을 끊임없는 견해의 수정으로 정의한다(Freud 164). 물론 포퍼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충분히 ‘과학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포퍼는 맑스를 비판하면서 간접적으로 프로이트 역시 “인간 본성에 내재한 거대한 숨은 동기”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라는 점을 적시하고 있다(Enemies 100). 그러나 포퍼의 비판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프로이트의 주장은 데카르트주의에 기초한 것으로, 이런 과학적 사유를 수행하는 주체 자체에 대한 의심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포퍼와 프로이트의 논의를 떠받치고 있는 데카르트주의라기보다, 오히려 이들이 과학 지식의 진보라는 명목으로 내세우고 있는 과학 이론의 ‘지적 중요성’(intellectual significance)이라고 할 수 있다. 포퍼와 프로이트는 각각 과학철학과 정신분석학이 과학 지식의 진보를 위한 중요한 ‘이론’이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이론을 단순한 과학의 보조물이 아니라 과학을 성찰하고 이를 통해 오류를 제거해나갈 수 있는 중요한 수단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이들은 자기 이론의 ‘과학적’ 거처를 확보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을 비과학적인 지식으로 파악하는 포퍼의 전제는 과연 신뢰할 수 있는가? 이런 의문은 과학이라는 테두리 내에 과학 자체에 대한 이론의 거처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불러오는 것이기도 하다. 정말 과학에 대한 ‘과학적 이론’이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성립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이 물음은 과학과 인식이라는 분법, 다시 말해서 ‘과학적인 인식이야말로 진리’라는 전제에 대한 검토를 내포하는 것이다. 이를 논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과학에 종속당한 관점이 아니라, 과학과 함께 과학을 가로지르는 어떤 관점이다. 이런 관점은 과학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과학을 성찰의 대상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이론’을 위한 전제조건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정신분석학은 과학적 이론이라기보다 문학적 텍스트로 거론되기 일쑤인데, 이런 판단의 준거를 이루는 문제의식은 주로 과학철학이나 진화심리학, 그리고 정신의학을 통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정신분석학의 담론이 포퍼가 말하는 ‘성장하는 과학 지식’과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른바 정상과학의 성과는 정신분석학을 유사과학으로 보는 회의적 시각을 증폭시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정신분석학은 “육체”에 대한 과학이 아니라 “주체”에 대한 과학적 담론이다. 이런 정신분석학의 조건은 정신의학의 영역과 다른 무엇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정신분석학과 정신의학을 구분할 필요는 영미 권에 프로이트가 수용된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의 예를 들자면 이렇다. 프로이트가 미국을 방문한 뒤에 미국의 심리학계가 한 일은 “성적 에너지를 측정하고, 통계를 통해 프로이트 식 치료의 효과를 검증하고, 프로이트 개념이 개인의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경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 사회적 조사를 수행”하는 것이었다(Roudinesco 401). 이런 세속화 과정은 의사에게만 정신치료를 허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미국 특유의 제도적 문제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신분석학을 정신의학의 시녀로 만드는 역할을 했다. 이런 결과는 정신분석학을 하나의 독자적 학문영역으로 생각했던 프로이트의 생각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경과를 염두에 두었을 때 우리는 주체에 관한 과학적 담론으로서 정신분석학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고, 실제로 정신분석학의 목적이 생물학적 육체의 작동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윤리의 위상학을 구상하는 것이라는 라캉의 통찰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새로운 철학적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시도는 지젝이나 바디우를 통해 일찍이 목격할 수 있다. 특히 바디우는 라캉을 활용하여 인식론적 권위를 잃어버린 철학의 지위를 수학을 통해 재정립하고자 시도한다. 바디우는 “수학은 실재의 과학”이라는 라캉의 말을 인용해서 “언어가 순수한 다수로 날인한 단일성의 흔적에서 유일하게 감산(subtraction)한 것이 진짜 실재”라고 말하는데, 이런 주장은 해체주의의 결정 불가능성이야말로 가치평가의 규범으로부터 감산된 것이라는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철학적 결론으로 이어진다(107). 이런 바디우의 라캉 응용은 정확하게 라캉의 과학 개념과 철학의 재정립을 연결시키고 있는 결정적 증거다. 물론 이런 시도는 철학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지만, 바디우의 시도는 현재 급격하게 역동성을 잃어가고 있는 이론적 사유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할 근거를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근대적 인식론의 단초를 마련했던 데카르트주의의 전복으로 간주할 수가 있다. 라캉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정신분석학을 통해 부르주아적 이념의 구현물이었던 서구의 주체 철학을 혁신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지젝과 바디우가 각자의 철학적 관점에 근거해서 라캉을 활용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라캉은 정신분석학을 경험과학이나 심리과학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분투했다. 라캉에게 정신분석학은 하이데거가 정의하는 “과학”(Wissenshaft)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참 명제의 상호연관을 통해 수립된 총체성”으로 과학을 정의하는 것은 완벽한 의미를 전달할 수 없다고 하면서 과학은 바로 현존재(Dasein)가 소유한 “존재자(Sein)의 방식”에 근거한다고 했다(32). 하이데거의 입장에서 객관을 재현하는 주체라는 인식론적 모델은 일상생활에서 행해지는 현존재의 의도적 활동들이야말로 사물을 드러내는 근본적 환경이라는 전제로 인해 가능하다. 따라서 하이데거에게 과학은 일상 활동의 구조 속에서 사물들이 의미화의 연쇄를 벗어나게 만들어, 사물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는 작업이다. 이런 하이데거의 주장은 “기표의 연환”이라는 개념을 떠올리게 만드는데, 무의식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의 구조를 이루는 것이기에 의미화의 순환을 벗어난 지점에서 무의식의 모습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정신분석학 본연의 기능이라는 라캉의 견해를 연상시킨다.
2. 칸트와 사드
프로이트는 역시 ?환상(幻像)의 미래?(“The Future of an Illusion”)에서 정신분석학을 환상 또는 착각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환상이라는 것은 과학이 제공할 수 없는 것을 과학이 아닌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164). 프로이트는 명백하게 과학을 “종교적 신념”과 대립시키면서 과학은 “증명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과학은 신념에 대한 고착이 아니라 끊임없는 견해의 수정을 의미한다. 어떤 담론이나 세계관을 과학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이처럼 수정을 향해 열려 있는지 여부이다. 종교적 담론은 수정할 수가 없다. 성서를 수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는 끊임없이 원-텍스트로 돌아가는 환원주의적 해석학만을 허락한다.
과학적 견해의 변화는 갑작스럽게 오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 발전과 진보를 거쳐 출현한다. 일정 시점에서 발견된 법칙은 이후에 새롭게 증명된 법칙에 따라 교체된다. 보편적이라고 받아들여졌던 법칙의 타당성이 특수한 것으로 드러나는 순간에 새로운 타당성이 수립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과학의 작업을 통해 우리가 세계의 리얼리티에서 무엇인가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염두에 두었던 정신분석학이라는 과학은 항상 새로운 리얼리티의 발견을 전제한 “열린 구조”였다. 리얼리티에 대해 개방되어 있는 프로이트의 과학 개념은 여러 가지로 정신분석학에 대한 라캉의 과학적 태도를 암시한다. 라캉의 과학 개념은 무의식의 작동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무의식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개념은 언제나 하나의 형식으로 미적분을 통해 우리에게 강제되는 것과 무관할 수 없는 접근법에서 수립된다. 이해하고자 하는 리얼리티에 대한 접근법을 본보기 삼아 이 개념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실로 이것은 스스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하나의 도약, 그 경계의 지점에 도달하는 길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Concepts 19)

이 난해한 진술에서 라캉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명백하다. 무의식의 개념에 내재한 개방성을 무한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는 것. 그래서 라캉은 일정한 형식으로 이를 제한해야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 제한은 경계의 지점, 근접성을 달성하는 수준에서 가능하다. 이런 근접성을 달성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무의식의 개념을 정교하게 가다듬는 일이다. 이렇게 개념적 형식을 더욱 갈고 닦는 행위야말로 라캉의 과학이 전제하는 임무인 것이다. 물론 이런 개념의 정교화가 전제하는 것은 리얼리티에 더욱 가까이 접근하는 형식의 개발이다. 이를 위해 라캉은 언어적 모델을 차용한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유명한 명제는 이런 관점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라캉은 언어구조를 일컬어 “무의식의 개념 아래 무엇인가 한정적이고 접근가능하며 객관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21). 그러나 라캉의 입장에서 언어구조는 무의식에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근거일 뿐이지 무의식 자체가 아니다. 무의식은 훨씬 역동적인 개념이자 동시에 불투명성의 위치를 지시하는 것이다. 무의식의 지점에서 해명되는 것은 없다. 이 지점은 언어화에 대한 저항이고, 달리 말하자면 과학적 진술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정신분석학의 과학은 증명할 수 있으나 진술할 수 없다. 분석되지 않는 원인의 지점, 이것이 바로 무의식이고 이를 이해하려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과학적 목적이다. 분석 불가능한 지점들, 다시 말해서 실재의 위치를 발견하는 것, 여기에서 정신분석학은 새로운 과학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
이런 지위는 토마스 쿤(Thomas Kuhn)이 언급하는 “정상과학”(normal science)같은 것이 아니다. 쿤이 정의하는 정상과학이란 것은 “과거에 이룩된 하나 이상의 과학적 성과에 확고히 근거한 연구”로서 이런 성과는 “특정한 과학적 공동체가 미래의 실천을 위한 초석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얼마동안 인정”하는 합의를 의미한다(10). 오히려 라캉에게 정신분석이론은 “과학의 주체”(the subject of science)를 해명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다. 무의식에 대한 과학으로 정신분석학은 정상과학과 달리 존재론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Concepts 29). 무의식은 “존재하는 것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것”이다(30). 이런 맥락에서 무의식은 존재론적이라기보다 윤리적이다. 라캉은 이것이야말로 프로이트의 정념(Freud’s passion)이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의 정념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캉은 이를 “진리에 대한 갈구”라고 지칭한다(34).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정념은 분석가의 욕망이다. 그렇다면 라캉은 정신분석학을 진리에 이르는 사다리로 본 것일까? 라캉에게 이런 질문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실 중요한 개념은 진리가 아니다. 확실성(certainty)이다. 프로이트의 방법은 데카르트적이었다―확실성의 주체에 기초해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문제는―무엇이 확실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의문에 근거해서, 첫 번째 해야 할 일은 무의식의 내용과 관련된 것이라고 간주되는 어떤 것―특히 꿈의 경험으로부터 도출한 것에 대한 의문일 경우―도 믿지 않는 것이다. 도처에 떠도는 것들, 표시, 얼룩, 점, 꿈의 전언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텍스트를 의심하는 것에 대해―나는 모르겠다, 나는 의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35)

이처럼 의심이야말로 프로이트의 확실성에 대한 근거였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기획과 데카르트주의를 동일시하면서 주체의 확실성, 정확하게 말하면 데카르트적 주체에 대한 의심에서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의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신분석학은 데카르트의 주체로부터 출발하지만 “소위 뉴턴의 과학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43). 이것을 라캉은 “주체에 대한 추측의 과학”(the conjectural science of the subject)이라고 부른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자연과학(physical science)으로 대표되는 근대과학의 성과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의 “완고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결정화”를 갱신하기 위한 과학이다. 라캉은 자연과학을 부정하거나, 그것에 대항하는 ‘인문학’을 정립하려는 것이 아니다. 라캉은 자연적 법칙과 다르게 작동하는 주체의 문제를 자연과학적 방법론으로 적절하게 다룰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그는 근대과학을 보완하고 완전하게 만들기 위한 방책으로 정신분석학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런 라캉의 문제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는 글이 바로 ?사드와 함께 칸트를?(“Kant avec Sade”)이다. 이 글은 원래 새롭게 발간한 사드의 ??규방철학??(la philosophie dans le boudoir) 판본을 위한 해제였다. 그러나 라캉이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단순한 해제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 글에서 라캉은 근대적 인식론의 토대가 되었던 과학의 주체를 독창적으로 분석한다. 라캉의 분석을 통해 근대 과학의 주체는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과학적 인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가 문제인 것이다. 라캉은 프로이트에 비겨 사드(Marquis de Sade)야말로 과학을 통해 윤리의 위치를 바로 잡은 사상가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Ecrits 645). 이런 전제를 통해 라캉이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사드가 칸트를 전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전복했다는 말은 사드가 “칸트를 완전하게 만들었다”는 뜻이기도 하다(646). 완전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칸트가 감춰놓은 것을 사드가 발견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감춰놓은 것이 바로 칸트 철학을 구성하는 ‘실재’였던 셈이다.
라캉의 입장에서 칸트는 “선(good)을 행하면 좋다”는 고대적 윤리학을 근대적 윤리학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라캉이 보기에 “선을 느끼는 것”은 쾌락원칙의 한계 내에서 통용되는 것으로, 이는 곧 “잘 사는 것”(well-being)이라는 문제와 관련을 갖는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쾌락원칙에 충실한 것이 선의 정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이렇게 쾌락원칙의 한계를 지킨다는 것은 절도와 중용을 행복의 조건으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라캉에 따르면 칸트는 “전복성의 핵”을 건드리는 작업을 통해 근대의 윤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칸트는 쾌락원칙에 갇힌 윤리학을 감산의 등식으로 수정한다. 칸트의 등식은 도덕률의 대상(object)으로 선을 다시 규정하는 것이다. 물론 칸트의 등식에서 제거되는 것은 기존의 윤리학이 선의 조건으로 보았던 “쾌락”이다. 여기에서 없애야 할 쾌락은 병리적 쾌락으로서 주이상스를 의미한다. 이처럼 “선의 무게는 대상에 대한 그의 관심에서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것이 제거된 것”이다. 당연히 향락은 쾌락이면서 동시에 고통이기에 칸트의 등식에서 감산되어야한다.
따라서 칸트의 윤리학에서 핵심적인 것은 윤리를 달성하기 위해서 병리적 쾌락의 대상, 말하자면 주이상스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향락이 제거된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상징적 거세”(symbolic castration)에 해당하는 법 앞에 평등한 주체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향락은 민주주의적 윤리를 위해 억제되어야 할 무엇이다. 그러나 라캉의 분석에 따르면 칸트의 윤리학은 근대 주체의 탄생에서 중요한 향락의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 칸트가 몰랐던 것은 향락이야말로 주체에게 윤리를 성립시키는 그 무엇이라는 사실이다. 사드가 칸트의 윤리학을 완성했다는 것은 칸트가 외면했던 그 무엇을 사드가 폭로하고 있다는 뜻이다. 라캉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칸트가 도덕적 경험에서 결여된 것이라고 부른 세 번째 항목 -- 이를테면, 법의 실행에서 의지를 보장하기 위해 칸트가 물 자체라는 사유 불가능한 영역으로 퇴거시켜버렸던 바로 그 대상이 출몰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드의 경험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더 이상 접근 불가능하지 않고, 고통의 행위자인 세계 내 존재, 그 현존재로서 드러나는 대상이 아니겠는가? (651)

내용이 좀 어렵지만 풀어보면 이렇다. 라캉은 지금 물 자체라는 ‘사유 불가능한 영역’을 무의식으로 보고 있다. 이 무의식의 영역으로 퇴거시켜버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인식 불가능한 것을 없는 것처럼 생각해버렸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식할 수 없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결여로서 존재한다는 말이 이런 의미이다. 분명 형용모순이지만,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없다’는 상태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 존재를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물 자체라는 말로 표현했던 셈이다. 그런데 사드는 이렇게 칸트가 ‘접근불가’라고 선언하고 아예 사유에서 밀어내어버린 것을 ‘접근가능’이라고 바꾸어버린 것이다. 물론 드러나는 방식은 ‘고통’이지만, 엄연히 ‘현존재’로서 그 주이상스의 대상은 사드를 통해 현시한다.
이렇게 사드의 경험은 칸트가 보류했던, 또는 회피했던 대상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사정이 이렇다고 해서 라캉이 ‘사드 만세’를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라캉은 사드의 윤리학을 칸트의 완성으로 볼 뿐, 칸트를 넘어선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에게 사드의 윤리학은 판타지를 통해 향락과 조우하는 것을 차단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실패한 것이다. 칸트가 물 자체라고 생각해서 사유를 포기했고 사드가 판타지를 만들어내어 차단해버린 이 대상은 주이상스이다. 사드는 주이상스의 존재를 경험적으로 확인시켜줬지만, 그것을 전면적으로 승인하지 못했다. 주이상스를 승인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바로 주이상스를 금지시키는 법에 저항한다는 의미이다.
칸트에게 쾌락은 의지의 경쟁 상대였지만 사드에게 이것은 오히려 의지를 압도한다. 그러나 사드의 윤리학에서도 이것은 극단의 순간에 “판타지의 개입이 없다면 완전히 엉뚱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652). 사드의 판타지는 극단적 쾌락, 다시 말해서 주이상스의 달성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대상의 불일치를 위해 개입한다. 이를 통해 사드는 궁극적으로 “법에 항복한다”(667). 흥미롭게도 라캉은 사드가 판타지로 가려버린 이 향락을 윤리의 기초로 간주하는데, 이런 논리에서 우리는 라캉의 윤리와 과학 개념을 연결시킬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결정화된 진리, 또는 정태적 입장을 넘어서서 끊임없는 교정을 향해 열려 있는 것이 바로 라캉의 과학 개념인 것이다.
라캉의 과학 개념은 그의 주체이론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이는 곧 윤리학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측면에서 흥미롭다. 그에게 과학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이다. 이런 윤리의 문제와 연관된 라캉의 과학 개념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위상학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라캉의 인식론에서 중요한 것은 “진리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진리는 어디에서 판명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다.
결국 이런 전환은 근대과학의 주체를 전복시킬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라캉이 주이상스를 윤리-인식의 기준으로 설정하는 것은 근대과학이 주체의 과학을 통해 교정되어야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문제는 과학적 방법론과 이를 통해 도출할 수 있는 결과가 아니라 과학적 대상에 접근해가는 주체인 것이다. 한 마디로 과학적 방법이 아무리 과학적이면 무엇하겠는가? 그 주체가 자신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과학적 인식이라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라캉의 문제의식이다. 정신분석학을 이런 주체에 대한 추측의 과학이라고 정의한 라캉의 개념은 근대과학의 결정론을 넘어서서 인문적 사고의 진리를 보여주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알튀세르의 말처럼 “과학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담론을 한 줄이라도 쓰는 한, 그 담론에서 작가라는 주체는 부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Lenin 171). 그러나 라캉에 따르면, 이런 과학적 담론은 주체의 자리를 은폐한 것일 뿐이다. 근대과학이 결정해놓은 그 자리에 항상 결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앞서 언급한 바디우의 말처럼, 언제나 과학적 평가의 규범은 감산해버린 실재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라캉의 과학 개념이 새로운 좌파이론의 구성에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이다. 맑스주의나 구조주의는 주체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조건에 대한 보편적 이론, 다시 말해서 과학적 담론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러나 정작 현실에 대한 총체화를 달성하는 순간, 주체의 실천이라는 가장 중요한 자리는 사라져버렸다. 라캉주의는 이런 문제의식에 대한 중요한 통찰들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3. 라캉주의의 현전성
정신분석학을 사회문화분석에 활용한 선례는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넓지만, 구체적으로 정신분석학을 일종의 “이론”으로 보고 제휴를 도모했던 경우는 알튀세르라고 할 수 있다. 알튀세르는 정신분석학을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대상을 다루는 “과학”이라고 정의하면서 정신분석학이 하나의 “이론”으로서 기능할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198). 그러나 이런 알튀세르의 시도는 심리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을 가르고 있는 변별성을 철학에 복속시켜버린 결과이다. 말하자면, 알튀세르는 철학의 입장에서 정신분석학을 전유하고 있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 인간주의의 터널에 갇힌 주체의 범주를 유물론적 차원(또는 과학적 차원)에서 재구성해내려고 하는 것이다.
1964년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을 결합하려고 시도하면서 ?프로이트와 라캉?(“Freud and Lacan”)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이 “오류인식의 구조”(the structure of misrecognition)에 대해 고민한다는 측면에서 유사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체의 오류인식에 대한 알튀세르의 관심은 사뭇 라캉의 과학 개념과 다른 것이었다.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 이래로 우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맑스로 인해 우리는 인간 주체이자 경제적, 정치적, 철학적 자아라는 것이 역사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헤겔의 주장과 반대로 오히려 역사라는 것은 ‘중심’ 같은 것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오류인식을 떠난 어떤 필연적인 ‘중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구조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 위에서 프로이트는 진짜 주체이자 독특한 본질을 체현하고 있는 개인이라는 것이 자아의 형식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자아’나 ‘의식’ 또는 ‘존재’ -- 이것이 자율적, 육체적인 존재이든 아니면 ‘행동’의 존재이든 -- 에 중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인간 주체는 탈중심화되어 있고 ‘자아’에 대한 상상적 오류인식, 다시 말해서 그 자신을 ‘인식’하는 이데올로기적 공식 이외에 다른 ‘중심’을 갖고 있지 않은 구조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 (218-19)

이 주장의 요지는 간단하다. 역사가 이데올로기적 오류인식이라는 것을 맑스가 밝혔다면 프로이트는 그 역사의 주인이라고 일컬어지는 개인이 기실은 텅 빈 구조의 산물이라는 점을 드러내었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에서 알튀세르는 라캉의 이론을 전유해서 독특한 이데올로기론을 창안한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런 생각은 이데올로기를 단순한 환영이나 허위의식으로 보았던 기존의 경향들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이념이나 신념체계, 또는 정치적 프로그램 같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재현들의 체계”(a system of representations)이다. 한 마디로 정의하면 바로 구조이다. 이 구조라는 것은 언어체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이런 원리에 입각해서 “주체”를 정의하는데, 그에게 인간 주체라는 것은 이런 체계를 통해 구성된 이데올로기적 존재다. 이런 맥락에서 알튀세르에게 이데올로기는 존재의 진짜 조건과 주체의 상상적 관계이다. 이 상상적 관계라는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큰 주체(Subject)에 작은 주체들(subjects)이 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알튀세르는 “호명”(interpellation)이라고 정의하는데, 알튀세르가 말하는 큰 주체라는 것은 특정한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라캉이 말하는 “아버지의 이름,” 다시 말해서 상징적 법이자 주인-기표(Master-Signifier)와 유사한 것이다(171). 그러나 라캉에게 이런 관계는 실재에 대해 신경증자가 만들어낸 조화의 환상일 뿐이다(Concepts 22).
이런 문제를 지적하고 나선 이가 바로 지젝이었다. 지젝에게 알튀세르의 공식은 대타자를 너무 매끄럽게 설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중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구조가 아니라 이 구조와 주체의 틈새에서 작동하는 판타지라는 것이 지젝의 주장이다(?i?ek 91). 지젝의 지적처럼 알튀세르의 라캉 전유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라캉의 과학 개념을 적절하게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의 과학 개념은 알튀세르가 규정했던 과학 개념과 다른 것이다. 알튀세르는 라캉으로부터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을 구성해내고자 했지만 근대적 과학 개념에서 주체의 문제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던 알튀세르주의는 논리적 한계에 봉착해서 스스로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알튀세르가 관심을 보인 라캉의 명제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알튀세르에게 필요했던 것은 이데올로기와 연관해 있는 무의식을 설명할 범주였는데, 이 명제에 근거해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에 개념적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알튀세르는 라캉의 명제를 더 밀고 나아가서 “무의식은 이데올로기적인 언어(랑그가 아니라)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Writings 76). 알튀세르는 여기에서 사회구조들의 유사성은 무의식의 구조와 언어 구조가 서로 비슷한 것보다 더 복잡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라캉에 대한 일정한 비판을 노정하고 있다. 말하자면, 알튀세르는 무의식을 구조화하는 것은 언어학의 학문적 대상인 언어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알튀세르의 의도는 “언어학이 없었다면 자신의 정신분석학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라캉도 인정할 것이다”는 진술에서 암묵적으로 드러난다(24).
그러나 라캉은 명백하게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은 언어적 구조와 다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라캉은 정신분석가가 언어학이라는 분야를 무시할 수 없고, 또 언어가 정신분석학을 지탱하는 유용한 근거이긴 하지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이 언어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Concepts 21). 또한 데이비드 메이시(David Macey)도 지적하듯이, 근대언어학과 라캉 정신분석학의 관계는 “기껏해야 주변적인 것”에 불과하다(122). 라캉은 언어학을 정신분석학에 연관시키려는 숱한 문헌들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라캉은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설명하기 위한 매개로서 언어학을 활용했을 뿐 언어학 자체를 자신의 정신분석학을 구성하기 위한 결정적 토대로 간주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에 대해 논의하는 라캉”을 “언어학적 라캉”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Arrive 34). 오히려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핵심적인 것은 브루스 핑크(Bruce Fink)가 언급하듯이 “철학적 이론”이 아니라 “임상학적 실천”이다(xiii).
여기에서 임상학적 실천이라는 것은 임상이 라캉주의의 핵심이라는 뜻이 아니다. 엄연히 말하면, 라캉주의는 근대임상의학에서 말하는 임상의 개념을 폐기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라캉은 임상이라는 발언은 은연 중에 근대임상의학이라는 절대범주로 라캉주의를 환원시키려는 뉘앙스를 내포하고 있다. 임상적 실천이라는 것은 ‘상담’을 통해 자기 분석을 수행하는 분석주체의 언어를 가리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라캉은 “언어이론”에 관심을 두었다기보다 그 언어의 실행에 더 천착했던 것이다. 이런 까닭에 언어학에 대한 라캉의 진술은 종종 상충된 결론을 유도하는데, 예를 들어 “모든 언어는 하나의 메타언어를 함축한다”는 진술은 “의미의 의미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메타언어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발언과 분명 모순이다(Macey 124). 이런 모순적 진술에서 우리는 언어 자체보다도 언어의 수행성에 더 관심을 갖는 라캉의 면모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가 있다.
알튀세르와 다른 차원에서 정신분석학의 과학을 결정론적 인과성과 분리해서 사고하도록 만드는 라캉의 과학 개념은 상대주의적 태도와 구분되는 것이다. 이런 개념의 연원을 따져보는 것은 라캉의 과학 개념을 이론적 근거로 설정하기 위한 유용한 고찰을 제공한다. 이런 과학 개념은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을 거슬러 멀리 신칸트주의에 가 닿아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서 논의했던 라캉과 하이데거의 과학 개념을 도출시키는 하나의 공통지반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신칸트주의는 “칸트로 돌아가자”라는 기치 아래 경험주의와 실증적 심리학에 반대한 독일의 철학적 경향이었다. “칸트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은 직접적으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라캉의 슬로건을 연상시킨다. 기원으로 돌아가면 갈수록 두 이론적 자장은 유사한 색채로 통합되는 듯하다.
신칸트주의 학파 중에서 후기 마르부르크 학파(Marburg)에 속하는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는 이성에 대한 칸트의 비판을 문화영역에 적용했는데, 이는 상징을 인간사유의 공통범주로 간주하는 일이었다. 이런 시도는 기존의 신칸트주의를 일신하는 것으로서, 미학적 범주의 물화를 역사적 맥락에서 재고하는 것을 의미했다. 갤린 티하노프(Galin Tihanov)는 이런 카시러의 갱신을 일러 “인간 경험에 대한 칸트의 형식적 규정을 인간 의식과 문화에 대한 헤겔의 역사적 규정으로 종합한 설득력 있는 시도”라고 언급했다(Tihanov 24).
이런 카시러의 이론 중에서 주목해야할 부분은 과학을 하나의 상징형식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카시러의 관점에서 과학은 더 이상 진리에 대한 절대적 표준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체계에 불과하다. 이런 카시러의 논거는 인간의 인식행위가 상징화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집요한 논증을 통해 이루어진다. 티하노프는 신칸트주의의 특징으로 “실증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들고 있는데, 이는 결국 모든 가치판단을 가치평가의 문제로 전환하고 과학을 일종의 방법론으로 간주하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은 분명 정신분석학의 문제를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으로 설정했던 라캉의 입장의 기원을 보여주는 것으로, 더 나아가서 과학과 언어의 관계문제에 대한 하이데거의 정의를 환기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신칸트주의적 패러다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간단하다. 일반적 법칙을 탐구하는 과학적 연구방법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는 것, 오히려 개별적 특이성에 대한 탐구야말로 이런 일반적이고 선험적인 법칙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주장이다. 토마스 시거디(Thomas Segady)의 정의에 따르면, 신칸트주의는 (1) 지식 이전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조건을 알아내고자 했고, (2) 세계에 대한 이해를 위해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3) 지식의 대상은 결코 이해될 수 없고, 오직 대상은 실천이성을 통해서만 재현될 수 있다는 전제를 내세웠다(43). 물론 이런 전제는 칸트를 통해 칸트 철학의 토대로부터 이탈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전제를 토대로 신칸트주의는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의 지식이 실천하는 “가치”를 과학적 객관성의 조건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신칸트주의적 견해에 따르면, 이런 가치들을 탐구하는 방법론의 “차이”야말로 학문의 성격을 가르는 주요한 기준이다. 말하자면,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은 가치를 학문적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그 방법론의 차이로 인해 서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라캉의 과학 개념이 신칸트주의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굳이 유추하자면 프로이트에 대한 비엔나 학파의 간접적 영향을 라캉의 과학 개념과 연결 지을 수 있겠지만 이런 해석은 과도하게 문제를 선형적 계보학의 질서 속으로 환원시켜버릴 위험이 있다. 중요한 것은 라캉의 과학 개념이 어떤 “영향의 불안”을 거쳐 나온 것인가를 규명하는 작업이 아니라, 라캉주의라는 것이 생경하게 아무런 이론적 근거도 없이 제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라캉주의는 신칸트주의에서 비엔나학파로, 그리고 프로이트와 하이데거로 이어지는 이론의 계보학에서 과학적 주체의 해명이라는 돌파구를 통해 이론을 재구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라캉주의는 적용의 문제가 아니라 토대의 문제다. 라캉의 과학 개념은 “비개념”(non-concept)이 아니라 “결여의 개념”(the concept of lack)이다. 과학적 주체에 대한 라캉의 정의는 인간의 지식 구조를 “형식적 정체”(formal stagnation)로 보았던 라캉의 전제에서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Ecrits 90). 말하자면, 인간의 지식은 자아와 대상을 영원성과 정체성, 그리고 실체를 가진 것처럼 오인하게 만든다. 정신분석학은 지식의 일반적인 오인구조에서 출발해서 무의식의 작동방식을 규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분석학의 목적은 방법과 개념에 대한 신칸트주의적 천착과 여러모로 닮아 있다. 특히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신칸트주의적 방법론의 유사성은 관념론과 실증주의의 중간지점에서 진정한 지식의 가능성을 읽어내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적 주체에 대한 라캉의 정의는 지성사적 맥락에서 비평의 준거를 결정하는 개념과 입장의 맥락을 밝혀줄 중요한 범주로 재평가되어야하는 것이다. 최근 라캉주의를 임상학적 측면에서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핑크가 언급하듯이, 라캉은 근본적으로 체계적인 이론을 결여하고 있지만, 서구 지성사의 맥락에서 본다면, 라캉의 이론은 나름대로 보이지 않는 역사적 맥락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이유는 특별히 라캉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말하자면, 반체계성은 라캉 이론만의 특징이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랜 기원을 내재하고 있다.
따라서 이 반체계성의 시원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시계를 돌려놓는 시기보다 오래된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굳이 이것을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한정해서 논할 필요는 없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갖는 정통성을 강조하면서 라캉을 포스트모던 문화비평의 재난으로부터 구원해내겠다는 지젝이나 핑크의 시도들은 라캉의 반체계성을 구성하는 복잡한 사상적 궤적보다 이를 활용한 수행적 실천에 더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철학적 상대주의의 돌연변이가 아니라는 사실이고, 오히려 라캉을 통해 기존의 정치학이나 임상을 더욱 효과적으로 제대로 실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지젝의 주장들이 잘 보여주듯이, 라캉주의는 이데올로기적 난국에 봉착한 문제들을 해결할 중요한 실마리들을 제공함으로써 실천가들로 하여금 막연하게 “현실”(reality)이라고 받아들여지는 상징적 질서를 넘어선 그 무엇, 말하자면 실재를 발견하도록 만든다.
이런 시도들은 정신분석학의 정치화를 통해 기존의 이론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지적 도전이다. 물론 말은 좋지만 의문이 든다. 어떻게 라캉주의를 통해 이런 한계가 극복될 수 있을까? 레이먼드 윌리엄즈가 지적하듯이, 심리학적 차원과 사회학적 차원을 가르는 전통적 구분법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248). “사회학적”(sociological)이라는 말이 “사회적”(social)이라는 대중어법으로 전환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에 반해서 “심리학적”(psychological)이라는 말은 여전히 이와 비슷한 대중 어법의 대체물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윌리엄즈의 견해다. 윌리엄즈의 말이 암시하는 것은 심리적 차원이 사회적 차원과 대등한 지위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궁극적으로 사회적 차원에 복속되어 있는 한 영역으로 심리적 차원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뜻한다.
윌리엄즈에 따르면, 심리학적 관점은 내면세계에 우선권을 부여하고 특화시킴으로써 외부 세계를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심리적 차원을 다루는 정신분석학이 외부 세계 분석에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내면세계를 특화해서 분리해내는 정신분석학의 방법론이 얼마나 현실분석에 적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앞서 논의했듯이 라캉의 과학 개념은 사회적 차원에 심리적 차원을 복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차원, 또는 무의식의 지위를 사회적 확실성의 토대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라캉의 과학은 주체의 윤리학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제임슨이 거론하고 있는 것처럼, “근대과학의 관점”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탐구 대상을 다른 학제로부터 분리해서 고립화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Prison-House 43). 이런 맥락에서 제임슨은 니콜라스 루만(Nikolas Luhmann)을 원용해서 “근대화”의 보편적 속성으로서 차별화(differentiation)를 언급한다. “차별화는 사회생활의 영역을 개별적으로 서서히 분리”시키고 이를 근거로 독자적인 법칙과 역동성을 구축한다(Modernity 90). 이런 시스템 차별화의 과정을 통해 소쉬르는 근대언어학의 개념을 구성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소쉬르는 “연구를 발전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연구 대상을 고립시키는 것”이라는 근대과학의 패러다임을 깨닫는다(14). 이와 같은 방식으로 소쉬르는 빠롤에서 랑그를 분리해내면서 독창적인 언어학을 창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라캉 역시 이런 방식으로 근대과학의 출현을 설명하고자 한다. 라캉에게 근대과학을 전근대적인 과학과 구분하는 기준은 대가(master)의 존재다(Concepts 47). 대가는 하나의 체계를 만들어내는 존재이자 동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는 주인-기표이다.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대가는 인식소(episteme)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계기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주장은 다분히 전략적인 것이다. 프로이트를 대가로 설정함으로써 라캉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자신의 슬로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에도 불구하고 라캉은 확실히 근대과학의 패러다임과 다른 관점에서 정신분석학의 과학성을 재구성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은 심리라는 연구대상을 다른 것들로부터 분리해내는 과정을 통해 수립된 사회심리학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전복하는 것이다. 이런 라캉의 과학 개념을 적절하게 원용하는 철학자가 바디우이다. 알튀세르의 라캉 전유와 달리 바디우는 라캉의 과학 개념을 적극적으로 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다. 바디우는 큰 스타일(grand style)과 작은 스타일(little style)을 구분하면서 라캉을 활용한다(3-4). 원래 이 개념은 바디우가 철학과 수학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다. 바디우의 용어법을 거칠게 정의한다면, 작은 스타일은 “전문화”이고 큰 스타일은 “일반화”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과학의 인식론적 측면을 철학적 사유대상으로 삼는 일에서 중요한 것은 큰 스타일이라기보다 작은 스타일, 다시 말해서 전문화이다.

철학에서 전문화는 불변하는 작은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라캉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런 전문화는 주인-기표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의미 연쇄의 S1에 해당하는 대가의 담론을 대학의 담론으로 붕괴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든 발화의 두 번째 순간을 통해 잘 재현되는 영원한 논평이기도 한데, 이렇게 논평을 통해 대가를 찬탈함으로써 S2는 존재하게 된다. (3)

알튀세르와 정반대의 지점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사유한다는 측면에서 확실히 이 주장은 흥미롭다. 바디우에 따르면 작은 스타일은 수학을 철학의 탐구대상으로 만드는 것이고 큰 스타일은 수학에서 철학적 논제의 계시를 받는 것을 뜻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비평과 결합시키는 행위는 곧 대가의 담론을 찬탈해서 전문화의 작은 스타일들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러나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비평적 틀로 채택하는 문제와 라캉의 과학 개념에 근거해서 비평적 주체를 새롭게 구성하는 문제는 다소 다른 층위에 놓인다.
라캉의 과학 개념은 바디우가 말하는 큰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큰 스타일에 대해 바디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큰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반대로 수학이 철학의 직접적 계시를 제공한다는 것을 명기한다. 이런 계시는 여러 문제들의 핵심에 대한 강제적이거나 심지어 폭력적인 개입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다. (7)

라캉주의에서 과학의 재정식화를 위한 새로운 개념화는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수학과 같은 역할을 한다. 데카르트에게 수학은 “확실성의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철학적 근거였다(8). 바디우에 따르면 이런 패러다임은 논리체계와 다른 것이다. 이런 패러다임은 수학적 패러다임의 가치체계를 떠받치는 증명이 아니라 오히려 수학적 대상에 대한 절대적 단순성이자 명료성이다. 이 단순성과 명료성은 상대주의를 벗어나게 만드는 절대적 지평을 구성한다. 이처럼 큰 스타일은 “언어적 전회”로부터 발생한 철학적 재난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언어적 전회는 철학도 일종의 언어적 구성물이라는 사실을 “발견”시킴으로써 수학적 실증성을 전제로 구성된 철학의 인식론적 기반을 허물어버렸다. 라캉의 과학 개념은 이런 파멸적 상황에서 존재론을 새롭게 규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는 것이 바디우의 인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바디우는 알튀세르와 다른 차원에서 “수학은 과학의 실재”라고 한 라캉의 궤적을 자신의 철학적 기획과 합치시킨다(107).
정신분석학적 명제를 “수학소”(matheme)를 통해 도식화하고자 했던 후기 라캉의 노력은 인식론적 상대주의에 대한 저항처럼 보이는데, 이는 결국 정신분석학이 위상학적 차원에서 주요한 현실적 전략으로 채택되어야한다는 라캉 자신의 암시를 담고 있는 듯하다. 라캉은 수학소를 일컬어 “기표가 아니라 절대적 의미화의 색인”이라고 정의했다(Ecrits 691). 여기에서 의미화의 색인 또는 나열이 과학의 위상학적 측면을 암시하는 것이다. 바디우가 라캉에게 주목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수학에 대한 라캉의 고찰은 정신분석학을 주체의 과학이라고 한 라캉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수학은 감산의 존재론을 규정하는 중요한 패러다임을 제공한다. 하나의 존재에서 감산된 것이야말로 실재인 것이고 언어는 하나의 존재에 내재한 순수한 다수성 위에 찍힌 도장과 같다.
견해에 따라서 라캉의 수학에 대한 관심이 언어에 대한 관심과 상보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디우의 언급처럼 언어와 수학은 철학적 차원에서 구성되었을 때 전혀 다른 것이고 오히려 대립적인 것이다. 바디우가 라캉을 원용하는 것은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넘어선 자리에서 철학적 기반을 재구성해내기 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감산의 존재론에 대한 유용한 근거를 제공하는 라캉의 과학 개념을 통해 상대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비평적 주체의 복권을 모색해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 고찰을 통해 라캉의 과학 개념이 실재의 윤리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지표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감산의 윤리학에 근거한 라캉의 과학 개념은 이론적 주체가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정언명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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